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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KARL BARTH)의 예정론
라준석
I. 시작하는 말
“하나님께서는 그대를 선택하시기로 예정하셨습니다.”라는 선포는 실로 복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예정교리’에 대하여 조금만 더 생각하면, 우리들은 우리를 당혹케 하는 여러 가지 질문들이 우리 앞에 버티고 서 있다는 것을 즉시 알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가 대할 때마다 늘 고민스럽고 당혹스럽기까지 한 교리가 바로 이 ‘예정론’이다. 이러한 ‘예정’에 대하여 오랫동안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해 온 주장은, 역시 전통적인 ‘이중예정론’이다. 칼빈의 주장을 살펴보면, 이러한 이중예정론에 대하여 잘 알 수가 있는데, 그는 <기독교강요>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분명히 보여주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원하고도 변할 수 없는 계획에 따라 구원으로 받아들이실 사람들과 멸망에 내어주실 사람들을 오래 전에 확정하셨다고 말한다.”1) “도리어 어떤 사람을 위해서는 영생이 예정되며, 어떤 사람을 위해서는 영원한 저주가 예정되기 때문이다. 각 사람은 이 중의 어느 한 쪽 결말에 이르도록 창조되므로, 우리는 그를 생명 또는 사망에 예정되었다고 한다.”2) 이 인용귀절들을 살펴보면, 우리는 ‘예정’과 관계되어 세 가지 내용이 주장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가 있다. 그것은 ① 인간들 중에는 ‘선택된 인간’과 ‘유기된 인간’이 있다는 것, ② 이러한 ‘선택’과 ‘유기’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일어난다는 것, ③ 이러한 결의는 이미 ‘오래 전에’ 결정되었다는 것 등이다.
이러한 전통적인 ‘이중예정’교리는 많은 의문을 일으키게 된다. 여러 가지의 의문들이 제기되지만, 세 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영원성’과 ‘시간성’의 조화 문제이다. ‘영원 전에’ 일어난 선택과 유기의 결정이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면, ‘현재’의 구원사건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이처럼 이미 영원 전에 개인의 선택과 유기가 결정되었다면, 현 시점에서의 인간의 모든 노력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영원 전의 예정’은 결국 숙명론으로 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②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책임성’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결정’에 따라서 인간의 선택과 유기가 결정된다면, ‘유기된 자’의 ‘유기’원인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지 않는가? 결국 ‘유기된 자’는 자신의 멸망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일군의 무리에게는 ‘선택’이 또 다른 일군의 무리에게는 ‘버림’이 주어진다면,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는 불공평하고 불완전한 은혜가 아닌가? 이러한 주장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성경귀절에 위배되는 것이 아닌가? ③ 예정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 문제이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을 보여주신다. 그렇다면, ‘영원 전에 이미 결정되었다’라는 이러한 예정론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개인의 ‘선택’과 ‘유기’와 직접적인 연결성이 없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이중예정론’을 통해서 보여지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지는 성경의 하나님과 다른 하나님이 아니가? 이러한 많은 질문을 끌어 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경적인’ 해답을 끌어내고자 씨름했던 오늘날의 대표적인 신학자는 아마도 칼 바르트(Karl Barth)일 것이다.
이 글에서는 칼 바르트의 예정론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물론, 칼 바르트의 예정론을 고찰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적이지만, 그것에 머무르지 않고, 그의 예정론이 극복하고자 했던 문제들이 극복되었는지, 또한 그가 끌어안고 고민했던 많은 문제들에 대해서 과연 성경은 어떻게 답을 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숙고하면서, 우리의 생각을 정리하는데까지 나아가려 한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칼 바르트의 예정론의 핵심내용을 사상의 변천 과정에 따라서 세 시대로 나누어 고찰하려고 한다(II장). 그리고 난 후에 전통적인 ‘이중예정론’을 지지하기 위한 근거귀절로 인용되었던 성경귀절들을 해석해 보고자 한다(III장). 이 부분에서 우리는 칼 바르트의 해석을 전통적인 해석과 비교분석하면서, 과연 성경이 말하고 있는 참된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숙고하게 될 것이다. 끝으로, 이러한 예정론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하여 언급하면서(IV장) 이 글을 맺으려고 한다.
II. 칼 바르트의 예정론의 핵심내용
바르트의 사상이 그렇듯이, 그의 ‘예정론’은 계속해서 변천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그의 ‘예정론의 핵심사상’을 세 단계로 나누어서 고찰하려고 한다. 그것은 ① 1936년의 예정론(Gottes Gnadenwahl), ② 1942년의 예정론(KD II/2), ③ 화해론(KD IV/1, 1953-KD IV/4, 1967)에서의 예정론이다. 먼저 1936년의 예정론부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1936년의 예정론(Gottes Gnadenwahl)
1936년의 바르트의 예정론이 전통적인 예정론과 다른 중요한 점은 하나님의 예정을 ‘믿음의 사건’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영원성’과 ‘시간성’의 문제를 극복하려고 노력한 결과이다. 이러한 ‘영원성’과 ‘시간성’의 조화 문제는 1942년의 예정론에서도 1936년의 예정론과 같은 구조로 제시되지만, 화해론에서의 예정론에서는 다시 분리되어서 다루어지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하여튼, 1936년의 예정론에서, 바르트는 아우구스티누스, 루터, 칼빈, 베자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예정론의 큰 문제점 중의 하나인 ‘영원성’과 ‘시간성’의 문제를 극복하려는 사고구조를 제시하고 있다. 바르트는, ‘영원 전의’ 선택과 유기 결정을 말하는 이러한 전통적 예정론은 ① 하나님의 현존하는 자유와 주권을 해치는 예정론, ② 고정된 체계만 남는 기계적인 예정론, ③ 회개에로의 진지한 부름을 해치는 예정론이라고 비판하면서 그의 주장을 전개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주장하는 내용의 핵심은 무엇인가? 요약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3)
1) 하나님은 선택하기도 하시고 버리기도 하신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사랑은 심판이 없 는 사랑이 아니다.
바르트는 다음과 같은 성경귀절을 근거로 들면서, 전통적인 예정론과 같이 선택하고 버리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분명하게 언급한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 9:13),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눅 17:34) 이처럼 1936년의 예정론에서 바르트는 ‘선택’과 ‘유기’의 이중구조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기에 바르트에 따르면, 하나님의 사랑은 심판이 없는 사랑이 아니다. 바르트는 “그러므로 보편적 은총 속에서 저주가 폐기되었다고 말해서는 안된다.”4), “은총을 멸시하는 사람을 하나님의 율법이 죽일 수 있고 죽여야 할 수밖에 없음을...여기(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계시되어 있다.”5)고 말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고 있다는 점은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면서,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되어 있다는 1942년의 예정론과의 큰 차이점이다.
2)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단 한 분 버림받으신 분’(Der einzige Verworfene)이 아니고, 우리의 버림의 계시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선택과 버림의 중재자이다.
바르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의 버림을 발견한다. 그는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하신 버림을 골고다에서 언급할 수 있다.”6)라고 말한다. 바르트는 또한, 1936년의 예정론에서, 그리스도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 자체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은총을 베푸는 은총의 통로, 즉 선택과 버림의 중재자로 이해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택과 버림은 그리스도에 대한 ‘인간의 믿음’과 관련되어 있다. 이점에서 바르트의 예정론은 전통적인 예정론과 다른 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전통적인 예정론은 현재의 ‘인간의 믿음’, 또는 ‘인간의 순종’과 관계 없이, ‘영원 전의’ 선택과 유기가 모든 것을 결정해버리는 구조를 보여주고 있지만, 바르트의 예정론은 아직, 전통적인 예정론처럼 ‘선택과 버림’을 이야기하지만, 이러한 ‘선택과 버림’을 ‘인간의 믿음’과 관련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선택과 버림’은 언제 일어나는 것인가? 영원 전에 결정된 것이 현재 그저 효력만을 발휘하는 것인가? 아니면, 현재의 인간의 응답과 관계되어 나타나는 ‘현재의 사건’인가? 이에 대하여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3) 선택은 현재 일어나는 사건이다. 선택은 하나님의 현존하는 자유의 행위와 이에 상응 하는 인간의 믿음과 관계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선택된 자이다. 이처럼 선택과 유기는 영원 전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 성격을 지닌다.
바르트는 “순종과 믿음, 믿음과 순종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계시되는 길이다.”7)라고 말한다. 즉 하나님의 선택과 버림은 인간의 믿음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은 언제 일어나는 사건인가? 이에 대하여 바르트는,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은 영원 전에 일어나고 변경가능성이 없는 그러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믿음과 상응하여 현재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바르트의 1936년의 예정론은 전통적인 예정론과 큰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데, 글의 초반부에서 제시한 ‘영원성’과 ‘시간성’의 문제를 극복하려는 바르트의 의도를 볼 수가 있다.
2. 1942년의 예정론(KD II/2)
1942년의 예정론을 알 수 있는 그의 <교회교의학> II/2을 읽어가노라면, 두 가지 중요한 강조점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것은 ‘은총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것인데, 우리는 이것들이 그의 예정론을 규정지우는 중요한 사상적 근거가 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바르트는 “은총의 선택은 복음의 총화이다.(Die Gnadenwahl ist die Summe des Evangelium.)”8)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고 있으며, 또한 “우리들 뒤에 있는 모든 길을 따라서 나아갈 때에, 우리들은 계속해서 예수의 이름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서는 한 발자욱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9)라고 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른바 ‘기독론적 집중’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사고에 따라서 바르트는 1942년의 예정론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그리스도 안의 존재로 규정하는, 영원 전에 일어난 ‘하나님의 자기 규정’(Selbstbestimmung Gottes)에 대하여 말하게 되며, 이에 따라서 예정론은 ‘은총론’이라는 시각에서 새롭게 쓰여지게 된다. 이러한 교회교의학 II/2에 나타난 그의 예정론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은 ‘은총의 하나님’이시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을 ‘자유 안에서 사랑하시는 분’(der in der Freiheit Liebende)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하나님은 ‘인간에게로 향하시는 하나님’이시며, 또한 ‘인간을 선택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선택하셨고, 하나님은 인간을 위하여 자유안에서 사랑하시는 분이시다.”10), “하나님은 그의 본질상 자유 안에서 사랑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은...하나님께서는 그의 은총 안에서 인간에게로 향하기를 선택하셨다는 사실에서 보여진다.”11) 이처럼 하나님은 ‘은총의 하나님’이시며, ‘선택의 하나님’이시며, ‘사랑의 하나님’, 또한 ‘인간에게로 향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현 역사 속에는 버림받은 자들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들을 버리셨는가? 그렇지 않다. 이러한 버림받음은 하나님의 자비의 그늘일 뿐이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그의 예정론의 전체 구조를 규정짓게 된다. 즉, 일군의 무리를 지옥으로 보내기로 예정하는 무시무시한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은총을 베풀기를 원하는 ‘은총의 하나님’의 발견은 그의 예정론의 근본성격을 규정하게 되며, 이러한 예정론은 일대 전기를 가져오게 된다.
2) 예정은 ‘은총의 선택’(Gnadenwahl)이며, 이러한 ‘은총의 선택’은 ‘복음의 총화’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의 선택’을 말하는 것이 바로 예정론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선택하셨다.’라는 이러한 소식은, 바르트에 따르면, 복음의 총화(die Summe des Evangeliums)이다. 바르트는 “은총의 선택은 복음의 총화이다...은총의 선택은 전체복음이다...그것은 모든 좋은 소식의 총괄개념이다.”12), 또한 “선택론은 복음의 총화이다.”13)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바르트는 이러한 ‘은총의 선택’은 하나님의 ‘인간과의 결합(Bund)’이라는 점에서, “은총의 선택은 화해론(Versohnungslehre)의 결정적인 말과 비밀을 형성한다.”14)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화해란 결합의 성취”15)이기 때문이다.
3) 은총의 하나님의 모든 사역의 구체적인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바르트에 따르면,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찾으면 안된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 전에 일어난 ‘하나님의 자기규정’(Selbstbestimmung Gottes)으로 이해한다. 하나님의 삶의 시작에 있었던 영원한 결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기로 결정한 결의였다. 바르트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선택하시는 하나님인 동시에 선택된 인간’(der erwahlende Gott und der erwahlte Mensch)이시다.16) 또한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는 한 분 선택된 자일 뿐만 아니라, 그 선택된 자이시다.(Jesus Christus ist also nicht nur ein Erwahlter, sondern der Erwahlte Gottes.)”17)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선택된 자인 것과 같이 유기된 자이다.(Er ist der Verworfene, wie er ... der Erwahlte ist.)”18) 바르트에 따르면, 하나님의 이중 예정이란 인간을 선택하시고, 대신 자신을 버리신다는 십자가의 사건을 요약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버림의 계시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선택의 계시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은 ‘선택하시는 하나님’인 것이다. 바르트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단 한 분 버림받으신 분(Der einzige Verworfene)’이시다.19)
4) 하나님의 선택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선택된 자이다.
바르트에 따르면, 하나님의 선택은, “시간 속에서 영원히 일어난다.(Sie geschiet ewig in der Zeit.”20)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역사(Geschichte)이고, 만남(Begegnung)이고, 결단(Entscheidung)이다.”21)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은 영원전에 결정된 것으로서의 고정된 체계가 아니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영원 전에, 그러나 전 뿐만 아니라, 시간 위에서, 또한 시간 안에서 하나님은 예정하시는 하나님이시다.(Vor aller Zeit, aber nicht nur vor, sondern uber und in aller Zeit ist Gott der pradestinierende Gott.)”22) 그러므로 선택은 현재의 인간의 믿음과 관계되어서 일어나는 ‘믿음의 사건’이다. 바르트는, ‘객관적으로 선택된 존재(objektiven Erwahltsein)’와 ‘선택된 자로서의 주체적인 삶(subjektiven Leben als Erwahlter)’사이의 차이를 언급한다. 즉, ‘선택된 자의 존재(Sein des Erwahlten)’에서 ‘그러한 삶(Leben als solcher)’에로의 이행에 있어서 개개 인간의 ‘결단(Entscheidung)’은 약속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인간이 이 약속을 듣고 믿을 때에, 하나님은 이러한 이행(Sein des Erwahlten에서 Leben als solcher에로의 이행)을 실현시키신다.”23) 즉,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결단과 관계되어 일어나는 역사이고 만남이고, 현재와 관련되어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믿는 자는 선택된 자이다. 이러한 사상은 예정론에 있어서 전통적인 이중예정론과 크게 구별되는 점으로서 1936년의 예정론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여, 1942년의 예정론에서 정교하게 정립되었다.
5) 은총의 선택의 중재로서 하나님은 ‘공동체’를 선택하신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을 두 원의 중심점으로 본다. 이러한 두 원은 외부적인 원인 개인들의 선택과, 내부적인 원인 공동체의 선택이다.24) 물론 선택의 중심목표는 개개인의 선택이다. 그렇다면 공동체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공동체는 고유한 봉사,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로 초대하는 봉사’에로 예정되었다. 그러기에 칼 바르트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 이 문장은 이미 예정론 안에, 신론 안에 속해 있다.”25)라고 말한다. 바르트는 이 부분에서 이중적인 형태의 공동체의 선택을 말하는데, 그것은 ‘이스라엘(Israel)’과 ‘교회(Kirche)’의 형태이다. 바르트에 따르면, 교회는 하나님의 긍휼을 증거한다. 공동체의 목표는 하나님의 긍휼의 빛이 밝게 빛나도록 하는 것이며, 기쁜 소식, 즉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교회는 복음의 완성된 형태로서 이스라엘 안에 이미 선재한다.
이처럼 바르트가 은총과 선택의 중재로서 선택된 공동체를 말한다는 것은, 예정론의 관점에서 볼 때에,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그것은 전통적인 이중예정론에 따르자면, 교회공동체의 선교사명이 모호해지게 마련이지만, 칼 바르트의 예정론적인 구조에 따르면, 교회공동체의 선포는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선택을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믿음의 사건과 관련되어 일어나는 현재의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바르트가 공동체의 선택을 말한다고 해서 어떤 특정한 ‘선택된 공동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의 예정의 본래적인 대상은 어떤 공동체가 아니라, 개개인인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예정된 가족이나, 예정된 민족이란 없다 ... 또한 예정된 인간성이란 없다 ...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공동체를 통해서) 예정된 인간이 있을 뿐이다.”26) 따라서 공동체는 모든 개개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1942년의 바르트의 예정론은 전통적인 예정론의 문제점들을 어떻게 극복하려고 하고 있는가? 세 가지로 말할 수 있다. ① ‘은총의 하나님’의 발견이다. 즉, 하나님의 행위를 선택과 유기의 이중구조로 봄에 따라서 야기되는 문제점을 극복하려고 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신관에서 유래되는 것이다. 오직 ‘은총과 선택’을 강조하는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강조는 전통적인 이중예정론에서 발견되는 중요한 문제점 중의 하나인 ‘선택과 유기’의 대칭구조를 극복하고 있다. ② 하나님의 자유를 사랑과 은총에서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전통적인 예정론이 고수하려고 하였던 ‘하나님의 주권성’을 강조하면서도, 독재적인 하나님의 모습이 아니라, 사랑하시는 ‘자비로우신 분’으로 하나님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유는 사랑하시려는 자유라는 말이다. ③ ‘영원성과 시간성’의 차이를 극복하고 있다. 영원 전에 일어난 사건이 현재를 결정하는 기계적인 구조를 벗어나, 현재의 믿음의 사건과 영원 전에 일어난 하나님의 자기규정이 관계를 가지는 구조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것은 인간을 주체적인 존재로 파악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사고에 바르트는 만족하는가? 바르트는 이제 화해론에서는 영원전에 일어난 사건과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구분짓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그의 견해를 고찰해보면 다음과 같다.
3. 화해론(KD IV/1, 1953 - KD IV/4, 1967)에서의 예정론
이제 1953년의 화해론에서는 ‘하나님의 신율’, 즉,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선택하셨다는 사실과 ‘인간의 자율’, 즉 인간이 믿는다는 사실이 더 이상 동시적인 것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바르트는 1953년에 출간된 교회교의학 IV/1에서 ‘객관적 화해론’을 발전시킨다. ‘객관적 화해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모든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고, 따라서 모든 인간의 죄는 이천년 전 십자가에서 이미 해결되었다’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현재의 시점에서의 인간의 주관적인 믿음과 관계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이미 하나님과 화해되었다는 것이다. 즉, 모든 인간은 이미 하나님과 객관적으로 화해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바르트는 1936년과 1942년의 예정론에서는 ‘영원성’과 ‘시간성’을 조화시켜서 ‘믿음의 순간’이 바로 ‘화해’의 순간이라고 보았지만, 1953년 이후의 화해론의 예정론에서는 하나님과의 화해의 순간은 인간이 주체적으로 믿는 순간이 아니고, 2천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라고 말한다.27)
한 가지 고려할 점은 시간성의 차이를 제외시킨다면, 이것과 액면그대로 똑같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비슷한 구조가 1942년의 예정론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도 잠간 언급하였듯이, 바르트는 1942년의 예정론에서, ‘객관적으로 선택된 존재(objektiven Erwahltsein)’와 ‘선택된 자로서의 주체적인 삶(subjektiven Leben als Erwahlter)’사이의 차이를 언급한다. 즉, ‘선택된 자의 존재(Sein des Erwahlten)’에서 ‘그러한 삶(Leben als solcher)’에로의 이행에 있어서 개개 인간의 ‘결단(Entscheidung)’은 약속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인간이 이 약속을 듣고 믿을 때에, 하나님은 이러한 이행(Sein des Erwahlten에서 Leben als solcher에로의 이행)을 실현시키신다.”28) 이처럼 바르트는 1942년의 예정론에서 ‘객관적으로 선택된 존재’와 ‘그러한 것을 실제적으로 누리는 삶’ 사이를 구분하여, 이러한 삶으로의 이행을 가능케 하는 요소로서 ‘인간의 믿음’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1953년 이후의 화해론에서 ‘객관적으로 화해된 인간’이 ‘주관적인 믿음’으로 인해서 그것이 실재화되는 구조와 비슷한 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인간의 믿음과는 관계 없이 선택받을 자와 유기될 자가 이미 결정되었다’는 전통적인 예정론의 주장과, 그에 따른 무시무시한 하나님 상에 반대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은총’(Gnade)과 ‘사랑’(Liebe)이시기 때문에, 일군의 무리를 유기하시기로 결정하시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원사건은 인간의 믿음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1942년 이전의 예정론과 1953년 이후의 예정론의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1936년과 1942년의 예정론에서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을 인간의 믿음과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반하여, 1953년 이후의 화해론에서는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은 화해의 사실을 현재에서의 인간의 믿음과 분리시켜 놓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만민화해론(Allversohnungslehre)’은 ‘만민구원론(Allerlosungslehre)’을 말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바르트는 분명히 화해된 존재와 구원받은 존재를 구분하고 있다. 그러면 화해와 구원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바르트는 이 차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설명하였다.29) 2차 세계 대전 때에 어떤 사람이 나치를 피하여 오스트리아 알프스의 깊은 산중으로 은신하였다. 그는 산중에서 살게 되었고 엄청난 고난을 겪게 되었다. 그러던 중 어느날 나치는 망하고 오스트리아의 모든 도시에는 자유와 평화가 찾아 왔다. 그러나 알프스 산중에 은신해 있는 이 사람은 아직 그러한 자유와 평화를 맛보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도 나치가 망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실제적으로 구원을 얻으려면, 누군가가 나치는 망했다는 기쁜 소식을 그에게 전해주어야 하며, 이 사람도 그 기쁜 소식을 듣고 믿어야 하며, 알프스 산을 떠나 오스트리아로 내려와야만 한다. 이 때에 비로소 그는 참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나치가 망한 것이 바로 화해의 사건이요, 이 화해의 사건으로 자유와 평화는 객관적인 실체가 된 것이다. 그러나 알프스에 은신한 사람은 아직 구원을 받지 못했다. 그의 구원은 누군가에 의해서 전파된 이 기쁜 소식을 듣고 믿음으로써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다. 바로 이 화해와 구원 사이의 시간이 교회의 시간이요, 선교의 시간이요, 성령의 시간인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주관적인 믿음과 관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되었다 는 ‘객관적화해론’은 ‘만민구원론’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르트의 예정론은 여러 가지 면에서 전통적인 예정론과 상당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① 전통적인 예정론은 영원 전에 일어난 선택과 유기의 결정에 따라서 현재의 선택과 유기가 결정되어 버리는 기계적인 결정론적 구조를 보이고 있는 반면에, 칼 바르트의 예정론은, 1936년과 1942년의 예정론에 있어서나 1953년 이후의 예정론에 있어서나, 공히 이러한 결정론적인 구조를 극복하고 있다. 그것은 어쨋든 한 인간의 선택과 유기가 현재의 믿음의 사건과 관계있다는 것이다. ② 전통적인 예정론에서는 유기에 대한 책임성이 하나님께로 돌려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지만, 칼 바르트의 예정론에 있어서는 유기에 대한 책임성이 하나님에게가 아니라, 인간에게로 돌려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것은 근본적인 신론의 차이를 야기시키는데, 전통적인 예정론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주권성은 보호될 수 있지만, 자기의 마음대로 선택과 유기를 결정하는 폭군적인 하나님으로 이해될 수 있는 반면, 칼 바르트의 예정론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모든 인간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은총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으로 이해될 수가 있는 것이다. ③ 전통적인 예정론에서는 영원 전의 선택의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와 별개의 것으로 일어난 것으로 이해될 가능성이 있는 반면에, 칼 바르트의 예정론에서는 하나님의 선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해되고 있으므로, 모든 선택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과연 성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증거하고 있는가? 다시 말하면, 선택과 예정과 구원에 관한 수많은 성경 귀절들이 그러한 주제에 대하여 증언하는 참된 내용은 무엇인가?
III.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까지 칼 바르트의 예정론의 핵심내용을 시대적인 변천에 따라서 고찰해 보았다. 이제, 바르트의 주장을 전통적인 예정론의 주장과 비교하면서, 성경에서 증거하고 있는 예정사상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어느 곳에서도 ‘선택과 유기’라는 전통적인 ‘이중예정’을 말하지는 않는다.
전통적으로 이중예정을 위한 성서적 근거로 인용되는 귀절은 로마서 9-11장이다. 칼빈은 이 본문 중에서 특히 9장 13절(“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과 9장 27절(“남은 자”)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그 은밀한 계획에 의하여 원하시는 사람을 거저 선택하시며, 다른 사람들을 제외하신다는 것이 이제 충분히 밝혀졌다...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보여 주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원하고도 변할 수 없는 계획에 따라 구원으로 받아들이실 사람들과 멸망에 내어 주실 사람들을 오래 전에 확정하셨다고 말한다.”30) “바울은 야곱과 에서의 예를 들어 논의를 더욱 전개해 나간다. 두 사람이 다 아브라함의 후손이었고, 어머니의 태중에 함께 있었지만, 맏아들의 권리는 에서에게서 야곱에게로 옮겨졌다. 이 변경은 하나의 전조(前兆)와 같은 것으로 야곱의 선택과 에서의 유기를 증거하는 것이라고 바울은 주장한다.”31) 이처럼 이중예정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칼빈의 목적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또한 로마카톨릭의 인간의 공로설에 반대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중예정론에 의해서는 ‘하나님의 주권’은 유지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모호하게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일군의 무리를 버리시기로 작정한 하나님은 결코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또한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이 제한적으로 효력을 발생한다는 것은 성경의 증언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본문은 칼빈의 주장대로 ‘영원 전의 선택과 유기 결정’이라는 이중예정을 말하는 것인가? 칼 바르트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바르트는 로마서 9-11장을 전통적으로 개인주의적으로 해석하여 이중예정론을 위한 근거귀절로 사용한 전통적인 예정론에 반대하여, 교회론적으로 새롭게 해석한다.32) 바르트에 따르면, 로마서 9-11장에서 말하는 것은 영원 전에 하나님이 일군의 무리는 영원한 축복으로, 일군의 무리는 영원한 저주로 정했다는 의미의 이중예정, 즉 다른 말로 말하면 ‘부분적인 선택’이 아니다. 로마서 9-11장이 말씀하려고 하는 내용의 핵심은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에 의하여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약속의 자손으로 선택되었다는 ‘전체적인 선택’인 것이다. 이 점에서는 바르트의 해석이 옳다. 우리들이 로마서 9-11장을 읽어보면, ‘선택과 유기’라는 ‘이중예정’을 말하기 보다는, 주권적인 하나님의 사랑에 의하여 이방인에게까지도 구원의 가능성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로마서 9-11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10장 13절에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라는 말씀이 나온다. 이 말씀을 보면, 일군의 무리는 선택으로 일군의 무리는 유기로 이미 정해져 있다는 ‘이중예정’은 옳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9장 13절의 말씀과 9장 19-21절에 기록된 토기장이의 비유는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일까? 전통적인 예정론의 해석처럼 이중예정을 말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나, 토기장이의 비유는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 비유를 저주의 백성이었던 이방인들을 하나님께서 그분의 전적인 주권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삼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아무도 힐문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은 다름아닌 ‘은총을 베풀기 위한 주권적 예정’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이방인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예정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긍휼에 대하여 아무도 힐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하나님의 긍휼의 행동에 아무런 불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4-16)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롬 9:30) 즉, 로마서 9-11장은 전통적인 예정론자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무시무시한 이중예정을 전하려는 본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참되고 영원한 예정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민을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본문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로마서 9-11장의 내용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복음을 전하기 위한 본문인 것이다.33)
2. 모든 인간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열려 있음을 말한다.
에베소서 1장 4절(“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흠이 없게 하시려고”)에는 ‘창세 전에’라는 말이 나온다. 칼빈은 이 말을 근거로 해서 영원 전의 이중예정을 말한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사람들만을 택하신 것이므로, 신령한 복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이 아니다.”34)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과연 성경은 이와같은 ‘제한적인 구원’을 말씀하고 있는가? 바르트에 따르면 그렇지가 않다. 1942년의 예정론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은총의 하나님’ 이해에 따라서, 바르트는 모든 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존재라는 주장에 이르게 된다. 이 말은 모든 자가 구원에 이른다는 말이 아니라, 모든 자에게는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해하게 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지는 하나님은 어떤 이에게는 구원의 은총을 베풀지만, 어떤 이에게는 구원을 가능성을 애초부터 막아버리는 그러한 하나님이 아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롬 10:1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13) 그렇다면, 이 말씀들과의 관계에서 에베소서 1장 4절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전통적인 예정론의 이해대로 ‘창세 전에’ 이미 ‘선택받을 자와 유기될 자’를 정하셨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것은 창세 전에 선택받을 자와 유기될 자를 미리 정하셨다는 것을 뜻하는 본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흠이 없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시기를 미리 정하셨다는 것을 뜻하는 본문이다. 따라서 이 본문은 어떤 사람에게는 애초부터 구원의 가능성이 막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죄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의 은총을 베풀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에, 이 은총을 받아들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3. 구원은 인간의 믿음과 관계되어 있음을 말한다.
칼빈은 “믿음은 선택의 결과이며, 선택은 믿음에 의존하지 않는다...이 말의 뜻은 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 지금 확인된다는 것-이를테면, 지금 인침을 받는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인 후라야 선택이 효과를 나타내며, 여기서 그 타당성을 얻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35)라고 말한다. 이 말에 따르면, 믿는 자가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영원 전에’ 선택된 자가, ‘현재’ 믿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인간의 믿음과 관계 없이, 선택과 유기가 결정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된다. 칼 바르트는 이에 반대한다. 바르트에 따르면, 인간의 구원은 인간의 믿음과 관계가 있다. 1936년의 예정론, 1942년의 예정론, 1953년 이후의 예정론을 비교해 볼 때에, 믿는 순간과 선택의 순간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는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한 가지 공통되는 점은 인간에게 있어서 구원의 효력은 ‘인간의 믿음’, 즉 ‘응답과 순종’과 함께 발생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현재의 응답과는 별도로 이미 창세 전에 일어난 ‘선택이냐, 유기냐?’의 결정 여하에 따라, 현재에는 그것의 확인만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구원은 현재의 인간의 믿음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과연 성경에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성경에서는, 바르트의 주장대로, 인간의 믿음과 관련되어서 구원문제가 언급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을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6)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 10:9) 이처럼, 성경에 따르면, 인간의 구원사건은 인간의 믿음과는 별도로 ‘영원 전에’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현재의 믿음과 관련’되어 일어나는 것이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은 사랑의 하나님이 베푸신 놀라운 ‘은총’이라고 말한다.
이제까지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성경에서는 이중예정을 전하지 않는다. 즉, 하나님은 어떤 사람은 구원으로, 어떤 사람은 멸망으로 영원 전에 미리 결정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반면에, 모든 인간에게는 구원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그는 구원을 받는다. 이러한 구원사건은 이미 영원 전에 결정된 것이, 오늘날 단지 확인되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현재의 우리의 믿음’과 관계되어 있다.’
우리는 이제 예정론을 다룸에 있어서 아주 곤란한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그것은 ‘만일 우리의 믿음 여하에 따라서 우리의 구원이 결정된다면, 그것을 어찌 은총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인간의 결단 여하에 따라 선택과 유기가 비로소 결정된다면, 그것은 은총이 아니지 않은가?’라는 질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은총이요, 은혜이다. 왜냐하면, 구원을 얻을 만한 아무런 공로도 없는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완전히 열어놓았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실로 하나님의 은총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닐 수 없다. 스스로 구원에 이르기에는 전혀 불가능한 인간이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의 중심부에는, 그 은총을 받아들이기로 결단하는 인간의 믿음보다는, 구원의 길을 베푸신 하나님의 은총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한 인간이 구원을 얻게 된 것은, 그가 어느 날 견단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총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실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성경에서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라고 말한다. 즉 인간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구원을 얻지만, 그 구원을 가능케 하는 근본적인 것은 인간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 즉 인간을 선택하기로 결정하신 ‘하나님의 은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정론은 하나님의 은총을 전하는 교리이며, 칼 바르트의 표현에 따르자면, ‘복음의 총화’(Die Summe des Evangeliums)라고 할 수 있다.
IV. 맺 는 말
1. 먼저, 지금까지 고찰한 칼 바르트의 1936년의 예정론, 1942년의 예정론, 1953년 이후의 화해론의 예정론에서 계속해서 나타나는 공통점으로서 우리는 세 가지를 말할 수 있다.
①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이중예정’에 반대한다. 구원은 ‘인간의 믿음’과 관계가 있다. ② ‘영원 전에’ 선택과 유기가 이미 결정되었다는 기계론적 결정론에 반대한다. 구원은 ‘현재의’ 인간의 응답과 관계가 있다. ③ 예정론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해하였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 바르트의 예정론은 시대에 따라 변천과정을 겪게 된다. 이전과 다른 중심적인 변화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1936년의 예정론 : 전통적인 예정론의 결정론적인 경향에 반대하면서, 하나님의 예정을 인간의 믿음과 관련되어 현재에서 일어나는 ‘믿음의 사건’으로 파악하였다. 따라서 인간의 회개와 믿음과 순종을 강조하게 되었다. ② 1942년의 예정론 : 하나님의 존재를 예수 그리스도 안의 존재로 규정하게 되었고, ‘은총의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영원 전에 일어난 ‘하나님의 자기규정’(Selbstbestimmung Gottes)을 언급하게 되었고, 하나님은 인간을 선택하시고, 대신 자신을 버리시는 분으로 이해되게 되었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는 ‘단 한 분 버림받으신 분’으로 규정되고, 하나님은 인간에 대해서 ‘선택과 버림’이라는 두 행위가 아니라, 오직 ‘은총과 선택’이라는 하나의 행위를 하시는 하나님으로 파악된다. ③ 1953년 이후의 예정론 : 이전의 예정론에서는 선택을 인간의 믿음과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으로 파악하였는데 반하여, 이제는 화해의 시간과 구원의 시간을 구별하는 ‘객관적 화해론’을 발전시킨다. 모든 인간은 주관적인 믿음과 관계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객관적으로 하나님과 화해되었다고 본다.
3. 그렇다면, 전통적인 이중예정론과 칼 바르트의 세 가지 형태의 예정론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성경적인가?
우리는 이 결정을 내리기 전에 위에서 언급한 예정에 대한 성경의 증거들을 다시 한 번 요약적으로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① 어느 곳에서도 ‘선택과 유기’라는 이중예정을 말하지는 않는다. ② 모든 인간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열려 있음을 말한다. ③ 구원은 인간의 믿음과 관계되어 있음을 말한다. ④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은 사랑의 하나님이 베푸신 놀라운 ‘은총’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성경의 증언들에 어울리는 가장 예정론은 어떤 유형의 예정론일까? 먼저, 전통적인 이중예정론은 이러한 성경의 증언들과 위배된다. 그렇다면, 칼 바르트의 예정론 중에서 어느 구조의 예정론이 가장 성경적인가? 그것은 칼 바르트의 예정론 중에서 1953년 이후의 화해론에서 발전시킨 형태의 예정론일 것이다. 물론 이 예정론에는 하나의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역시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만민구원론’으로 나아갈 위험성이다. 그러나 칼 바르트가 말하듯이, 이 유형의 예정론은 ‘만민구원론’이 아님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칼 바르트는 유기를 힘주어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선택의 그늘로서 유기되는 자들도 있다는 것을 결코 부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4. 우리는 성경에서 증거하는 예정론을 이렇게 정리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은총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선택하시기로 예정하셨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인간을 선택하시고, 자신을 버리심으로 모든 인간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어느 누구도 이미 창세 전에 선택과 유기에로 결정되지는 않았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고 받아들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이 구원은 인간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유 안에서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므로, 그것은 은총이요, 은혜이다.’
5. 이러한 예정론의 의미와 중요성은 무엇인가?
이러한 예정론은 과연 사변에 불과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예정론은 결코 사변이 아니다. 그렇다면 예정론의 의미는 무엇인가? 또한 그것은 왜 중요한 것인가? 이러한 예정론은 복음의 요약이요, 복음의 총괄개념이며, 복음의 총화이다. 예정론을 통해서 보여지는 하나님은 주권적인 하나님인 동시에,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예정론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은 인간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받아들이고, 인간에게로 향하시어, 인간과 연합을 가지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따라서 예정론의 핵심은 복음이고, 복음의 총화가 예정론인 것이다. 따라서 예정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사랑하시고, 인간에게 향하시어, 구원을 베푸시는 좋으신 하나님에 대한 송영적인 고백교리인 것이다.

첫댓글 암쪼록 제가 17세때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삶과 죽음... 그리고 구원과 심판... 이런저런 고민을 하면서.. 저로 하여금 가장 공포스럽게 했던 것은 칼빈의 예정론이며 예정론때문에... 얼마나 고통속에 하루하루를 보내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살기위해 당시 목회자들을 있는한 다 찾아다녔고.. 물어보고 길을 가르쳐 달라고 말했지만.... 솔직히 아무도 쉬원한 말씀을...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고... 알고 있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알게되었습니다.. 저분들이 교회 지도자라고 하면서... 양을 기르는 목회자라고 하면서... 구원의 문제하나만큼도 제시해 줄수 없다면.. 도대체 저분들은 뭐하러 저런 감투를 쓰고 있는걸까.
하구요.. 그래서.. 저는 저의 구원문제를 저 자신이 찾아야지.. 목회자들을 믿고 의지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성경을 연구하기 시작했네요..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속에서 두려움이 찾아오는건... 내가 만일 선택받지 못한 운명으로 태어났다면... 내가 이 성경을 연구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였습니다.. 암쪼록.. 이 칼빈의 예정론의 허구성을 깨달은것은... 그로부터 수년이 흘렀습니다.. 말씀속에 빛을 발견한후... 저를 억눌렀던 칼빈의 운명론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칼빈의 운명론의 허구성과 폐단성을 깨달은후... 저는 말씀에대한 소망이 생겼습니다.. 구원의 말씀은 찾으면 찾을 수 있는 것이구나 하구요.. 그러기를 또
칼빈의 예정론을 얼마나 깊이 이해하셨는지는 모르지만, 예정론을 운명론으로 보고자하는 알미니안들과 일반 철학자들의 사고 도식에서 한 치도 못 벗어나고 계시네요. 운명론은 절대 기독교적인 용어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운명론에는 '인격적인 섭리'라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빠져 있습니다. 예정론을 자꾸 운명론 쪽으로 몰고 가시는 레마님의 의도가 파악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만.... 개인의 주관적인 경험에 비추어 구조를 비판하는 것은 '독단'의 우려에 빠지게 합니다. 개인의 주관적 경험은 파편적인 것입니다. 일반화의 요구는 너무도 자가당착적입니다.
한 십수년이 흐른후... 저는 말씀가운데 계신 주님과 구원의 복음을 온전히 깨닫고 알게되고 분별하게 되었습니다.. 암쪼록.. 칼빈의 예정론은... 알마니.. 카톨리즘에대해선 든든한 방패로 잘 사용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칼빈의 예정론은 그 자체에서 반진리적인 교리이기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의 입장에선 대적하는 소경만드는 악한 누룩임도 알아야겠습니다.. 뜬구름잡는 잡히지도 않는 예정론에 구원을 맡기지 마시고.. 확실한 십자가의 도와 구원의 능력이 되는 복음을 발견해서... 온전한 구원을 확신하시고... 주님의 예정안으로 들어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럼 바울의 예정론은 어찌 생각 하시는지요?
다음에.. 기회되면... 함 나눌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로마서에 나오는 그 부분은 개인의 영혼에 대한 구원부분을 말씀하시는게 아니라... 그것은 그림자와 모형으로 보고 있다는게 저의 전체적인 관점입니다.. 그림자는 육신에 한정되는 것이지... 영혼의 문제에 관계되는건 아닙니다.. 암쪼록.. 그부분의 연구는 저보단 다른 어떤분이 정말 심도있게 연구하셔서.. 글을 올리신 적이 있었는데.. 방금전 찾아봤는데.. 어디에 있는지 아무리 찾아도 찾지를 못하겠네요.. 글치만 반드시 찾아서 올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그분의 글을 읽고.. 옳다 여겼기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론과 핵심은.. 칼빈의 예정론이 맞느냐 그르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칼빈의 예정론이 맞던 아님 틀렸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모르면... 그분의 복음을 믿지 아니하면... 구원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아무리 칼빈의 예정론이 맞네.. 혹 틀렸네 주장해도... 이것의 진위를 판단했다고... 구원받는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어떠한 복음과 십자가의 도는... 그런 신학 교리적 용어로 받는것이 아닙니다.. 그런면에서도 교리에서 벗어나라고 말씀드리는 것이며.. 백날 칼빈의 예정론 주창해봤자.. 십자가의 도에는 소경으로 평생 끝납니다.. 이것이 이 예정교리의 독한 누룩입니다.. 십자가의 진리를 무의미하게만들고 대적하
는 교리가 무슨 하나님의 뜻이 되겠는지요.. 운명론적 예정론과 운명론적 제한속제론은... 십자가의 주님의 보혈을 아주 하챦게 만들고... 그분의 복음의 광채를 축소시키며 구원받아야 될 존재들에게... "십자가의 도"를 깨닫게해서... 구원받도록 도와줘야 되는데... 오히려 우둔해서... 예정되었는지 유무만 판단해야하는 멍청함에 빠지게 만드니.. 어찌 참 진리라 할 수 있겠는지요.. 제가 예도 들었지만.. 제가 구원문제로 고통당할때.. 고민할 사춘기때... 목회자라는 분들.. 정말 구원에 대해선.. 복음과 십자가의 도에 대해선... 거의 깡통수준이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이런 결과가 되었습니까?
알마니즘, 카톨리즘은 십자가의 도를 부정하는 진리관이니 당연히 모르는게 당연하겠지만.. 말할 필요도 없지만.. 칼비니즘도... 구원의 선 판단기준을 예정되었는지 않되었는지에 근본적으로 달린 문제이기에... 십자가의 도를 연구할 가치도 없고.. 구원의 복음을 연구할 가치가 없게되어있는 것입니다.. 만일.. 구원문제가 그런 운명론에 근거하지 않고.. 십자가의 도와 복음을 온전히 발견해서 이걸 믿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면... 어느누가 십자가의 도와 복음에 목숨걸지 않겠는지요... 그런데 목회자라는 분들이나 신학생이라는 이들이나 신학자라는 이들도.. 정말 죄송스럽지만.. 로마서나 기타 십자가의 도에 대해선 빈약 수준
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저를 교만하다고 해도 달게 받겠습니다.. 사실이 그런걸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지도 않겠습니다.. 그분들이 한 영혼이라도 제대로 그 길을 가르쳐 줄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진리를 온전히 발견한자는 그렇게 말하지 못합니다.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복음을 깨닫지 못하니까..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칼빈과 루터의 칭의론도 성경적이 아닙니다.. 카톨리즘이나 알마니즘은 물론하고 그들도 제대로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비슷꾸무리하면서도.. 정확하게 발견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나중 이부분을 열어드리면.. 그때 이해가될 것입니다..
똑같다고 억지 주장하면 할말 없지만... 분명 다릅니다.. 그 종교개혁가들도 어떨때는 바른 말을 할때도 있고 혼돈하고 있었지만.. 근본적으론 정확히 깨닫지 못했다고 해야 정확합니다.. 저는 분별합니다.. 암쪼록.. 예정론 문제는 예정론 문제이고.. 저는 이런 십자가의 도와 관계도 없는... 제가 볼땐 칼빈이 대단한 영적인 학자로 보지 않는관계로.. 그런 덜익은 신학자의 이론에 시간을 허비하고 싶진 않는다는게 제 갠적 생각이랍니다.. 말씀드린대로... 로마서 부분에 대해선 다른 분이 성경적으로 설득력있게 칼빈의 오류를 밝힌 사이트를 본적 있기에 암쪼록 다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교리나 신조를 이야기 하다보면 그 어떤 한계점이나 딜레마에 봉착 합니다!!~이것이 우리 인간 지성의 한계입니다!~`말씀`이 `육신`되어 하나님 자신이 이땅에 내려 왔다는데,..이것을 이성이나 지성으로 논 한다는것이 말이나 됩니까?...그 어떤 한계점은 인식하셔야 합니다!!~칼.바르트 ..이 양반을 좋게 평하지는 않더라구요!!~현대신학은,..그야말로 신앙이 아닌 학문의 경지에 들어 섰습니다!!~신앙의 눈으로 신학을 들여다 봐야지요!!~학문의 눈으로 신학을 들여다 보면,.그야말로 종교학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내가 깨달았고 믿었던 예수!!~그것을 체계화 시켜 기록으로 남겨두면 그것이 교리가 되고 신조가 되는것입니다!!~
그리하여 그것이 성경적인가 ?..아닌가?..이것을 연구하고 따졌던일이 교회사 입니다!!..저 개인은 교리나 신조를 몰라서 그렇게 방황 했건만,.레마님은 교리나 신조때문에 고통을 받으셨군요!!~정말 아이러니 합니다!!~~얼마전 담임목사에게 이제 설교는 들을만큼 들었으니,.이제 강단에서 교리나 신조를 전해야 한다고 그랬더니,.그분이 엄청 놀래더이다!!~기본적 교리나 신조없이 신앙생활하면,.그것이 얼마나 `맹신`이 되는가를 뼈저리게 느낀 사람입니다!!~~레마님이 무엇에 안타까와 하시는지,.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그렇다고 나만큼 깨닫지 못했다고 하는 발언은 신중 하셔야 합니다!!~
바르트가 자유주의자들의 놀이터에 폭탄을 던진 사람으로 그의 신학적인 공로가 인정되기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유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바르트가 신자유주의자라는 명칭을 얻고 있는 것은 이때문입니다. 그는 칸트의 물자체적인 존재의 사고와 키엘게골의 실존주의를 들여옴으로 하나님은 '전적 타자'(전적 초월)적인 존재요 내재적인 존재로서의 하나님은 부정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완전한 영감도 부정하는 실존주의적인 입장입니다.
바르트는 삼위일체도 하나님의 구속과 관련한 입장에서 보는 것이 아닌, 영원 전부터 삼위일체가 하나님의 존재 방식으로 봅니다. 따라서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유기가 결정되었다는 "일원론적 예정론"을 주장을 합니다. 그래서 구원에 대한 유니버셜리즘을 주장합니다. 물론 개혁주의 교회에서도 "구원 예정은 영원 전이다, 또는 인간의 타락 이후 하늘의 어전회의에서 이루어진 것이다"의 주장은 팽팽합니다.
바르트의 사고는 '창조'도 처음부터 '선택'을 위해 봉사한다는 데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창조'의 고유한 의미와 독자성은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을 위해" 사라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위한 공간적인 의미만이 남게 됩니다.
아모르님의 지식이 해박 하시네요!!~철학을 공부하고 신학을 전공해야 한다는 말이 설득력이 있습니다!!~레마님 같은 분은,..지성(철학)도 섭렵하여 그의 허구성이나 무력함을 들여다 볼줄 알아야 합니다!!~인간지식의 한계도 보아야 하는데,.교리나 신학이 무슨 세상지식 쯤으로 알면,.레마님 같은 주장이 설득력을 얻지요!!~바울이 그러한 인물이었지요!!~세상지식도 배우고 나서 버려야지요!!~세상지식(철학)이 뭔지도 모르면서 ,.신앙을 논하면 우습게 되는걸 아셔야 합니다!!~
세상 지식도 하나님의 나라를 수종하는데 복속시켜야 하는 것이 칼빈주의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이 칼빈주의를 벗어나게 되는 것은 세상지식에 빠져 하나님의 지식을 등한히 하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겠는지요? 세상지식이라고 하등 가치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간과한 데서 오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것은 거룩한 지식만이 참된 것이라는 영지주의 이원론의 도식에 함몰되는 것이지요. 내가 지식의 새벽날개를 달고 지구의 끝에 가서 섰다 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은 거기 계시오매.....
이 문제에서 우리가 간과한 것이 있는데 성령께서 부르시기 전의 인간의 상태에 관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1절 이하를 보면 인간은 죽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인간 스스로 영적인 반응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이 좁은 공간에 말할 수는 없지만 죽었던 자!!! 하나님께서 결국 예정하시고 부르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냥 죽어있는 것이지요. 내가 반응하기 전에 예정하신 것이지요! . 에베소서 1장을 보면 선택과 예정에 나옵니다. 성경에 그렇게 나오는 걸요!
철학적으로 접근하지 마시고.. 말씀을 하나하나 생명으로 접근하셔야 된답니다.. 다음 언제 에베소서에 나타나신 영적인 비밀도 찾아보도록 하겠지만... 근본 말씀을 보는 태도를 신학적 틀안에서 보셔서는 성경이 보이질 않습니다.. 주님말씀이 내 말은(레마) 영이요 생명이라 했습니다.. 말씀을 레마로 취해야지.. 교리로 보면 백날 풀어봐야.. 인간의 지혜.. 육신의 지혜에 거치며.. 그 끝은 사망이랍니다..
그리고 탈무드님에게 에베소서의 그 말씀과 관련해서 한마디 더 조언들 드리겠습니다.. 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방향이 틀리셨습니다.. 칼빈의 교리라는게 그렇습니다.. 겉으로는 맞는듯 싶어도... 중심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의 말씀의 방향을 살짝 틀어버리고... 하나님의 의도를 바꾸어 버립니다.. 사람들은 껍데기 말에 현혹되어 그 중심과 생명을 보지 못하고... 무조건 맹목해버립니다.. 칼빈을 따라가다보면... 결국 남는건 멍청한 신학과 철학밖엔 않남습니다.. 그런 하챦은 초등학문만 남아놓고는 똑똑한줄 알게됩니다.. 칼빈을 벗어나시고... 신학자들을 벗어나십시오.. 그들의 글은 참고만 하는것이지
추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과 생명은 말씀에 있지... 신학자들의 철학적 체계에 있지가 않답니다.. 스스로 지혜있다 생각하나... 실상 말씀에 비추어보면...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것이 외식이요 위선이요 가증이라고 주께서 복음서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무어무엇 무엇무엇은 거시기하나... 그 중심의 의와 인과 신이라는 생명은 모른다(버렸다)는 말씀입니다.. 철학과 의문의 껍데기를 붙드는 자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묵상해보시길 바랍니다.. 교리서 하나 보는 시간에 말씀을 목숨걸고 연구해야 합니다.. 교리서 그것 정말 유치한 철학에 불과합니다..
전번에도 말슴드렸지만... 교리나 신학을 연구해서 깨닫는게 쉬울까요.. 말씀을 연구해서 깨닫는게 쉬울까요... 교리나 신학을 연구해서 그 내용의 전면모와 생명을 발견하는게 어려울까요? 하나님의 말씀의 전면모와 생명을 발견하는게 어려울까요? 정답을 말씀드리면... 신학이란것.. 교리라는것.. 정말 단순하며 단순무식합니다.. 어려운게 아닙니다.. 그것 좀 안다고 아는게 아닙니다.. 저도 왠만큼 다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끝도 없고 그 깊이와 넓이와 어떠하심은 광대하십니다.. 신학을 깨달았다는 자라고 말씀을 알까요? 정말 웃기는 발상입니다.. 결코 모릅니다.. 유치한 초등학문을 했다고... 비교할 수 없는
고등학문의 천상에 속한 하나님의 말씀의 생명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면.. 이는 마치 유치원생이 유치원 교육과정을 끝내고... 대학서적을 간파했다고 말하는 어리석음에도 못미치는 것입니다... 제 말의 뜻을 발견해야 될 것입니다.. 신학했다고 자랑하지 마십시오.. 그런건 다 유치원생 수준의 초등학문에 불과한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돌아봐야 될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의 생명이지... 알마니즘이니 칼비니즘이니 이런 초보 초등 학문이 아니랍니다....
아무리 이야기 해도 레마님 하고는 평행선을 달릴것 같습니다!!~~그러나 그 마음만은 받아 들이며,.이해 합니다!!~교리나 신학을 바탕으로한 신앙이 정립되어야 하는데,.그것을 부정함은 또 다른 교리위에 서 있음을 인식 하셔야 합니다!!~지금 그것을 모르시고 있네요!!~우리가 율법에 매이지는 않지만,.그 율법안에 담겨있는 정신은 지켜야 합니다!!~율법 이야기 나오면 ,..또한 한참이나 쟁론이 되겠군요!!~참으로 바르게 이해 한다는것이 평생 걸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레마님은 영지주의적 관점에 빠지신 분입니다. 거룩한 지식만이 바른 지식이고 그 외의 것은 다 초등학문이고..... 자신이 제시하는 방법 외의 어떠한 것도 사망에 이르는 것이라고.... 레마님도 결국은 영지주의의 옷을 입고 성경을 가르치는 분이군요. 신학이 단순하고 무식한 것이라고요? "내가 먹지 못하는 생선은 다른 사람이 먹어서도 안 돼. 내가 먹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생선은 다 비린 것이야" 이런 독단에 빠져 있습니다.
레마님은 이원론이나 흑백론의 의미를 아셔야 합니다!!~~내가 시장에서 장사하면 세상일이요!!~성경 들고 복음 전하면 하나님의 일이다 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성직은 이 세상에 없답니다!!~제가 젊은날 이걸 일찍 깨달었어야 하는데,.이걸 깨닫는데 세월이 많이 걸렸지요!!~우리안에 믿음이 들어오면 모든것이 다 하나님의 일이요!~거룩한것입니다!!~우리의 육체가 더럽다고 얼마나 방치 했던가!!~죽으면 썩어질 몸이라 하여 얼마나 혹사 했던고!!~
이런 세속적인 표현이 있습니다.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다"라는.... 내가 주장하는 것은 다 옳아야 하고 남이 하는 말은 다 그른 것이어야만 한다는 그런 아집과 독단.... 2천년 역사의 신학과 교리가 레마님의 손끝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돼버렸습니다. 뭔가 제대로 안다면 그런 독단은 피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것은 기대할 수는 없을 것같습니다. 알렉산더 캠벨의 후예에 불과하신 분 같습니다.
그까짓 거의 사단적인 예정론을 거부했다고 영지주의라고 주장하다뇨.. 하나님의 말씀을 개똥철학에 비추어 판단하시려 드십니까? 저는 칼빈의 이중예정론을 은혜로우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삯군하나님이요 치졸한 하나님이요 괴독한 하나님으로 만드는 마귀의 작품으로 보는 사람입니다.. 잘못된 교리에서 벗어나세요.. 그 교리를 신봉하는 이상.. 아모르님도... 광대하시며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치졸한 하나님으로 만드는 죄에 참여하는 한 사람에 불과한 것입니다.. 칼빈의 그 교리가 무슨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찬양하는 교리라고 보시는지... 속지 마시고.. 눈을 뜨시고.. 바로 보세요...
예정 신학 교리를 붙잡겠다는 분들 그냥 두십시오. 몇번 나누어보고 중단할줄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끝없는 논쟁은 유익보다는 감정으로 흐르기가 쉽습니다.
저는.. 그 신학 교리를 붙잡지 말고.. 떨쳐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2천년역사라구요? 그런 2천년역사는 누가 주장한 주장입니까? 카톨릭을 참교회라고 보십니까? 그 아류에서 1500년대에 조금 벗어난 종교개혁자들이 성경의 전체를 대변한다고 보십니까? 정말 교회사를 잘못 알고 계시네요... 교회의 역사는 2천년동안.. 초대교회에서 아나밥티스트들에의해 현재까지 지탱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카톨릭과 종교개혁가들의 교리역사를 전체 교회사로 보는건 허구맹랑한 발상이십니다..
교회사를 제대로 공부한 적이나 있으십니까? 현재는 과거에서 구성되는 것이고, 또 미래를 결정 짓습니다. 과거에 의존되지 않은 지식이란 없습니다. 역사학에 대한 기본 지식이나 갖고 계십니까?
역사학? 제게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어떤 사람을 숭상하지도 않고.. 어떤 위대하다는 사람의 말도 신봉하지 않습니다.. 저는 모든 이가 제겐 말씀을 위한 참조와 조언으로만 여길뿐입니다.. 그 모든 사람들이나 서적이나 기록은 부수적일뿐.. 오직 말씀만을 숭배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솔직히 다른것엔 관심도 없습니다..
그런 전제는 어떤 그리스도인이든 다 갖고 있습니다. 혼자만 성경을 본다고 착각하지는 마십시오. 저는 칼빈의 업적 속에서 성경을 보지만 레마님은 캠벨의 사고에서 성경을 보시는 차이 뿐입니다.
켐벨이 무슨 말했는지 관심도 없지만.. 말씀을 보십시오.. 전 말씀주의자 일뿐입니다.. 사람은 사람일 뿐입니다..
ㅎㅎㅎㅎㅎ 그래서 제가 레마님을 무식하다고 하는 겁니다. 예정론을 거부했다고 해서 영지주의라고 한 것이 아니라, 세속적인 지식을 무익하고 해로운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한 것입니다. 영지주의의 이원론에 대한 이해도 없으신 분이니 그런 이해도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말입니다.
무식? 그래요.. 님은 참으로 똑똑한 분이십니다.. 그렇게 똑똑하신 분이.. 그런 마귀적인 예정론도 분별못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인줄 선전하고 다니시니 말입니다..
칼빈의 영향을 받지 않은 교단이 없는데 그럼 다들 사단들이군요. 레마님은 혼자서만 하나님의 자녀이고요....
칼빈의 영향을 받았다고 마귀의 자녀라고 한적 없습니다.. 그런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다만, 그 교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그리고 인간에 대해서도 십자가의 구원의 복음에 있어서도 문제가 많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대화할 가치가 없으신 분이군요.. 그만합시다..
"칼빈의 예정론이 사단적이라면 다른 교리들도 사단적입니다. 사단적인 사람이 바른 교리를 말할 수는 없을테니까요. 그렇다면 사단적인 칼빈의 영향을 받지 않은 교리가 있지 않으므로 교리를 배운 모든 사람은 사단적입니니다"라는 결론이 도출됩니다. 칼빈의 교리가 사단적이라는 글은 레마님의 글의 도처에서 발견됩니다. 말을 바꾸지는 마세요. 저도 이만 자러 가야겠습니다.
저도 끝으로 말씀드립니다.. 칼빈의 교리는 그 자체로써 십자가의 도를 감옥에 가두는 교리지만... 그것이 십자가의 도를 정면 부정하진 않기에... 그 교리안에서도 얼마든 십자가의 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의 교리는 하나님을 편협화하고 복음을 가리는 교리이긴 하지만... 그 교리 자체가 알마니즘이나 카톨리즘처럼 십자가의 도를 정면 부정하진 않기때문에 구원의 복음 자체를 대적하는건 아닌 것입니다.. 오해하진 마시길 바랍니다.. 저는 그 교리 자체에대한 부분을 말하는 것이지.. 이 교리외에 교파에 속한 이들의 다른 구원에대한 문제마져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확대해석 하지 마세요.. 그 예정론을 겪어본자만 알겁니다..
저는 리플에도 달았지만.. 칼바르트에 대해선 아는게 없는 사람입니다. 그의 신학노선도 모릅니다.. 다만, 아는건... 거의 예정관이 저와 거의 일치한다고 소개드린 것 뿐입니다.. 최소한 그의 예정관은 성경적으로 바로 직시한 예정관이라고 말씀드렸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