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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문화역사길라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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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숭복사지 삼층석탑_쌍탑 (2017.8.06)
藥泉(승호) 추천 0 조회 375 17.08.31 14:1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제법 넓은 공간에 쌍탑이 사이좋게 서있다. 서탑은 2~3층 몸돌과 3층옥개석이 멸실되어 없고 동탑은 2층 몸돌이 없다. 양탑 모두 상륜부는 남아 있지 않다.

 하층기단의 중석과 저석이 일석으로 치석되어 장판형의 지대석위에 올려져 있다. 탑의 규모가 작아서 기단한면이 한돌로 조성되어 있고 엇물림방식으로 결구되어 있다. 갑석은 총 네개로 구성되어 있다.

상층기단 괴임이 호각의 2단으로 되어 있지만 각형부분이 높이가 호형부분에 비해 많이 낮아져서 시대를 좀더 내려 볼수 있는 요소가 아닌가 생각된다.  기단부 상하 탱주는 2:1로 조성되어 상층기단에는 8부신중이 조각되어 있다. 

 

날씨가 너무 더워 동탑은 확인하지 않았는데 서탑의 경우 상층기단의 결구방식은 엇물림과 감입식이 혼합된 혼합경 결구방식으로 남산리 삼층석탑에서 최초로 나타난 결구방식이 여기서 재현 되었다. 초층탑신 괴임은 각형2단을 유지하고 있고 탑신면에는 문비가 조각되어 있다. 남아 있는 옥개석의 층급받침이 모두 4단으로 조성되어 있어 이 또한 시대를 조금 아래로 보는 요소가 된듯하다.

 동탑의 경우 하층기단이 이완되서 그런지 물매가 느껴지지 않는데 동탑의 경우에는 하층기단 갑석에서 물매를 확인할수 있지만 합각선은 나타나지 않는다.

 풍탁공이 4개인것도 이탑의 특징은 아닐런지 작은 규모에 비해서 많은 장식을 해 좀더 화려하게 보이려 한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기단부를 보면 금방이라도 무너질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그래도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 모습이 신기하다.

 

 

 

 

 








이하는 인터넷 자료

숭복사비편은 현재까지 15편이 발견되었다. 발견된 비편의 숫자는 적지만 이 비는 최치원의 사산비명()의 하나이기 때문에 전체의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비문의 내용에 따르면, 숭복사()는 경문왕의 모후인 소문왕후의 외척이며 경문왕비인 숙정왕후의 외조부 되는 김원량이 지은 곡사()가 기원이 되어 창건하였다고 한다. 숭복사는 경문왕이 즉위하면서 중수하기 시작하였으며, 사찰의 이름도 헌강왕 11년에 숭복사로 바꾸었다. 그러나 그 후의 역사는 전래되지 않고 있다. 현재 이곳에는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다. 이곳의 지세 및 금당지(), 석단()은 규모 면에서 불국사와 비슷하다.

또 이곳에서는 국사대웅()과 개와대웅() 등의 명문이 새겨진 기와를 비롯해 금고() 등이 발견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동서로 2개의 탑이 있는데, 서탑은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9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탑은 기단부에 팔부중()이 새겨져 있고, 탑신은 1층에 문비()가 있고, 각 옥개석에는 4단의 받침이 있다. 동탑은 서탑과 같은 양식으로 보이는데, 현재 일부 파괴된 기단부와 1층 옥신, 2개의 옥개석만 남아 있다. 이 비는 헌강왕 12년(886)에 최치원에게 비문을 짓게 하고 진성왕 때에 완성하였다. 이 비문을 통해 신라왕실과 중앙 귀족들의 불교신앙을 파악할 수 있고, 돈을 주고 사는 왕토()와 공전() 등을 통해 통일신라 말기의 토지 상황을 알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숭복사비편 (e뮤지엄, 국립중앙박물관)


 

[判讀文]

 

 

有唐新羅國 初月山 大崇福寺 碑銘 幷序 

 

 

도입부 : 임금의 덕과 나라의 태평

 

 

1. 임금은 仁政과 孝禮를 우선으로 해야 함

 

 

臣聞, “王者之基祖德, 而峻孫謀也, 政以仁爲本, 禮以孝爲先”, 仁以推濟衆之誠, 孝以擧尊親之典, 莫不體無偏於夏範, 遵不?於周詩. 聿修芟秕稗之譏, 克祀潔??之薦, ?慧渥均濡於庶彙, 德馨高達於穹旻. 然勞心而扇?泣辜, 豈若拯群品於大迷之域, 竭力而配天享帝, 豈若奉尊靈於常樂之鄕.

신이 듣건대 “임금된 자가가 조종(祖宗)의 덕을 바탕으로 하여 후손을 위한 계책을 높이는데 있어, 정치는 인(仁)으로써 근본을 삼고 예교(禮敎)는 효(孝)로써 으뜸을 삼는다” 하오니, 인으로써 대중을 구제하려는 정성을 드러내고 효로써 어버이를 섬기는 모범을 드높여 <서경(書經)>의 홍범(洪範)에서 ‘임금은 치우침이 없는 것’을 본받지 않음이 없고 <시경(詩經)> 大雅편에서 ‘효자가 다하여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따르지 않음이 없어야 합니다. 조상의 덕을 이어받아 닦는데 성숙하지 못하다는 비난을 없애고, 조상의 제사를 잘 받드는데 마름과 같은 하찮은 풀이라도 정결히 올림으로써 은혜가 백성에게 고루 미치게 하며 덕의 향기가 끝없는 하늘에 높이 사무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애를 쓰면서 더위 먹은 백성에게 부채질을 해주며 죄인을 보고 우는 것이 어찌 중생을 크게 미혹한 데서 건져주는 것만 하겠으며, 힘을 다하여 조상을 하늘과 상제(上帝)와 함께 제사지내는 것이 어찌 높으신 혼령을 항상 즐거운 곳에 모시는 것만 하겠습니까.

 

 

2. 불도가 군자의 풍모가 넘치는 신라에 전승되어 번성함

 

 

是知敦睦九親, 實在紹隆三寶. ?乃玉毫光所照燭, 金口偈所流轉, 靡私於西土生靈, 先及於東方世界, 則我太平勝地也, 性滋柔順, 氣合發生. 山林多靜?之徒, 以仁會友, 江海協朝宗之欲, 從善如流. 是故, 激揚君子之風, 薰漬梵王之道, 猶若泥從璽金在鎔, 而得君臣鏡志於三歸, 士庶翹誠於六度. 至乃國城無惜, 能令塔廟相望, 雖在贍部洲海邊, 寧?都史多天. 衆妙之妙, 何名可名.

이에 조상과 후손의 돈독하고 화목함이 실로 삼보(三寶)를 계승하여 높이는데 있음을 알겠습니다. 하물며 옥호(玉毫)의 빛이 비치고 부처님의 입에서 게송이 나오는 것이 인도 사람에게만 한정되지 않고 동방세계에도 미쳤으니, 우리 태평한 승지(勝地)는 성질은 유순함을 낳고 기운은 만물을 생하는데 적합합니다. 산과 숲에는 고요하게 수도하는 무리들이 많아 인(仁)으로써 벗을 모으고, 강과 바다의 물은 더 큰 곳으로 흐르고자 함을 좇아 착함을 따르는 것이 물이 흐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군자의 풍도(風度)를 드날리고 부처의 도에 감화되는 것이 마치 진흙이 도장을 따르고 쇠가 용광로 안에 들어 있는 것과 같아서, 군신(君臣)이 삼귀(三歸)에 뜻을 밝히고 사서(士庶)가 육도(六度)에 정성을 기울이며 나아가 국도(國都)에까지 아낌이 없어 탑이 즐비하도록 하였으니, 비록 그것이 섬부주(贍部洲)의 바닷가에 있으나 어찌 도솔천에 부끄러우리오. 뭇 미묘한 것 가운데 미묘한 것을 무슨 말로써 나타내겠습니까.

 

 

전개부1 : 숭복사의 유래와 기원

 

 

1. 鵠寺의 由來와 名稱, 地勢

 

 

金城之?, 日觀之麓, 有伽藍號崇福者, 乃先朝嗣位之初載, 奉爲烈祖元聖大王園陵, 追福之所修建也. ?若稽古寺之濫觴, 審新刹之覆?, 則昔波珍飡金元良者, 炤文王后之元舅, 肅貞王后之外祖也, 身雖貴公子, 心實眞古人, 始則謝安縱賞於東山, 儼作歌堂舞館, 終乃慧遠同期於西境, 捨爲像殿經臺, 當年之鳳管?絃, 此日之金鍾玉磬, 隨時變改, 出世因緣. 寺之所枕倚也, 巖有鵠狀, 仍爲戶?. 能使鴦廬長價, 永令鵝殿增輝, 則彼波羅越之標形, ??遮之紀號, ?若飛千里以取譬, 變雙林以?題者哉. 但玆地也, 威卑鷲頭, 德峻龍耳, 與畵金界, 宜?玉田.

금성의 남쪽 해돋이를 볼 수 있는 산기슭에 숭복사(崇福寺)라는 절이 있사오니 이 절은 곧 선대왕(先大王)께서 왕위를 이어받으신 첫 해에 열조(烈祖) 원성대왕(元聖大王)의 능을 모시고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것입니다. 옛 절이 생긴 기원을 상고하고 새 절이 이룩된 것을 살펴보건대, 옛날 파진찬 김원량(金元良)은 소문왕후(炤文王后)의 외숙이요 숙정왕후(肅貞王后)의 외조부로서, 몸은 귀공자였으나 마음은 참다운 옛사람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사안(謝安)이 동산(東山)에서 마음껏 즐기듯이 가당(歌堂)과 무관(舞館)을 어엿하게 짓더니 나중에는 혜원(慧遠)이 여럿이 함께 서방정토(西方淨土)에 가기를 기약한 것처럼 그를 희사하여 불전(佛殿)과 경대(經臺)로 삼아, 예전에 피리 금슬 소리이던 것이 오늘날 금종(金鍾), 옥경(玉磬) 소리가 되었으니 시절이 변함에 따라 고쳐진 것으로 속계(俗界)를 벗어난 인연이었습니다. 절의 의지가 되는 것은 바위의 고니 모양인데 그로 인해 절 이름을 삼았습니다. 좌우의 익랑(翼廊)으로 하여금 길이 값지게 하고 불전(佛殿)으로 하여금 길이 빛나게 하였으니, 저 파라월(波羅越)의 형상과 굴인차(??遮)의 이름으로 어찌 한 번에 천리를 나는 고니로써 비유하고 사라쌍수(沙羅雙樹)가 변한 것으로 이름을 지은 것과 같겠습니까. 다만 이 땅은 위세가 취두산(鷲頭山)보다 낮고 지덕(地德)이 용이(龍耳)보다 높으니 절을 짓느니보다는 마땅히 왕릉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2. 鵠寺와 元聖王陵과의 관계

 

 

?貞元戊寅年冬, 遺敎??之事, 因山是命, 擇地尤難, 乃指淨居, 將安秘殿. 時獻疑者有言, “昔游氏之廟, 孔子之宅, 猶皆不忍終毁, 人到于今稱之, 則欲請奪金地, 無乃負須達?大捨之心乎. 冥葬者, 地所祐天所咎, 不相補矣”. 而?政者譏曰, “梵廟也者, 所居必化, 無?+出不諧, 故能轉禍基爲福場, 百億劫濟其危俗, 靈隧也者, ??坤脈, 仰揆乾心, 必在苞四象于九原, 千萬代保其餘慶, 則也. 法無住相, 禮有盛期, 易地而居, 順天之理. 但得靑烏善視, 豈令白馬悲嘶. 且驗是仁祠, 本隸戚里, 誠宜去卑就峻, 捨舊謀新. 使幽庭據海域之雄, 淨刹擅雲泉之?, 則我王室之福山高峙, 彼侯門之德海安流. 斯可謂 ‘知無不爲, 各得其所’, 豈與夫鄭子産之小惠, 魯恭王之中轍, 同日而是非哉. 宜聞龜筮協從, 可見龍神歡喜”. 遂遷精舍, 爰創玄宮, 兩役?徒, 百工?事.

정원(貞元) 무인년(798년) 겨울에 (元聖大王께서) 장례에 대해 유교(遺敎)하시면서 인산(因山)을 명하였는데 땅을 가리기가 더욱 어려워 이에 절을 지목하여 유택(幽宅)을 모시고자 하였습니다. 이때 의문을 가진 이가 있어 말하기를, “옛날 자유(子游)의 사당과 공자(孔子)의 집도 모두 차마 헐지 못하여 사람들이 지금껏 칭송하거늘 절을 빼앗으려는 것은 곧 수달다장자( 須達多長者)가 크게 희사한 마음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장사지내는 것이란 땅으로서는 돕는 바이나 하늘로서는 허물하는 바이니 서로 보익(補益)되지 못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담당자가 비난하여 말하기를, “절이란 자리하는 곳마다 반드시 교화되며 어디를 가든지 어울리지 않음이 없어 재앙의 터를 능히 복(福)된 마당으로 만들어 한없는 세월 동안 위태로운 세속을 구제하는 것이다. 무덤이란 아래로는 지맥(地脈)을 가리고 위로는 천심(天心)을 헤아려 반드시 묘지에 사상(四象)을 포괄함으로써 천만대 후손에 미칠 경사를 보전하는 것이니 이는 자연의 이치이다. 불법은 머무르는 모양이 없고 예(禮)에는 이루는 때가 있으니 땅을 바꾸어 자리함이 하늘의 이치에 따르는 것이다. 다만 청오자(靑烏子)와 같이 땅을 잘 고를 수만 있다면 어찌 절이 헐리는 것을 슬퍼하겠는가. 또 이 절을 조사해보니 본래 왕의 인척에게 속하던 것인바 진실로 낮음을 버리고 높은 데로 나아가며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꾀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왕릉으로 하여금 나라의 웅려(雄麗)한 곳에 자리잡도록 하고 절로 하여금 경치의 아름다움을 차지하게 하면 우리 왕실의 복이 산처럼 높이 솟을 것이요 저 후문(侯門)의 덕이 바다같이 순탄하게 흐를 것이다. 이는 ‘알고는 하지 않음이 없고 각각 그 자리를 얻음이다’고 할 수 있으니, 어찌 정(鄭)나라 자산(子産)의 작은 은혜와 한(漢)나라 노공왕(魯恭王)이 도중에 그만 둔 것과 더불어 견주어 옳고 그름을 따지겠는가. 마땅히 점괘에 들어맞는 말을 듣게 된다면 용신(龍神)이 기뻐함을 보게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드디어 절을 옮기고 이에 왕릉을 영조(營造)하니 두 역사(役事)에 사람이 모여 온갖 장인(匠人)들이 일을 마쳤습니다.

 

 

3, 鵠寺의 移轉과 元聖王陵의 조성

 

 

其改創紺宇, 則有緣之衆, 相率而來, 張袂不風, 植錐無地, 霧市奔?於五里, 雪山和會於一時. 至於撤瓦抽椽, 奉經戴像, 迭相授受, 競以誠成, 役夫之走步未移, 釋子之宴居已就. 其成九原, 則雖云王土, 且非公田. 於是括以邇封, 求之善價, 益丘壟餘壹(?)百結, 酬稻穀合二千?(?除一斗爲?, 十六斗爲?). 旋命所司與王官之邑, 共芟榛徑, 分蒔松?, 故得蕭蕭多悲風, 激舞鳳歌鸞之思, 鬱鬱見白日, 助盤龍踞虎之威.

절을 옮겨 세울 때에 인연 있는 대중들이 서로 솔선하여 와서 옷소매가 이어져 바람이 일지 않고 송곳 꽂을 땅도 없을 정도여서 무시(霧市)가 오리(五里)까지 이어져 나오며, 설산(雪山)까지 이어선 사람들이 일시에 어울려 만나는 것 같았습니다. 기와를 거두고 서까래를 뽑으며 불경을 받들고 불상을 모시는데 번갈아 서로 주고받으며 다투어 정성으로 이루니, 인부가 분주히 걸음을 옮기지 않아도 스님들의 안식처가 이미 마련되었습니다.

왕릉을 이루는데 비록 왕토(王土)라고는 하나 실은 공전(公田)이 아니어서 부근의 땅을 묶어 좋은 값으로 구하여 구롱지(丘壟地) 백여 결을 사서 보태었는데 값으로 치른 벼가 모두 이천 점(?)[유(?)에서 한 말을 제한 것이 ?이고 열여섯 말이 ?이다]이었습니다. 곧 해당 관사와 기내(畿內)의 고을에 명하여 함께 길의 가시를 베어 없애고 나누어 묘역(墓域) 둘레에 소나무를 옮겨 심으니, 쓸쓸하게 비풍(悲風)이 잦으면 춤추던 봉황과 노래하던 난새의 생각이 커지지만 왕성한 기운으로 밝은 해가 드러나면 용이 서리고 범이 걸터앉은 듯한 지세(地勢)의 위엄을 더해 줍니다.

 

 

4. 元聖王陵 주변의 風光과 景文王과의 因緣

 

 

且觀其地, 壤異瑕丘, 境連暘谷. 祇樹之餘香未泯, 穀林之佳氣增濃, 繡峯則四遠相朝, 練浦則一條在望, 實謂喬山孕秀, 畢陌標奇. 而使金枝益茂於鷄林, 玉派增深於?水者矣. 初寺宇之徙也, 雖同湧出, 未若化城, 哉得?荊棘而認岡巒, 雜茅茨而避風雨. 僅踰六紀, 驟歷九朝, 而累値顚覆, 未遑崇飾, 三利之勝緣有待, 千齡之寶運無虧. 伏惟, 先大王, 虹渚騰輝, 鼇岑降跡, 始馳名於玉鹿, 別振風流, 俄?職於金貂, 肅淸海俗. 據龍田而種德, 捿鳳沼以沃心, 發言則仁者安人, 謀政乃導之以道. 八柄之重權咸擧, 四維之墜緖斯張, 歷試諸難, 利有攸?(?).

그곳을 보니 땅은 하구(瑕丘)와 다르나 경계는 양곡(暘谷)에 맞닿아 있습니다. 기수(祇樹)의 남은 향기가 아직 사라지지 않고 곡림(穀林)의 아름다운 기운이 더욱 무르녹아, 비단 같은 봉우리는 사방 멀리에서 조알(朝謁)하는 것 같고 누인 명주 같은 개펄은 한 가닥으로 눈앞에 바라보이니, 실로 교산(喬山)이 빼어남을 지니며 필맥(畢陌)이 기이함을 나타냈다고 할 것인바, 왕손들이 계림에서 더욱 무성하게 하고 또 신라에서 더욱 깊이 뿌리내리도록 할 것입니다.

처음 절을 옮김에 있어 비록 보탑이 솟아나오듯 빠르긴 했으나 아직 절다운 모양을 갖추지는 못하여 가시덤불을 제거하고서야 언덕과 산을 구별할 수 있었고 지붕에 띠를 섞고이어서야 비바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겨우 70여 년을 지나는 사이 갑작스럽게 아홉 왕이나 바뀌어 여러 번 절이 쓰러지고 무너짐을 당하여 미처 수리할 겨를이 없었는데 경문대왕(景文大王)의 뛰어난 인연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천 년의 보배로운 국운(國運)이 이그러짐이 없게 되었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선대왕(先大王)께서는 전욱씨가 태어날 적에 홍저라는 곳에 빛을 떨쳤듯이 금오산(金鼇山) 봉우리에 자취를 내리시어 처음 옥록(玉鹿, 국학)에서 이름을 드날리고 화랑의 풍모을 특별히 떨치시더니 얼마 뒤엔 높은 자리에서 백관을 통섭(統攝)하시고 궁벽한 나라의 풍속을 바로잡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임금이 후사의 위치에서 덕의 씨를 뿌리고 태자의 거처에 깃들어서는 마음을 계발하셨으니 말씀을 하면 곧 어진 이가 백성을 편안케 하는 것이었고 정치를 도모하면 곧 도로써 백성을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덟 가지의 중요한 권병(權柄, 권력)을 모두 일으키고 예의염치(禮義廉恥)의 떨어진 실마리를 이에 펼쳐서 여러 난관을 차례로 겪었지만 가는 곳마다 이로움이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전개부2 : 景文王과 鵠寺의 重修

 

 

1. 王位 爭奪戰과 景文王의 登極

 

 

旋屬憂侵杞國, 位曠搖山, 雖非逐鹿之原, 亦有集烏之苑. 然以賢以順, 且長且仁, 爲民所推, 捨我奚適. 乃安身代邸, 注意慈門, 慮致祖羞, 願興佛事. 因請芬皇寺僧崇昌, 以修奉梵居之地, 白于佛, 復遣金純行, 以隆宣祖業之誠, 告于墓, 詩所謂, “愷悌君子, 求福不回”, 書所謂, “上帝時歆, 下民祇協”. 故能至誠冥應, 善欲克終, 卿士大夫與守龜協, 赫赫東國而君臨之.

얼마 안 있어 나라에 우환이 생겨 왕위가 비어 산이 흔들리는 듯한데 비록 왕위각축의 양상은 없었지만 간혹 까마귀처럼 모이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어질며 유순함으로써 임하였고 노성함과 인자함을 지녀 백성들의 추숭하는 바가 되었으니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이에 대저(代邸)에서 몸을 편히 하고 자문(慈門)에 뜻을 기울이며 조종(祖宗)에게 부끄러움이 될까 하여 불사(佛事) 일으키기를 발원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분황사의 승 숭창(崇昌)에게 청하여 절을 중수하여 받들겠노라는 뜻을 부처님께 고하며 다시 김순행(金純行)을 보내어 조업(祖業)을 높이 펼치겠노라는 성심(誠心)을 사당에 고하도록 하셨으니, <시경(詩經)>에 이른바 “화락하고 단아한 군자여! 복을 구함이 그릇되지 않도다”라고 한 것이요 <서경(書經)>에 이른바 “상제(上帝)가 이에 흠향하시어 아래 백성이 공경하며 따른다”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능히 지극한 정성이 가만히 감응되고 좋은 욕망이 잘 이루어졌으며 공경(公卿) 사대부(士大夫)의 뜻이 점괘와 더불어 합치되었으니 동국을 빛나게 하여 임금의 자리에 오르셨습니다.

 

 

2. 唐나라가 景文王의 登極을 認定

 

 

爰遣陪臣, 告終稱嗣. 遂於咸通六年, 天子使攝御史中丞胡歸厚, 以我鄕人前進士裵匡, 腰魚頂?爲輔行, 與王人田獻?來. 錫命曰, 自光膺嗣續, 克奉聲猷, ?彰善繼之名, 允協至公之擧, 是用命爾爲新羅國王. 仍授檢校太尉兼持節充寧海軍使, 向非變齊標秀, 至魯騰芬, 則何以致飛鳳筆而寵外諸侯, 降龍旌而假大司馬之如是矣. 亦旣榮沾聖澤, 必將親拜靈丘, 肆以備千乘之行, 奚翅耗十家之産.

이에 신하를 (당나라에) 보내어 (憲安王의) 돌아가심을 고하고 (경문왕의) 사위(嗣位)하심을 아뢰게 하였더니, 드디어 함통(咸通) 6년(865년)에 천자께서 섭어사중승(攝御史中丞) 호귀후(胡歸厚)에게 우리나라 사람으로 전(前) 진사(進士)였던 배광(裵匡)의 허리에 어대(魚袋)를 두르고 머리에 치관(?冠)을 쓰게 하여 부사(副使)로 삼아 왕사(王使) 전헌섬(田獻?)과 함께 와서 칙명을 전하여 말하기를, “영광스럽게 보위(寶位)를 이어받음으로부터 훌륭한 계책을 잘 받들어 잘 계승하는 이름을 드날리고 진실로 지극히 공정한 추거(推擧)에 부응하였으니 이에 그대를 명하여 신라왕으로 삼노라”고 하고는 이에 검교태위(檢校太尉) 겸(兼) 지절충녕해군사(持節充寧海軍使)의 직함을 내렸으니, 지난날에 제(齊)나라와 같은 것을 변화시켜 빼어남을 나타내고 노(魯)나라와 같은 경지에 이르러 향내를 드날리지 못했다면 천자께서 어찌하여 조서를 보내 외역(外域)의 제후를 총애하고 용(龍)을 그린 기(旗)를 내려 대사마(大司馬)에 가섭(假攝)함이 이와 같았겠습니까. 또한 이미 천자의 은택(恩澤)에 영광스럽게 젖었으니 반드시 장차 몸소 선왕(先王)의 능에 참배할 때 임금의 행차를 준비하였으나 어찌 많은 비용을 소모하겠습니까.

 

 

3. 한 老人과 老僧이 鵠寺의 重修에 관해 建議함

 

 

遂命太弟相國(尊諡惠成大王), 致齋淸廟, 代謁玄?. 懿乎. 鷄樹揚?, ?原挺茂. 歲久而永懷耕象, 時和而罷問喘牛. 藻野縟川, 觀者如雲. ?有?背之?, 鵠眉之僧, ?手相慶, 大相賀曰, “貴介弟之是行也, 聖帝之恩光著矣, 吾君之孝理成焉”. 禮義鄕風, 綽有餘裕, 遂使海波晏, 塞塵淸, 天吏均, 地財羨, 則乃踵修蓮宇, 威護栢城, 今也其時, 捨之何俟. 於是, 孝誠旁達, 思夢相符. ?見聖祖大王, 撫而告曰, “余而祖也, 而欲建佛像, 飾護予陵域, 小心翼翼, 經始勿?. 佛之德, 予之力, 庇爾?, 允執厥中, 天祿永終”.

드디어 재상(宰相)인 태제(太弟)[시호를 높여 惠成大王이라 함]에게 명하여 종묘(宗廟)에 재(齋)를 올리게 하고 대신하여 능(陵)에 배알(拜謁)토록 하셨으니, 아름답구나! 왕족들의 훌륭함이 드날리고 형제들의 무성함이 빼어났도다. 풍년이 오래 계속되니 길이 밭 가는 코끼리를 생각하게 되고 시절이 화평하니 재상으로서 소가 헐떡이는 까닭을 물을 필요가 없구나. 들을 꾸미고 시내를 채색하니 보는 사람이 구름과 같도다. 이에 반점 생긴 늙은이와 흰 눈썹의 스님이 있어 손뼉을 치며 서로 기뻐하고 크게 하례하여 말하기를, “귀하신 왕제(王弟)의 이번 행차로 거룩하신 천자의 은광(恩光)이 드러나고 우리 임금의 효성이 이루어졌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의와 풍속이 침착하고 유연하여, 마침내 바닷 물결이 잠잠하고 변방의 풍진이 깨끗하며 사철이 고르고 땅의 산물이 불어나게 되어 선대(先代)를 이어 절을 중수하고 능을 잘 호위하시니 바로 지금이 그 기회인즉 이때를 버리고 어느 때를 기다리겠습니까. 이에 효성이 두루 사무치고 생각이 꿈과 부합하게 되었으니, 곧 (꿈에) 성조(聖祖) 원성대왕(元聖大王)을 뵈온 즉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나는 너의 선조이니라. 네가 불상을 세우고 나의 능역(陵域)을 꾸며 호위하고자 하는데, 조심하고 삼가할 것이며 일을 서두르지 마라. 부처님의 덕과 나의 힘이 네 몸을 감싸줄 것이니 진실로 중도(中道)를 잡아 하늘이 주는 복록을 길이 마치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4. 元聖王의 現夢과 法會

 

 

旣以韻耿銅壺, 形開玉寢, 不占十煇, 若佩九齡. 遽命有司, 虔修法會, 華嚴大德釋決言, 承旨於當寺, 講經五日, 所以申孝思而薦冥福也. 仍下敎曰, “不愛其親, 經所戒也, ‘無念爾祖’, 詩寧忘乎. ?言在藩, 有欲修寺, 魂交致感, ?慓襟靈. 旣愧三年不飛, ‘深思一日必葺’, 百尹御史, 謂利害何. ‘雖保無賣兒貼婦之譏’, ‘或慮有鬼怨人勞之說’. 獻可替否, 爾無忽諸”. 宗臣繼宗勛榮以下, 協議上言曰, “妙願感神, 慈靈現夢, 誠因君志先定, 果見衆謀僉同, 是寺也成 九族多慶. 幸値農隙, 請興?工”.

이미 동호(銅壺)에서 맑은 소리가 나고 옥침(玉寢)에서 깨어나셨는데 열 가지 햇무리로 길흉을 점치지 않아도 꿈에서 일러준 대로 될 것 같았습니다. 급히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법회를 경건하게 베풀도록 하여 화엄대덕(華嚴大德)인 결언(決言)이 이 절(鵠寺)에서 왕지(王旨)를 받들어 닷새 동안 불경을 강(講)하였으니 효성스러운 생각을 아뢰고 명복(冥福)을 빌고자 한 때문이었다. 이에 하교(下敎)하시기를, “어버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경전(父母恩重經)에서 경계하는 바이다. ‘네 조상을 생각하지 않으랴’고 하는 시구를 어찌 잊겠는가. 돌보아주심이 번방(藩邦)에 있는데다 절을 중수하고자 할진대 혼과 통하여 감응이 이루어지니 송구함이 가득 차 마음이 떨리는구나. 이미 삼 년 동안 세월만 보낸 것은 부끄럽지만 ‘비록 잠시 머물지라도 반드시 집을 수리한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였는데 백윤(百尹)과 어사(御事)는 이해(利害)가 어떻다고 하느냐. 비록 ‘자식을 팔고 아내를 잡혔다’는 비방이 없음은 보장하겠으나 혹 ‘귀신이 원망하고 사람들이 괴로워한다’는 말이 있을까 염려된다. 옳은 것을 권하고 그른 것을 못하도록 하여 그대들은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종신(宗臣)인 계종(繼宗)과 훈영(勛榮) 이하가 협의하여 아뢰기를, “묘원(妙願)이 신명(神明)을 감동시켜 자애로운 조령(祖靈)께서 꿈에 나타나셨는 바 진실로 왕의 뜻이 먼저 정해짐으로 인하여 과연 중의(衆議)가 모두 같은 것으로 나타났으니 이 절이 이루어지면 구친(九親)에게 기쁜 일이 많을 것입니다. 다행히 농사철이 아닌 때를 당하였으니 청컨대 목공[?工] 일을 일으키소서”라고 하였습니다.

 

 

5. 鵠寺의 重修와 주변의 빼어난 景觀

 

 

爰用擇人龍於建禮仙門, 擧僧象於昭玄精署, 乃命宗室三良 曰端元毓榮裕榮, 與釋門二傑 曰賢諒神解, 及贊導僧崇昌, 督其事. 且國君爲檀越, 邦彦爲司存, 力旣有餘, 心能匪懈. 將?小加大, 豈宜新間舊. 然恐沮檀溪宿願, 不瑕傷?苑前功, 選?故材, 就遷高?. 於是占星揆日, 廣拓宏規, 合土範金, 爭呈妙技. 雲梯而?材架險, 霜途而? 堊?香, 屬?麓而培垣, 壓溪流而敞戶, 易荒土皆而??, 變卑?而?廊. 複殿龍盤, 中以盧舍那爲主, 層樓鳳?, 上以修多羅爲名. 高設鯨?, 對標鸞檻. 綺井華?而革甲?, 繡?枝擁以??, 聳翼如飛, 廻眸必眩. 其以增崇改作者, 有若?容別室, 圓頂蓮房, ?食?堂, 晨炊?舍. 加以雕??巧, 彩?窮精, 巖洞共淸, 煙霞相煥. 玉刹掛蓬溟之月, 兩朶霜蓮, 金鈴激松澗之風, 四時天樂. 就觀勝?, 傑出遐?. 左峯巒則鷄足?雲, 右原?則龍鱗閃日. 前臨則黛列?嶠, 後?則鉤連鳳崗. 故得遠而望也, ?而奇, 追而察也, 爽而麗, 則可謂樂浪仙境, 眞是樂邦, 初月名山, 便爲初地.

이에 건례선문(建禮仙門)에서 걸출한 인재를 가리고 소현정서(昭玄精署)에서 고매한 스님을 기용하여 종실의 세 어진 이인 단원(端元), 육영(毓榮), 유영(裕榮)과 불문의 두 호걸인 현량(賢諒), 신해(神解) 그리고 찬도승(贊導僧)인 숭창(崇昌)에게 명하여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습니다. 또 임금께서 시주가 되시고 나라의 선비들이 담당자가 되었으니 힘이 이미 넉넉하고 마음도 능히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장차 작은 것을 크게 만들려 하는데 어찌 새것에 옛것을 뒤섞어서야 되리오마는 그러나 단계(檀溪)의 오랜 소원을 저버릴까 두렵고 내원(?苑)의 전공(前功)을 손상하지 않으려 옛 재목을 골라 모아 높게 다진 터로 옮겼습니다. 이에 별을 점치고 날을 헤아려서 넓게 개척하여 규모를 크게 하였으며 진흙을 이기고 쇠를 녹여 부어 다투어 묘기를 나타냈습니다. 구름사다리는 수(?)와 같은 솜씨로 다듬은 재목을 험한 데에 건너지르고 서리 같은 도벽(塗壁)은 요(?)와 같은 재주로 만든 색흙에 향을 이겨 넣으며, 바위로 된 기슭을 깎아 담을 돋우고 시냇물을 내려다보며 앞이 탁 트이게 창을 내며, 거친 층계를 금테 두른 섬돌로 바꾸고 보잘 것 없는 곁채를 무늬 새긴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겹으로 된 불전은 용이 서린 듯한데 가운데에 노사나불(盧舍那佛)을 주인으로 모셨으며, 층층 누각엔 봉황이 우뚝 섰는데 위에다 수다라(修多羅)라고 이름하였습니다. 고래등 같은 마룻대를 높이 설비하고 난새 같은 난간을 마주보게 하며, 비단 같은 천정엔 꽃을 포개었고 수놓은 주두엔 곁가지를 끼우니 날개를 솟구쳐 날아갈 듯하여 볼 때마다 눈이 아찔하도다. 그밖에 더 높이고 고쳐 지은 것으로는 초상화를 모신 별실과 스님들이 거처할 요사며 음식을 헤아리는 식당과 밥을 짓는 넓은 부엌이었습니다. 더욱 새기고 다듬는 데 교묘함을 다하고 채색하는데 정밀함을 다하였으니 암혈(巖穴)과 골짜기가 함께 맑으며 안개와 노을이 서로 빛나도다. 옥찰간(玉刹竿)에 봉명(蓬溟)의 달이 걸렸으니 두 떨기 서리 같은 연꽃이요 금방울에 송간(松澗)의 바람이 부딪히니 사철의 천연 음악이로다.

절승(絶勝) 경개(景槪)를 보면 외딴 구석에서 걸출하였으니 왼편의 뾰족한 봉우리들은 닭의 발이 구름을 끌어당기는 듯하고 오른편의 습한 들은 용의 비늘이 태양에 번쩍이는 것 같도다. 앞에 나가면 메기 같은 산이 검푸르게 벌려 있고 뒤로 돌아보면 봉황 같은 산등성이가 잇닿아 있도다. 그러므로 멀리서 바라보면 높고 기이하고 가까이 가서 살피면 상쾌하고 아름다우니 가히 낙랑(樂浪)의 선경(仙境)이요 참으로 즐거운 나라이며 초월(初月)이란 명산(名山)은 곧 환희의 땅이라고 이를 만하도다.

 

 

6. 重修의 完了와 景文王의 갑작스런 昇遐

 

 

善建而事能周?, 勤修而福不唐捐, 必謂大庇仁方, 上資寶壽. ?三千界爲四境, 籌五百歲爲一春, 豈期獵豹樊岑, 方歡竪尾, 跨龍荊峀, 遽泣墮髥.

잘 세워서 모든 일이 두루 잘 되었고 부지런히 닦아서 복을 헛되이 버리지 않았으니 반드시 우리나라를 크게 비호하며 위로 왕의 보수(寶壽)에 도움을 주게 될 것입니다. 삼천세계(三千世界)를 망라하여 네 경계를 삼으며 오백년을 셈하여 한 봄으로 삼고자 하였는데, 번산(樊山)에서 표범을 사냥하여 바야흐로 꼬리세움을 기뻐하시다가 형산(荊山)에서 용을 걸터 타고 갑자기 떨어진 수염을 잡고 울 줄이야 어찌 기약하였겠습니까.

 

 

결말부 : 崇福寺란 이름과 王의 登極

 

 

1. 憲康王의 登極과 崇福寺로의 易?

 

 

獻康大王, 德峻妙齡, 神淸遠體. 仰痛於寢門問竪, 俯遵於翌室宅宗, ?文公盡禮居憂, 終能克己, 楚莊王俟時修政, 其實驚人. ?復性襲華風, ?滋慧露, 抗尊祖之義, 激歸佛之誠. 中和乙巳年秋, 敎曰, “善繼其志, 善述其事, 永錫爾類, 在我而已. 先朝所建鵠寺, 宜易?爲大崇福. 其持經開士, 提綱淨吏, 南畝以資供施, 一依奉恩故事 奉恩寺乃聖悳大王追福建寺, 其故波珍飡金元良所捨地利, 輸轉非輕, 宜委正法司. 別選二宿德, 編籍爲常住, 薦祉于冥路, 則有以見居上位者, 无幽不察, 結大緣者, 有感必通”. 自是鳧鍾吼?寥, 龍鉢?香積. 唱導則六時玉振, 修持則萬劫珠聯. 偉矣哉. 得非尼父所謂 “無憂者, 其惟文王乎, 父作之, 子述之者耶.”

헌강대왕(憲康大王)께서는 젊은 나이에 이미 덕이 높으셨고 정신이 맑고 몸이 건강하여 우러러 침문(寢門)에서 환관에게 안부를 묻지 못하게 됨을 슬퍼하시고 머리 숙여 익실(翼室)에서 거상(居喪)하는 것을 준수하시었습니다. 등(?)나라 문공(文公)이 예(禮)를 다하여 거상(居喪)함으로써 마침내 극기(克己)할 수 있었고 초(楚)나라 장왕(莊王)이 때를 기다려 정사를 다스림으로써 실로 사람을 놀라게 하였거늘, 하물며 천성이 중화(中華)의 풍도를 따르시고 몸소 지혜의 이슬에 젖으시며 조종(祖宗)을 높이는 의리를 들어올리시고 부처에게 귀의하는 정성을 분발하셨음에랴.

중화(中和) 을사년(885년) 가을에 하교하시기를, “그 뜻을 잘 계승하고 그 일을 이어받아 잘 따르며 길이 후손에게 좋은 일을 물려주는 것이 나에게 달려 있을 뿐이니 선대(先代)에 세운 곡사(鵠寺)의 명칭을 바꾸어 마땅히 대숭복(大崇福)이라 해야 할 것이다. 경(經)을 몸에 지니는 보살과 시무(寺務)의 대강을 맡은 청정한 승려가 좋은 전지(田地)로써 공양과 보시에 이바지하였는데 한결같이 봉은사(奉恩寺)[봉은사는 聖德大王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절이다]의 전례를 따르라. 고(故) 파진찬(波珍飡) 김원량(金元良)이 희사한 땅의 산물로부터 얻는 이익을 운반하는 일이 중대하니 마땅히 정법사(正法司)에 위임토록 하라. 그리고 따로 덕망이 있는 두 고승을 뽑아 사적(寺籍)에 올려 상주(常住)토록 하면서 명로(冥路)에 복을 드린다면 윗자리에 있는 나로서 유계(幽界)까지 살피지 않음이 없게 될 것이고 대연(大緣)을 맺은 이로서도 감응이 있어 반드시 통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로부터 종소리는 공중에 울려 퍼지고 발우엔 향적여래(香積如來)가 주는 밥이 가득 담기며, 창도(唱導)함에 육시(六時)로 옥경(玉磬)이 울리고 수지(修持)함에 만겁(萬劫) 동안 구슬이 이어지듯 하리니, 위대하도다! 공자(孔子)의 이른바 “근심이 없는 이는 오직 문왕(文王)일진저. 아비가 일으키고 아들이 이어받았구나”는 것을 얻으심이 아니겠습니까.

 

 

2. 憲康王의 命과 그 感懷

 

 

慶曆景午年春, 顧謂下臣曰, “禮不云乎, ‘銘者自名也, 以稱其先祖之德, 而明著之後世, 此孝子孝孫之心也’. 先朝締?之初, 發大誓願, 金純行與若父肩逸, 嘗從事於斯矣. 銘壹稱而上下皆得, 爾宜?銘.” 臣也, 浪跡星?, 偸香月桂, 虞丘永慟, 季路徒榮, 承命震驚, 撫躬悲咽.

경사스러운 병오년(886년) 봄에 하신(下臣) 치원(致遠)을 보고 이르시되, “<예기(禮記)>에 이르지 않았던가. ‘명(銘)이란 스스로 이름함이니 그 조상의 덕을 칭송하여 후세에까지 밝게 드러내려는 것은 효자 효손의 마음이다’라고. 선조(先祖)께서 절을 지으실 당초에 큰 서원(誓願)을 발하셨는데 김순행(金純行)과 그대의 아비 견일(肩逸)이 일찍이 이 일에 종사하였다. 명(銘)이 한 번 일컬어지면 과인과 그대가 모두 얻게 되리니 그대는 마땅히 명(銘)을 짓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신(臣)은 바다를 건너 중국에 가서 월계(月桂)의 향기를 훔쳤지만 우구자(虞丘子)의 긴 슬픔만 남겼고 계로(季路)의 헛된 영화만을 누릴 뿐이었는데, 왕명(王命)을 받자오매 두렵고 놀라와 몸을 어루만지며 슬퍼 목이 메입니다.

 

 

3. 元聖王의 治積에 대한 回顧

 

 

?思西宦日, 嘗覽柳氏子珪, 錄東國之筆, 所述政條, 莫非王道, 今讀鄕史, 宛是聖祖大王朝事蹟. 抑又流聞, 漢使胡公歸厚之復命也, 飽採風謠, 白時相曰, “自愚已往, 出山西者, 不宜使海東矣. 何則, 鷄林多佳山水, 東王詩以印之而爲贈, 賴愚嘗學, 爲綴韻語, 强忍愧酉守之, 不爾爲海外笑必矣.” 君子以爲知言. 是惟烈祖以四術開基, 先王以六經化俗, 豈非貽厥之力. 能得換乎其文, 則銘無愧辭, 筆有餘勇.

가만히 생각하옵건대 중국에서 벼슬할 때 일찍이 유자규(柳子珪)가 우리나라의 일에 대하여 적어 놓은 글을 읽으니 서술한 바가 바르고 조리가 있어 왕도(王道) 아님이 없었는데 이제 우리 국사(國史)를 읽어보니 완연히 원성왕조(元聖王朝)의 사적(事跡)이었습니다. 또 전하는 말을 들으매 중국의 사신 호귀후(胡歸厚)가 복명(復命)함에 한껏 채집한 풍요(風謠)를 두고 당시의 재상에게 이르기를, “제가 다녀온 지금부터 무부(武夫)는 신라에 사신으로 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라에는 산수가 아름다운 곳이 많은데 신라왕이 시로써 그려내어 주시거늘 제가 일찍이 배웠던 것에 힘입어 운어(韻語)를 지음으로써 억지로 부끄러움을 참아가며 화답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해외(海外)의 웃음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관리들이 옳다고 여겼다 하옵니다. 이는 오로지 열조(烈祖)께서 시(詩), 서(書), 예(禮), 악(樂)으로 터전을 마련하시고 선왕(先王, 元聖王)께서 육경(六經)으로 세속을 교화하심이니, 어찌 후손을 위하여 그러하심이 아니겠습니까. 능히 문물을 빛나게 하셨으니 명(銘)을 지어도 부끄러운 말이 없을 것이요 붓을 들어도 넘치는 용기가 있을 것입니다.

 

 

4. 碑銘의 撰述과 定康王의 昇遐

 

 

遂敢窺天酌海, 始緝凡詞, 誰知墜月?峯, 俄興永恨. 旋遇定康大王, 功成遺礪, 韻?吹?. 旣嗣守丕圖, 將繼成遺績, 無安厥位, 未喪其文. 而遠逐日弟兄, 據値西山之影, 高憑月姉妹, 永流東海之光. 伏惟 大王殿下, 瓊?聯芳, 璇源激爽, 體英坤德, 纘懿天倫. 諒所謂, 懷神珠, 鍊彩石, 有虧皆補, 無善不修. 故得寶雨金言, ?然授記, 大雲玉偈, 宛若合符.

드디어 감히 하늘을 엿보고 바닷물을 헤아려 비로소 평범한 말을 엮어 보았는데 달이 떨어지고 산이 무너져 별안간 긴 한탄만이 일게 될 줄 뉘 알았겠습니까. 뒤미처 정강대왕(定康大王)께서 남기신 숫돌에 공을 이루시니 부시던 지(?)에 운(韻)이 맞으셨습니다. 이미 왕위(王位)를 이으시어 왕업(王業)을 지키시며 장차 남은 사업을 이어 이루시려고 그 지위에서 편한 날이 없으시어 그 글을 마치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나 멀리 해 같은 형님을 쫓으시다가 갑자기 서산(西山)에 그림자를 만나시니 높은 달 같은 누이에게 의지하여 길이 동해(東海)에 빛을 전하셨습니다. 엎드려 생각컨대 대왕전하(定康王)께서는 아름다운 꽃받침이 꽃과 이은 듯하고 왕가의 계통이 매우 밝으며 빼어난 곤덕(坤德)을 체득하고 아름다운 천륜(天倫)을 계승하셨나니, 진실로 이른바 신주(神珠)를 품고 채석(採石)을 불린 것이어서 이지러진 데는 모두 기우고 좋은 일이라면 닦지 않음이 없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보우경(寶雨經)>에서 부처님 말씀으로 분명히 수기(授記)하신 것이라든지 <대운경(大雲經)>에 나오는 옥 같은 글이 완연히 부합됨과 같음을 얻으셨습니다.

 

 

5. 眞聖女王의 登極과 撰述에 관한 謙辭

 

 

且以文考成佛宮, 康王施僧供, 已峻琉璃之界, 未刊琬琰之詞, 申命?材, ?搖柔翰, 臣雖池?變墨, 而筆?夢椽, ?比張融, 不恨無二王之法, 庶幾曹操, 或解有八字之褒. 設使灰撲塡池, 塵飛漲海, 本枝蔚矣, 齊若木以長榮, 豊石巍然, 對沃焦而卓立.

선고(先考) 경문대왕(景文大王)께서 절을 이룩하시고 헌강대왕(憲康大王)께서 스님들의 공양을 베푸시어 이미 불교계를 높이셨으나 아직 비문을 새기지 못하였기에 용렬한 신(臣)에게 명을 내리시어 힘없는 붓을 놀리게 하셨는데, 신이 비록 못이 먹물로 변함에 부끄럽고 붓이 꿈속에서 서까래만 함에 욕되오나, 장융(張融)이 두 왕씨(王氏)의 필법이 없음을 한탄하지 않은 것에 가만히 비할 것이오며, 조조(曹操)가 어쩌다 여덟 자의 찬사를 풀이했던 것에 가까울 것입니다. 설령 재가 부딪쳐 못을 메우고 먼지가 날아 바다에 넘칠지라도 임금의 후예는 무성하여 약목(若木)과 나란히 오래도록 번영할 것이며 두터운 비석은 빼어나 옥초(沃焦)를 마주보며 우뚝 서 있을 것입니다.

 

 

銘詞

 

 

齋誠拜手, ?涕援毫, 追?華而獻銘曰,

정성을 가다듬고 손 모아 절하며 눈물을 씻고 붓을 들어 빛나는 발자취를 더듬어 명(銘)을 지어 올립니다.

 

 

1. 부도의 전래와 융성

 

迦衛慈王, ?夷太陽. 顯于西土, 出自東方.

無遠不照, 有緣者昌. 功崇淨刹, 福蔭冥藏.

가비라(迦毘羅)의 부처님은 해돋는 곳의 태양이시라

인도(印度)에서 나타나시고 동방(東方)에서 나오셨구나.

먼 곳까지 비추지 않음이 없어 인연 있는 자(景文王)들이 번성(蕃盛)하였네.

깨끗한 곡사(鵠寺, 崇福寺)에 공이 높았고 원성왕릉(元聖王陵)에 복이 미치었도다.

 

 

2. 원성왕의 치적에 대한 칭송

 

烈烈英祖, 德符命禹. 納于大麓, 奄有下土.

保我子孫, 爲民父母. 根深桃野, 派遠桑浦.

열렬하신 원성왕(元聖王)께서는 덕업(德業)이 순(舜)임금과 부합하셨으니

큰 숲에 드심이 무난하여 문득 천하를 얻었네.

우리의 자손을 보호하시고 백성들의 부모가 되옵시니

뿌리는 동방에 깊었고 갈래는 동해에 뻗었도다.

 

 

3. 元聖王의 因山과 移寺

 

蜃?龍?, 山園保眞. 幽堂闢隧, 踊塔遷隣.

萬歲哀禮, 千生淨因. 金田厚利, 玉葉長春.

상여줄 메고 수레로 제궁 모셔 산릉에 편안히 모셨으며

유택(幽宅)에 수도(隧道)를 열고 곡사(鵠寺)를 이웃에 옮기셨도다.

오래도록 애모하는 예(禮)는 모든 이의 깨끗한 인연일지니

절에 이로움이 많고 왕가(王家)가 길이 번성하리라.

 

 

4. 景文王의 孝誠과 佛事

 

孝孫淵懿, 昭感天地. 鳳?龍躍, 金圭合瑞.

乞靈不昧, ?福斯至. 欲報之德, 剋隆法事.

효손(孝孫)이 깊고 아름다워 천지의 이치를 밝게 아시매

봉황이 날고 용이 뛰니 금규(金圭)가 상서로움에 부합되었도다.

조상의 영전(靈前)에 기원하매 어둡지 않고 바라던 복도 곧 이르니

선조의 은덕 갚으려고 불사를 잘 일으키셨네.

 

 

5. 鵠寺의 重創과 그 모습

 

妙選邦傑, 嚴敦國工. 對農之隙, 成佛之宮.

彩檻?鳳, 雕樑架紅. ?墉雲矗, ?壁霞融.

나라의 인걸 잘 뽑으시고 나라의 명공(名工)을 돈독(敦篤)하게 대하시며

농사철 아닌 때에 대처하여 숭복사(崇福寺)를 이룩하셨네.

채색 난간엔 봉황이 날아들고 아로새긴 들보엔 무지개가 걸쳤으며

둘러싼 담장엔 구름이 피어오르고 그림벽엔 노을이 엉키었구나.

 

 

6. 鵠寺의 位置와 周邊景觀

 

盤基爽塏, 觸境蕭灑. 藍峀交聳, 蘭泉?瀉.

花?春巖, 月高秋夜. 雖居海外, 獨秀天下.

터전이 시원스레 툭 트이고 눈에 드는 경치는 맑고 깨끗하다.

쪽빛 묏부리는 어울려 솟아 있고 맛 좋은 샘물은 쉬지 않고 솟아난다.

꽃이 아름다운 봄산이며 달이 높이 뜬 가을밤이 있으니

비록 바다 밖에 있지만 이 세상에 홀로 빼어나구나.

 

 

7. 崇福寺로의 改名과 憲康王의 德化

 

陳耕報德, 隋號興國. 孰與家福, 崇之國力.

堂?妙音, 廚豊淨食. 嗣君遺化, 萬劫無極.

진(陳)나라에서는 보덕사(報德寺)라 불렀고 수(隋)나라에서는 흥국사(興國寺)라 이름하였네.

어찌 가복(家福)이라고만 하랴 국력을 높이심이라.

불당(佛堂)에선 미묘한 소리 드높고 주방에는 정결한 음식이 푸짐하다.

헌강왕(憲康王)께서 끼치신 덕화 만겁 동안 무궁하리라.

 

 

8. 眞聖女王의 登極과 祝願

 

於??后, 情敦孝友. 致?雁行, 愼徽龍首.

詞?腐毫, 書慙??. ?壑雖渴, 龜珉不朽.

아름답구나 眞聖女王(진성여왕)이시어! 효도(孝道)와 우애(友愛)의 정이 돈독하시도다.

안행(雁行)을 아름답게 이루시고 왕자(王者)의 도를 삼가하여 훌륭하게 하셨도다.

글은 썩은 붓을 놀린 듯 부끄럽고 글씨는 팔목을 당긴 듯 수치스러우나

큰 골짜기가 비록 마를지라도 거북 위의 옥돌은 썩지 않으리라.

 

 

□□□手 桓?等刻

□□□수(□□□手) 환견(桓?) 등 새김.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 1992) 정병삼 朝鮮金石總覽 허흥식 김영태 황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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