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무상(無相)을 행하(여 상相에 집착함이 없)지만, 중생을 교화 제도하(기를 싫어하지 않)는 것, 이것이 보살행입니다.
雖行無相,而度眾生,是菩薩行。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들은 불학도 다 깊이 연구했고 경전도 적지 않게 보았습니다. 이 한 마디를 보고서는 금강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존재하는 온갖 중생의 부류는 알에서 태어나는 것이나, 태에서 태어나는 것이나, 습기에서 태어나는 것이나, 화현하여 태어나는 것이나, 형상이 있는 것이나, 형상이 없는 것이나, 생각이 있는 것이나, 생각이 없는 것이나,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것이나, 나는 그들을 모두 무여열반의 경지에 들어가도록 제도하리라 고. 발심하여, 이와 같이 무량 무수 무변한 중생들을 열반에 들도록 제도하였더라도 실제로는 한 중생도 제도를 얻은 자가 없느니라[所有一切眾生之類, 若卵生ㆍ若胎生ㆍ若濕生ㆍ若化生, 若有色ㆍ若無色, 若有想ㆍ若無想, 若非有想ㆍ非無想, 我皆令入無餘涅槃而滅度之. 如是滅度無量ㆍ無數ㆍ無邊眾生, 實無眾生得滅度者]. 그리고 달마조사의 또 다른 법본(法本)에서 전하는 말인 달마사행관(達摩四行觀: 보원행報冤行ㆍ수연행隨緣行ㆍ무소구행無所求行ㆍ칭법행稱法行)을 참구해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온갖 좋은 일을 했다면 한 것으로 끝이지, 마음속에서는 남겨두기조차도 하지 않습니다. 만약 오늘 내가 좋은 일을 한 가지 해서 남을 도와주었다고 생각한다면 벌써 상(相)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무상행(無相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무상을 행하더라도 무상에 묻혀버리지 않습니다. 비록 온갖 중생을 교화하더라도 상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보살행입니다.
(역자보충) 다음은 달마사행관(達摩四行觀)에 대한 인터넷상에서 얻은 자료로서, 온전한 번역이 아니어서 미흡하지만 약간 손질하여 참고로 전재합니다.
보리달마의 가르침을 알기 위한 자료 중 가장 신뢰할 수 있고 가장 오래된 자료는 제자 담림(曇林)이 기술한 ‘약변대승입도사행론서(略辨大乘入道四行論序)’이다. 담림은 이 글에서 스승 보리달마의 선법(禪法)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도(道)에 들어가는 많은 방법이 있지만, 결국은 이(理)로부터 들어가는 것[理入]과 행(行)으로부터 들어가는 것[行入] 2가지[二入]로 귀결된다.
이(理)로부터 들어가는 것은 경전에 의해서 그 근본정신을 파악하고 온갖 중생의 평등한 본성(佛性)을 믿어, 스스로의 마음을 관(觀)하여서 자신과 상대가 둘이 아님을 깨닫고, 진실의 도리와 명합(冥合)해 차별 없이 적연무위(寂然無爲)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행(行)으로부터 들어가는 것은 보원행(報怨行)ㆍ수연행(隨緣行)ㆍ무소구행(無所求行)ㆍ칭법행(稱法行)의 4가지(四行)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보원행(報怨行)이란 현세 생활의 여러 가지 원망과 증오 및 고통과 번뇌는 모두 자신의 과거의 업보로 말미암은 결과라고 보아 참고 받아들이면서 인간 본래의 도(道)에 힘쓰는 것이다,
둘째, 수연행(隨緣行)이란 사람은 인연에 따라서 괴로움과 즐거움을 경험하게 되지만, 그러한 것들은 모두 업보의 인연에 의한 것으로 인연이 다하면 모두 무(無)로 된다는 것을 관하여서, 순역(順逆)의 인연에 입각해서 도(道)에 맞게 하는 것이다.
셋째, 무소구행(無所求行)이란 도(道)를 밖에서 추구하고 집착하는 것을 없애는 수행을 철저히 하는 것이다,
넷째, 칭법행(稱法行)은 온갖 중생이 모두 본래 청정하다고 하는 이법(理法)을 믿고 이법에 맞도록 끊임없이 6바라밀을 수행하되 6바라밀 닦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 청정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
비록 무작(無作)을 행하(여 함이 없)지만, (3계6도에서) 생사의 몸을 받음을 나타내 보이는 것, 이것이 보살행입니다.
雖行無作,而現受身,是菩薩行。
‘무작(無作)’은 어떤 경전들에서는 ‘무원(無願)’으로 번역했습니다. 이 두 개의 다른 문자로의 번역은 불법의 의미에서 다 맞습니다. 왜냐하면 원력(願力)은 틀림없이 심리적으로 행을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명사로 말하면 심리행위입니다. ‘수행무작(雖行無作)’은 온갖 것이 다 공하여 지나가면 머무르지 않고 붙들지 않아서, 한 것은 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 말은 우리들로 하여금 영명(永明) 수(壽)선사가 옛사람의 네 마디 말을 인용했던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허공꽃 같은 6도만행을 닦아 익히고 修習空花萬行
물속의 달 같은 도량에 편히 앉아서 安坐水月道場
거울속의 모습 같은 천마를 항복받고 降伏鏡像天魔
꿈속 같은 부처의 과위를 증득하네 證成夢中佛果
그는 깨달은 뒤 닦음을 일으켜서 하루에 108가지 불사(佛事)를 하느라 대단히 바빴습니다. 황교(黃敎)의 총카바 대사와 마찬가지였는데, 앞서 말했듯이 그는 불법을 널리 전파하기 위하여 일분일초도 한가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젊은 학우들은 저를 배우지 말기 바랍니다. 반드시 총카바 대사처럼 해야 합니다. 이 두 분들은 모두 보살행입니다. 공(空)ㆍ무작(無作)ㆍ무상(無相)을 분명히 알면서도 크나큰 서원을 일으켜 세세생생 다시 옵니다. 다시 오기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태에 들어가야 하고, 성장해야 하고, 이제 막 경전 강의하고 설법한지 몇 년 되지도 않았는데 업보가 다 해 버립니다. 그런 뒤에 또 다시 와야 하니, 정말 번거롭습니다. 그렇지만 보살은 이런 번거로움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무작(無作)을 행하지만, 생사의 몸을 받음을 나타내 보일[雖行無作, 而現受身]’ 수 있습니다. 이거야말로 보살행입니다.
비록 무기(無起)를 행하(여 생각의 일어남이 없)지만, 온갖 선행을 일으키는 것, 이것이 보살행입니다.
雖行無起,而起一切善行,是菩薩行。
이 말은 번역하기 더욱 어렵습니다. 어떻게 ‘무기(無起)’할까요?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임은 범부법입니다. 심지어 선종의 대주(大珠)화상의 말을 빌릴 수 있는데, 앞서 이미 말했듯이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임은 천마(天魔)입니다.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생각을 움직이지 않으면 좋을까요 좋지 않을까요? 여러분들 중에 어떤 사람은 이 노선을 걸어가서 정좌하고서 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정도에 도달합니다.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생각을 움직이지 않는 것은 음마(陰魔)입니다. 세 번째는, 일어나기도 하고 일어나지도 않는 것은 번뇌마(煩惱魔)인데, 비상비비상(非想非非想) 경계와 다름없습니다. 이 세 가지 노선을 제외하면, 당신이 보기에 어떤 것이 마장이 아니겠습니까? 바꾸어 말하면,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이는 것은 범부법이요,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생각을 움직이지 않는 것은 천인의 경계이거나 성문법으로서 공(空)에 치우친 것이라고 우리는 현재 말하는데, 보살도는 어떨까요? 일으키면 곧 쓰고 놓아버리면 쉽니다. 일으킴과 일으키지 않음이 전혀 걸림이 없습니다. ‘수행무기(雖行無起)’,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생각을 움직이지 않으면서 작용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기일체선행(起一切善行)’, 어떤 악행도 하지 않고 많은 선행을 하는 것입니다.
이틀 전에 제가 여러분들에게 위산(溈山)선사가 경책하는 네 마디 말을 시험해 본 적이 있는데 저는 여러분이 꼭 주의하기를 바랍니다. 반드시 외우십시오. ‘진여의 경지에서는 공(空)하여 한 생각에도 머무르지 않지만, 모든 선행 가운데에서는 작용을 일으켜 어떠한 작은 선행도 버리지 않는다[實際理地, 不著一塵; 萬行門中, 不捨一法]’, 이게 바로 보살도입니다. 놓아버릴 때는 한 티끌에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본래 아무것도 없으니 어느 곳에서 먼지를 일으키겠습니까? 예컨대 자리에 올라와 휴식정(休息定)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모든 것[萬緣]을 놓아버리고 한 티끌에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일어나서 행하고 쓰고자 하는 것은, ‘모든 선행 가운데에서는 작용을 일으켜 어떠한 작은 선행도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작은 선행이라도 주의해야 합니다. 이 도리를 이해하면 유마거사가 말한 ‘비록 무기(無起)를 행하지만, 온갖 선행을 일으키는 것, 이것이 보살행입니다[雖行無起, 而起一切善行, 是菩薩行].’란 말을 이해하게 됩니다.
남회근 선생 유마경 강의에서
첫댓글 감사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