절망에서 희망으로
(요한복음 9 : 1-12)
잭 캔트필드가 쓴 “가장 절망적일 때 가장 큰 희망이 온다”는 책에는 친구 사이인 암전문가 두 사람이 주고받은 대화가 실려 있는 것입니다.한 의사가 친구에게 물었습니다.“난 도대체 이해가 안 되네.자네나 나나 암환자에게 똑같은 약을 똑같은 양으로 같은 스케줄에 따라 처방을 하지 않는가.” “그렇지.” “그런데 왜 나는 내 약을 먹은 사람은22%밖에 살아나지 못하고 자네가 주는 약을 먹은 사람은 74%나 살아나오니 무슨 비결이 있는가.”그러자 친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똑같은 약만 처방하지 않느냐.너는 약 만주지 자네는 이 약을 줄 때 환자에게 이 약을 어제와 똑같은 것입니다.열심히 드세요 라고 말할 꺼야.그러나 나는 약을 주면서 이렇게 말한다.
여기 당신의 희망이 있습니다.이 약은 당신에게 생명을 갖다 줄 것입니다.낫게 해 줄 것입니다.희망을 가지십시오.한 사람의 의사는 그냥 의무적으로 약을 잡수라고 하는데 다른 사람의 의사는 희망이 있다는 것을 항상 말해 주었습니다.한 사람은 약을 주었고 다른 한 사람은 희망을 주었습니다.그런데 그저 약을 주고 처방할 때는10명 중7명이 죽었는데 희망을 주었을 때10명 중에7명이 살아났습니다.
희망이라는 말에는 5가지 핵심 가치가 있습니다.
인간은 빵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한 희망을 먹고 삽니다.
희망을 잃은 자는 이미 삶자체를 잃은자입니다.
희망은 좌절과 절망을 이기게 하는 힘입니다.
희망은 그냥 주어지지 않습니다. 배워야 하고 연습해야 합니다.
희망은 인간을 인간답게 합니다.
예레미야 29장 11절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오늘 말씀은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한 맹인을 예수님께서 고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이 말씀을 통하여 분명한 인생의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1. 절망 가운데 태어 났습니다.
요한복음 9장1절에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성경은 말씀합니다.여기서‘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이란 말에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이 사람은 자기가 맹인이 되고 싶어서 맹인이 된 것이 아니라 태어나보니까 맹인이 된 것입니다.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운명을 결정할 수가 없습니다.태어나보니 남자로 태어났고 태어나보니 여자로 태어난 것입니다.그런데 날 때부터 맹인이 되었으니 그 절망은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은 영적으로 볼 때 절망 중에 태어나 절망 중에 살아가다가 절망 중에 죽어가는 모든 인생을 말하고 있습니다. 맹인이 날 때부터 맹인이 된 것처럼 모든 인생이 죄 가운데 태어나서 절망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이 태어날 때‘으앙’우는 울음이 절망의 세계를 향한 울음입니다.
문제가 없는 사람에게는 도전이 없습니다. 모든 문제에는 해결방법이 있습니다. 결국 문제의 크기는 꿈의 크기와 정비례합니다. 따라서 문제가 인생을 재미있게 만듭니다. 희망을 지닌 사람은 문제조차도 도전으로 바꾸어 내는 사람입니다. 희망이라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은 남다른 삶을 선택하게 하는 힘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희망은 우리를 살 맛나게 하고, 가슴을 뜨겁게 하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게 하고, 더 나아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억울하고 고통스런 상황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면 낙심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요셉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며 묵묵히 견딜 때 하나님의 임재와 범사에 주시는 형통을 누리게 됩니다. 현재 삶에 어려운 일이 있나요? 고난의 상황을 바라보지 말고 우리와 동행하시며 형통하게 하시는 하나님만 의지하십시오.
절망을 희망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바꿔주시는 하나님이 모든 일을 형통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2.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을 만나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는 것입니다.
9장 3절에“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할렐루야. 이 사람이 앞을 못 보게 된 것이 자신이 무슨 죄를 지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부모가 죄를 지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이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기 위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죄와 절망 가운데 헤매고 있을 때 우리를 불쌍히 보셨습니다.그래서 맹인을 불쌍히 보시고 예수님이 서신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보시고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예수님은 뭐라고 판단하셨습니까?
6절“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셨습니다.
그 사람 자신이나 부모의 죄로 보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그 운명이 바뀌어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빛이 되십니다. 생명의 빛이 되시는 것입니다. 치료의 빛이 되십니다.
1873년 미국 시카고에 아주 행복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호래티오 G.스패포드이며 유명한 변호사이자 대학교수였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아내와 사랑스런 네 딸을 큰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한번은 아내와 네 딸이 프랑스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여객선 하브호가 영국 배와 충돌해 승객 226명이 익사하는 대참사가 발생했습니다. 네 딸은 모두 익사하고 아내만 겨우 생명을 구했습니다. 스패포드는 사고현장에 도착해 딸들의 이름을 부르며 절규했습니다. 이때 아내는 절망적인 슬픔 속에서도 남편의 손을 잡으며 말했습니다.
『여보, 딸들은 지금 천국에 있어요. 우리와 잠시 헤어져 있을 뿐이랍니다.』
스패포드는 아내의 말에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비극의 바다에서 시 한편을 지었습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평안해』
이것이 바로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내 평생에 가는 길』(찬송가 413장)입니다. 딸을 잃은 아버지의 노래가 오늘 우리에게 큰 위안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결코 안전하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께 영혼을 맡긴 자는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평안합니다.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죄악입니다.
시편 71편 14절에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
로마서 15장 13절에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우리가 환난 중엗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을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3. 실로암 못에 씻고 밝은 눈으로 왔습니다.
9장 6절-7절에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6절 말씀에, 예수님께서 땅에 침을 뱉으시고 진흙을 이겨서 맹인의 눈에 바르는 장면이 나옵니다.진흙은 어디나 있습니다. 진흙 그 자체는 무가치한 것입니다. 돈을 주고 진흙을 사가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무가치한 진흙이 예수님 손에 들려서 맹인의 눈을 뜨는 놀라운 기적의 도구로 쓰여졌습니다. 진흙같은 우리도 예수님의 손에 들리기만 하면 놀라운 기적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들 보기에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내가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부족한 것 같은 사람이라고 느껴진다고 할지라도 우리 예수님 손에 들리기만 하면 예수님의 손에 붙잡히기만 하면 기적은 나타나는 것입니다.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가 예수님의 손에 들려지었을 때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붙들려 있으면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죽은 나사로로 살아 났습니다. 소경바디매오도 눈을 떳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진흙을 눈에 바른 다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을 때에 그 눈이 밝아졌습니다. 이 실로암 못은 예루살렘에 언제나 신선한 물을 제공하는 연못입니다.
이 실로암 못은 바로 우리의 치료자 되신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실로암입니다.
그러므로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어두움을 밝게 할 수 있다는 중의(重義)적 표현입니다.
실로암 물에 눈을 뜨게 하는 신통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실로암 물이 신비한 효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실로암에 들어간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눈을 뜨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건에서 실로암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이 어두움에 갇힌 자들을 광명의 세계, 밝은 세계, 눈이 열려 세상을 보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영원한 영생, 즉 구원의 세계를 보는 눈을 열어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 준 사건입니다.
“어두운 밤에, 캄캄한 밤에 새벽을 찾아 떠난다.” “실로암”(신상근 작사, 작곡)이란 찬양의 첫 가사다. 이 곡이 처음 세상에 나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1981년이니 정말 오래된 곡입니다. 실로암이라는 곡을 작사 작곡한 신상근목사님입니다.
80년대 한국 교회에 많은 감동과 은혜를 준 <실로암>은 신상근 목사님이 만들었습니다. 그는 고 3시절 신학을 하겠노라 서원하면서 <실로암>을 만들었습니다.
그후 신학교를 떠나 세상에서 방황하고 있을 때에도 이 찬양은 계속 불려졌습니다.
그가 손을 대는 사업마다 실패했고 스트레스로 인해 39살에 폐암말기 판정까지 받았습니다. 2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은 후에야 한없는 회개로 하나님께 엎드려 암 투병을 이겨냈습니다.
건강을 회복하고 20년 만에 다시 신학을 시작했고 2008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실로암의 가사와 같이 어둔 밤과 같은 인생을 살다가 실로암을 통해 새 인생을 살았습니다.
실로암이라는 곡이 유독 사랑받는 교회가 있습니다. 바로 연무대군인교회입니다. 충남 논산에 있는 육군훈련소 안에 있는 군인교회인데, 한 번에 5,000명의 예배자들이 모일 수 있는 큰 규모의 예배당이 있는 교회입니다. 이 훈련소에서 훈련받는 신병 숫자만도 일만 명이 훨씬 넘고, 주일예배 참석자 수가 6천 명에서 7천 명 정도가 된다고 하니 그 규모가 엄청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인원이, 그것도 20대의 젊고 튼튼한 군인들이 찬양하는 시간에 거의 빠지지 않고 부르는 찬양곡이 “실로암”이란 찬양과 “아주 먼 옛날 하늘에서는”이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당신을 향한 노래”(천태혁 작사, 진경 작곡, 1993년 작곡)라는 찬양인데, 수천 명이 “실로암”을 찬양하는 중간에 “훈련은! 전투다! 각! 개! 전! 투!”라는 추임새를 넣으며 열광적으로 찬양하는 모습은 그 열기가 대단하다. “당신을 향한 노래”를 부르는 중간에도 “사랑해요”, “축복해요” 등의 추임새를 넣는 모습도 우렁찹니다. 이러한 광경은 이미 유튜브를 비롯한 여러 매체들에서 동영상이 나와 있기에 한 번쯤은 보았을 것입니다.
이 시대에도 젊은 병사들이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군부대 안에 있는 군종장교(군목)들의 깊은 헌신과 더불어 기독교인 장교들이 더 마음을 모아 병사들을 잘 섬긴다면 그야말로 군부대가 복음의 황금어장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18장 10절에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나님이 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이 많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절망에서 소망으로 이끄십니다.
하나님은 어두움속에서 빛가운데로 이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