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과 서사는 수필의 두 축을 이룬다. 한 편의 글을 읽고 우리는 흔히 '이 글은 서정적이다' 또는 '이 글은 시적인 글(poetic essay)이다'라고 말한다. 또 다른 글을 읽고 '감동적인 이야기다' 또는 '이야기가 재미있다'라고 평하기도 한다.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그 글이 어느 쪽으로 기울었는가를 가늠하고 있는 것이다. 수필을 이렇게 서정과 서사로 나누어서 생각하는 버릇은 수필이 태생적으로 시와 소설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두 거대 장르의 영향에 압착된 결과이기도 하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수필을 서정과 서사로 분류하는 고정관념부터 깨야할지도 모른다. 타 장르와 충분히 영향을 주고받되 수필만의 독특한 영역과 자유로운 지경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상당수의 수필들이 시적 발상과 이미지 구현에 머무르거나 어떤 창의적 해석도 없이 이야기가 이야기로 그쳐버리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좋은 수필을 쓰기 위해서는 서정과 서사를 아우를 수 있는 통섭력도 필요하고 때로는 고정된 틀을 깰 수 있는 강력한 비판력도 필요한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김애자'의 「입춘대길」을 살펴보기로 하자. 「입춘대길」은 아무래도 본령이 서정 쪽으로 기울고 있는 듯하다. 특히 언어구사와 표현에 섬세한 노력이 엿보인다. 단어들이 적제적소에 쓰이고 있어 심미적인 상쾌함을 주고 있고, 일상에서 건져올린 비유들이 참신하고 깊이가 있다. 다음 문장들을 읽어 보자.
농사를 전업으로 삼진 않아도 남새라도 가꾸어 밥상에 올리려면 해토머리부터 일손이 바빠진다. 가장 먼저 하는 것이 김치 광을 헐고 항아리를 파내는 일이다. 빈 항아리를 가셔 내고 하늘이 내려앉도록 물을 가득 퍼 담아 우린다. 그 다음은 장을 담그는 일이다. 메주를 씻어 독에 놓고, 미리 풀어둔 소금물을 붓는다. 소금과 메주와 물의 비율을 잘 맞추어야 장이 제 맛을 낼 수가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경험을 통해 터득하지 않으면 얻어낼 수 없는 만만찮은 일이다. 장 담그는 일을 선두로 호박 구덩이를 파고 두엄을 퍼다 안긴다. 씨감자를 손보고, 마늘 밭에 덮어 놓았던 짚을 걷어낸다. 짚 속에서 병아리 주둥이만큼 자란 마늘 싹이 생명의 강인함을 여실히 드러낸다.
적절한 서술어의 활용이 관념을 씻어낸 농촌 생활의 동작상들을 눈앞에 보이듯 그려준다. 몇 가지 서술어의 활용을 짚어보자.
김치광을 헐고 항아리를 파낸다. 빈 항아리를 가셔내고 물을 퍼 담아 (항아리를) 우린다. 메주를 씻어 독에 놓고 소금물을 붓는다. 호박 구덩이를 파고 두엄을 퍼다 안긴다. 씨감자를 손보고 마늘 밭에 덮어 놓았던 짚을 걷어낸다. 마늘싹이 생명의 강인함을 여실히 드러낸다.
반복되지 않는 서술동사들이 일종의 리듬감을 주고 주어와 잘 호응하여 명징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비유가 글의 내용과 밀착돼 있고 비교적 일상적이다. 비유가 지나치게 비약적이어서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충돌하거나 보조관념이 원관념을 가려버리는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즉 글이 지나치게 시적으로 비약하지 않고 적당한 산문성이 유지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빈 항아리를 가셔내고 '하늘이 내려앉도록' 물을 가득 퍼 담아 우린다. 짚 속에서 '병아리 주둥이만큼' 자란 마늘싹이 생명의 강인함을 여실히 드러낸다.
그러나 글의 가치와 완성도를 표현의 적절성과 효율성만 가지고 논할 수는 없다. 글이 완성되려면 주제를 일관되게 추구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주제가 굳이 거창하거나 심오하지 않더라도 그 글의 주제는 글 전체를 이끌고 가는 글의 핵核이다. 핵은 문장들이 산만하게 흩어져버리는 것을 막는 중심 역할을 한다. 그 글의 모든 문장들과 에피소드들은 이 핵(주제)을 중심으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그래서 모든 글들은 주제를 중심으로 얼개가 형성된다. 이러한 얼개(구조)를 짜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도구가 이야기이다. 기승전결이 있는 구체적 이야기든, 눈에 보이지 않는 숨어있는 이야기든, 이야기가 일단 도입되면 그 글에 서술의 힘이 붙는다. 「입춘대길」에는 표면에 드러나는 이야기와 배경(context)으로서의 이야기가 존재한다. 표면적인 이야기는 작가가 산 속을 산책하며 자연을 관찰하기도 하고 생활을 사유하기도 하면서 겨울의 한유閑裕를 즐긴다는 이야기다. 글의 배경에 깔려 있어서 맥락을 잘 유추해 가면 다음과 같은 숨은 이야기를 발견할 수도 있다. 작가는 은퇴했거나 평소에 염원이 있어서 도시 생활을 접은 후에 전원이나 농촌으로 귀촌/귀향한 것으로 보인다. 본격적인 농사는 짓지 않지만 텃밭에 채소를 가꾸는 둥 비교적 소극적인 생산 활동에 참여한다. 그러면서 농민들과 어울리고 그들의 생활 철학에 공감하고 흙에서 일종의 깨달음을 얻는다. 이 이야기들이 어떤 구체적인 실감을 띄고 박력있게 다가오진 않지만, 일상에서 의미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과정들을 비교적 잔잔하게 서술하고 있다. 한 마디로 「입춘대길」은 서정과 서사가 잘 버무려져 무리없이 읽히는 아름다운 글이다. 독자가 「입춘대길」에서 어떤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이 평에서는 논외로 한다. 다만 이 글에서 함께 고려해 보고자 했던 바는 작품에서 서정과 서사가 공존하는 방식과, 글의 얼개로서 서사의 역할과 그 중요성에 관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