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마태 4,12-17.23-25
그때에 12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래아로 물러가셨다. 13 그리고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
14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5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16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17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23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24 그분의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졌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 간질 병자들과 중풍 병자들을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25 그러자 갈릴래아, 데카폴리스, 예루살렘, 유다, 그리고 요르단 건너편에서 온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20세기 초, 미국 질레트사의 창업자 질레트는 세계 최초로 안전면도기를 개발했습니다. 당시의 면도기는 비싸기도 했지만, 사용 전에 칼날을 갈아야 했기에 매우 위험했습니다. 따라서 질레트는 자신의 발명품이 전 세계인의 선택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심각한 판매 부진이었습니다. 1년 동안 질레트사가 판 것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면도기 51개, 면도날 168개”
세계 제1차 대전이 시작되었고, 그는 곧바로 군수 물품 조달 부서에 연락해 면도기를 원가에 보급하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원가에 판매하면 남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까지의 적자 역시 당연히 메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커다란 손해를 보는 이 결정이 질레트사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켰습니다. 돈 한 푼 쓰지 않고 엄청난 광고 효과를 본 것입니다. 그래서 1917년, 한 해에만 1억 3천만 개의 면도기를 판매할 수 있었습니다.
손해 보는 것처럼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손해 너머를 바라본다면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세상의 관점이 무조건 진리의 길은 아닙니다. 그보다 주님의 관점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관점을 따르게 되면, 어리석고 현명하지 못한 것처럼 비춰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근시안적인 생각입니다. 조금만 더 멀리 바라보면 사랑의 삶을 사는 주님의 관점이 하늘 나라를 차지하게 되는 가장 올바른 결정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감옥에 갇히고 나서야 회개를 선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는 요한에 의해 옛 계약이 끝나고, 새 계약의 시작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의 가르침을 짓밟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확인하듯이 요한의 가르침을 이어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우리의 회개로 주님께서 얻으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세상의 관점으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말도 듣지 않고, 악으로 쉽게 기울어지는 우리를 보면 “꼴도 보기 싫다.”라고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세상의 관점을 따르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관점은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죄를 고백하여 죄의 얼룩을 모두 씻지 않는 한 아무도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은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드러났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죄의 얼룩을 모두 씻는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모두가 어려운 일을 겪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매일 경이롭고 아름다운 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더글러스 케네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예수님.
기분 좋지 않은 말을 듣고 나서….
몇 년 전에 있었던 일이 기억납니다. 새벽 묵상 글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그로 인해 방송 출연과 외부 강의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습니다. 선배 신부님을 만나 함께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조신부가 성실하게 글을 쓰는 것은 좋은데, 조신부 묵상 글은 깊이가 없어.”
나름 그 깊이를 만들기 위해 책도 많이 읽고, 묵상 시간도 늘려가고 있는데 이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영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기분 나쁘다고 화를 내면, 막돼먹은 사람으로 비춰질 것 같고 또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말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는 속 좁은 사람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좋은 조언 감사합니다.”라고 말을 했지만, 솔직히 기분이 영 좋지 않았습니다.
‘나’를 보고 관찰하고 판단하는 사람들과 우리는 함께 살아갑니다. 따라서 자신이 원치 않는 판단이 이루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철학가 샤르트르의 말처럼 ‘타인은 지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함께 산다는 것은 좋은 말만 들으며 산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쁜 말도 들으며 나를 변화시키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