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충희 洪忠熹(1878~1946)】
"920년 북로군정서 제2중대장 및 대대장 서리, 청산리전투 참가,"】
1878년 12월 29일 한성부(漢城府) 도렴동(都染洞)에서 태어났다. 호는 우봉(禹峯)이며, 이명은 홍충의(洪忠意)·홍충관(洪忠觀)·홍충헌(洪忠憲)·홍충길(洪忠吉) 등이다. 신장은 5척(尺) 4~5촌(寸) 정도였고 흰머리가 많았다고 한다. 1903년 대한제국 무관학교 보병과를 제2기로 졸업하였으며, 참위(參尉)로 임관하였다. 1907년 7월 31일 부위(副尉) 재임 중 해주(海州) 군영에서 군대 해산을 당하였다.
1919년 민족대표 권동진(權東鎭)을 도와 만세운동에 참가하였으며, 이후 항일무장투쟁을 염두에 두고 동지(同志) 김규식(金奎植)·김찬수(金燦洙)와 함께 중국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1920년 6월을 전후하여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 참여하였으며, 그해 9월 북로군정서가 보병 1개 대대를 편성할 때 제2중대장 및 대대장 서리를 역임하였다. 그해 10월 청산리전투에서 김좌진(金佐鎭)·나중소(羅仲昭)·박영희(朴寧熙)·이범석(李範奭) 등과 함께 참전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이후 북로군정서 군대를 따라 러시아로 이동하였으며, 1922년 무링현(穆稜縣) 팔면통(八面通)으로 돌아와 학교를 설립하고 한인 자제들의 민족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1924년 4월에는 북로군정서 출신들이 결성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에 참가하여 제1연대 제3대대장에 임명되었다. 그해 12월에는 광진단(光進團)이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동빈현(同賓縣, 현 옌서우현(延壽縣) 원가둔(遠家屯))에서 개최한 회의에서 단장(團長)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이 회의에는 신희경(申熙慶)·남만규(南萬圭)·박인(朴仁) 이외에 의성단(義成團) 계열의 장익(張翼)·전창덕(全昌德)·김철무(金鐵武) 등이 참여하였다. 의성단은 1923년 11월 길장선(吉長線) 부근 카륜(卡倫)에서 단장인 편강렬(片康烈)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편강렬이 일제 경찰에 의해 체포되는 1924년 7월을 전후한 시기까지 만주지역의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강력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던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 중 하나였다.
1934년에는 김영숙(金永肅)·김서종(金書鍾) 등과 함께 하얼빈 안핑제(安平街)에 대종교선도회(大倧敎善道會)를 설치하고 민족정신과 독립의식 고취에 진력하였으며, 이 시기에 대종교 참교(參敎)에도 서임되었다.
1942년 11월 일제가 만주지역의 대종교를 탄압한 사건인 임오교변(壬午敎變)으로 인해 대종교지도자들이 대거 검거되자 피신하여 지하생활을 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환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