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 우리가 '풀잎'하고 그를 부를 때는, 우리들의 입 속에서는 푸른 휘파람 소리가 나거든요.
바람이 부는 날의 풀잎들은 왜 저리 몸을 흔들까요. 소나기가 오는 날의 풀잎들은 왜 저리 또 몸을 통통거릴까요.
그러나,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 우리가 '풀잎', '풀잎'하고 자꾸 부르면, 우리의 몸과 맘도 어느덧 푸른 풀잎이 돼 버리거든요.
+ 풀잎 (이준관·시인, 1949-)
나는 풀잎을 사랑한다. 뿌리까지 뽑으려는 바람의 기세에도 눈썹 치켜올리는 그 서릿발같은 마음 하나로 참고 버티는
풀잎을 나는 사랑한다.
빗물에 휩쓸려간 자국도 푸르게 메워내고 겨울에 얼어죽는 부분도 입김을 불어넣고 뺨을 비벼주어 다시 푸르게 살려내는
풀잎을 나는 사랑한다.
아침이면 이슬을 뿜어 올려 그 이슬 속을 새소리 왁자하게 밀려나오게 하고 착하디착한 햇빛을 받으러 하늘로 올려보는 조그만 손 풀잎을 나는 사랑한다.
가만히 허리를 일으켜 세워주면 날아가고 싶어 날아가고 싶어 바람에 온 몸을 문질러 보는 초록빛 새
풀잎을 나는 사랑한다.
+ 풀잎은 (공재동·시인, 1949-)
풀잎은 씨앗이 모진 추위를 견디라고 딱딱한 껍질을 덮어 주지만
봄이 오면 새싹이 될 씨눈 하나를 씨앗 속에 몰래 감추어둔다.
풀잎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작고 부드러운 것만이 딱딱한 땅을 헤치고 올라와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 풀잎이 아름다운 이유 (김무화·시인)
풀잎이 아름다운 이유는 바람에 흔들리기 때문이다. 풀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은 바람의 향기를 알았기 때문이다.
바람 앞에 고개 숙일 줄 아는 풀잎은 바람의 향기를 사랑할 뿐 절대 바람에 꺾이지 않는다. 풀잎이 아름다운 것은 바람의 향기를 사랑하고도 그 바람에 꺾이지 않기 때문이다.
+ 예쁘게 살아가는 풀잎이 되어요 (공광규·시인, 1960-)
우리 아름답게 일어서는 풀잎이 되어요 바람찬 날 강 언덕 아래 웅크려 세월의 모가지 바람 앞에 내밀고 서럽게 울다가도 때로는 강물 소리 듣고 모질게 일어서는 풀잎이 되어요 누가 우리들 허리 꼭꼭 밟고 가도 넘어진 김에 한 번 더 서럽게 껴안고 일어서는 아니면 내 한 몸 꺾어 겨울의 양식 되었다가 다시 새 봄에 푸른 칼날로 서는 우리 예쁘게 살아가는 풀잎이 되어요
+ 셋방살이 (정갑숙·아동문학가, 1963-)
풀잎이 전세를 놓았다
풀벌레가 전세를 얻었다
풀잎은 전세 값으로 노래를 받아 날마다 기뻤다
풀벌레는 전세 값으로 노래를 주어 날마다 즐거웠다.
+ 풀잎 끝에 이슬 (이승훈·시인, 1942-)
풀잎 끝에 이슬 풀잎 끝에 바람 풀잎 끝에 햇살 오오 풀잎 끝에 나 풀잎 끝에 당신 우린 모두 풀잎 끝에 있네 잠시 반짝이네 잠시 속에 해가 나고 바람 불고 이슬 사라지고 그러나 풀잎 끝 에 풀잎 끝에 한 세상이 빛나네 어느 세월에나 알리요?
+ 비에 젖은 풀잎을 (나태주·시인, 1945-)
비에 젖은 풀잎을 밟고 오시는 당신의 맨발 빗소리와 빗소리 사이를 빠져나가는 당신의 나신 종아리에 핏빛 여린 생채기 진다. 가슴팍에 예쁜 핏빛 무늬가 선다.
+ 풀잎으로 나무로 서서 (이성선·시인, 1941-2001)
내가 풀잎으로 서서 별을 쳐다본다면 밤하늘 별들은 어떻게 빛날까. 내가 나무로 서서 구름을 본다면 구름은 또 어떻게 빛날까. 내가 다시 풀잎으로 세상을 본다면 세상은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내 다시 나무로 서서 나를 본다면 나는 진정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걸어갈까. 내가 별을 쳐다보듯 그렇게 어디선가 풀잎들도 별을 쳐다보고 있다. 내가 나무를 바라보듯 그렇게 어디선가 나무도 나를 보고 있다.
+ 풀잎 (김종우·시인, 1961-)
나직이 부르는 노래가 진정 노래예요 거센 함성 없지만 끊어질 듯 살아오는 그 끈질긴 힘의 목소리예요 빛이예요 온 천하가 어둠에 갇혀 방향 없이 바람에 밀려도 눈물로 일어서는 소리 우리 긴 기다림의 서러움이 진정 새로움의 노래예요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풀 /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목까지 눕는다 바람보다도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풀잎 / 이기철
초록은 초록만으로 이 세상을 적시고 싶어한다 작은 것들은 아름다워서 비어 있는 세상 한 켠에 등불로 걸린다 아침보다 더 겸허해지려고 낯을 씻는 풀잎 순결에는 아직도 눈물의 체온이 배어 있다 배추값이 폭등해도 풀들은 제 키를 줄이지 않는다 그것이 풀들의 희망이고 생애이다 들 가운데 사과가 익고 있을 때 내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만의 영혼을 이끌고 어느 불켜진 집에 도착했을까 하늘에서 별똥별 떨어질 때 땅에서는 풀잎 하나와 초록숨 쉬는 갓난아기 하나 태어난다
밤새 아픈 꿈꾸고도 새가 되어 날아오르지 못하는 내 이웃들 그러니 누가 저 풀잎 앞에서 짐짓 슬픈 내일을 말할 수 있는가 사람들이 따뜻한 방을 그리워할 때 풀들은 따뜻한 흙을 그리워한다
풀잎을 보았다 / 김종해
조그만 풀잎 하나로 살다가 한 생(生) 다 지낸 뒤 이 땅에 두고 가는 것은 저마다 다르구나 누구는 봄날 햇살이겠거니 한 철 바람이겠거니 눈부신 꽃잎의 그림자겠거니 그러나 영겁의 시간이 지난 뒤에도 저 풀잎 안에서 또 몸을 일으켜 세우는 것은 작고 여린 풀잎 유전자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