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홍의 영화 속을 걷다>(14)
밥값 한다는 것의 어려움
이창재 감독의 <길 위에서>

< 길 위에서 On the Road / 다큐멘타리 / 2012년 / 104분>
무엇을 보고 싶은가?
경북 영천 은해사의 백흥암은 일 년에 딱 두 번만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린다고 한다. 부처님 오신 날과 백중날이 그 두 번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왜 그토록 닫혀 있어야만 하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곳은 금남의 집, 곧 비구니들이 참선정진하며 수행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남자가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으면 비구가 되고, 여자가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으면 비구니가 된다. 출가하는 데에야 다 제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가 아닌 여자가 출가하는 데에는 뭔가 더 특별한 사연이 있을 것이라며 궁금해 하는 것은 세속에서 허덕이며 사는 사람들의 공통된 호기심일 것이다.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길 위에서>를 만든 이창재 감독 역시 처음에는 이런 세속의 관심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감독의 육성으로 그러한 동기에 대한 나레이션이 흘러나온다. 금남의 집에 카메라를 들이대려는 감독에게 백흥암의 주지 스님은 이곳에서 당신은 무엇을 보고 싶으냐고 화두 같은 말을 던졌다는 것이다. 물론 감독이야 세속적 관심처럼 비구니들이 수행하는 곳이기에 호기심이 동했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물어온 주지 스님의 의중이야 더 생각하지 않아도 불을 보듯 뻔하다. 수행중인 스님들이 비구니이기에 관심이 많은 것이냐, 아니면 참선수행의 오묘한 뜻을 알고 싶다는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인지를 분명하게 밝히라는 것이었을 터이다. 물론 감독의 의도는 후자였을 것이다.
이 영화는 물론 참선수행을 비롯한 불가에서의 진리를 탐구하는 비구니들의 일상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지만, 선우 스님과 상욱 행자 두 사람의 출가와 수행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그리고 영운 스님의 종교적 확신과 믿음이 그 두 사람의 믿음직한 풍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선우 스님은 갓난아기 때부터 거의 운명처럼 불가에 귀의한 경우이고, 상욱 스님은 든든한 출세의 문턱에서 세속의 모든 화려함을 버리고 출가했다는 점이 다르다. 이창재 감독을 비롯한 촬영 팀은 닫혀 있는 문 안에서 비구니들과 함께 한솥밥을 먹으며, 또한 불가에서의 수행 일정을 그대로 따르며 사계절의 순환과 그 속에 어우러진 비구니들의 진리에의 탐구를 아름다운 영상에 담았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들 역시 비록 한시적이었지만 출가하여 불가에 귀의한 셈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 영화는 여느 다큐멘터리 영화와는 다르게 아름답고 시정적인 분위기가 넘쳐 보인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그 어느 누구라도 영혼을 정화한 것 같은 특별한 경험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행의 길 위에서 깨달음을 얻다
선우 스님은 특별한 출가의 운명을 통해 비구니 스님이 된 경우이다. 이른바 ‘동진 출가’이다. 불가에서는 어린 나이에 불제자에 입문한 사람을 동진스님이라 하고, 이를 불교에서는 동진출가라고 한다. 선우 스님은 갓난아기 때에 부모의 품을 떠나 할머니에 의해 절에 맡겨진 경우이다. 그녀는 지극한 신심에 의한 자진 출가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 영문도 모르고 불가에 귀의했다. 그래서 그녀는 어릴 때부터 나이 든 비구니 스님을 스승으로 삼아 불교의 계율을 익혔다. 그녀는 백흥암에서의 행자 생활을 끝내고 스승을 비롯한 두 명의 비구니와 함께 만행 길에 오른다.
만행(萬行)은 불자나 수행자들이 수업해야 할 일체의 행법(行法)을 말한다. 하안거나 동안거 동안 사찰 내에서만 수행하던 스님들이 안거 기간이 끝나면 3개월 동안 전국의 수행처나 각자 나름대로 수행할 만한 곳을 찾아 떠나는 것을 말한다. 즉, 아름다운 자연 속을 거닐며, 때로는 시끄러운 속세의 저자 거리를 지나며 그 동안의 심심을 다지고 수행자가 걸어가야 올바른 길에 대해 자신에게 물어보는 시간을 말한다. 그러므로 행자 생활을 끝낸 선우 스님에게는 특별한 시간이 아닐 수 없다.
이 영화에서 만행 길의 선우 스님이 잠시 휴식을 취하는 사이에 스승인 비구니 스님이 선우 스님의 두통을 지압으로 치료해 주는 장면은 매우 상징적이다. 문제는 선우 스님의 머리가 왜 아픈 것일까에 있다. 선우 스님의 두통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을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영문도 모르게 출가하여 스님이 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의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속세의 외적 충격에 대한 방어기제의 나약함으로 인한 어지럼증이다. 정체성에 대한 혼란은 굳건한 신심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에 대한 불안일 것이고, 방어기제의 약화에 대한 흔들림은 자신의 뿌리인 부모에 대한 그리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우 스님의 해맑은 얼굴과 순진무구한 표정은 우리 모두에게 안도의 한숨을 쉬게 만든다. 동진 출가한 그녀에게는 불가에서의 수행의 나날들이 운명처럼 각인되어 있을 것이고, 참선 수행의 종교적 분위기가 세월의 지문으로 남아 그녀의 육신을 형성했을 것이다. 그녀는 속세에서 산문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산문에서 나고 자랐기에 불가의 모든 계율과 지고지순한 분위기가 그녀의 육신을 만들고 영혼을 정화시켜 왔기에 그녀의 삶은 바로 불교 그 자체인 것이다. 또 자연의 그 은혜로움이 그녀를 얼마나 단련시켰을까. 그래서 그녀의 그 해맑은 웃음과 순진무구한 표정은 우리 모두에게 위안이 되고 있다. 선우 스님은 만행의 길 위에서 신심을 굳히고 자신이 앞으로 걸어가야 할 여정의 의미를 깨달았을 것이다.
악다귀처럼 달라붙는 속세의 질긴 인연
상욱 스님은 출가의 이유가 남다르다. 그녀는 미국 유학을 마치고 교수 임용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출가를 결심한 것이다. 미국 유학 시절에 젠(Zen) 센터에서 불교의 오묘란 진리를 깨닫고 출가하게 된 것이다. 백흥암의 주지 스님이 비구니가 되기를 결심한 상욱 스님을 앞에 두고, 젠 센터에서 경험한 불교와 수행자로서의 삶은 판이하게 다르니 한 번 더 생각해 보라고 권유해도 그녀의 믿음은 확고하다. 문제는 속세와의 끈질긴 인연의 끈을 쉽게 놓지 못하는 데에 있다. 그녀의 어머니가 가사 자락을 붙들고 눈물로 애원을 해도, 때로는 행자 생활을 끝내고 구족계를 받으려는 그녀를 놓아 달라고 스님들에게 간절한 모성을 내보여도 이미 그녀의 몸과 마음은 불가 한 가운데에서 반석처럼 흔들림이 없다. 아버지는 멀찍이 물러서서 속세와의 끈질긴 인연을 어쩌지 못하고 먼산바라기만 할 뿐이다.
상욱 스님의 경우와 영운 스님의 경우는 판이하다. 영운 스님의 어머니는 출가하여 불가에 귀의한 자신의 딸을 ‘영웅’ 스님으로 부르며 흔쾌히 그녀를 놓아준 것이다. 그런데 상욱 스님의 어머니는 속세에서의 모든 영예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출가하는 그녀의 딸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한 어머니는 그녀 너머의 오묘한 진리의 세계를 본 것이고, 또 한 어머니는 속세의 풍요한 삶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같은 출가를 두고도 이렇게 생각이 다른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상욱 스님의 출가 이유에 대해서는 그 어느 누구도 납득이 되지 않을지 모른다. 현실에서의 풍요한 삶과 화려한 명예를 버리고 끝없는 고행의 길을 가는 수행자가 된다는 것은 상식적인 시각에서는 수용하기가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상욱 스님의 어머니가 그토록 질긴 속세의 인연을 끊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출가 이유는 상욱 스님 자신밖에는 모를 것이다. 어쩌면 그녀 자신도 자신의 불가해한 그런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디 우리 삶에 불가해한 것이 한두 가지만 되겠는가. 그런데도 상욱 스님의 출가 이유를 자꾸 캐묻고 싶은 것은 무슨 연유에서일지 그것 또한 궁금하다.
밥값을 해야 한다는 무서운 화두
이 영화에서의 백미는 영운 스님의 말이다. 영운 스님은 행자들을 앞에 앉혀 놓고 자신들은 밥값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시주를 받은 쌀로 밥을 지어 먹고 목숨을 연명하고 부처님의 뜻에 따라 불법을 체득하는 만큼 스님들은 올바른 수행의 길에 정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밥값을 제대로 하는 길이이라는 것이다. 밥값의 참다운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말을 확대 해석하면 어디 수행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겠는가. 그 말은 속세의 우리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그 말은 곧 밥값을 제대로 못 하는 우리들의 영혼에 내려치는 죽비소리와 같은 것이다.
밥값을 해야 한다는 영운 스님의 극히 상식적이고 평범한 화두가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들을 불편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우리 주위에 밥값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디 한 둘 뿐이겠는가. 학문을 하는 사람도, 글을 쓰는 사람도, 정치를 하는 사람도 제 본분을 다하지 못하면 그것이 바로 밥값을 못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밥값의 참다운 의미를 깨닫고 수행하듯이 삶을 살아간다면 이 세상이 바로 극락정토이고 우리 모두가 수행자가 아니겠는가.
이 영화의 마지막에 이창재 감독은 스스로에게 문득 묻고 있다. 수행선원의 비구니들의 아름답고 숭고한 일상을 통해 너는 무엇을 보았느냐 하는 질문에, 그들과 여러 날을 함께 했지만 감독은 선뜩 명쾌한 대답을 하지 못한다. 속세나 불문이나 불가해한 것은 어디나 존재한다. 영운 스님의 말씀처럼 제대로 밥값만 하고 살아간다면, 그것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를 만들고 또 이 영화를 보는 참다운 의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수행선원 백흥암의 문이 굳게 닫힐 때 영화를 보는 우리들 마음의 문은 활짝 열렸을 것이다. 우리들 마음속에 추녀 끝 풍경소리, 바람소리가 아름다운 고즈녘한 암자 한 채가 오롯이 들어앉아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정화하는 성대한 제전이나 다름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