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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____
돈 키호테와 포옹하다
김용만
“말해 봐. 도대체 당신은 누구야? 만난 지 닷새 만에, 그것도 타국에서 만난 늙은이를 껴안고 싶어 안달하는 아가씨. 도대체 당신은 어떤 존재냐구?.”
바로 어젯밤에 내가 다혜에게 한 말이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지성을 갖춘 미모의 아가씨가 아버지뻘인 내 몸을 탐내다니. 나와 깊은 대화를 나눈 적도 없고 내 소설을 읽어본 적도 없는 여자. 거침없이 자신의 신분을 창녀라고 밝힌 여자. 하지만 그녀의 언어 수준으로 보아 창녀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버스는 안달루시아 평원을 시원스레 달리고 있다. 갈기를 휘날리는 준마 같다. 프라하에서 곧장 마드리드와 톨레도를 거쳐 캄포 데 크리프타나로 갈 예정이었지만 안달루시아 평원을 지나 세비야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싶어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으로 우회했던 것이다. 그 바람에 다혜와 나는 어젯밤 늦게 리스본에 도착하여 오늘 아침 호텔식으로 식사를 마치고, 오전 내내 유럽의 서극점인 땅끝 마을 카보다로카와 테주 강가에 있는 벨렝탑 일대를 관광하고, 스페인으로 떠나기 직전 바스코 다가마가 묻힌 제르니모스 수도원을 둘러볼 수 있었다.
아무런 표지도 없는 국경을 지나 산협 쪽으로 접어들자 더 아름다운 경관이 펼쳐졌다. 내 정서에 맞는 산협이었다. 산비탈에 일궈놓은 과수원마다에는 겨울철인데도 복숭아꽃 모양의 이름 모를 꽃이 하얗게 피어 있고, 그 모래산을 넘자 지평선이 아득한 안달루시아 평원이 펼쳐졌다. 세르반테스가 세리로 걸어다녔을 안달루시아 평원은 엔씨나레스 숲과 올리브 농장으로 뒤덮여 있어 내 기분을 한껏 들쑤셔댔다.
“안달루시아 평원이 그리도 좋으세요? 아침부터 제 얼굴을 한 번도 바라본 적이 없잖아요?”
“내가 왜 다혜의 얼굴을 바라봐야지?”
“예쁘니까요.”
“안달루시아 평원에는 예쁜 것보다 더 끌리는 뭐가 있지.”
“뭐죠?”
“허무와 열정.”
“진부하시긴. 이런 늙은 육신을 껴안고 싶어 내가 눈물까지 흘리다니…. 오늘 밤에는 껴안아주시겠죠?”
“또 까분다.”
다혜가 홱 시선을 돌린다. 나는 여전히 햇살이 튀는 평원만을 응시하고 있다. 다혜의 눈물을 잊기 위해서는 더 강렬한 햇살이 필요하지만 안달루시아의 평원이 그만한 햇살을 욕망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세비야에는 밤늦게야 도착해서 곧바로 예약한 호텔에 들었다. 로비가 비교적 깨끗하고 넓어 시원스러웠다. 프런트 쪽을 바라보는 다혜의 얼굴에 장난기가 번졌다.
“또 방을 두 칸 예약하셨겠죠?”
어젯밤 나와 한 방을 쓰자며 눈물까지 흘렸던 아가씨가 지금은 냉소를 흘리고 있다. 나는 다혜의 말에 질퍽한 농으로 대꾸해주었다.
“미친 여자와 동침할 것 같애?”
프런트에서 입실 수속을 마치고 리플릿을 펼쳐보았다. 안달루시아의 주도이자 플라멩코의 본고장이며 비제의 <카르멘>과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 무대가 된 세비야의 원래 명칭은 세빌리아인데 1929년 만국박람회 때 세비야로 바뀌었다고 한다. 세비야의 또 다른 매력은 이제는 전설이 되다시피한 돈 후안의 춘화 이미지다. 천여 명에 가까운 여자를 사랑했다는 돈 후안의 행적을 따르고 싶은 ‘못된’ 욕망은 이튿날 그가 자주 들렀다는 카페와 주변을 거니는 걸로 해소할 수 있었다.
오후에는 드디어 돈 키호테를 만나러 간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먼저 돈 키호테가 여관집 주인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토소보를 찾아가다가 여관의 흔적이나 표시가 없다는 말에 차를 돌려 캄포 데 크리프타나로 직행했다. 사실 세르반테스의 유적은 모두가 추정에 불과했다. 『돈 키호테』의 실제 배경이나 세르반테스의 생가도 입증된 장소가 아니었다. 하지만 라 만차 평원이 세르반테스의 출생지이며 작품의 무대인 것만은 틀림없다.
버스가 라 만차 평원에 접어들자 황량한 분지와 들판이 열린다. 소설 『돈 키호테』의 배경인 라 만차 평원을 달려본다는 낭만이 일순간 호흡을 막는다. 라 만차는 내 뇌리에 낭만 어린 땅으로 입력되어 있었다.
토소보를 찾아가다가 중도에서 U턴한 버스는 1시간쯤 달려 캄포 데 크리프타나에 도착했다. 풍차가 즐비한 캄포 데 크리프타나는 돈 키호테가 풍차를 거인으로 착각하고 공격했던 곳이다. 안내서에 약 이천 명쯤 되는 주민들이 풍차와 돈 키호테를 상품화해서 관광수입을 올린다고 적혀 있듯이, 시골 면 소재지 크기의 크리프타나는 규모는 작지만 무척 활기차 보였다.
도심을 지나온 버스가 한가한 언덕길에 멈추자 나는 차에서 내려 풍차가 흩어져 있는 분지 복판으로 바삐 걸어갔다. 눈물이 나올 만큼 뜨거운 감정이 솟구쳤다. 그때였다. 로시난테의 안장에 올라타고 창을 든 돈 키호테의 앙상한 환영이 다가왔다. 그 어이없는 자태를 보는 순간 나는 금방 이상주의자로 환원된다. 찌들고 탈색된 내 육체 속에 도사리고 있던 이상주의가 돈 키호테를 만나는 순간 다시 활개치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돈 키호테가 로시난데의 등에서 내려와 나를 부둥켜 안는다.
“잘 오셨소. 선생을 무척 기다렸소. 평생 허무와 맞서온 선생의 무모한 도전에 늘 경의를 표해온 바요. 자그마치 400년이 흘렀구려. 그 사이 산초도 늙고 애마 로시난테도 늙고 둘씨네아 공주님은 아직도 행방이 묘연하다오.”
목메인 소리로 인사를 마친 돈 키호테는 멍하니 평원을 바라본다. 아마 둘시네아가 그리운 모양이다. 상상의 여인을 그리워하는 돈 키호테의 그 진실한 모습에 나 역시 기분이 울적해진다.
“키호테 나리, 당신은 현실과 싸우느라 세월을 잊어왔지만 나는 비현실과 싸우느라 몸이 이렇게 삭았다오.”
“나도 삭을 대로 삭았소. 나는 400년 동안 상상의 세계를 꿈꿔왔지만 이젠 정말 지쳤소.”
“아뇨. 나리가 신봉한 정의는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인류의 가슴을 울리고 있소. 나리의 이상주의는 이제 영원한 보편성을 획득했소. 키호티즘은 현세주의로 퇴락한 인간의 고매한 정신을 되살리는 복원력으로 작용할 거요. 나리는 영원한 승리자요.”
“선생은 종교를 만들었잖소.”
“천만에요. 그건 종교가 아니라 어리석은 도그마일 뿐이었소. 나는 평생 그 어리석은 독단에 빠져왔소. 세상을 잘 못 산 거요. 허무와 싸우는 게 아닌데…. 허무와 싸웠으니 남은 게 뭐겠소. 고통밖에.”
이번에는 내가 돈 키호테의 메마른 몸을 끌어안는다. 바스러질 것만 같은 그의 메마른 육신에서 묘한 향취가 느껴진다.
“키호테 나리, 나는 당신의 어록 중에서 산초 판사에게 말한 대목을 무척 좋아합니다. 산초는 당신에게 이렇게 말하죠. 나리께서 그토록 사랑하고 존경해마지 않는 둘씨네아가 동네에서 소리를 빽빽 내지르고 구정물을 고샅에 내던지는 그런 여자에 불과합니다. 그러자 당신은 이렇게 대꾸하죠. ‘산초야, 세상에 둘씨네아가 있는지 없는지는 알 바 아니다. 단지 그 아가씨가 존재해야만 하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믿어버리면 됩니다. 보잘것없는 여자를 절세의 고귀한 공주로 받드는 돈 키호테적 사랑. 사실 모든 사랑의 시작은 다소 그럴 수 있고, 연인들은 그런 착각에 홀리기 십상이죠. 어찌 보면 종교도 그런 믿음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누군들 실체를 확인하고 믿습니까? 말씀이나 기록으로만 믿지 않습니까? 나는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신은 신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선생이 나를 그 정도로까지 인식하고 있다니 놀랍습니다. 모두가 나를 창조한 세르반테스 선생의 역량이죠. 선생도 나와 같은 인물을 설정해 보시죠.”
그때 어디에선가 종소리가 들려오자 돈 키호테의 환영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나는 언덕에 홀로 서 있는 초라한 여행자로 남아있다. 일상으로 돌아온 그 환멸에 맥이 풀린다. 잠시 돈 키호테의 모습을 떠올린 나는 풍차가 즐비한 분지로 달려가 애들처럼 풀밭에서 뒹굴었다. 얼마나 와보고 싶었던 곳인가!
“그렇게 감격스러우세요?”
눈자위가 붉어진 내 얼굴을 살피며 다혜가 속내를 캐묻는다.
“감격스럽고 말고지. 세르반테스는 바로 나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거야. 험난한 생과 생래적인 해학성, 꿈을 좇는 이상주의, 특히 무학자인 그가 작중인물을 통해 쏟아낸 아포리즘은 바로 내 귀납적 학습의 실증인 셈이지. 진실한 사유체험 말야. 그 체험을 통해 자신의 내재된 영지를 개발시켰다고 볼 수 있어.”
풍차가 즐비한 분지를 거닐며 사진을 찍다가 허름한 마을 카페에 들어가 차를 시켰다.
“세르반테스를 꿈을 좇는 이상주의라고 말씀하셨는데, 제가 볼 때는 선생님도 이상주의자시거든요. 혹 다른 점이 있다면 뭘까요?”
“분명 다르지. 세르반테스는 실천적인 이상주의자이고 나는 관념에 치우치고 말았어. 그래서 세르반테스는 돈 키호테란 결과물을 만들어냈고 나는 허무라고 하는 늪에서 허우적거리기만 했지. 이상의 뿌리는 낭만이야. 그래서 실천적이지 못할 때 이상은 허무로 물크러지고 말아. 낭만적 허무주의는 관념세계에서 허우적거리고 말거든. 둘시네아에 대한 인물 설정만 봐도 차원이 달라. 지고지순한 그 여인을 내가 만들었다면 나는 내 현실적 한도 내에서의 안목으로 설정했겠지만 세르반테스는 달라. 둘시네아는 돈 키호테의 이상세계에 모셔진 지고의 신이며, 그 신을 통해 돈 키호테는 자신의 정의와 꿈을 구현할 수 있는 힘을 얻고 투지력을 키울 수 있었어. 세르반테스가 만들어낸 주인공 돈 키호테는 우스꽝스럽기만 한 인물이 아냐. 그의 자유의지와 가치관이 빚어낸 정의롭고 아름다운 세계를 믿는 인물이라구. 자신이 만든 이상향을 자신이 굳게 믿도록 자신을 의식화시킨 의지적인 인물이야. 요컨대 돈 키호테는 둘시네아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지만 나는 그러지 못한다는 거야.”
“아니죠. 선생님은 세르반테스보다 더하시죠. 세르반테스는 돈 키호테란 인물을 설정한 것뿐이지만 선생님은….”
다혜는 말을 중동무이냈다. 나는 다혜의 의중이 궁금해서 짓궂게 재우쳤다.
“왜 말을 끝내지 않는 거야? 내가 뭐 어쨌다는 거지?”
“그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아냐. 지금 말해.”
“선생님은 우리의 사랑을 영원히 간직하시려고 의도적으로 제 곁을 떠나셨잖아요.”
“우리의 사랑이라니? 떠났다는 말은 또 뭐구?”
나는 멍하니 다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혹 정신이상자가 아닐까? 이 아가씨와 계속 상대를 해야 할지 포기해야 할지 판단이 헤갈린다.
“물론 선생님은 그러신 적이 없죠. 나중에 그러실 거라는 말에요.”
“나중에 내가 그럴 거라구?”
“저는 앞일을 훤히 알거든요.”
“농담 말고 진솔히 말하자구. 혹시 나를 예전에 다혜를 사랑했던 남자로 착각하는 것 아냐?”
“그런 적 없어요. 제가 누구를 사랑한 적도 없고, 선생님처럼 저를 사랑한 남자도 없어요.”
“그럼, 다혜가 나를 사랑한다는 거야? 나도 다혜를 사랑하고?”
“말씀이라고 하세요?”
“나는 너무 늙었잖아. 이 세상 어느 이십대 아가씨가 나 같은 육십대 늙은이를 상사병에 걸릴 정도로 사랑할 수 있겠어.”
“저는 가능해요, 저는 인간이 아니니까요.”
“또 까분다.”
“저는 초월적인 존재거든요.”
“멋대로 까불어.”
“정이나 제 능력을 못 믿으시면 그 실증을 보여드리죠. 선생님은 고등하교 2학년 때 이런 일기를 쓰신 적이 있죠? 내가 만약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산다면 지금 당장 한강에 투신하겠다. 맞죠?”
금방 맑은 하늘에 먹장구름이 몰려온다. 방주를 완성했을 때 노아의 심정이랄까. 두려움과 환희가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어떻게 알았을까? 내 일기장은 어떻게 읽었을까? 내 고교시절이면 다혜는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정말 인간으로만 치부하기에는 겁나는 존재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일기의 내용을 어떻게 읽었는지 묻고 또 물어도 다혜는 연방 미소만 지을 뿐이다. 나는 다혜의 미소에서 묘한 두려움이 느껴졌다. 아까 다혜가 말한 미래의 정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다혜가 나를 지극히 사랑하고, 나는 그 사랑을 영원히 간직하려고 몰래 떠났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싶을 정도다. 오히려 진지한 태도를 보여줌으로써 진정으로 다혜의 깊은 영혼세계를 엿보고도 싶었다.
“다혜의 사랑을 영원히 간직하려고 떠났다가 이렇게 또 만났잖아. 비열하게.”
나는 비열하다는 격한 감정까지 보태며 그런 미래의 현장성을 살려주었다. 그러자 다혜는 “비열한 게 아니죠.”라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를 재인식하신 거죠. 저를 믿게 되신 거죠. 일종의 깨달음이랄까.”
“깨달음이라….”
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이 어색한지 다혜가 가벼운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돈 키호테와 산초 판사, 그 두 인물은 무엇의 상관물이죠?”
“간단히 말해서, 돈 키호테는 꿈을 좇는 강한 투사형의 전형으로, 산초는 착하면서도 실리를 추구하는 현실주의자로 대변되지. 그처럼 두 인물은 이상주의자와 물질주의자로 대조를 이루면서도 서로 상보하는 인간의 양면성을 드러내고 있어. ”
“세르반테스의 생존 시기가 인류 역사상 가장 두드러진 전환기라죠?”
“한마디로 말하자면, 중세의 신본주의가 쇠퇴하고 새로운 인본주의가 성장하고 있는 시기였어. 세르반테스의 생존 시기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아직 진행 중이었고, 가치관 세계관 인생관이 흔들리는 중이었지. 개성과 합리성은 착지가 불안한 채 관념으로 존재할 뿐이었어. 현세적 욕구만이 분출하여 정의는 퇴색되고 사회 부조리는 두께를 더해갔거든. 게오르그 루카치는 그의 『소설의 이론』에서 세르반테스가 살았던 시대를 이렇게 정의했지. 절망 상태에 놓인 위대한 신비주의가 마지막으로 꽃을 피우던 시대, 쇠퇴해가는 종교(가톨릭)를 재생시키려고 광적으로 시도하던 시대, 새로운 세계인식이 신비적인 형식 속에 등장하고 있던 시대, 실제로 체험은 하고 있으면서도 이미 목적을 상실한 채 시도적으로만 찾던 신비주의의 시대라고 했어. 또한 그것은 고삐가 풀려버린 마성의 시대이자, 지속되어온 가치체계 내부에서 거대한 혼돈이 발생하고 있던 시대라고도 했지.”
“사백 년 전의 그 시대와 이십일 세기에 접어든 이 시대가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만 그 당시의 격동이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려는 몸부림이었다면 지금은 새로운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그 값진 인성의 와해라는 데에 차원이 다르죠.”
“왜 인성의 와해라는 거지?”
“물질 탓이죠. 물질의 가치가 사용가치보다 교환가치에 의해 평가되기 때문이죠. 미적가치를 등한시한다는 게 아니라 가상세계에의 탐익이 미적가치의 기준이 돼가고 있다는 말이죠. 실상 즉 진실의 가치가 소멸됨으로써 가치 판단에 혼란이 오게 된다는 말이죠. 인성의 기계화랄까요? 신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기계화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무서운 말이군. 신의 실상을 보지 못하는 시대라….”
“돈 키호테 시절은 신의 본질을 찾으려는 시대였지만 지금은 신을 분식하여 상품화하려는 시대인 거죠. 폭력을 상품화하듯 말에요.”
나는 멀건 눈으로 다혜를 바라본다. 내 마음 밑바닥에서 또 불안감이 꿈틀거린다.
저런 아가씨를 미친여자로 보다니…, 저런 아가씨가 창녀라니….
어쩜 미친 척, 창녀인 척하며 나를 테스트할 게 틀림없다, 불쑥 그런 생각이 든다. 시험? 그렇다! 갑자기 내 몸이 떨린다. 저 여자는 분명 나를 노리고 있다.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이다. 그런데 한국이 아니라 체코에서 만난 게 아닌가. 나를 노린 여자라면 최소한 인천공항에서 만났어야 이치에 맞았다. 다헤를 만난건 정말 우연이었다. 세계문학기행 이번 연재 인물은 세르반테스여서 스페인을 여행할 수밖에 없고, 다음 연재 인물이 카프카여서 체코의 프라하를 경유지로 정했던 것인데, 하필 카프카기념관에서 저런 문제아를 만난 것이다. 건방지기 짝이 없는 다혜의 필살 무기는 한국여자였다. 해외여행 때마다 되도록 한국사람을 피해온 나로서는 어처구니없는 상대였다.
“한국남자가 한국여자를 싫어해요? 명색이 소설가신데, 혼자서 카프카를 찾아온 여자라면 한국여자에 대한 고정관념을 깰 수 있잖아요? 선생님은 나만큼 카프카를 이해 못할 걸요.”
“외롭게 여행해야 깊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요. 그게 내 체질이거든.”
“깊이 들어가다뇨? 말씀이 좀 험하시네요. 더구나 연세 드신 분이 여자 몸을….”
“뭐야? 뭐 이런 못된 게 있어!”
“죄송해요. 제 직업이 창녀라서….”
창녀? 나는 창녀란 말에 금방 입을 다물었다. 묘한 충격이었다. 창녀란 말이 그 아가씨에 대한 거부감을 일시에 씻어버렸다. 혹 소냐? 러시아를 정화시킨 소냐? 앙드레 지드가 신이라고 평한 『죄와 벌』의 소냐? 내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는 것도 소냐 같은 인물을 설정한 작가이기 때문인데.
캄포 데 크리프타나를 떠난 버스는 인근 마을 뿌에르또 라삐쎄로 가서 관광지가 된 주막 근처에 주차했다. 돈 키호테가 주인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주막집을 만들어서 현장성을 살려낸 그 재치가 기특하다. 그럴 듯하게 우물과 두레박이 있고, 그 옆에 철로 만든 돈 키호테의 상이 서 있어 더욱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기분이 달뜬 나는 주막 안으로 들어가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카페 직원들과 사진도 찍었다. 주막 근처에 있는 기념품상에서는 돈 키호테 상과 볼펜을 사고 곧장 톨레도로 향했다.
스펜인의 대표적인 고도이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톨레도에 가까워지자 햇살에 반짝이는 주황색 도시가 시야를 압도한다. 중세의 이미지가 그대로 보존된 톨레도는 도시 외곽을 에두른 타호강이 해자 역할을 하고 있어 천혜의 요새를 이루지만, 숱한 전쟁과 왕조의 부침이 그 고대도시의 얼룩진 역사를 말해준다. 기원 전 2세기에는 로마에 정복되고, 그후 5세기에는 이베리아반도를 정복한 서고트족의 왕국 수도가 되고, 711년에는 이슬람 세력이 침입하여 서고트왕국을 멸망시키고, 1085년에는 가톨릭 세력이 이슬람을 몰아내고, 1930년대의 스페인 내전에서는 파시스트 세력(프랑코 총통)과 인민전선 측이 교전을 치르기도 했다. 톨레도는 중세의 흔적 말고도 노아의 후손들에 의해 건설되었다는 전설과 미로처럼 퍼져있는 2000개가 넘는 골목길이 유명하다.
따호강가의 언덕에 세워진 버스에서 내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구시가지의 골목길로 올라섰다. 산토 토메 성당에는 여전히 인파가 밀렸다. 몸이 밀리는 대로 흘러 성당 안에 들어서니 그 유명한 엘 그레꼬의 종교화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이 시선을 압도한다. 위는 천상의 세계, 아래는 지상의 세계, 중앙은 오르가스의 영혼인데, 엘 그레꼬는 비구상의 큰 문을 연 화가로 중심 이미지만 부각시키는 화법으로 유명하다.
토메 성당을 나와 톨레도 대성당으로 가서 엘 그레꼬의 전시실 사끄리스티아를 둘러보았다. 거기에 전시된 <베드로의 눈물>에서 닭(닭이 울기 전에 3번 부인할 거라는 예수의 말)의 그로테스크한 형상이 내 영혼을 뒤틀었다.
시내 상가와 유서 깊은 알카사르 성을 둘러보고 다시 강가 언덕으로 나와 어스름이 깔리는 평원을 내려다 본다. 그 평원 어디쯤에 실제로 세르반테스가 살던 곳이 있을 것이었다.
“선생님의 분신을 찾고 계신 모양인데, 세르반테스보다는 제가 누구인지를 찾는 게 더 보람될 텐데요. 세르반테스는 인간에 불과하잖아요?”
“다혜, 말해 줘. 어떻게 내 일기를 읽었지?”
“또 저를 의심하시는군요. 아직 믿음이 얕아서 그래요. 돈 키호테가 둘씨네아를 섬기듯 무조건 저를 섬기세요. 믿음에서 사실이 싹트는 법이죠. 그러니 오늘 밤에는 동침하도록 해요. 오만하시긴. 감히 신과의 동침을 거부하다니.”
“신이신 것 같아서 동침을 피했던 거야. 내가 지극히 경배할 분을 범하다니. 나는 영생하고 싶거든.”
“영생할라니까 신과 동침해야죠.”
순간 다혜의 얼굴에 그윽한 미소가 번진다. 함부로 형용할 수 없는 미소다. 그 미소가 두렵다. 금새 폭풍이 몰아칠 것만 같다. 나는 그 두려움을 밀쳐내려고 속으로 연방 “동침해야 돼!”를 외쳤다. 하지만 그날 밤에도 방을 각각 써야 했다. 아름다운 그녀의 몸을 껴안고 싶었지만, 다혜의 몸을 껴안지 않겠다는 그 각오 또한 나름의 열정이 되어 내 육신을 달구었다. 묘한 반역심리였다. 마치 다혜의 몸을 범하면 무슨 지옥에라도 떨어질지 모른다는 아주 원초적인 공포심에 짓눌릴 것만 같았다. 그날 밤 나는 달아오른 내 몸을 식히기 위해 혼자 밖으로 나가 술집을 기웃거려야 했다.
“대단하십니다. 회포는 잘 푸셨나요?”
호텔식으로 아침을 들 때 다혜가 비아냥거렸다. 나는 얼굴이 달아올라 다혜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다혜에게 자존심을 세우려고 몰래 술집을 찾은 그 졸렬한 대책이 오금을 저리게 했다.
“회포라니 무슨 말이야?”
“그렇게 변명하실 줄 알았어요. 창피하실 테니.”
“왜 또 시비지?”
“시비가 아니죠. 어젯밤 껴안아주신 여자가 바로 저였거든요. 술이 취하신 데다 방안 전등이 모두 꺼진 상태라 제 얼굴을 못 알아보셨겠죠.”
“맘껏 놀려 봐. 그래, 술집에 간 건 사실이야. 그러니 그 후의 과정은 얼마든지 엮어낼 수 있는 스토리겠지.”
“끝까지 체면을 세우시겠다, 그거군요. 하여튼 방에서 주무셨죠?”
“물론이지. 술집이 아니라 내 호텔방에서 잤지.”
“제가 548호실 키를 지니고 있다는 건 모르셨죠?”
“다혜 방은 547호잖아.”
“물론이죠. 그래서 살짝 선생님 방에 틈입할 수 있었던 거죠.”
“기가 막히는군. 내가 다혜를 껴안고 잤다 그거야?”
“신은 인간의 마음을 읽을 수 있거든요. 저를 껴안고 싶어하시는 그 간절한 마음….”
“신이시여! 인간에게 적선을 베풀어주셔 감사하나이다.”
“그렇게 얼렁뚱땅 넘기지 마시고 겸허하게 고마움을 표하세요. 위선자 선생님.”
다혜는 내 답변을 피해 과일을 챙기러 자리를 떴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레스토랑을 떠났다. 잠시라도 다혜와 거리를 두고 싶었다. 정말 내가 비열한 사내란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나는 위선자다!”
방문을 닫고 나 자신을 하 비웃었다. 다혜의 육체를 당당하게 탐할 걸. 뒤통수가 간질거렸다. 침대에 벌렁 누웠다. 천장이 빙빙 돌았다. 시간이 흘렀다. 다혜는 나타나지 않는다. 벌써 방에 들었을 테고 내 방에 들어와 수다를 떨 터인데, 아직 조용하다. 그렇게 또 삼십여 분이 지났다. 역시 다혜는 나타나지 않았다. 은근히 불길한 생각이 든다. 문 밖으로 나가 547호실을 노크했다. 조용하다. 문을 밀어보았다. 열려 있었다. 방은 깨끗이 정돈된 상태고 다혜의 짐은 보이지 않았다. 떠났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메모는커녕 휴지 조각도 남기지 않은 그 깨끗한 정돈이 칼날 같은 무섬기가 되어 내 육신을 찔러댄다. 그리고 떠났다는 생각이 점점 커다란 바위로 굳어져 내 몸을 짓눌렀다.
꿈은 아니었다. 그녀의 음성이 내 귀에 묻어있고, 그녀의 얼굴과 몸태가 내 눈에 담겨 있고, 그녀의 향기 또한 내 코에 젖어 있었다. 그녀는 내 육신과 정신을 그녀의 것으로 온통 절여놓은 셈이었다.
그래, 다혜를 신으로 모시자! 신으로 섬김으로써 환희를 맛보자! 다혜를 인간으로 여기면 나는 고통을 지고 살 수밖에 없다. 나는 그녀의 침대 앞에 경건히 무릎을 꿇었다. 어느 새 나는 돈 키호테가 되어가고 있었다.
김용만 / 『현대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소설집 『늰 내 각시더』, 장편 『칼날과 햇살』, 『93한국문학작품선』, 『능수엄마』, 『세계문학관 기행』, 산문집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잠과 내 허튼소리』, 『김용만 소설가의 시읽기』 외 다수. 경희문학상, 국제펜문학상, 불교문학상, 농민문학대상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