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學校 가는 길
[논어論語] 맨 첫 장 학이편學而篇에서 공자孔子는 이렇게 말했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不亦說乎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 배우고 때로 익히며 공부를 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며 친구가 있어 멀리에서도 찾아온다면 이 또한 즐거운 일이 라는 말이다.
우리들이 공자의 가르침대로 배우는 것은 즐거운 일이요, 벗이 먼 곳에서 잊지 않고 찾아오는 것도 즐거운 일이라고 하셨으니 우리들도 학문을 익히고 친구들을 사귀려고 진학을 하여 학교생활에 열중 하는 것, 이것이 학생의 참된 정도正道라 할 수 있겠다.
1945년 8월 15일 우리들은 국민학교 3학년 여름방학 중에 민족의 해방을 맞았다. 어떻게 일제에게 철저한 세뇌교육을 받았는지 그 당시에는 해방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처럼 우리들은 완전히 세뇌가 된 바보이었다.
한편 우리들은 엉겁결에 갑자기 마지한 해방인지라 3 4 5 학년의 교과서가 제대로 마련이 되지 아니하여 학교수업이 어물 어물 진행되었으니 참으로 재수 없는 과도기를 만났다.
1948년 해방정국의 어수선한 틈바구니가 계속되고 있었는데 필자와 이웃에 사는 친구 임채규는 익산군 웅포면인 우리 면내에 중학교가 없기 때문에 옥구군 서수면에 있는 신설된 학교, 임피중학교를 편도 10-12km 왕복 20-24km의 거리를 두 다리를 의지하여 매일 걸어 다녔다. 더구나 우리들은 5학년을 마치고 바로 중학교에 입학했음으로 국민학교 6학년공부는 하지도 못했다.
그래도 우리들 그 또래들이 길을 걷는 데에는 아주 이골이 났다. 등교시간이 처음에는 편도 2시간이 소요되더니 차차 걷는 속도가 빨라져서 어느 때는 1시간 40분, 최대속도를 내면 1시간30분에 주파할 수가 있었다.
그 당시의 통학여건은 필설로는 표현을 못한다. 길이 포장이 되지 않은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길바닥에 부역으로 면민들을 동원하여 봄 가을로 자갈을 깔아서 걷기도 힘들었을 뿐 아니라 차량이 지나가면 자갈이 튀어 행인이 다치는 경우도 있고 차량이 일으키는 먼지를 뒤집어쓰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런 여건 속에서 3년간 통학을 하여 개근상을 받았으니 이는 학업우등상보다도 자랑스러운 상이었다.
필자는 중학교에 재학 중일 때부터 독서에 남다른 취미가 있어 무엇이든 읽을거리가 있으면 몰입해서 읽었는데 그 당시에는 시골에서 읽을거리를 구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래서 책을 구했다 하면 서로 먼저 읽으려고 하는 욕심이 발동하여 경쟁이 치열했다. 그래서 책은 지금처럼 장서용이 아닌 독서용이어서 책이 집에서 편안하게 쉴 틈이 없이 이 마을 저 마을로 부지런히 왔다 갔다 하는 여행을 반복하다보니 책이 너덜너덜 헤어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래서 시멘트 포대 같은 종이로 표지를 덧바른 경우가 많았다.
그러던 중에 하루는 박계주 선생이 지은 [순애보]를 입수했다. 책을 빌려주는 친구가 필자와 김상권이라는 친구에게 동시에 책을 빌려주기로 약속을 하였는데 책은 필자가 먼저 손에 넣었다. 그랬더니 김상권이 자기가 먼저 보기로 했다면서 책을 넘겨달라고 하였으나 필자도 책에 대한 집착이 강하여 책을 꼭 손에 쥐고 모시고 다녔다. 그랬더니 수업이 다 끝나고 하교시간에 이 친구가 필자의 책 보따리를 들고 나와서 거래를 하자고 제의했다. 필자의 손에 있는 [순애보]를 자기에게 넘겨주면 내 책 보따리를 필자에게 넘겨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필자도 이를 용납지 아니하는 옹고집으로 버텼다. 그러는 중에 그 친구와 갈라서야 하는 갈림길이 나왔다. 그 친구는 서수면 산간리에 살기에 마룡리 방죽 길에서 헤어져야 한다. 그 친구가 최후로 필자에게 통보했다. “그 책을 내가 먼저 보도록 나에게 넘겨주면 네 책 보따리를 넘겨주겠다.”
“ 기왕에 내가 책을 받아서 상당부분을 읽었다. 네가 내 다음에 보도록 하겠으니 책 보는 넘겨 달라.” 고 했으나 마이동풍인 이 친구의 고집도 필자의 고집과 막상막하이었는지 필자의 책 보따리를 가지고 자기 집으로 가버렸다.
그까짓 소설책 한권이 뭔 대수인가 다음날 읽으면 되는 걸 그걸 서로 먼저 읽으려고 고집을 부리고 있으니 지금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되는 하나의 웃음거리가 된다. 그러나 이는 그 만큼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시골 벽촌인지라 너나없이 모두가 읽을거리에 목말라하고 있는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장면이라고 말 할 수 있겠다.
필자는 책 보따리를 친구에게 맡기고 그냥 집으로 와서 그 책을 밤새워 다 읽었다. 그 이튿날 달랑 소설책 1권만 들고 학교에 갔더니 작은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제 고집을 부린 김상권이 필자의 책보자기를 들고 자기 집으로 갔다가는 자기부모님에게 야단을 맞을 것 같아서 그랬는지 필자의 책보를 길가에 놓고 그냥 자기 집으로 가 버렸다는 것이다. 참으로 무책임한 사람이다. 그때 길가를 지나던 길손이 책보를 주워서 내용을 보니 책과 공책이 들어 있는데 임피중학교 한길수 라는 책보의 주인 이름이 나오는지라 책보를 들고 학교에 들려 수위 겸 학교를 보살피는 아저씨 집에 맡겨놓고 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친구들은 필자는 하교 길에 책 보따리를 잃어버리고서도 잃어버린 것도 모르고 다니는 얼빠진 학생으로 낙인을 찍어놓고 조롱하고 있는 현장이었다. 그러니 얼마나 친구들에게 놀림감이 되었겠는가. 책 1권을 가지고 서로 먼저 보려고 시샘을 하다가 결국에는 얼간이로 낙인찍힌 필자. 어찌 보면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라고 나무람 할 수도 있겠으나 독서에 대한 열망, 책을 가까이 하려는 욕심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려고 했던 그 고집은 알아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필자 등은 비록 이런 독서에 열악한 한적한 시골에서 자랐으나 책을 좋아하였기에 오늘날 시인이요, 수필가인 문인이 되었고 김상권은 최초학사경찰로 자유당 말기에 치안국 교육계에서 승진하려는 경찰들에게 시험문제를 담당하는 업무를 맡아보다가 어느 3.1절 날 밤새워 철야기도를 했다고 하더니 갑자기 풍을 맞아 미국으로 치료차 갔으나 소식이 두절되었으니 너무나 아쉽고 안타까웠다.
어느 날은 학교 가는 길에 눈이 많이 내려서 길이 상당히 미끄러웠다. 일행 몇 사람의 학우들이 모여서 미끄러운 길을 피하고자 사람들의 발자국이 닿지 않은 길을 찾으려고 하다 보니 샛길을 찾을 수밖에! 샛길을 새 길로 찾다 보니 수로도 나오고 농로도 있어 좋다구나 하고 정신없이 걷다가 필자가 눈길에 미끄러져 수로에 풍덩 빠져버렸다. 그러니 신발이 다 젖고 바지도 젖었는데 바지가 얼어서 걸음을 옮길 때 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심하게 들렸다. 그런데도 학교에 늦을세라 급히 날뛰어 학교의 정문 앞에까지 왔다. 이때 정문 앞 구멍가게 아저씨가 나를 보더니 깜작 놀라며 나를 데리고 자기네 부엌으로 가더니 활활 타는 솔가지불로 바지를 말렸다. 바지에서는 김이 무럭무럭 나더니 좀 따뜻해 졌다. 그러다 보니 아침 수업시간이 늦었다. 정문에서부터 앞만 보고 뛰어 가는데 훈육을 담당하던 선생님이 교무실에서 창문을 열더니 “ 어이 학생 이리 들어 와 봐 . . . .”나를 부른다. 그러나 나는 못 들은 척 못 본 척하고 교실로 뛰어 들어 갔더니 50분 수업이 거의 거의 끝날 시간이 되었다. 케 세라 세라다. 될 대로 되라. 내일 일은 내일에게 맡겨보자 하는 뱃심이 생겼다. 거의 1시간 지참을 문제 삼아 벌을 주고 고과에 참고 할 수도 있으련마는 한문을 가르치며 원체 점잖으신 선비 같은 심종현 선생님이 훈육을 담당하시어서 그랬는지 그냥 <묻지 마>로 덮어 버렸기에 조용히 넘어갔다. 이같이 필자는 거래가 없는 사람의 도움을 받고 살았다.(人不知而不慍不亦君子乎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공자 말씀
이래서 왕복 20-24km를 무사히 통학하였기에 3년 개근상과 다른 상을 받고 졸업을 하였으니 이것도 인덕을 제대로 담뿍 받은 복 중의 대복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