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레터 93]“줬으면 그만이지”라는 진주晉州의 ‘작은 시민’
MBC 설특집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를 보신 분들이 많으리라. 이런 프로만큼은 ‘본방 사수’를 했어야 했는데, 사전에 알지 못했다. 정읍에 사시는 지인형님이 “우천, 유튜브에서 ‘어른 김장하’ 검색해봐”라는 전화를 주지 않으셨다면, 나는 ‘바보’가 되었을 것을 생각하니 아찔하다. 유튜브 1, 2부를 본 소감을 적기도 부끄럽게, 진주의 한 이름없는 ‘양식良識 있는 의인義人’을 알게 되었다. 보자마자 인터넷으로 주문한 책 『줬으면 그만이지-아름다운 부자 김장하 취재기』(김주완 지음, 피플파워 2023년 1월 펴냄, 359쪽, 2만원)를 서너 시간만에 정독, 완독했다. 2023년 새해가 밝은지 금세 한 달이 흘렀다. 무엇을 설계하고, 무엇을 실천할지 정할 사이도 없이, 2월이다. 진정 세월은 60대 후반이니 67km로 내달리는 것인가.
먼저 ‘어른 김장하’가 도대체 누구인지 요약해 보자. 1944년 경남 사천에서 태어나 자란 그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 진학을 하지 못했다. 할아버지 소개로 들어간 한약방에서 3년여 점원으로 일하다 19살에 한약업사(한약종상) 시험에 합격했으나, 20세가 안돼 다음해 면허를 발급받았다. 그해, 약관弱冠의 나이에 한약방을 열었으며, 작년 5월말 폐업할 때까지 두 번 이전하며 59년 동안 ‘한우물’을 팠다. 진주 남성당한약방은 번호표를 날아줄만큼 환자들이 줄을 섰다. 41세때 명신고등학교를 세워 궤도에 올려놓고 7년만에 학교를 국가에 기증했다. 당시 시가로만 110억을 훌쩍 넘었다고 해 지역에서 화제가 되었다. 문제는 그게 다가 아니다. “아픈 사람들로 인해 번 돈은 개인의 돈이 될 수 없으니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믿기지 않는 ‘철학’을 20대 중반부터 실천했다는 것이다. 주변에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의 등록금을 도맡았다. 현재까지 드러난 ‘김장하 장학생’만 1천명이 넘는다한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런 미담美談을, 이렇게 숭고한 선행善行을 한번도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 그 어떤 상도 받지 않았다. 믿겨지는가? 이제껏 신문 방송에 인터뷰 한 줄이 나오지 않았다는 게. 거머리같은 기자들의 취재욕을 어떻게 뿌리쳤을까? 말 그대로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했다. 생불生佛, 살아있는 부처, 살아있는 예수에 다름아니었다.
언론인 김주하가 입체적으로 취재한 이 책의 기록을 보면, 사례는 넘치고 또 넘친다. 대법관이 된 장학생들은 ‘몰래생일’에서 축사를 하며 울먹였다. 결론은 “어떻게든지 선생님을 닮으려 평생 노력하겠다”는 것. 중학교 때부터 아예 집에서 데리고 대학까지 가르친 한 여학생은 대학교수가 되었으나, 운동권으로 감옥살이를 했다. 출감한 후 “선생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죄송하다”고 하자 “그 어떤 것도 기대한 적 없다. 네가 한 일도 애국이고 숭고한 일”이라고 짧게 말했다 한다.
이제껏 듣고 아는 의인, 현인, ‘성인聖人’들과 비교할 수 없는 감동, 감명, 아니 감동, 감명이란 단어를 쓸 수 없을 정도인 것을 알았다. 우리는 살신성인殺身成仁했던 테레사 수녀도, 이태석신부, 슈바이처 같은 분들의 삶과 사상도 조금은 알고 있지만, 이런 분은 없었던 듯하다. 전대미문, 금시초문. 불가사의이다. 그 말이 어울릴까.
평생 한약방 낡은 의자만을 지키며 환자들을 돌봤다. 거기에서 번 무수한 돈을, 아주 가치있는, 의미있는 일에만 아낌없이 썼다는 것이다. 일례를 또 들어보자. 형평사衡平社운동을 아실 것이다. 한 백정의 억울한 죽음에 분노(미국에서 경찰의 무자비한 폭행으로 억울하게 죽은 흑인의 죽음에 항의하는 거센 시위와 같은 성격)한 양반출신 강상호 선생이 백정출신들과 함께 1923년 4월 <형평사衡平社>를 조직하여 전방위적으로 대항에 나섰다. 형평사는 ‘저울처럼 평등한 모임’이라는 뜻이다. 그들의 창립 발기문을 보라, 지금 소리내어 읽어도 가슴이 뛴다. “우리의 계급을 타파하고,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고, 참다운 인간이 되는 것을 기약한다. 전국의 형평계급아, 단결하라” 그들은 서부 경남의 진주라는 지역에서 신분 타파와 여성 등의 인권해방 깃발을 높이 들었다. 인내천人乃天사상에 다름 아니었다. 1992년 한약방 주인은 형평운동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선구자인 강상호선생 묘비를 세우는데 소리소문없이 앞장섰다. 비문 뒷면에 이름을 밝히지 않았던 ‘작은 시민’이 수십년 만에 그분임이 밝혀졌다. 김주완 기자의 '촉'이 아니었다면, 자칫 무덤까지 가져갔을 비밀이었다.
오죽하면 그렇게 어디에도 나서지 않던 그분이 한겨레에 당신 이름으로 칼럼을 썼을까.(1993년 4월 25일자). 그 칼럼의 결론부분을 보자. “우리는 지금 개혁과 민주화의 시대에 살고 있다. 진정한 개혁과 민주화를 앞당겨 이루기 위해서는 모든 일에 형평정신, 곧 평등사상을 바탕삼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형평사’는 지금 없어도 형평운동은 계속되어야 한다. 완전한 평등을 추구해온 발자취가 곧 인류의 역사가 아니던가. ‘형평운동 70주년 기념사업회’가 형평정신을 오늘에 되살리고 북돋워서, 우리 사회를 좀더 따뜻하고 정의롭게 만드는 시민인권운동단체로서 다시 출발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로 끝맺고 있다.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으신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대야말로 ‘냉혈한冷血漢’이 아닐까.
아하, 알겠다. 그분의 뜻과 철학을, 어렴풋이 보인다. 그분이 진주주환경운동연합 고문,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 후원회장을,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진주지부 이사장을, 진주문화사랑모임 부회장을, 진주오광대보존회 이사장을, 지리산생명연대 공동대표 및 상임의장을 왜 맡은 것인지. 그리고도 항상 기념사진 몇 장을 보면 한 구석탱이에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도, 그건 ‘겸손’이 아니고 ‘겸손 그 자체’였다. 말 없이, 글 없이 ‘ 그림자 역할’을 자처했던 것을. 오죽하면 2019년 진주지역 시민사회단체에서 ‘김장하 75회 생일잔치’를 쉬쉬쉬하며 깜짝 파티를 해주었을까. ‘진주가을문예’를 아시는가? <진주신문> 창간주주이자 이사였다. 물론 <한겨레신문> 창간주주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 분이었다. 재단법인 남성문화재단을 설립하여 이사장이 된 것도, 각종 뜻있는 시민단체 후원을 위한 것이었음을.
나하곤 아무 상관도 없은 이야기일까. 그럼에도 나는 왜 한없이 고맙게 느끼며, 나 자신이 부끄러운 것일까. 이분의 다큐멘터리를 소개해준 지인형님은 "그분을 꼭 만나 뵙고 싶다"고 하셨다.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어쩌다 뵙는 기회가 있다면 그 자리에서 넙죽 큰절을 올리겠지만, 나는 이 취재기를 쓴 김주완 기자만큼은 기회가 된다면 만나보고 싶다. 장학금을 지원해주지 않았는데도 김장하선생을 ‘인생멘토’로 고맙게 생각하며 파스타집을 차린 쉐프의 집(사천 비란치아)에서 김기자와 몇 마디라고 나눴으면 좋겠다. 부끄럽지만, 지금껏 진주와 촉성루에도 가보지 못했다. 올 봄이 가기 전에 꼭 가볼 작정이다. 폐업한 남성당한약방도 ‘성지 순례’처럼 수소문해 멀리서라도 바라보고 올 것이다. 그것이 내가 할 일인 듯하다.
아아, 어른 김장하. 만세다! 예전에 고려나 조선은 중국의 ‘제후국’이어서 ‘만세萬歲 만세萬歲 만만세萬萬歲’라고 할 수 없었다. 단지 ‘천세千歲 천세千歲 천천세千千歲’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우리의 임금 이름에도 ‘조祖’나 ‘종宗’을 쓸 수 없어 ‘00왕’이라고 했다. 조선조 ‘조와 종’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외교의 승리’였던 것이다. 부디 수복강녕하시길 빈다. 그분 특유의 '종종걸음'을 보고 싶다. 평생 걸어서, 아니면 자전거로 출퇴근한 60년은 그대로 '역사'가 되었다. 어찌 자동차를 살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을까. 이 시대 최고의 어른으로부터 ‘진주정신晉州精神’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그분이 강조하는 '진주정신은 무엇인가? 이 어른은 한약방을 하면서도 처음부터 줄기차게 ‘진주정신’에 대해 천착하여, 논문을 200자 원고지 75장으로 정리해놓았다. 아아, 이럴 수가?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라더니, 인생도처에 이런 어른같은 상수가 있다니 놀랍다. 경이로웠다. 그리고 고마웠다. 다큐를 누워서 보다가 벌떡 일어나 허리를 곧추세우고 본 것은, 내 나름의 경의敬意를 갖추고 싶어서이다.
이 땅에 성인聖人, 성자聖者와 같이 왔다가 가신 분들은 많다. 한 살림운동을 펼친 무위당 장일순, <혼자만 살면 무슨 재민겨>라고 하던 전우익, <강아지똥>의 권정생 선생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분은 그 많은 사람들을 몽땅 합해 놓은 듯했다. 선행, 일일선,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연말만 되면 전주 노송동 주민센터에 이름없이 나타난다는 ‘기부천사’도 있다. 이런 분들 때문에 세상이 별처럼 아름다운 것이리라. 김장하선생의 철학을 적나라하게 적시하며 졸문을 마친다.
어느 스님이 눈보라가 치는 어느 추운 겨울날, 고개마루를 넘어서 이웃마을로 가고 있었다한다. 저쪽 고개에서 넘어오는 거지를 만났는데, 당장이라도 얼어죽을 듯했다. 저대로 두면 죽을 것같아 가던 발길을 멈추고 외투를 벗어줬다. 그런데 그 걸인이 당연한 듯이 외투를 받고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그냥 가더라는 것이다. 누군들 기분이 좋겠는가. 솔직히 부처나 예수도 인상을 찌푸릴 일이 아닌가. 그래서 “여보시오. 인사 한마디 못하시오?”했더니, 그 걸인 하는 말이 걸짝이다. “줬으면 그만이지. 뭘 칭찬을 되돌려 받겠다는 것이오?”그제서야 스님이 무릎을 딱 치며 탄식을 한 말을 들어보자. “아, 내가 아직 멀었구나. 줬으면 그만인 것을 무슨 인사를 받으려 했나. 되레 내가 공덕을 쌓을 기회를 저 사람이 준 것이니 내가 고맙다고 인사를 해야 맞지.” 이 정도는 되어야 최소한 ‘선문답先問答’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흐흐.
첫댓글 나는 이런 유전자가 존경스럽다.
첫째. 그런 부를 이룰 수 있는 복과 능력을 존경한다.
둘째. 그런 "마음을 내는" 사람(유전자)를 존경한다.
반대로 본부장(본인,부인,장모)같은 유형의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은 어떤 마음이 들까?
"저런 미친 놈! 그 좋은 돈을 옹그려 쥐고 폼 잡으며 살지 않고 저렇게 헤프게 쓴다고? 또라이 아냐?" 라고 비아냥거리지 않을까?
마치 (내가 너보다 못나서 가만이 있는 줄 아냐?면서) 독립운동가를 비아냥거리듯....
(아니면 다른 반론을 구합니다!)
세째: 그런 도덕적인 정의로운 생각을 "실천하는 용기"를 존경한다.
갖은 고문을 견디며 양심을 행동으로 옮겼던 독립운동가의 "용기"를 존경하듯이....
왜? 나는 그런 용기가 없으니까....ㅠ
반대로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가진 사람을 (점잖은 양) 폄하하거나 시기하는 유전자도 있을 것이고....
나무아멘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