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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19일 금요일 [(녹) 연중 제28주간 금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녹] 연중 제28주간 금요일 또는 [홍]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사제, 성 이사악 조그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또는 [백] 십자가의 성 바오로 사제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게 되었을 때, 약속된 성령의 인장을 받았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라며, 하느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신다(복음).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두었고 여러분도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1,11-14 형제 여러분, 11 만물을 당신의 결정과 뜻대로 이루시는 분의 의향에 따라 미리 정해진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몫을 얻게 되었습니다. 12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13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위한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게 되었을 때, 약속된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14 우리가 하느님의 소유로서 속량될 때까지, 이 성령께서 우리가 받을 상속의 보증이 되어 주시어,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7 그때에 1 수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서로 밟힐 지경이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 2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3 그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에서 한 말을 사람들이 모두 밝은 데에서 들을 것이다.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은 지붕 위에서 선포될 것이다. 4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5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여라. 6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7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에페 1,7). 이스라엘 백성은 파스카의 희생 제물 덕분에 목숨을 보존하고 이집트를 탈출하여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탈출 12,13-14 참조).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은 짐승의 피가 아닌 예수님의 피로 죄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죄의 노예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구약의 법에 따라 할례의 피를 흘림으로써 ‘육적인 표식’을 받지만,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은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난 표지로 ‘성령의 은사와 인장’을 받습니다.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받을 하늘 나라의 상속권을 보증하십니다. 하느님께 속한 자녀들은 성령을 선물로 받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미리 맛보게 됩니다. 성령을 받은 자녀들은 이 지상의 삶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벗’이라 부르시며 육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도록 당부하십니다. 믿는 이들의 목숨을 위협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막는 사람들은 잠깐 동안의 권력과 억압을 행사할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 숫자까지 세어 두실 정도로 어려움에 빠져 있는 자녀들을 지켜 주십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의 희망을 어둠 속에 가두며 천상의 가치를 기다리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리스도께 속량된 사람은 죄에서 해방되어 영적 기쁨을 누리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써 생명을 얻은 하느님의 자녀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
세 가지 사랑의 조화 우리 대한민국의 부모님들만이 지니고 있는 특별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녀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도에 넘치는 투자와 집중이 바로 그것입니다. 과도한 자녀 교육열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부모에 대한 자녀들의 지나친 의존성이 또한 그렇습니다. 절대로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도를 넘어서는 것 같습니다. ‘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80% 정도가 딱 적당한데, 100%를 넘어 120%까지 챙겨주다보니 결국 ‘마마보이’ ‘캥거루족’ 같은 신조어가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어떤 부모들은 펠리칸이나 가시고시가 따로 없습니다. 자신들을 위한 투자는 전혀 없습니다. 자나깨나 자식들 생각 뿐입니다. 자녀들을 위해서라면 있는 것 없는 것, 더 나아가서 모든 것을 다 자녀들에게 내어줍니다. 그들을 바라보며 드는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세상의 부모들도 자신의 자녀들을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리고, 그토록 큰 사랑을 베푸는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지니고 계신 우리들을 향한 사랑은 얼마나 큰 것이겠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우리 자신의 존재 자체를 하찮게 여기고 보잘 없는 존재로 여깁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 한 가지!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시선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분을 우리를 얼마나 귀히 여기시는지 모릅니다. 시편 작가의 표현처럼 그분은 우리를 당신 눈동자 처럼 소중히 여기십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도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루카 복음 12장 6~7절) 그리스도 신자로서 영성생활에 있어서 늘 고민해야 할 중요한 측면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영성생활이란 제일 먼저 몸과 마음과 정신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영성생활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바탕으로 눈에 보이는 하느님이신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일이 또한 중요합니다. 그것으로 다 끝났을까요? 천만의 말씀! 한 가지가 더 남아있습니다.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을 기초로 나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 남아있습니다. 흙부스러기 같이 나약하고 머리칼 보다 많은 죄에 둘러싸여 있는 나 자신이지만, 그래도 나란 존재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나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 이것이 또한 영성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입니다. 돌아보니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매기는 점수가 너무 박합니다. 저같은 경우도 저 자신의 지난 날에 대해 점수를 매길때, 30점 밖에 안줍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인생 점수를 그렇게 매기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바라보는 그분의 시선은 우리 인간의 시선과 철저히 다릅니다. 우리 인간은 우리가 지은 죄, 오점, 실패, 과오에 시선을 집중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노력하는 모습, 가능성, 한번 잘 살아보겠노라는 다짐, 지향들에 더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하느님 시각으로 우리를 바라보실 때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얼마나 대견스러운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부족하고 비참한 삶을 살아도, 그분께서 우리에게 매기는 점수는 언제나 99점, A+ 입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주님께 대한 두려움으로 세상 두려움을 이겨라>
어떤 임금이 체스 게임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그 나라에서 체스를 가장 잘 둔다는 사람과 시합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기분 좋게 졌습니다. 임금은 다음번을 기약하며 이번에 이겼으니 원하는 것을 말해보라고 하였습니다. 많은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 사람은 체스 판 위에 나뉜 칸의 개수만큼 쌀 한 톨, 그 다음 칸엔 두 톨, 그 다음 칸엔 네 톨, 이렇게 체스 판이 다 찰 때까지 쌀을 주시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체스 판은 총 64개의 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임금은 너무 상이 작아 보였지만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체스 판의 반인 32개까지 칸이 차자 논 하나를 주어야 하는 상황까지 갔습니다. 끝까지 가다가는 나라 전체를 빼앗기게 생긴 것입니다. 왕은 신하들 앞에서 한 약속이기에 어찌 해야 하느냐를 고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만약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약속을 잘 지켜 무일푼 거지가 되겠습니까, 아니면 그놈을 칼로 쳐서 나라를 지키겠습니까? 약속을 지키던 그 약아빠진 사람을 칼로 치던 왕을 움직이는 힘은 ‘두려움’입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아 자신의 국민들로부터 욕을 먹는 두려움이 크면 약속을 지키겠고, 나라를 잃는 두려움이 크면 그 사람을 칼로 칠 것입니다. 어쨌든 인간의 모든 행동을 일으키는 힘은 두려움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어떤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서는 그것과 반대되는 두려움을 더 크게 느끼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어떤 분들은 자신은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두려움이 없으면 사람이 아닙니다. 배고파지는 두려움이 없으면 먹지 않을 것이고, 졸릴 두려움이 없으면 잠을 자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두려움에 의해 지배되고 두려움 때문에 생존합니다. 차가 오는데 피하지 않거나 맹수가 다가오는데 도망치지 않는 토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두려움은 생존과 직결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려움이란 말을 ‘욕구’로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욕구의 힘은 두려움입니다. 내가 어떤 이성을 사랑하여 결혼하기를 원한다면 그 원하는 마음 안에는 그 사람과 헤어질 것 같은 두려움이 동시에 존재하게 됩니다. 욕구를 충족시키게 만드는 힘이 두려움인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원하는 게 없으면 두려울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두려움 없이 사는 방법은 아무 것도 원하지 않으면 됩니다. 문제는 너무 원하지 않으면 공수병(물을 두려워하는 병)이나 거식증(몸이 음식을 거부하는 병) 등에 걸려 생존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니 조금만 원해야합니다. 굶어 죽지 않을 정도만 먹기를 원한다면 맛있는 것을 많이 못 먹을 것 같은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하루 천 원으로 살 수 있을 정도만 되면 가난해지는 두려움은 사라지게 됩니다.
욕구는 두려움이기 때문에 또한 고통입니다. 많이 욕망하면 많이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니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만 원한다면 그 두려움이 주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지나치게 많은 돈을 원하고 지나치게 많은 인기를 원해서 그것을 잃는 두려움을 견딜 수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욕구가 두려움이고 고통임을 안다면 우리는 이 세상의 욕구들을 줄여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욕구는 저절로 줄어들지는 않습니다. 욕구 총량의 법칙이 있습니다. 이것을 덜 원하면 저것을 더 원해야합니다. 먹는 것을 덜 좋아하기 위해서는 그 욕구를 이길 다른 욕구를 찾아야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조금 더 나은 몸매가 되기를 원해야 음식량을 줄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 것에 대한 욕구를 줄이려면 천상 것을 원하면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대상, 즉 욕망해야 할 대상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하느님을 욕망하는 만큼, 그래서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게 된다면 이제 세상 것은 두려워지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그러니 이 세상 고통의 원인이 되는 욕망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입니다. 하느님을 욕망하면 세상 욕망이 사라집니다. 그렇기에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이 은총인 것입니다. 성령 7은 중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 두려움은 하느님을 두려워함입니다. 이 두려움이 바로 세상 두려움을 없앨 수 있는 두려움인 것입니다.
사람이 재물과 하느님을 동시에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를 사랑하면 하나는 미워해야합니다. 이는 나비가 되면 애벌레 때 좋아하던 잎사귀를 좋아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좋아지면 다른 것은 싫어집니다. 따라서 세상 것인 돈이나 명예 등을 좋아하면 그만큼 하느님은 좋아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두려워하라고 하시는 이유는 세상 것을 잃는 두려움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느님만을 두려워합시다. 하느님만을 바랍시다. 그 두려움을 청합시다. 그러면 이 세상이 주는 고통에서 해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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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성인:성 요한 드 브레뵈프 사제와 동료 순교자
캐나다와 미국에서 후론족과 이로케족 인디언들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파하고 있던 8명의 예수회 회원들은
1642년과 1649년 사이에 잔인한 고초를 당한 후 순교했다.
그중에 이사악 조게스는 1647년 10월 18일에 순교했고 요한 드브레뵈프는 1648년 3월 16일에 순교했다.
프랑스 노르망디의 콩데-쉬르-비르에서 태어난 요한 드브레뵈프은 카앙 근교에서 대학교를 다녔지만, 그의 양친은 가나한 농부였다.
그는 1617년에 루앙의 예수회에 입회했고, 1622년에 사제로 서품되자 지원하여 캐나다 선교사로 길을 떠난 후로는 캐나다와 미국에서 후론족과 이로케족 인디언들 사이에서 24년동안이나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파한 유명한 선교사가 되었다.
그의 고초는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1629년, 영국인들이 퀘백을 점령하고 예수회원들을 몰아낼때 그도 쫓겨 나자 하는 수 없이 프랑스로 돌아왔으나, 1633년에 재차 선교사의 길에 올랐다.
1637년, 천연두가 만연되어 수천 명의 인디언들이 죽게 되자,선교사들은 재앙을 몰고 온 악마라고 간주되어 그 부족의 마술사들로부터 큰 곤욕을 치루었지만, 그는 1640년까지 인디언들과 함께 거주했다
그는 잠시 퀘백으로 갔다가 다시 인디언 부락으로 왔을 때 프랑스의 가장 적대적이었던 이로케족 인디언들로부터 동료 8명과 함게 체포당하여 1642년과 1649년 사이에 잔인한 고초를 당한 후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가 보인 용기와 성덕은 수많은 인디언들을 감동시켜 그가 죽고난 후에도 약 7천명의 인디언 개종자들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그는 후론족의 사전과 교리서를 만들었다.
그중에 이사악 조게스는 1647년 10월 18일에 순교했고 요한 드 브레뵈프는 1648년 3월 16일에 순교했다.
그들은 1930년에 시성되었다.
그들의 신앙과 영웅적인 삶은 북아메리카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믿음을 깊이 심어 주었으며, 북아메리카 교회는 순교자들이 흘린 피로써 일어난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바오로 사제
San Paolo della Croce Sacerdote
St.Paul of the Cross
St. Paulus a Cruce, C
3 January 1694 at Ovada, Piedmont (northern Italy) as Paolo Francesco Danei
-18 October 1775 at Rome, Italy
Canonized:1867 by Pope Pius IX
이탈리아의 오바다 태생인 바오로 프란치스꼬 다네이는 부모의 신앙 유산을 물려받은 탓인지, 15세 때에 이미 까스텔라조의 자기 집에서 엄격한 고행과 보속을 행하였던 것이다.
1714년, 그는 터키인들과 사우는 베니스군에 입대하였으나, 기도와 보속생활에 이끌려 명예 제대를 하고 귀향하였다.
그는 몇해를 은거하던 중, 1720년에 예수의 성명과 흰 십자가가 그려진 고난의 뺏지를 검은 옷에 다신 성모님의 환시를 보았는데,
(성모님께서 발현하셔서 검은 복장의 가슴에 심장이 그려져 있고 그 가운데 십자가와 예수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수도복을 보여 주셨다고한다. 고통의 어머니 마리아의 신심이 깊었음.)
이때 그분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설교하는 수도회 창설을 명하셨다고 한다.
그의 환시가 올바른 사실임을 인정한 알레산드리아의 주교로부터 수도회 창설에 관한 허가를 받게 된 바오로는 40일간의 피정을 통하여 회칙을 초안하였다.
그는 자기 동생인 요한 밥띠스따와 함께 로마로 가서 교황청의 허가를 신청했으나, 처음에는 거절당하였지만,
1725년의 방문에서는 교황 베네딕또 13세로부터 수련자를 받아도 좋다는 허가를 받고, 1727년에는 자신이 사제로 서품(교황 베네딕도 14세에게)되었다.
그들은 몬떼 아르젠따리오에 수도원을 세웠는데, 처음에는 규칙이 너무 엄격했던 탓으로 많은 수련자를 잃었다고 한다.
1737년에는 첫 수도원의 문을 열였고, 1741년에는 교황 베네딕또 14세로부터 개정 회칙을 승인받고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한 십자가와 고난의 맨발 성직 수도회"(예수 고난회)가 전세계로 뻗어나가기 시작하였다.
바오로는 자신의 뜻과는 달리 초대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탈리아 전역을 누비며 선교 여행을 하였고, 그의 설교는 놀라운 힘을 발휘하여 만인의 심금을 울렸다.
또한 그는 초자연적인 은혜로써 축복을 내렸고, 치유의 기적과 원거리에서 동시에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기적 등이 나타났다.
그는 당대 최고의 설교가였다. 사도적 열성과 엄격한 극기에서 뛰어났다.
고난회의 최종 승인을 1769년, 교황 끌레멘스 14세로부터 받았다. 또한 그의 노력에 의하여 고난회 수녀들이 꼬르네또에 첫 수도원을 갖게 된 것이다.
3년 동안의 병고로 고생하시다가 로마에서 1775년 10월 18일 세상을 떠났다.1867년 6월 28일 비오 9세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바오로 프란치스코는 신비가이며 선교사인 동시에 영적 지도자로서 그리고 예수 고난회의 창설자로 알려져 있다.
16명의 형제들 가운데 두 번째인 그는 제노아에 있는 기숙 학교에서 하던 공부를 중지하고 집안일을 도와야만 했다.
지도자적 성격을 타고 난데다가 부드럽고도 강한 의지를 소유한 바오로는 그 당시 사람들로부터 쉽게 신뢰를 받게 되었다.
바오로의 전기 작가는 그가 다른 사람들의 신체적,영적 빈곤에 대해서도 진심으로 강한 연민을 지녔었다고 전한다.
그는 얼마 동안의 은수자 생활을 마친 뒤에 로마에서 고난회를 세웠는데, 이 회는 본당에서 신자들에게 강론을 하거나 십자가의 신비를 새롭게 하는 데 헌신했다.
무엇보다도 우선 바오로는 십자가의 신비가이다.
어떤 전기 작가는 그에게 그리스도의 수난보다 더 적합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바오로는 자기 회의 첫째 가는 사도직인 말씀의 설교에 완벽한 모범을 보였다.
그의 본당 선교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을 십자가의 역설 안에서 대면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대면은 그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활 안에서 그리스도의 구원 활동과 계속적인 수난이 십자가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이러한 십자가의 의존에 도달하기 위하여 바오로는 행렬과 가두설교,철야기도,참회 예식,희생,찬미가,기도
그리고 때로는 설교 그 자체까지 평신도들이 능동적인 자세로 받아들이는 방법을 발전시켰다.
바오로는 1775년 10월 18일, 로마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1867년 6월 28일 비오 9세에 의하여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