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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5
#룻
아마도 룻기는 사사 옷니엘이 죽은후, 모압왕 에글론이 왕성하던 18년 중간부터 사사 에훗이 다스리던 시기로 넘어가던 어느 기간이었을것 같다.
#신명기 #Deuteronomy 5:21
21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집이나 그의 밭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네 이웃의 모든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약혼식도 결혼식도 하지 않았어도 당사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주변에서 보더라도 둘이 결혼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연인사이인데도 앞의 일은 모르는 것이고 둘 사이에는 아무런 법적 관계가 없다고 하면서 둘 중 한 명에게 끊임없이 구애를 하여 갈등하게 하거나 갈라놓으려 하는 행위는 이웃의 아내나 남편을 탐내는 죄이다. 결혼할 것도 아니면서 두 남녀가 서로의 육체를 탐내는 것은 남자는 상대녀의 미래의 남편에게, 여자는 상대남의 미래의 아내에게 죄를 짓는 것이다. 자기 연인을 다른 연인과 비교하거나 자기 배우자를 다른 배우자와 비교하는 것은 타인의 아내나 남편을 탐내는 죄이다. 자기 연인이나 배우자가 없는데서 친한 사람들끼리 모여 자기 연인이나 배우자를 험담하고 흉보는 것은 타인의 아내나 남편을 탐내는 죄이다. 자기 연인이나 배우자의 인격과 성품이 아니라 외모와 조건을 가지고 불평불만하는 것은 타인의 아내나 남편을 탐내는 죄이다. 한때 연인이었거나 배우자였던 사람이 자기와 헤어지고 나서 다른 연인이나 배우자를 만나는 것에 분노를 참지 못하고 기회를 봐서 그 사람을 유혹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아내나 남편을 탐내는 죄이다. 자기 연인이나 배우자의 장점을 지나치게 자랑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로 자기 아내나 남편을 탐내는 죄를 유발하는 것이다. 대체로 남자는 음란한 정욕 때문에 타인의 아내를 탐내게 되고 여자는 안목의 정욕 즉 허영 때문에 타인의 남편을 탐내게 된다. 이 불법적인 탐심을 억제하지 않으면 내 안에서 그 탐심이 자라나게 되어 결국 다른 사람의 아내나 남편과 외도와 불륜을 저지르게 되어 자기는 물론이거니와 타인의 가정도 파탄나게 하고 심지어 누군가의 생명을 앗아가기까지 나아가게 된다.
부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은 단순히 좋은 것을 잘 먹고 잘 살며 누리기 위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나보다 더 잘 버는 부자에 대한 질투에 기인한다. 그래서 대체적으로 남들보다 부유한 자도 자기와 비슷한 수준의 지인들과 끊임없이 비교하고 더 벌려고 애를 쓴다. 그래서 더 큰 부자가 되어도 거기서 만족하지 못하는데 그 수준의 다른 부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계속 평생을 끊임없이 돈버는데 바치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타인의 부유함을 부러워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시기하며 질투하게 되면 그 사람의 부를 어떻게 자기 것으로 만들까 하는 불법적인 모의를 하게 된다. 그래서 그 사람의 취약점을 면밀히 관찰해서 그 약점을 이용해서 그사람의 재물을 자기 것으로 삼기도 한다. 어떤 자는 자기가 마치 그 부자인 것처럼 위장해서 여러 사람들을 속이고 그렇게 속인 사람들에게서 다른 물질의 유익을 구하기도 한다. 이것이 나중에는 자기 자신을 그 부자라고 여기게 되는 상황으로 가기도 하는데 이를 가리켜 흔히 '리플리 증후군'이라 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용광로 같은 사교육 열기는 단순히 부모들이 자녀들의 독립을 위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다른 부모들의 자녀보다 조금이라도 더 우월해야 한다는 비교의식에 기인한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녀가 나중에 세상에서 남들보다 더 유리한 위치에 있게 하기 위해서 어렸을 때부터 온갖 사교육으로 시간을 보내게 하고 주위에서 자녀를 위해 뭔가를 한다고 하면 굳이 필요하지도 않고 유익될 것이 없어도 남들이 하니까 무리해서라도 자녀에게 시킨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자녀를 자녀로 대하지 않고 하나의 관리 대상으로 취급하게 되어 부모자식으로서의 인격적 관계가 무너지게 된다. 부모가 하라는 것을 자녀가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면 그것 때문에 자녀에게 대놓고 실망하고 더이상 사랑스러운 자녀가 아니라 애물단지 짐덩어리 정도로 취급하게 된다. 그래서 자녀가 아무리 좋은 성적을 받아와도 칭찬해주기는 커녕 틀린 문제에 집착하여 타박을 주기도 하고, 남들보다 뛰어나지 않은 자녀는 가정의 행복을 방해하는 존재라고 생각해서 그 자녀로 절망하게 하고 부모가 보는 앞에서 투신자살하게도 한다.
학교폭력의 이유 중 하나는 가해자가 피해자의 외모나 조건이나 재능 등을 질시하는 것 때문이다. 피해자가 가해자보다 선생들에게 더 관심과 칭찬을 받거나 성적이 좋거나 인기가 있거나 하면 가해자는 그것이 꼴보기 싫어서 무리를 이뤄서 피해자를 괴롭힐 뿐만 아니라 피해자와 친하게 지내는 다른 학생들에게도 폭력을 저지름으로써 피해자를 철저히 고립시킨다. 자기는 피해자보다 여러가지로 더 풍족하면서도 피해자가 가진 몇 안되는 좋은 것을 탐내는 것이 마치 한 부자가 자기 손님을 대접하려고 옆집의 가난한 이웃이 딸처럼 애지중지하는 작은 암양 새끼를 빼앗아 잡은 것과도 같다. 그 대가는 먼 훗날 자기 아들에게 반역을 당하고 열 명의 후궁들이 아들에게 강간을 당하는 것으로 보복되었듯이, 오늘날 과거에 학교폭력을 저지른 유명인사들이 이제서야 피해자들의 폭로로 인해서 전국적인 공분을 사고 자기 분야에서 무고한 자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고 자기는 매장되는 것으로 보복되고 있는데 이 또한 하나님의 갚으시는 섭리인 것이다.
#20200305
#창세기 #Genesis 제 42 장
요셉의 형들이 애굽으로 가다
1 그 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바라보고만 있느냐
2 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하매
3 요셉의 형 열 사람이 애굽에서 곡식을 사려고 내려갔으나
4 야곱이 요셉의 아우 베냐민은 그의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생각에 재난이 그에게 미칠까 두려워함이었더라
5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양식 사러 간 자 중에 있으니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있음이라
극심한 기근은 애굽 뿐만 아니라 주변 모든 지역에 광범위하게 펼쳐졌던 것 같다. 이는 다르게 생각해보면 7년의 풍년 또한 애굽과 모든 지역에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애굽 백성들 조차도 7년의 풍년기를 허랑방탕하게 보낸만큼 그 외의 다른 지역 족속들은 더욱 그러하였을 것은 명약관화하다. 하나님께서 보편적으로나 특별하게나 부어주신 은총과 은사들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당연한 자기만의 소유나 능력으로 치부하기 마련이며 이는 교회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과 소유들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쌓아 비축하지 않고 육신의 정욕을 위해 허랑방탕하게 된다면 언젠가는 다른 이의 선에 구걸하거나 돼지들이나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워야 할 공산이 크다. 적어도 풍년이냐 흉년이냐를 판단하는 것은 한 해가 흘러봐야 알 수가 있다. 야곱의 가족들이 요셉과 상봉하여 고센 땅에 머물게 된 때는 흉년이 2년 지난 때였으므로, 아들들이 야곱의 명을 따라 애굽으로 곡식을 사러 간 때는 아마도 흉년 1년차였을 것이다.
여기서 야곱은 하나님께서 새로 주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대신에 옛 이름인 야곱으로 불리운다. 이는 어쩌면 야곱이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은 후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나아가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을 놓아버리기까지 할 정도로 극심히 절망하며 퇴보한 상태였음을 은연중에 암시하는 것 같다. 그러한 야곱의 신앙의 퇴보는 곡식을 사러 보내는 아들들 중에서 베냐민만을 제외한 것에서도 볼 수 있다. 야곱은 분명히 요셉의 꿈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하나님께서 요셉에 대해 무언가 큰 뜻과 계획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야곱은 아들들에게서 요셉이 들짐승에 잡아먹혀 죽었다는 거짓말을 듣고서는 그 꿈의 내용도 잊어버리고 꿈을 통한 하나님을 믿는 믿음도 사라지게 된 것 같다. 그래서 야곱은 라헬에게서 얻은 베냐민이라도 어떻게든 보호하기 위해서 어쩌면 요셉보다 더 과잉보호를 했던 것 같다. 물론 한치 앞을 모르는 연약한 인간으로서는 불명확한 꿈보다는 눈에 확연한 증거를 믿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밤새 힘으로 겨뤄 얻어낸 축복의 이름인 이스라엘에는 전혀 걸맞지 않은 불신앙의 행보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라 해서 각자의 삶에서 겪는 온갖 희로애락애오욕의 감정에 무덤덤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 감정을 단지 세속인들 수준에서만 표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도리어 신자가 느끼는 수많은 감정 너머에 계신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바라보고 수준 높은 신앙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6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7 요셉이 보고 형들인 줄을 아나 모르는 체하고 엄한 소리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곡물을 사려고 가나안에서 왔나이다
8 요셉은 그의 형들을 알아보았으나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더라
9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
요셉이 자기를 죽이려 했다가 노예로 팔아버린 이복 형들을 보았을 때 어떠한 심정이었을지는 사실 당사자가 아니면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니 요셉이 그 오만가지 복잡미묘한 자기 감정들, 그 중에서도 특히 복수심과 증오심을 억제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가 지난 날 어렸을 때 꾸었던 두 개의 꿈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두 개의 꿈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노예와 죄수로까지 비천하게 낮아졌다가 하나님께서 주신 바로의 꿈 해몽으로 애굽의 2인자 위치까지 높아져서 꿈대로 형들의 절을 받게 된 그 모든 상황이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형들이 자기에게 행한 악을 그대로 되돌려 주지 않고 그저 밀당하듯이 형들의 마음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이러한 요셉의 여유는 분명 오늘날 신자들이 우리들을 까닭없이 핍박하는 이들을 대할 때 갖춰야 할 필수적 요소일 것이다(안타깝게도 오늘날 대한민국 교회는 도리어 주위를 까닭없이 핍박하는 존재로 전락하긴 했지만..). 설령 우리가 지금은 핍박자들보다 이 땅에서는 높지 않을지라도 그 핍박자들을 너그럽게 대할 수 있는 것은 최종적으로 우리에게는 하늘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 꿈과 같은 소망이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져 하늘의 상급을 받고 높은 위치에 오르게 될 것이므로 지금 잠깐 이 땅에서 당하는 핍박자들의 핍박을 별 것 아닌 것으로 털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10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아니니이다 당신의 종들은 곡물을 사러 왔나이다
11 우리는 다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 확실한 자들이니 당신의 종들은 정탐꾼이 아니니이다
12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아니라 너희가 이 나라의 틈을 엿보러 왔느니라
13 그들이 이르되 당신의 종 우리들은 열두 형제로서 가나안 땅 한 사람의 아들들이라 막내 아들은 오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없어졌나이다
14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한 말이 이것이니라
15 너희는 이같이 하여 너희 진실함을 증명할 것이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너희 막내 아우가 여기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여기서 나가지 못하리라
16 너희 중 하나를 보내어 너희 아우를 데려오게 하고 너희는 갇히어 있으라 내가 너희의 말을 시험하여 너희 중에 진실이 있는지 보리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는 과연 정탐꾼이니라 하고
17 그들을 다 함께 삼 일을 가두었더라
18 사흘 만에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 너희는 이같이 하여 생명을 보전하라
19 너희가 확실한 자들이면 너희 형제 중 한 사람만 그 옥에 갇히게 하고 너희는 곡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안의 굶주림을 구하고
20 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그러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니 그들이 그대로 하니라
21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22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도다 하니
23 그들 사이에 통역을 세웠으므로 그들은 요셉이 듣는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
24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끌어내어 그들의 눈 앞에서 결박하고
25 명하여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각 사람의 돈은 그의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하니 그대로 행하였더라
요셉은 형들과 티키타카를 하면서 처음에는 한명만 보내고 모두 가두겠다고 했으나 3일 후에 그들을 옥에서 꺼낸 후에는 반대로 한 명만 남기고 모두 보내겠다고 선처(?)를 베푼다. 이에 형들은 감금된 3일 동안에 자기들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지 곰곰히 생각했을 것이고 마침내 20년 전 요셉을 죽이려 하고 팔아버린 죄를 기억하게 되었다. 그들이 그 죄를 스스로 지목하여 잘못을 인정한 것은 그들에게 용서와 화해의 시작이 되는 매우 감사한 일이었다. 만약에 그들이 여전히 자기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억울해했다면 요셉의 뺑뺑이는 더욱 길어졌을지도 모른다.
여기서도 르우벤은 여전히 맏형으로서의 역할을 안하고 있다. 물론 객관적으로는 자기는 요셉을 구하려 했으나 동생들이 이를 거역하고 팔아버린 것이 맞지만, 적어도 이 상황에서는 동생들을 질책하고 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감금되어 남겠다고 했어야 했다. 그러나 르우벤은 동생 시므온이 결박되는 것을 보고도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고 두고만 본다.
요셉의 형들이 가나안으로 돌아오다
26 그들이 곡식을 나귀에 싣고 그 곳을 떠났더니
27 한 사람이 여관에서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자루를 풀고 본즉 그 돈이 자루 아귀에 있는지라
28 그가 그 형제에게 말하되 내 돈을 도로 넣었도다 보라 자루 속에 있도다 이에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 하고
요셉은 형들에게 호의를 베풀었어도 형들은 자기들의 지은 죄가 있어서 그 호의를 도리어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징벌의 표징으로 여긴다. 그래도 이들처럼 호의를 죄를 깨닫게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나마 축복이다. 버림받은 자들은 아무리 어르고 달래고 혼내도 자기 잘못을 알지도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그런 자들은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영원한 멸망을 당하게 된다. 담임목사로서 8년이나 목회(?)한 교회에 치명적인 해를 끼쳤으면서도 회개도 안하고 인정도 안하고 마지막까지 추하게 교회를 버리고 떠난 자의 결말은 이만희가 당할 최후와 같다.
29 그들이 가나안 땅에 돌아와 그들의 아버지 야곱에게 이르러 그들이 당한 일을 자세히 알리어 아뢰되
30 그 땅의 주인인 그 사람이 엄하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우리를 그 땅에 대한 정탐꾼으로 여기기로
31 우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는 확실한 자들이요 정탐꾼이 아니니이다
32 우리는 한 아버지의 아들 열두 형제로서 하나는 없어지고 막내는 오늘 우리 아버지와 함께 가나안 땅에 있나이다 하였더니
33 그 땅의 주인인 그 사람이 우리에게 이르되 내가 이같이 하여 너희가 확실한 자들임을 알리니 너희 형제 중의 하나를 내게 두고 양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안의 굶주림을 구하고
34 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려 오라 그러면 너희가 정탐꾼이 아니요 확실한 자들임을 내가 알고 너희 형제를 너희에게 돌리리니 너희가 이 나라에서 무역하리라 하더이다 하고
35 각기 자루를 쏟고 본즉 각 사람의 돈뭉치가 그 자루 속에 있는지라 그들과 그들의 아버지가 돈뭉치를 보고 다 두려워하더니
36 그들의 아버지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37 르우벤이 그의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내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 손에 맡기소서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리이다
38 야곱이 이르되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만일 너희가 가는 길에서 재난이 그에게 미치면 너희가 내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
그들은 비록 애굽에서 양식을 얻어 왔어도 마음 편히 그것을 먹을 수가 없었다. 거기에 야곱은 시므온이 감금되었다는 얘기와 베냐민을 동행시켜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더욱 절망하여 거의 신앙을 잃을 위기까지 가게 되었다. 장자 르우벤은 자기 두 아들을 담보로 하여 베냐민을 반드시 지키겠다고는 했지만 이는 그저 공허한 호언장담에 다름 아니었다. 그는 단지 자기 서모 빌하와 간음함으로써 상실한 아버지의 신뢰를 어떻게든 되찾고 싶었을 뿐이었다. 야곱 또한 그런 르우벤의 말을 믿을 수가 없어서 지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