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진상규명과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천주교 인천교구 단식기도회 - 4일째
공동 집전: 인천교구- 김병상 몬시뇰(주례), 김윤석, 이재학, 신일섭, 황창희, 장동훈, 정윤섭, 김성수, 김영욱,
김일회, 한의열, 한덕훈, 박원재, 전대희, 김성만 신부 수원교구- 서북원, 최재철, 한만삼, 이지성 신부 전주교구- 김회인 신부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서영섭 신부 필리핀외방선교회- 알빈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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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
7/2(목) 단식기도회 4일차,
인천교구 원로사제이신 김병상 몬시뇰님과 호인수 신부님, 수원교구 신부님들을 비롯한 사제, 수도자, 여러 신자분들께서 방문하셔서 격려해주셨습니다. 이렇게 연대의 힘으로 단식기도회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후 4시, 답동성당에서 22분의 사제 집전과 80여명의 수도자, 평신도가 참여한 가운데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7월 3일 일정을 알려드립니다.
7월 3일(금)에는 저녁 6시에 가톨릭회관 5층 대강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며
이어서 저녁 7시에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천주교 인천교구 세월호 유가족 간담회'를 진행합니다.
많은 기도와 참석 부탁드립니다.
‘다시 용기를 내어라’
강론 : 장동훈 신부
반갑습니다. 단식기도 4일째입니다. 밥을 굶다보면 머리가 맑아집니다. 그런데 헛소리도 나옵니다. 어제 기도회 하루 일정을 마감하고 신포시장을 내려갔습니다. 떡볶이, 만두, 튀김... 입안에 의지와는 상관없이 침이 가득 고이는걸 보고 인간은 참으로 연약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연약한 인간이 절망이고 희망입니다. 희망을 만드는 것도 사람, 절망을 만드는 것도 역시 인간인 것 같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생각하면 먹먹해집니다. 200명이 넘는 아이들의 희생된 사건. 혹자는 이 사건을 통해 교훈을 가져야 한다고, 혹자는 심지어 하느님께 불충한 이 대한민국의 죄를 더 가혹한 징벌로 갚지 않게 하시려고 미리 아이들의 소중한 목숨을 먼저 가져가셨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런 이야기만큼 끔찍한 이야기는 없는 것 같습니다. 정말 그렇다면, 그런 ‘고약한 신’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끔찍한 하느님이 어찌 우리 주님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진정 그것이 교훈 따위를 위한 것이었다면, ‘경종’을 위한 것이라면, 그 얼마나 참혹합니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정말 그렇다하더라도 피붙이 잃은 부모들의 눈을, 얼굴을 바라볼 때면 모든 것이 무색해집니다. 이 모든 이야기가 끔직하고 가혹한 처사에 불과합니다.
오늘 독서의 아브라함도 같은 처지였습니다.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 아들을 바치라는 이야기, 아 그 얼마나 참혹한 신입니까. 얼마나 고약한 버릇을 가진 신이란 말입니까? 아이들의 희생 앞에 수많은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지만, ‘교훈’ ‘경종’, 대한민국의 변화를 위한 기회 따위로 회자했지만, 저 아이들을 자식으로 둔 어버이들의 눈을 마주칠 때면 그 모든 말은 무색할 뿐입니다. 아브라함 역시 마찬가지 심정이었겠지요.
세월호는 경종이 아니라 명백한 ‘난파’입니다. 우리들 삶이 좌초된 것이고 대한민국이 침몰한 것이고, 인간의 길이 끊어진 것입니다. 다 허물어진 집,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영점, 그것이 세월호의 침몰 이후 우리가 지금 발을 딛고 있는 표류한 땅입니다.
저는 오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며 특별히 ‘길’에 대하여 생각해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걸은 길. 이들을 데리고 어떤 마음으로 모리야 땅을 걸었을까요?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모리야 땅이 깊어질수록 심난한 마음 역시 더 커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쉬지 않고‘ 모리야 땅 깊숙이 들어갑니다. 또 모리야에서 돌아와서는 다시 브에르세바라는 낯선 땅으로 갑니다.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신세입니다. 심난한 마음, 앞길을 알 수 없는 여정, 어디가 목적지인지 모르는 그 막연함을 한번 상상해봅니다. 아니 어쩌면 아브라함에게는 모리야로 가는 여정 그 자체가 우리가 맞이한 오늘의 좌초처럼 매 순간 절망이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하느님의 이야기를 보면 온종일 하느님의 허리춤을 잡고 씨름을 했던 야곱이 생각납니다. 바로 하느님과의 싸움입니다. 하느님 편에서는 아브라함이 자신을 어떤 존재로 여기는지, 아브라함 편에서는 자신이 알고 있는 신이 진정 그 하느님인지, 서로에 대한 확고한 확신을 시험받는 시간, 신과 인간이 겨루는 신뢰의 싸움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이 당신을 어떤 존재로 여기고 있는지 알았던 것이고, 아브라함은 자신이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분이 어떤 분인지 이미 알았던 것입니다. 싸움이 끝났습니다. 그러자 하느님이 마련한 것, 곧 ‘야훼 이레’, 손수 마련하시는, 손수 그 길을 준비해주시는 분 앞에 다시 여정을 내쳐 달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승리에 가장 결정적 요소는 의심의 여지없이 ‘신뢰’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뢰이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신뢰에 이르기 위한 여정 그 자체. 모리야와 브에르세바, 그리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아직도 보이지 않는 저 까마득한 여정들에 대한 신뢰가 아닐까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어쨌든’, ‘결국에’ 좋은 것을 주시고, 모든 이가 구원되기를 바라시는 분이라는 부동의 믿음입니다. 막연함이 ‘기대’로 변화되는 대목입니다. 막막함이, 절망스러움이 기다림으로, 희망으로 변모하는 지점입니다.
단식기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정말 적은 숫자에 초라하고 세간의 관심도 끌기 힘든 조용한 단식입니다. 그래서 무의미해 보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을 생각하면 이 궁색한 마음은 더 짙게 다가옵니다. 난파한, 벽돌 한 장 남지 않고 완전히 무너진 집채 위에 서있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노동자들이 살기위해 고공에 매달리는 나라입니다. 대통령이 정치를 농락하고 국민을 기만하는 것은 더 이상 놀라운 일도 아닙니다. 헐값에 팔려 다니는 청춘들, 변두리에서 삶의 절벽으로 밀려나는 약자들. 이 절박한 상황들 덕에 우리의 기도는 더욱 무력하고 무의미해보이기까지 합니다.
하나같이 막연한 모리야 땅입니다. 깊이 들어가지만 앞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심란함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더 깊숙이 들어가는, 그 여정의 끝이 어디인지 모르는 막연한 두려움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는, 이 초라한 단식의 시간은 ‘손수 길을 마련하는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다시 회복하는 정화와 식별의 시간입니다.
하느님 손수 마련하지만, 그렇다고 그 내일은 거저 오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이 명백히 밝히는 부분입니다. 손수 마련하지만, 여행자들에게는 이 여정에 대한 신뢰가 여전히 필요합니다. 마치 모리야 땅 깊숙이 들어가던 아브라함처럼, 남루한 평상에 중풍 걸린 동료를 날라 오던 가난한 마음들처럼, ‘절박한’ 확신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절박하게 그 확신을 찾아야하는 시간입니다.
맞습니다! 바로 ‘신뢰’는 ‘용기’의 영역인 것입니다. ‘신뢰’는 심리, 감정의 영역이 아닌 용기의 영역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날라 온 동료들, 그들의 용기를 칭송합니다. 동료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삼은 그들의 용기를 칭송합니다. 그들의 용기가 다시 병자에게 주어집니다. ‘다시 용기를 내어라.’ 연대는 그렇게 인간을 용감하게 합니다. 연대는 그렇게 연약한 인간을 위대하고 단단하게 합니다.
모리야와 브에르세바 또는 그 알 수 없는 곳으로 끌려 다니던 아브라함을 다시 기억해야합니다. 그의 신뢰와 용기도 기억해야합니다. 더불어 동료의 병고에 진심을 공감한 저 가난한 마음들도 기억해야합니다.
슬픈 일들 지천입니다. 세월호 뿐만이 아니라, 도저히 사는 거라고 이야기 할 수 없는 일이 우리 앞에 매일 펼쳐지고 있습니다. 모리야 땅은 너무 깊고 여정은 그 자체로 곤욕입니다. 그럼에도 길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의 희생은, 우리들의 단식과 정개는, 이 가난한 마음들의 가난한 기도는, 이 여정을 그럼에도 신뢰하자는, 그래도 용기를 내어보자는 서로에 대한 격려이고 위로입니다.
인간은 자주 괴물과 싸우면서 괴물이 됩니다. 참혹과 싸우면서 참혹해집니다. 괴물이 되지 않는 길, 참혹한 존재가 되지 않는 길, 죽음에 먹히지 않는 길. 그 길은 무엇일까. 뾰족한 수가 있을 것 같지만 그것은 결국 ‘그럼에도’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는 우리 앞에 펼쳐진 여정에 대한 신뢰의 다른 말입니다. 그것은 사방천지 어둠뿐 인 모리야를, 더 막막한 저 브에르세바를, 그 너머의 길을 “손수 마련하시는” 하느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좌절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슬퍼도 고되어도, 그렇게 영영 쓰러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럼에도 일어나길 기도합니다. 그것은 떠나간 아이들이, 무죄한 목숨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기도 합니다. 결코 죽음에 먹히지 말라고, 난파되었어도, 폐허뿐이라도 결코 포기하지 말라고, ‘그럼에도’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인간일 수 있는 ‘인간의 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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