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홍의 영화속을 걷다>(12)
상처를 치유해 가는 마음의 풍경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바닷마을 다이어리>
김 문 홍
![](https://t1.daumcdn.net/cfile/cafe/27432C4056882B0D34)
<바닷마을 다이어리 Sea Town Diary 일본/ 드라마 / 2015sus / 127분>
따뜻한 일상의 풍경이 담긴 다이어리
소설이나 영화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서로 비교해 보고 그 둘 사이의 의미 맥락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흔히 작가들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작품의 상징적 의미를 매설해 두기 때문이다. 첫 장면에서는 작품의 방향을 설정하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주제를 축약해서 은유한다. 그런 의미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바닷마을 다이어리〉(2015년, 127분)의 오프닝 시퀀스와 엔딩 시퀀스는 다분히 작품의 방향을 암시하고 주제를 은유하고 있으며, 그 둘 사이의 행간을 채워주는 것이 곧 서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처음은 세 자매를 위한 상처의 발견을 위한 암시이고, 마지막은 상처를 안은 결과로서의 네 자매의 행복한 일상을 상징하고 있다.
오프닝 시퀀스는 둘째인 요시노(나가사와 마사미 분)가 애인과 함께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카메라는 클로즈업된 발에서부터 잠든 얼굴까지를 물 흐르듯 유연한 리듬으로 보여준다. 호출전화에 잠에서 깨어나 전화를 받는다. 첫째인 사치(아야세 하루카 분)로부터 아버지의 장례식을 알리는 호출이다. 엔딩 시퀀스는 네 자매가 카마쿠라의 해변을 걷는 장면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버린 아버지가 원망스럽지만 한편으로는 다정한 분이라고 안도한다. 이런 동생을 자신들에게 주어서 고맙다며 행복해 한다. 처음 장면은 또 다른 상처인 막내(히로세 스즈 분)를 만날 것이라는 암시이고, 마지막 장면은 그 상처가 결국은 자신들의 덧난 상처를 지워 주었다는 것에 대한 은유이다. 결국은 세 자매의 상처와 그리움에 대한 갈증이 막내의 상처를 끌어안음으로 저절로 치유되었기 때문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데뷔 영화인〈환상의 빛〉(1995)에서 생의 절정기에 자살한 남편에 대한 상실감을 극복해 가는 여자의 비통한 심리적 풍경을 아름답고 시적인 영상으로 보여 주었다. 그러나 2004년의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발표한 <걸어도 걸어도〉(2008), <진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2011),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 등의 작품들에서는 초기의 시네포엠에 가까운 영상미에서 전환하여 가족을 화두로 한 작품들이 무게중심을 이루고 있다.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그런 일련의 영화들에 정점을 찍는 느낌에 가깝다.
이 영화 역시 가족이 그 화두이다. 앞의 영화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내러티브와 주제로서의 현실인식이다. 앞의 영화들은 뚜렷한 서사적 플롯과 예리한 현실인식이 내재해 있다면, 이번 영화는 마치 일상의 풍경이 담긴 다이어리를 한 장씩 넘기는 에피소드 위주의 구성과 인물 중심으로, 그리고 어깨에 잔뜩 들어 있던 힘을 빼고 가족의 잔잔한 일상을 흐뭇한 미소로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 영화는 마치 관객들도 그들 네 자매의 한 일원이 되어 흐뭇한 가족의 풍경이 되고 싶다는 설렘을 느끼게 한다. 아니면 가까이 다가가 그들의 온기를 느끼고 싶다는 생각도 들게 한다.
상처를 온기로 고스란히 품다
이 영화는 요시다 아키미의 동명의 만화를 그 원작으로 삼고 있다. 첫째인 사치, 둘째인 요시노, 그리고 막내인 치카의 일상과 개성적 행동을 서사의 뼈대로 삼으면서, 이복동생인 막내 스즈를 그들의 일상 속에 편입시키면서 점차 상처를 극복하며 가족의 따뜻한 온기를 되찾아 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들 하나같이 착하다. 네 자매의 일상과 관련된 인물들 이외에는 거의 등장인물들이 없다. 마치 조그만 해변 도시 카마쿠라에는 네 자매들만 살고 있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할 정도로 서사가 단순하고 조용하다.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서사 중심보다는 인물 중심의 영화이다. 인물들의 표정과 감정의 흐름이 서사 기능을 담당하고 있을 정도로, 인물 사이의 갈등과 그것들이 일으키는 작은 파장이 쌓이고 쌓여 묵직한 서사의 추동력이 되고 있다. 네 자매들 중에서도 첫째인 사치의 비중이 아주 크다. 그녀는 병원의 간호사이면서도 주관이 아주 뚜렷하고 가장 역할을 단단히 해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병원의 소아청소년과의 유부남 의사를 사랑하고 있다. 아버지가 자신들을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사랑에 빠진 것처럼 그녀 역시 아버지의 비윤리적 형질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자신들의 안온한 가정을 지키기 위해 의사에게 결별을 고한다. 둘째인 요시노는 신용금고의 직원으로 근무하며 아르바이트 대학생을 사귀고 있다. 그녀는 성적인 개방성을 지니고 있으면서 서슴없는 자기주장으로 언니와 자주 부딪친다. 셋째인 치카는 스포츠 용품점의 직원으로, 마나슬루 등반으로 발가락 여섯 개를 잃은 점장 하마다를 좋아하고 있다. 이처럼 세 자매는 자신들이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상실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비윤리적이고 비정상적이고 결핍된 파트너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허점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곧 그러한 결핍이 또 다른 결핍에 대한 연민으로 작용하고 있음의 역설적 은유이다.
그러한 세 자매의 공간에 이복동생인 스즈가 들어오면서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그것은 곧 상처가 상처를 끌어안으면서 일으키는 심리적 균열이다. 술에 취해 잠든 막내 스즈를 바라보면서 세 자매는 웃음을 터뜨린다. 스즈가 잠결에 웃었다느니, 속눈썹이 길다느니, 귀가 큰언니를 닮았다는 등 동질성에 대한 연대감으로 또 다른 상처를 끌어안는다. 큰언니 사치는 자신들을 버리고 시집 간 엄마와도 화해한다. 엄마와 함께 묘소에도 들르고 담근 매실주도 엄마에게 건넨다. 엄마 역시 사치에게 자신은 그 집에서 숨 막혀 죽을 지경이었는데 너희는 그 집을 소중하게 여긴다며 대견해 한다.
이 영화에서는 배우들의 역할 표현이 압권이다. 섬세한 표정과 리액션, 그리고 대사와 마임이 한데 어우러져 장면의 분위기를 적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배우들의 연기 표현이 서사를 이끌어 가는 견인차가 되고 있다. 거기에 매실, 전통의상인 유카다, 전갱이 튀김, 매니큐어, 요리, 잔멸치 덮밥, 어묵카레 등의 오브제와 카마쿠라의 유려한 풍경이 직조되어 인물의 심리적 풍경의 의미망을 풍요롭게 만들고 있다. 거기에 카노 요코의 감미로운 서정적 음악이 분위기에 한 몫 거들고 있다.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게 행복
이 영화의 후반부에서 보여주는 불꽃놀이는 이들 네 자매의 상처의 치유에 대한 은유적 상징이다. 밤바다의 수면을 붉게 물들이는 불꽃의 그림자는 이들의 행복이 절정에 달했음을 암시한다. 곧이어 이들은 집에서 불꽃놀이를 하며 불꽃이 살아있는 느낌을 준다며 즐거워한다. 막내인 스즈가 자신의 불꽃을 유난히 큰언니 사치의 불꽃에 갖다 대고 흡족해하는 모습은 상처의 치유를 통한 동화를 표현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막내인 스즈가 목욕 후에 온몸에 감았던 타월을 벌리며 카타르시를 느끼는 대목은 이제는 스스럼없는 가족의 일원이 된 것에 대한 환희의 외침이다.
엔딩 시퀀스는 안온한 가족의 풍경을 고스란히 전한다. ‘바다고양이 식당’의 니노미야 아줌마의 장례식에 참석한 후 네 자매는 바닷가를 산책한다. 그들은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어 행복하다고 얘기한다. 세상의 마지막이 되었을 때 둘째 요시노는 남자와 술을 생각할 것이라고 너스레를 떤다. 큰언니인 사치는 아마 우리 집을 생각할 것이라고 놀려댄다. 사치는 자신들을 버린 아버지가 원망스럽지만 다정한 분이었다고 비로소 자신의 마음속에 받아들인다. 이런 막내 동생을 우리에게 주었기 때문이라고 흐뭇해한다. 그들에게는 막내인 스즈는 보물이나 다름없었다. 상처가 상처를 치유해 주었기 때문이리라.
고레에다 히로카즈에게 있어서 가족이란 낙관적 전망이다. 비록 지금은 갈등과 결핍, 그리고 상처와 미움으로 균열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가족의 현실적 풍경이다. 그러나 결핍을 인정하고 서로의 상처를 끌어안는 순간 온기와 희망으로 가득 찰 수 있다는 것이 <바닷마을 다이어리>가 우리에게 주는 전언이다. 그리고 가족의 끈끈한 연대를 위해서는 개인적 욕망과 꿈도 포기할 수 있다는 혈연적 가치도 은근하게 덧붙이고 있다. 사치가 사랑을 결연하게 포기하고, 둘째인 요시노가 이웃의 아픔에 눈을 떠가는 연민을 가지게 되는 것도 그러한 가족의 가치 때문이다.
이 영화는 인물의 연기 표현으로 승부수를 던지고 있다. 섬세한 연기 표현이 곧 서사의 축이고 사건 전개의 추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치밀하게 배치된 미장센과 공간, 그리고 오브제를 통한 의미 연상 작용 등이 씨줄과 날줄로 잘 직조되어 심금을 건드리고 있다. 뚜렷한 내러티브가 없어도 관객의 감성을 사로잡고, 상징적인 은유로서의 공간적 배경도 사건 전개의 추동력이 될 수 있다는 영화적 기교를 은근하게 귀띔하고 있다. 풍경도 인물 못지않은 확장성을 가지고 있다는 영화적 표현미학을 발견하게 하는 기쁨도 누리게 하고 있다. 풍경도 사람 못지않은 역할이 있다는 것을 이 영화는 넉넉하게 증명하게 하고 있다.
‘너 같은 보물을 세상에 남겼잖니. 네 아버지 어머니가 부럽다.’
이 말은 영화의 결미 부분에서 바로 위 언니인 치카가 동생 스즈에게 하는 대사이다. 작중인물의 대사처럼 그들의 일상에 감정 이입된 관객들은 활짝 웃으며 이들 네 자매에게 은근하게 속삭여 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너희들 부모는 정말 미워할 수 없구나. 아무리 생각해도 참 대단하다. 너희 같은 온기를 차가운 세상에 남긴 것을 보니 말이야. 만약에 너희들의 그 고운 마음 씀씀이가 방향을 잘못 틀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니. 너희 세 자매가 상처를 상처로 끌어안지 않았더라면 어쩔 뻔 했니. 이 영화는 서사의 영화라기보다는 인물의 영화이다. 서사는 그 인물들의 아름답고 착한 마음의 결에서 배어나온 향기일 뿐이다.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사람은 본디부터 참 선한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공자의 말처럼 ‘세상 모든 것은 근본은 사람이다’라는 보편적 명제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영화의 예술적 완성도에 큰 몫을 차지한 것은 이들 네 자매의 곱고 아름다운 심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