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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일기 3 |
1. 현관문에 걸린 수상한 종이봉투 선선한 바람이 살랑살랑 불던 작년 가을, 우리의 첫 아기가 태명대로 엄마 크게 고생시키지 않고 '순탄'하게 태어났다. 아기를 처음 품에 안은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마냥 기쁘기만 할 줄 알았는데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이 복받쳐 올랐다. '이 작고 귀한 생명을 내가 잘 키울 수 있을까? 이토록 큰 축복을 얻을 자격이 내게 있을까?' 뜻밖에 몰아친 감정들로 조금 지친 몸과 마음을 조리원에서 달래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날이었다. 현관문 손잡이에 의문의 종이 가방 하나가 걸려 있었다. '뭐지? 누가 갖다 놨지?' 의아해하며 열어본 가방 안에는 노란 아기 옷과 쪽지가 하나 있었다. 쪽지부터 펼쳐보았더니 단정한 서체로 적힌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한 줄의 짧은 편지였지만 그렁그렁 눈물 맺힌 눈으로 몇 번을 반복해 읽었다. '아가야, 이 세상에 와줘서 고맙고 환영해!' 따뜻한 인사로 우리 아이를 반겨준 사람은 아래층에 사는 이웃이었다. 가족 말고도 내 아기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감동이었는지 모른다. 그녀는 평소에도 나를 언니처럼 살뜰히 챙겨준 마음씨 고운 이웃이다. 입덧이 심한 나를 위해 선물해준 레몬 사탕이나 가끔 우리 집에서 차를 마시며 결혼생활에 대한 이런저런 좋은 얘기를 해주었던 시간들은 내게 상당한 위안이 되었다. 출산한 뒤에도 그녀의 따뜻한 정을 느끼며 금세 몸과 마음을 회복한 나는 집으로 그녀를 초대해 맛있는 요리로 보답했다. 큰 축복 속에 태어난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 어느덧 첫돌을 앞두고 있다. 세상이 점점 각박해져 간다지만 난 아이가 자랄수록 내가 사는 동네가 점점 좋아진다. 어제도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한 이웃에게 "혹시 아기 울음소리가 너무 시끄럽진 않나요?"라고 조심스럽게 여쭈자 "전혀요. 걱정 말고 편하게 아기 돌봐요" 하며 환하게 웃어주셨다. 이렇게 배려 깊은 이웃들과 함께라면 앞으로도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 것 같다. 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 밝고 포근할 것 같아 안심이 되는 요즘이다. 송현욱 인천에서 나고 자란 35세 초보 엄마입니다. 10년 간 요리사로 일하다가 요즘은 아기띠를 두르고 집앞 공원에서 산책을 즐기며 하루빨리 예전 몸매로 돌아갈 날과 아이가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하길 학수고대합니다. 2. 헌 교복을 입은 아이 학창 시절이란 무릇 그립고 아름다운 때지만 내 경우는 다르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중고등학교 모두 헌 교복을 입고 다닌 내겐 서러운 기억이 훨씬 많다. 교복 맞출 돈이 없어서 언니가 물려준 교복을 입고 중학생이 된 난 헐거운 교복을 걸친 내 모습이 볼품 없어 항상 부끄러웠다. 한번은 와이셔츠의 헤진 목깃을 감추려고 뒷 목에 반창고를 붙였는데 같은 반 남자애가 속옷이 삐져나온 줄 착각하고 나를 놀려댔다.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자식에게 주는 것이라고는 창피함밖에 없다는 어리석은 생각에 부모님을 미워하며 10대를 보낸 나는 몸만 크고 마음은 자라지 못한 어른이 되었다. '얼마나 능력이 없었으면 자식 교복 하나 사주지 못했지?'라는 원망만 키워가던 난 결국 몇 해 전 엄마 앞에서 가슴에 맺힌 서러움을 쏟아냈다. 엄마가 눈물을 훔치며 미안하단 말만 반복하는데도 내 마음속 상처받은 아이는 모진 말만 내뱉을 뿐이었다. 오랜 시간 단단히 맺혀 있던 내 안의 응어리. 영원히 굳어있을 것만 같던 그것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 건 친한 지인의 아픔을 나눠 가진 뒤부터였다. 중학생 때 구두를 새로 사달라고 하는 자신에게 왜 멀쩡한 신발을 놔두고 새 것을 사달라고 하냐며 버럭 화를 내던 아빠의 표정이 그녀의 가슴에 옹이처럼 박혀 있다는 것을 들었다. 헌 교복이 그토록 서글픈 기억이었던 건 나만 가난하고 힘들었다는 착각 때문이었을까? 나와 똑같은 누군가의 아픔과 대면하고 나자 내 내면의 아이를 다독여 줄 용기가 생겼다. '사람은 누구나 상처가 있어. 그걸 계속 품고 살지, 훌훌 털어내고 성숙한 어른이 될지는 너한테 달렸어. 그러니 그만 엄마를 용서해 줘. 일찍 남편을 여의고 자식 셋을 먹여 살리느라 고생하신 엄마잖아.' 점점 구부러지는 엄마의 등을 바라보며 이제는 원망 대신 다짐을 한다. 훗날 웃으며 엄마를 기억할 수 있도록 지금부터라도 엄마 손을 꼭 잡고 다정한 말을 건네야겠다고 말이다. 박새롬 3녀 중 장녀로 태어나 동생들에게 월급으로 교복을 사주었던 책임감 강한 30대 회사원입니다. 다시 학창 시절로 돌아간다면 가족여행을 꼭 가보고 싶은 아쉬움이 있습니다. 얼마 전 엄마 생신날 함께 드라이브를 즐기며 좋은 추억을 쌓은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습니다. 3. 우리 숙이는 착한 딸이지! 동글동글 귀여운 생콩이 한때는 미움의 대상이었던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인가, 우리 집에 놀러 온 이모가 내게 건넨 말 한마디로 애꿎은 생콩만 내게 미운털이 박혔다. "우리 숙이는 꼭 생콩 같아." 아마 사소한 일에도 잘 토라지는 조카에게 놀리듯 건넨 말이었을 텐데 난 온종일 기분이 언짧고 서운했다. 내가 평소에 좋아하고 동경하는 이모가 나를 비린내 나는 날콩에 비유하다니 너무 섭섭했다. 하필 이모처럼 예쁘고 멋진 사람이 되고 싶었던 터라 짜리몽땅하고 풋내 나는 '생콩'은 더욱 상처가 된 단어였다. 10년 전 엄마가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다행히 생명엔 지장이 없었지만 뇌가 손상돼 왼쪽 팔다리가 마비되고 인지장애까지 왔다. 꼼짝없이 병원 신세를 지게 된 엄마를 따라 나도 문턱이 닳도록 입원실을 드나들었다. 힘들고 아픈 시간이었지만 병원에서의 시간이 우울했던 것만은 아니다. 어둠 속에서도 별빛은 빛나고 진흙에서도 꽃이 피듯 엄마와 함께했던 예쁜 기억이 그 시간 속에 존재한다. 병상에 누워 있는 엄마의 곁에서 엄마 손을 꼭 잡고 엄마의 애창곡을 불러드린 기억이다. <한 송이 흰 백합화>를 나직이 부르는 내 목소리에 엄마도 컨디션이 좋은 날엔 목소리를 얹었다. "가시밭의 한 송이 흰 백합화 고요히 머리 숙여 홀로 피었네." 어눌하지만 듣기 좋은 엄마의 노랫가락은 자장가처럼 따스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엄마의 한과 외로움이 전해져 가슴이 먹먹해졌다. 국어 선생님이 되는 것이 꿈이었으나 장녀로서 동생들 뒷바라지하느라 학업을 포기해야 했던 엄마의 젊은 날이 노래와 함께 구슬프게 전해졌다. 엄마는 가슴 속에 쌓인 한을 멜로디에 실어 조금씩 흘려보낸 걸까. 그래서였는지, 아니면 인지장애 탓이었는지 엄마는 슬픈 기억을 모두 잊고 행복한 이야기만 늘어 놓았다. 아빠가 돌아가신 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보고 싶어 했다. 그 모습이 안타까워 엄마를 잘 모시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리던 자식들도 엄마는 가만히 다독여주었다. 엄마의 다정한 웃음에 때때로 어리광이 부리고 싶어졌던 나는 언젠가 한 번 엄마에게 물어봤다. "엄마! 이모가 오래 전에 나보고 생콩이라고 한 거 있지? 엄마도 그렇게 생각해?" 덜 영근 생콩처럼 버릇없게 군 적이 많아 엄마도 그렇다고 대답할 줄 알았지만 예상치 못한 엄마의 대답에 난 눈시울이 붉어졌다. "우리 숙이는 생콩 아니다. 엄마도 많이 도와주고 착한 딸이다." 엄마에게 툴툴거리며 마음 상하게 한 날이 많았는데도 착한 딸로 기억해주는 엄마가 고마워 나는 엄마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돌이켜보면 엄마가 들려준 사랑의 말처럼 엄마는 언제나 내게 눈부신 사람이었다. 해가 저물 때 까지 밭에서 일을 하는 엄마가 무서워할 것 같아 학교 갔다 돌아오자마자 곧장 밭으로 달려가 보면 노을빛을 뒤집어쓰고 깨를 털던 엄마의 실루엣이 참으로 고왔다. 아름다운 추억에 푹 빠져 있다가 엄마의 기척을 느끼고 마저 궁금했던 걸 물었다. "근데 엄마는 콩 중에 무슨 콩이 제일 맛있어?" 강낭콩이나 완두콩 같은 대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엄마는 전혀 생각지 못한 콩을 말했다. "청국장이지!" 청국장은 여러 차례 불순물을 제거하고 정제해 만드는 금과 같은 콩이다.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만 날콩이 청국장이 되어 비로소 구수한 제 맛을 낼 수 있다. 마음속에서 생콩을 지우고 청국장 같은 사람이 되기로 다짐한 그날 이후로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 난 종종 자문하곤 한다. 내 아이들에게 억세고 향이 독한 생콩 같은 엄마는 아닌지…. 깊은 맛이 부드럽게 우러나는 청국장이 되려면 아직 인내와 노력이 더 필 요하지만 엄마의 사랑과 응원만 있다면 언젠가는 나도 지혜로운 부모가 되리라고 믿는다. 4년 전 겨울, 엄마는 7년여 간의 투병 끝에 하늘로 떠났다. 새하얀 백합을 닮은 함박눈이 엄마를 마중 나온 날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엄마가 보고 싶을 때면 노래 한 구절을 나직이 읊조린다. "어여뻐라 순결한 흰 백합화, 그윽한 네 향기 영원하리라." 이숙이 경기도 성남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40대 회사원입니다. 청국장처럼 진국인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취미 삼아 틈틈이 배운 수예로 찻잔 받침, 지갑 등을 만들어 지인들에게 선물하는 게 작은 행복입니다. L'AMOUR TOUJOURS언제나 사랑 / Gigi D'Agostino / SYMPHONIACS (Strings / Violin, Cello, Piano & Electronic Cov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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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운 걸음으로
공유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
설렘 가득한 9월
맞이하세요
사랑천사 님 !
좋은글 감사 합니다
반갑습니다
동트는아침 님 !
고운 걸음주셔서
감사합니다 ~
기쁨과 웃음 가득한
행복한 한 주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