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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학(理學)의 부흥(復興)에 대한 나의 견해
철학과2023101228 愚人 吳政禹
한국 근현대 철학에서 근대란 무엇인가? 서구적 개념에 대입한 게 아닌 말 그대로 가까운 시기에 철학은 유교 성리학이다. 그리고 가장 부정되는 철학 역시 유교 정확히는 성리학이다. 현재 단언컨대 근본을 부정한 상태로 여러 사상을 잡다하게 수용하여 이상하게 운용하는 건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가 유일무이하다고 생각된다. 서구권 정확히는 북유럽 3국(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과 독일, 프랑스의 이념 정확히 말하자면 유럽 진보의 이론을 무작정 도입하는 좌익과 미국식 종교관과 시장개념이 뒤섞인 기독교 보수를 그대로 계승 표방하는 우익이지만 역시 진보처럼 무작정 도입을 시도하는 걸 볼 때 우리는 사상적으로 근대와 멀어졌다. 더 정확히는 유신체제의 후계 세력이 87 체제 이후 완전히 몰락한 때가 그나마 조금 있었던 유교 성리학 질서의 붕괴에 시작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항상 나는 유교적 성리학적 질서를 부흥하는 거야말로 현재 우리 사회에 벌어지는 모든 퇴폐를 무너뜨릴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녔다고 생각하며 더더욱 확신이 든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에 벌어지는 문제에서 세계 정세를 제외한 우리 내부에 문제는 정신문화의 타락에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부정하겠지만 현대 중국인과 마찬가지로 천민자본주의에 잠식되었다. 다른 말로 물질 만능주의가 극단적으로 판을 치는데 인구에 비하여 사기 범죄율이 매우 높다. 또한 정치인의 극단적 태업과 극단적 시민 운동이 활발하여 사회를 혼란으로 이끌고 있으며 초저출산 및 높은 자살률과 최근 들어 국적 이탈자까지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에 사이에서 계속 가속화 되어가며 기성세대의 이기심과 젊은 세대의 어리석음과 무관심으로 해결의 기미가 전혀 없다. 현재와 미래가 과거보다 퇴보하고 있는 지금 우리의 근본 유교 성리학적 질서의 부흥이 시급한 일이다. 나는 몇 개의 글을 발표하여 당연한 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지금 대다수에 대중들을 지적했는데 장담하자면 우리나라는 민주주의 퇴폐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시라 할 수 있으며 곧 우리나라 지식인을 필두로 한 구성원들이 항상 가지고 있는 민주주의의 우월성과 선함이 얼마나 큰 착각인지를 인지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수신제가치국평천하”에 걸맞게 개인으로 시작해서 계몽을 시작해야 한다. 그 계몽법은 각 개인의 분수를 인지하게 해서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해악을 끼치는 걸 방지하고 가족법을 회복시켜서 높아지는 이혼율을 극도로 방지하고 낙태죄를 매우 강하게 처벌하여 출산율 저하를 막는데 기여하고 체벌제도를 부활시켜서 학생이 선생에게 도전하지 못하게 하고 역시 선생 또한 도덕적 우월성과 교사라는 권위에 맞게 하여 전교조의 폐해를 차단해야 한다. 방송을 개혁하여 독신을 미화하고 그밖에 연애를 다루는 프로그램 역시 유해 방송으로 지정해야 한다. 출산율의 저하는 결혼율의 저하고 결혼율의 저하는 연애 강조로 시작된다. 따라서 유교적 가족주의적 질서를 장려해야 한다. 그 밖에 인권, 성평등같이 당연한 질서를 무너뜨리는 교육은 당장 철폐해야 한다. 이렇게 말한다면 꼰대 혹은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하는 부류들이 매우 많다 그렇다면 내가 질문하겠다. 나를 비판하는 부류들이 말한 대로 해서 해결된 게 단 하나라도 있는지 묻고 싶다. 가부장적 질서가 붕괴 이후 가정교육은 쇠락했고 덕분에 이기적인 개인이 나오고 그런 개인들이 대중이 되어서 학교 교육을 무력화하고 개인주의라는 이유로 독신 및 자유연애라는 방탕한 생활을 장려하여 초저출산 높은 이혼율 높은 낙태율을 기록하고 이런 걸 방치한 기성세대가 연금이라는 유럽식 좌파 제도를 누리겠다고 세대 갈등으로 이어졌다. 유교적 종법 질서를 회복한다면 기성세대는 모범과 염치를 알게 되고 젊은 세대는 공경심과 존엄함을 알게 된다. 공자께서 말씀하신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이미 정답을 오래전에 내놓았고 성리학자들은 민간으로 개념을 넣기 위해 향약을 실시하였다. 근데 문제는 이런 것에 직접적으로 나서야 하는 현재 남아있는 유림 혹은 문사철(文史哲) 학자들이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한다. 당장 성리학을 보자 성리학은 인간의 성(性)을 우주적으로 이치를 설명하기는 하지만 그것보다는 정치적 권력만 있지 대다수에게까지 확장 못했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서 탄생한 것이다. 즉 정치적 목적이 강한 학문이다. 성에 대한 탐구와 태극의 이치 등 모든 것은 송나라의 학자들이 정리했으며 그 대표가 바로 주자(朱子)다. 즉 주자가 정리했으니 논할 필요가 없고 후세는 리(理)를 강조해야 한다. 애초에 당시에는 성리학이라는 말보다는 리학 혹은 리학자라 불렸다. 혹은 도학 도학자로 불렸다. 그래서 나는 나의 견해를 말하다가 성리학자로 불리기에는 적절하지 못한 것 같다고 말을 들었을 때 전혀 문제가 없었다. 성리학의 근본은 유학이기에 더 높은 이치를 따라야 하며 그것은 공맹(孔孟)이기 때문이다. 주자께서도 공맹을 따르셨는데 어찌 내가 주자만을 높이겠는가? 나는 답답하다. 주자께서 이륙하신 성과를 근본을 따르겠지만 사실은 재해석하려는 조선학자들의 담론을 이해하기 힘들다. 그래서 내가 중요한 게 정치적인 학문 혹은 예악 질서를 말한 것이다. 주자께서 수신을 강조 하신 게 있으신데 國家(宋)와 北虜(金)는 서로 不共戴天의 원수임은 분명합니다. 오늘날 전쟁을 하지 않으면 복수할 수가 없고, 守備를 하지 않으면 제압하여 이길 수가 없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이것은 天理의 自然이며 人欲의 사사로운 怨望이 아닙니다. 先王이 夷狄을 제어하는 道는 그 근본이 威强에 있지 않고 德業에 있습니다. 그 책임은 邊境에 있지 않고 朝廷에 있습니다. 그것을 갖추는 것은 兵食에 있지 않고 紀綱에 있습니다.(주자어류)
이것은 주자께서 정강의 치욕을 설욕하고 고토 수복을 강조하셨던 글인데 여기에서 주목해야 하는 건 덕업과 기강을 강조하신 것이다. 송나라의 폐단과 정신을 바로잡는 것이야말로 수신(修身)이며 예악 질서 및 정통성 강조는 제가(齊家)와 치국(治國) 그 결실이 평천하(平天下)다. 철학과 정치는 같이 가는 것이며 역사와 문학도 같기에 문사철(文史哲)은 하나다. 근데도 요새는 분리되어 올바른 이치를 알지 못하고 있다. 조선 때 태극 논쟁을 비롯한 대다수 논쟁이 답답한 게 이것이다. 주자께서 정리하신 걸 유지하고 그것에 반기를 드는 무리가 있다면 논쟁할 필요도 없이 관학(官學)의 위엄으로 물리치면 그만이다. 근데 왜 성에 집착하는가? 그래서 나는 관학파와 훈구파가 사림 보다 재평가를 받아야 하며 우암 송시열이 가장 훌륭한 대학자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암 선생은 주자의 가르침을 그대로 보존하시려 노력하셨기 때문이다. 우리 효종 대왕이 북벌에 뜻을 두셨을 때 행보를 보시면 수신을 강조하였는데 주자와 비슷한 것이 아니겠는가? 식견이 없는 부류들은 조선이 왜란과 호란을 겪고 난 후 성리학적 질서를 강조한 것이 퇴보적으로 인지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 기강이 무너지고 매우 위태로운 내우외환이 일상적으로 오는 상태에서 당연한 조치를 실행한 것이며 애초에 명종 이후 사림의 분파와 당쟁이 내우외환을 해결하기 어렵게 했다. 붕당의 폐해를 지적하면 일제 식민사관이라고 비판하는데 식민사관과 별개로 이미 정립된 개념을 계속 재해석하고 논쟁하여 사직이 아니라 자신들의 스승만을 위해 나서는 행보를 볼 때 위군자(僞君子)를 비판하는 건 매우 당연하다. 목적과 수단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 것을 비판하는 건 마땅하다. 성리학은 옛것을 익혀 새것을 이룬다는 고차원적인 정치 학문인데 주자께서 정리하신 걸 재해석하여 서로에 스승의 우열을 가리는 행태는 성리학적 목적에서 벗어났다. 우암 선생께서는 현실적 경세관과 주자의 이치 더 나아가 공맹의 가르침을 회복하고 발전시키려 노력하셨다. 정도전, 권근을 비롯한 조선 초 중기 혹은 고려학자들의 수준을 사림보다 못한 취급 하는 건 매우 부적절하다. 주자의 학문을 그대로 적어서 개론서 수준으로 적는 게 기본이자 제일이며 그것을 재해석하며 담론을 넓혀서 조정에서까지 다루는 건 문제가 있다. 그래서 사직의 안녕을 위해 수신을 강조하여 무너진 질서를 되살리고 정착시킨 우암이 진정으로 대단한 학자다. 그렇다고 퇴계를 비롯한 동인 계열 학자들을 비난하는 건 절대로 아니다. 왜냐하면 동인이 나뉘어서 서인과 당쟁을 벌이다가 결국 일부 남인을 제외하면 몰락한 이유는 퇴계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북인의 난정 역시 스승 조식은 잘못이 없다. 이걸 분명하게 해야 한다. 역시 세도정치의 등장 역시 노론 및 우암과 그의 제자 잘못이 아니며 율곡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견문을 넓히다가 일본의 성리학 혹은 넓은 의미의 일본 유교를 주목하게 되었다. 현재 우리나라는 좌우를 가리지 않고 유교 성리학을 망국의 학문으로 취급한다. 지식인 대중도 상당수가 여기에 들어간다. 중국 역시 신문화 운동과 문화대혁명(대난동)으로 초기화되었으며 요새는 정치적으로 편법 적으로 사용 중이다. 월남(베트남)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일본은 다르다. 서구적 개념을 대부분 소개할 만큼 많이 들여와도 자신들의 정체성과 유교적 충효 개념이 근대 국가개념과 잘 융합이 되었고 부국강병을 이뤄서 유신(維新)을 성공시켰다. 일본을 제외한 나라들이 패망한 이유는 부패한 정치세력과 도움이 안되는 민중들의 합작으로 실패한 거지 유교적 질서 및 학문은 전혀 문제가 없다. 일본이 유교를 받아들인 시기는 오래되어 백제와 당나라의 학문을 수용하였고 몇몇 고승들이 송나라에서 리학을 소개해 오기도 하였으나 당시에는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그러나 조선의 허산전과 강항에게 영향을 받은 등원성와(藤原惺窩) 익숙한 표현으로 후지와라 세이카를 시작으로 그 제자 임나산(林羅山 하야시 라잔)이 막부의 출사하여 결국 성리학이 관학이 되는데 성공했다. 그 결실은 湯島聖堂(탕도성당 유시마 성당으로도 불림) 설립까지 되었다. 일본의 긴 유학사에서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문묘가 이때 정립이 되었다. 물론 이후 양명학과 일본 특유의 고학파들이 성리학을 비판하는 등 여러 변화가 있었으나 관학은 성리학이며 주자와 다른 해석을 했지만 공맹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참된 행보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 대표가 산록소행(山鹿素行 야마가 소코), 이등인제(伊藤仁齊 이토진사이), 적생조래 (荻生徂倈 오규 소라이) 가 있는데 물론 나도 무조건 적으로 일본 유학을 찬양하는 건 아니지만 공맹의 가르침을 강조하고 정치적 각성을 위한 시도가 훌륭하며 배울 가치가 있다. 나는 요새 이렇게 생각한다. 주자의 가르침도 결국 공맹의 가르침이고 공맹주(孔孟朱)를 중심으로 증자의 제자 오기가 속한 병가와 공자의 제자 자유,자하에 학문을 계승한 순자의 제자 한비와 이사의 법가 또한 공자의 갈래에서 나왔으니 수용하고 육구연, 왕수인 역시 비록 시비를 가려야 하지만 생각해 보면 육왕학(陸王學)은 문제가 있을지언정 육구연은 나름대로 유능한 지방관이었고 왕수인 역시 영왕 주신호의 난을 진압하는 등 뛰어난 관리였다. 즉 학문과 별개로 인물들은 크게 문제 삼을게 없으니 주자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육왕학의 일부는 공맹(孔孟)과 어긋나지 않으면 무조건 배척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된다. 유교질서가 완전히 무너져서 광망한 세상이 된 지금 하나라도 더하여 정치적 권위를 되찾으려 해도 시급한데 사소한 시시비비는 가릴 처지가 아니다. 일본적 유교 경세관은 유신으로 이어졌고 그게 우리나라에 유신을 가져와 태평성대를 가져왔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나라는 이러한 부흥의 시작 유신을 폄하하고 있으니 근본을 알지 못함이 크다. 내가 유교적 질서를 강조하면 민중을 폄하했는데 이것은 결과를 본 결론이었다. 현재 우리나라는 문맹률이 최하위고 해방 이후 태어난 세대부터는 최소한 초등교육을 그 이후부터는 고등교육 이제는 대학은 물론이고 대학원까지 배울 만큼 배웠다. 그러나 아직 까지도 제대로 된 근본을 알지 못하고 운동권의 수정주의적 역사관으로 우리나라의 근본을 부정하고 있다. 산업화의 위대한 경제성장을 개발독재로 폄하하고 반공주의 애국주의를 구시대 산물로 여기며 고전적 가치를 무시하고 폄하하는 오만방자함이 매우 극에 다 달았다. 그래서 유교적 가치를 강조하고 그것을 성공시켜서 정착화 시키기 위해 일본을 보고 깨달았으나 이러한 큰 그림을 아무도 이해를 못한다. 공부의 부족 때문이다. 책을 안 읽거나 혹은 읽더라도 제대로 된 책을 읽지 못하니 견문이 부족하고 그래서 반지성주의가 판을 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교육이 중요하며 교육의 시작은 가정교육이고 그것을 이루는 유교적 가족제도가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이유다. 그래서 내가 성리학의 성을 다루지 말고 리를 다루고 정치권력을 수복할 수 있는 이론을 찾고 보충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유교 성리학이 관학에 학문의 지위를 잃은 지난 백년 간 무슨 치욕을 당하고 굴욕을 겪었는지 말할 필요가 없다. 도(道)를 이루는 건 권도(權道)이며 왕도(王道)와 패도(霸道)는 무조건 같이 가며 그것을 개척하는 게 인도(人道)이며 그 인도를 개척하는 게 하늘의 길(天道)이다. 천도는 이치(理)이며 그래서 리를 탐구해야 하고 그것이 유교의 부흥(復興)의 길이자 사회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자 첫걸음이다.
추신: 지난 고려 성리학에 대하여 담론을 놔눴었는데 찾은 자료가 있기에 첨부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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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강의 시간에 듣는 것으로는 어떤 논리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글로 보니 어느정도 논리가 보이네요. 아래에 학우님의 글을 읽으면서 느낌점과 의문점, 비판점을 달아놨습니다.
1. 이 글에는 문단 나누기와 들여쓰기가 없습니다. 글을 읽을때, 문단이 안 나뉘면 논리적 흐름을 명확하게 구분하기 힘듭니다. 가독성 또한 떨어집니다. 교양 글쓰기를 수강하셨는지요? 필수 교양임에도 수강하지 않으셨으면 수강하시고 이미 수강하셨다면 교재를 통해 복습하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2. 글의 근거가 부족합니다. 주장을 뒷받침 해줄 근거가 빈약하거나 잘못되었거나 없습니다. 우선, 천민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선 한국의 소비자 지출 증가 통계와 소득 불평등 통계를 예시로 드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 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천민 자본주의에 대한 귀하의 근거는 한국의 높은 사기 범죄율입니다. 이는 각주처리를 하여 해당 통계로 가는 링크나 통계표를 넣는 것을 추천합니다.
3. 글에서 ‘극단적 시민운동’이 나왔는데 학우가 생각하는 극단적 시민운동이 무엇인지 독자들은 모릅니다. 이 부분도 예시를 통해 설명해주어야 합니다.
4. 정치인의~~~~전혀없다.의 문장은 너무 길고 그 사이의 내용이 많아 읽었을 때 의미를 받아 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정치인의 극단적인 태업과 시민 운동의 격화로 사회는 혼란에 빠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초저출산, 높은 자살률, 그리고 최근 증가한 국적 이탈자 문제까지 더해지며,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습니다. 기성세대의 이기심과 젊은 세대의 무관심이 겹쳐, 문제 해결의 가능성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문장을 수정하면 더 읽기 편할 것 같습니다.
5. 현재와 미래가 과거보다 퇴보했다는 표현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우선, 우리는 지금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때문에 과거와 미래는 비교할 수 없고 그러므로 미래가 퇴보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두번째, 과거보다 현재가 퇴보했다면 그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학우의 지난번 표현에 따르자면 과거 사회는 ‘정상 사회‘입니다. 그렇다면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 ’정상‘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살아보지도 않은 과거 사회를 우리가 현재 살아가는 사회와 비교 할 수 있습니까? 학우는 사료를 통해 알 수 있다 답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시대에 남은 정보는 한정적입니다. 그
그 시대의 모든 정보가 있지도 않고 일부 있는 정보도 일부 계층들을 위한 정보가 많습니다. 때문에 완벽하게 비교하는 일은 힘듭니다.
6. 과거의 사회에 있던 가치를 그때 통했다는 이유로 현대에 가져와서 그대로 적용하려 한다면 그것이 올바르게 적용될까요? 왜 과거에 있던 것이 현대에 오면서 사라졌을지 생각하보면 답이 나옵니다.
7. 학우는 글에서 낙태죄에 대해 강하게 처벌하자는 주장을 썼습니다. 그렇다면 강간에 의해 임신한 경우는 어떻게 할 건가요? 이 경우도 출산율 저하를 막는데 도움을 주기에 낙태를 하면 안되나요? 이 경우 낙태를 했을 시 처벌이 되나요? 또한 출산율 저하에 대한 언급이 많습니다. 그러나 출산율 저하의 원인을 잘못 인지 하고 있는 거 같습니다. 2010년 자료이지만 김승권 연구자의 ‘우리나라 저출산 원인과 대책’을 읽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같은 연구자의 2004년도 논문도 있으니 읽어보길 바라겠습니다.
8. 글에서 ‘나를 비판하는 부류들이 말 한 대로 해서 해결된 데 단 하나라도 있는지 묻고 싶다.’라는 학우의 주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반대로 묻고 싶습니다. 학우와 그리고 학우의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한 행위에 의해 해결된 것은 있나요?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익숙하니 그게 맞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구조 안에서 반드시 누군가는 희생을 하고 있습니다. 그 누군가는 반드시 약자입니다. 그들의 입을 막고 그들의 희생에 의해 사회는 유지되는 것입니다. 다른 분야는 몰라도 적어도 나는 노동 인권 문제에서 우리가 많은 발전을 했다 생각합니다. 과거에는 최저 임금도 없었고 휴게시간도 없었습니다. 잠도 안자고 공장에서 미싱을 돌리다 폐에 문제가 생기면 그대로 해고였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적어도 산재처리라도 해줍니다. 아무도 노동 운동에 대한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면 우리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학우는 은연중에 자신이 기득권층과 같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아닙니다. 우리는 20대입니다. 노인과 10대보다는 낫지만 우리는 사회 권력구조에서 낮은 위치에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본다면 동양인인 우리는 더 낮은 위치에 있을 겁니다.
9. 이 뒤부터는 교수님의 댓글로 피드백 받길 바랍니다. 학우란 같이 배우는 벗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정우학우와 대화를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정우 학우를 보면 대화라기 보단 일반적 표출을 하고 있단 느낌을 받습니다. 예를 들어, 제주 시청이나 서울역에 가면 불신지옥을 외치고 플랜카드를 앞뒤로 붙이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보신 적 있나요? 그들은 교인이고 전도를 하지만 그 누구도 그들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들이 다니는 교회를 묻지 않습니다. 그들은 폭력적으로 자신의 의견만 상대에게 전달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폭력입니다. 나는 학우의 발언에서 그런 폭력을 경험합니다. 모든 언어는 당사자성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강의실에 있는 그 순간, 우리가 내뱉는 단어 혹은 표현에 상처 받는 사람이 있지는 않을까요. 학우는 당사자성이 결여된 발언을 많이 합니다. 우리 강의실에는 여성 학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5/18에 희생된 가족과 그 시절 당한 고문으로 죽거나 아직까지 고통받는 사람을 아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신을 진지하게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이 당신을 학우로 생각하듯 당신도 그들을 학우로 생각했으면 합니다.
10. 마지막으로 정말 오지랖이지만 정말 신경쓰이는 점이 있어서 적습니다. 학사 편람의 졸업 요건을 읽어보셨습니까? 지금 복수전공을 하고 있는데 시간표가 학년에 맞지 않는 강의만 듣는거 같아 걱정이 됩니다. 철학과는 교수님 수가 적고 이번에는 윤교수님이 은퇴하시고 이런 저런 일이 생기면 시간표 짜는 게 정말 힘들어집니다. 만약 이런 점이 힘드시다면 학과 조교 선생님께 조언을 부탁받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중간고사 화이팅하세요.
앞서 학우의 정성스러운 댓글이 있었으므로, 총론적 관점에서 몇 가지 고려하였으면 싶은 것들을 간략하게 정리해보겠습니다. 먼저, 어떤 주장을 하고, 그것을 강화하기 위해 사료나 주장을 인용할 때는 객관성을 확보하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장보다는 주장이 제시하고 있는 논거의 타당성을 강조해야 합니다. 추신으로 첨부한 두 논문은 모두 최영성선생님의 저작이고, 이 분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은 성리학적 용어 내지는 성리학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용어와 관련된 사료입니다. 그런데 그 사료가 성리학의 고려 중기 유입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는 될 수 없습니다. 최영성선생님의 주장에 따르면 "그렇게 볼 수 있다"는 정도입니다. 역사학자라고 해서 성리학 유입에 대한 논의가 철학자의 주장보다 신빙성과 격이 떨어진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수업 시간에 강조했듯이 어떤 주장을 임의적으로 인용하는 것이 학계에서 수용되지는 않습니다. 논문을 찬찬히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래서 대부분의 학자는 "~에 따르면 ~라고 볼 수 있다."라고 하지, "~로 볼 때 ~이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객관적 검토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본문도 객관성에 좀 더 유의하면 좋겠습니다.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제가 생각해보지 못한 새로운 관점으로 정세를 해석하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앞으로도 학우님을 비판하는 사람들과 '학문적'으로 맞서 글을 써주시고 토론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분명 그 대립과 수용의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정우님과 다른 학우들 서로의 관점이 넓어질거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