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조 왕건 <제 103회>
줄거리
궁예는 여전히 왕건과 황후의 사이를 의심하며 가슴앓이를 한다. 이에 종간은 궁예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금강산 도인에게 영약을 다리게 하는 한편,아지태의 사건으로 위엄을 잃은 궁예를 위해 왕건에게 중지되었던 북벌을 어떤 방법으로든 재개할 것을 당부한다. 왕건은 종간의 타협안을 받아들여 새로운 북벌 계획을 세우고, 거의 폐허가 되어 있는 평양을 도모하기로 한다. 그리고, 이를 궁예에게 보고하기 위해 찾아 간 날. 궁예는 드디어 왕건에게 황후와 정혼을 했었던 사실을 캐묻는데...
씬 1 동 대전 안(낮)
궁예가 칼을 마구 휘두르고 있다. 탁자며 서류철들이 마구 흩어져 내려간다. 석총은 이곳저곳에서 번득거리며 지나친다. 궁 예는 후들후들 떨며 계속 검을 휘두른다. 엉망이다. 온통 방안이 엉망이다.
궁예 네놈이 나를 보고 거짓 미륵이라고.....? 이놈아, 나는 백성들이 인정해 준 바로 그 미륵이니라. 나를 보고 거짓이라고?
예끼, 이놈....
궁예는 그렇게 헛보이는 석총을 향해 검을 휘두른다. 석총의 웃음소리가 대전 가득히 울리고 있다.
석총 하하하하, 너는 거짓 미륵이다. 가짜야. 너는 미륵이 아니야.
궁예 아니다, 내가 미륵이다.
내가 미륵이야.
궁예가 그렇게 소리치며 거퍼 칼을 휘두르는데, 이번에는 아지태의 웃음소리와 함께 죽기 직전의 모습이 보여 진다.
궁예 (놀라며) 아니, 너는 아지태가 아니냐?
아지태 너는 미쳤다. 그래, 이제 바른 말을 하마. 내가 모종의 사건을 꾀하였다. 왜냐, 네 놈이 미쳤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난 북으로 갈 수 있었고 너와 함께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도 있었다. 불쌍하구나. 황제여, 너는 이미 미쳤다. 제국을 끌어 나갈 힘도 없다. 결국은 왕건이에게 다 내주게 될 것이다. 이 미련하고 불쌍한 황제여.
궁예 이놈, 아지태..... 닥치지 못할까, 이놈....
씬 2 동 대전 밖 복도
대전안에서는 계속해 부서지는 소리와 고함소리들이 들려온다. 왕건과 종간이 그렇게 서로를 보고 있다가 다시 안에 귀를 기울인다.
종간 (대전내관에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폐하께서 환후가 중하실 때에는 어의에게 일러 탕제를 쓰라고 하지 않았는가?
대전내관 이미 그리 조치를 했사옵니다, 내원어른.... 워낙, 갑자기 시도때도 없이 발병을 하시는지라....
종간 닥치지 못할까, 이놈? 그것을 알고 대처하는 것이 대전내관 네 놈의 소임이 아니냐?
그때다. 어의가 황급히 탕제를 들고 오고 있다. 그 옆에 최응이 따라 붙어 오고 있다가 이들과 마주치자 예를 올린다.
종간 원봉성령은 폐하 곁에 있는 줄 알았는데... 어찌 대전을 비우셨는가?
최응 폐하께서 영이 계시지 않으면 대전을 들지말라고 하신 지가 꽤 되었사옵니다.
종간 그래도, 그렇지. 쯧쯧... 자, 어의는 뭘 하는가? 가서 폐하를 뫼시게.
어의 예, 내원어른
종간 (잠시 망설이다가) 왕시중, 들어가십시다.
왕건 예.
씬 3 다시 동 대전 안
궁예는 지쳤다. 온 얼굴이 땀투성이다. 칼을 지팡이처럼 짚고 간신히 서 있다.
방안은 아수라장이다. 그리고, 궁예는 그렇게 허공을 보며 석총을 찾다가 들어서는 사람들을 보고 있다.
종간 (달래듯) 폐하, 신 종간이옵니다. 어이된 일이시옵니까?
궁예 .......?
왕건 ........?
궁예 (한참 보다가) 너희들은 누구인가? 석총이가 아닌가? 아니, 아지태인가?
종간 폐하, 신 종간이옵니다. 고정하시오소서, 폐하.
궁예 석총이가 아니라구...(사이) 아지태도 아니구.....?
(한참 보다가) 오, 그렇구먼. 아우가 아닌가? 사형도 오셨구료.
궁예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주저 앉는다. 그리고, 숨이 차 헐떡거린다. 계속해 가슴은 아프다.
종간 많이 편찮으시옵니까, 폐하?
궁예 (끄떡이며, 지쳤다) 아니오, 좀 과로했나 보오.
종간 침수드시오소서. 많이 곤하신 것 같사옵니다. 어의는 뭘 하느냐? 침수드시도록 탕제를 올려라.
어의 예, 내원어른.
종간 아니다. 이리 줘라. (약사발 받아 들고 먹이며) 폐하, 드시오소서. 편안히 주무실 수 있는 탕제이옵니다. 피로가 좀 가실 것이옵니다.
궁예 (끄떡이며 마신다) 그 놈들이 왔었어. 석총이하고 아지태가 왔었소이다. 나를 보고 가짜라고 하였어. 내가 미치광이라는 게야.
종간 주무시오소서. 오늘은 소주가 과하셨나보옵니다.
궁예 (지쳐서 눈을 감으며) 그런 것 같구료. (왕건보며) 아우가 왔는데.... 아우가 왔는데 잠이 쏟아지는 구먼.
왕건 편히 주무시오소서, 폐하.
궁예 그래, 너무 졸리워..... 졸리워.....
궁예는 그렇게 눈을 감는다. 방안을 돌아보던 종간이 한숨을 쉬며 내관과 어의에게 고개를 끄떡인다.
종간 뭣들 하는가? 폐하를 어서 침상으로 모시도록 하라.
그들 예, 내원어른.
궁예가 그렇게 침상으로 모셔진다. 최응은 침착하게 그렇게 서있고, 종간이 왕건을 보다가 나즉히 말한다.
종간 왕시중, 오늘은 폐하를 뫼시고 국사를 논하기는 적당치 않은 것 같소이다.
왕건 그런 것 같습니다, 내원어른.
종간 내 방으로 가십시다. 모처럼 만났는데 차라도 한 잔 하십시다.
왕건 그렇게 하시지요.
종간과 왕건은 잠시 든 궁예에게 예를 올리며 그 대전을 빠져 나온다. 그 두 사람을 보는 최응의 시선은 여전히 담담하고 냉담하다. 그 최응의 시선이 잠이 든 궁예를 보면서.......
씬 4 내원 외경(석양)
은부와 금대, 장일들이 심상치 않은 눈으로 어둠에 물들고 있는 종간의 방쪽을 보고 있다.
씬 5 동 내원 안(밤)
종간이 몸소 촛불이 불을 지핀다.
그리고, 왕건에게 차를 따라 주고 있다. 왕건이 받아 마신다.
종간 차나무의 첫물을 딴 것이라고 합니다. 언제 마셔도 이 녹차는 참 향이 그윽한 게 많은 시름을 잊게 합니다.
왕건 내원어른께서는 아주 오래도록 차를 가까이 해오셨고, 차에 대해서는 아주 많은 것을 알고 계십니다. 저 같은 사람은 참 부럽습니다.
종간 허허허, 무슨 말씀을...
두 사람은 그렇게 차를 두어 모금 마시며 탐색전을 한다. 그러다, 종간이 입을 연다.
종간 오늘 왕시중께서도 보셨겠지만 폐하께서는 아주 환후가 중하십니다.
왕건 일찍이 알고 있었사옵니다.
종간 그러셨을테지요. 사실 우리뿐만 아니라 조정의 많은 대소신료들이 쉬쉬하면서 다 아는 그런 비밀이올시다.
왕건 ......(끄떡인다)
종간 솔직하게 말씀드리리다. 꽤 오래되신 병이올시다. 마땅한 약도 없고 또 폐하의 환후를 다스릴 어의도 찾지 못하고 있소이다.
왕건 알고 있습니다.
종간 (차 마시며) 사실 그토록 폐하의 총애와 신망을 받던 아지태가 역모를 꾀한 것도 그 때문이올시다. 그 자는 폐하와 마찬가지로 북벌을 주장하였고 또 자신의 이름이 역사에 오르기를 꿈꾸던 자였소이다.
왕건 그랬었지요.
종간 그러나, 폐하의 환후가 중하시고 또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다소 과격해지시다보니 언제까지 자신이 안전지대에 들어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올시다. 즉, 폐하께서는 분명히 아지태 그 자의 실적에 대해서 책임을 물으실 것이라는 걸 알았다는 것이지요. 그 때문에 선수를 치다 일이 들통이 난 것이올시다.
왕건 이미 조사 중에 다 알게 된 일입니다.
종간 이제 이 나라는 아지태에게서 왕시중에게로 옮겨 왔소이다. 이미 왕시중은 많은 나라의 정책들을 바꾸고 새로운 질서를 시작했소이다.
왕건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종간 폐하께서는 왕시중께 법봉을 맡기셨소이다. 그 또한 의미가 적다고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왕건 물론 그러하옵니다.
종간 헌데 나는 솔직히 말해서 왕시중이 이곳 황도 철원에 있는 것을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사람이올시다. (사이) 처음부터 나는 왕시중을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아실 것이오.
왕건 한 나라를 운영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서로 힘을 모으지 않으면 길은 계속 어둡고 멀고 험할 것이옵니다. 이제는 서로가 손을 잡고 믿어야 하옵니다.
종간 (사이) 믿는다...? 믿어야 한다.... 허허허, 백번 옳은 말씀이오. 그러나, 현실이 그렇지 않소이다. 아지태는 왕시중이 충주에 있을 때 미륵종파의 우두머리인 석총과 만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소이다. 그리고, 왕시중도 시인을 했어요. 나는 알고 싶소이다. 아니, 폐하께서도 궁금해하실 것이외다.
왕건 무엇이 말이옵니까?
종간 그 석총이가 왕시중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소이까?
왕건 .........?
종간 말하기 어려운 것이오이까?
왕건 .........?
종간 허허, 아주 곤란한 이야기를 나누신 모양이올시다?
왕건 석총대사는 내게 말했사옵니다. 좋은 세상을 만드는데 내가 힘을 써달라고 말입니다.
종간 그것은 이 나라 신료라면 누구나 해야 하는 본분이지요. 헌데, 왜 굳이 왕시중께 그런 이야기를 거기까지 가서 했을까요?
왕건 지나는 길이라 했사옵니다.
종간 지나는 길이라...? 뭐,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석총이는 죽기 전에 분명히 다른 미륵이 올 것이라고 했소이다. 새로운 세상을 여는 미륵말이올시다. 그것은 아지태의 말처럼 반역이지요.
왕건 .......?
종간 암, 반역이고 말구.... 그 요망한 중 도선이라는 자도 왕시중이 삼한의 백성을 구할 것이라고 했다 하더이다. 그 또한 반역이 아니겠소이까? 삼한의 백성을 구하다니... 그것은 오로지 폐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오. 아니 그렇소이까?
왕건 폐하를 도와 대업을 이루는 것 또한 백성을 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사옵니다. 그런 뜻이 아니겠습니까?
종간 (한참만에 웃는다) 하하하하, 좋소이다. 그쯤 하십시다. 또 하나 얘기할 것이 있소이다.
왕건 말씀하시오소서.
종간 나 종간이라는 사람은 지금껏 폐하를 도와서 나라를 세우고 별다른 벼슬을 맡지 않은 채 폐하를 보좌하며 오늘에 이른 사람이오. 다행이 많은 신료들이 나를 따라주고 어려워합니다.
왕건 비록 드러난 벼슬은 아니지만 내원께서는 명실공히 이 나라의 지도자이십니다.
종간 허허허, 고맙구료. 그래서, 이야기요. 그 황후마마에 관한 이야기 말이오.
왕건 ........?
종간 그 비밀은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하오. 왕시중과 정혼을 했었다는 사실은 그저 흘러간 이야기였다고 말씀하시구료. 나 또한 그리 폐하께 전해 올리겠소이다. 아시겠소이까? 지금의 폐하께서는 그러한 심적 갈등을 감당키 어려운 분이십니다. 저 병 때문에 말이오. 심신이 많이 나약해지셨다는 말씀이오이다.
왕건 예, 내원어른, 알고 있사옵니다.
종간 고맙소이다. 그리고, 또 하나 더 있소이다.
왕건 말씀하시지요.
종간 폐하께서는 나라 이름을 두번씩이나 바꾸어 가면서 대 동방국, 저 중원의 나라에 우리의 깃발을 꽂으려고 하셨소이다. 허나, 지금 바로 왕시중이 그 북벌을 중단하자고 건의하였고, 또 윤허를 받았소이다. 다시 말하면 폐하께서 유일하게 보고 계시는 희망 하나를 왕시중이 빼앗아 버린 것이오.
왕건 .........
종간 폐하께서는 마지못해 북벌을 중단하게 하셨지만, 그 일마저 없으시면 그야말로 폐하는 가실 길이 없소이다. 그 일마저 없으시면 저 깊은 환후에서 영영 헤어나시지 못할 것이외다. 희망을 드려야 한다는 것이외다. 살아 계시다는 것을 확인해드리고 아직도 여전히 만 백성의 미륵이심을 믿게 하시고 자신감을 심어드려야 한다는 것이외다. 아시겠소이까?
왕건 (끄떡인다).......
종간 그렇소이다. 바로 그 길만이 폐하께서 병을 털어 버리고 일어나실 수 있는 유일한 길이외다. 자신감 말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만들어 드려야 한다는 것이올시다. 왕시중이 그렇게 해줄 수 있다면 나는 지금까지의 왕시중에 대한 모든 의심을 접겠소이다.
왕건 ........
종간 폐하를 옛날의 미륵으로 되돌리고 존경받고 현명하신 군주로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 일을 왕시중이 해줄 수 있다면, 내 어찌 더 이상 왈가왈가 하겠소이까? 그것을 부탁드리려고 차 한 잔 하자고 한 것이외다.
왕건 과연, 내원어른의 그 충정은 가히 본받을만 하옵니다. 노력해 보겠사옵니다. 폐하를 위한 길인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사옵니까? 그 일은 심사숙고하여 방안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종간 고맙소이다. 참으로 고맙소이다.
씬 6 황후전
연화가 한숨을 쉬며 제조상궁의 말을 듣고 있다.
연화 왕시중이 내원 그 사람의 방에 가 있다고?
제조 예, 황후마마. 내원과 왕시중 두 분 모두 폐하를 알현하러 왔다가 폐하께서 병증이 심하신 때였기로 그냥 돌아가셨다 하옵니다.
연화 도대체 얼마나 병의 증세가 심하셨기에 두 분이 그냥 돌아가셨단 말인고?
제조 어의가 올린 탕제를 드시고서야 침수에 드셨다 들었사옵니다.
연화 폐하의 환후는 심통이라고 하셨다. 갈수록 가슴의 통증이 심해지고 혼백이 혼란해지고 발광을 하시는 병이라 하셨어. 이제 그 현상들이 하나둘 나타나고 있는 게 아닌가? 지난번에는 발작을 하시어 내관 하나를 죽이셨는데, 이번에 또 검을 들고 휘두르셨다 하지 않았느냐? 어이해야 할꼬....
슬이 그 때문에 내원께서 불러들인 도인 한사람이 법당에서 백일기도를 드리고 있다 하옵니다.
연화 그 이야기는 나도 지나가는 길에 들었다. 허지만, 도인이 기도를 한다고 해서 나을 병이시라더냐....
슬이 하지만, 이번에 온 도인도 지난날의 그 설도인처럼 대단한 능력이 있다 하옵니다. 이번 도인은 기로써 고치는 것이 아니라 심산 유곡의 영약들을 가져다가 백일동안 기도와 더불어 다려 올린다 하옵니다.
연화 (한숨) 무슨 약이든 폐하의 고통을 덜어드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나는 그저 모든 것이 무섭기만 하구나..... 무서워.......폐하의 저 병증이 언제 어떻게 누구를 또 다치게 할 지 모를 일이 아니더냐.
슬이,제조 .........
연화 갈수록 태산이다. 이번 아지태 사건도 또한 그러하지 않느냐? 지금은 조용하지만 앞으로 폐하께서 어떤 말을 꺼내실 지 누가 알겠는가? 우리 집안도 좌불안석이야. 우리 태자들도 그렇고....
슬이 이미 왕시중게서 평결을 끝내신 일이옵니다. 설마 무슨 일이 있겠사옵니까?
연화 왕시중은 그리 하셨지만, 폐하가 계시질 않느냐? 병중에 발작이 나시어 어떤 영을 내리실 지 누가 알겠느냐?
씬 7 강장자 집 외경
씬 8 동 집 사랑
강장자 부부가 서로를 보고 있다.
이들은 떨고 있다.
백씨 삼년 동안이라고 하였사옵니다. 삼년 동안 바깥 출입을 못하시는 것이옵니다.
강장자 왕건이 그 놈이 내게 무슨 억하 심정이 있어서 삼년씩이나 발을 묶어 놓다니 고얀 놈....
백씨 그런 소리 마시오소서. 그쯤에서 끝난 것이 다행이옵니다. 아지태는 죽었사옵니다.
강장자 (휴, 한숨) 이번 일은 전적으로 아지태를 너무 믿은 탓이야. 글쎄 제 수하 중에서 배신자가 나오다니 말이 되는가 말이야.
백씨 지난 이야기는 해서 무엇하옵니까? 그나마 목숨을 건진 것은 천만다행이옵니다. 다 왕건 시중의 덕이옵니다.
강장자 덕은 무슨 덕...? 아닌 말로, 제 놈이 시중이라면 나는 황후의 아버지야. 연금이라니? 이런 억울한 평결이 어디 있단 말인가?
백씨 나으리께서는 폐하를 시해하시려했다고 들었사옵니다. 이렇게 가벼운 벌로 끝날 일이 아니옵니다. 왕시중만 하니까 나으리를 도와준 것이옵니다.
강장자 저 미친 황제를 시해하려고 한 것은 아지태이지, 내가 아니야. 나는 그저 태자들을 보위에 올리고 섭정이나 맡으려고 한 것이지. 생각해보시오, 부인. 내가 아무리 황후의 아버지라고 해도 무엇 하나 보장되고 안전한 것이 없소이다.
백씨 ...... 무엇을 더 보장받으려 하시옵니까, 나으리?
강장자 지금은 후삼국이 어우러져 싸우고 있고, 나라 사정은 복잡하고 어렵소이다. 저마다 권력을 탐내고 으르렁거리는데 나는 가진 것이 없소이다. 황제는 처갓집이라고 하여 조금도 우리를 보아준 것이 없소이다.
백씨 폐하는 본래 그런 분이시옵니다, 몰랐사옵니까?
강장자 몰론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책이 바뀌고, 권력의 향배가 바뀌면 언제 어떻게 죽을 지 모르는 것이 이 전국시대 벼슬아치들의 운명이오. 우리는 약자요. 장래를 좀 보장받으려고 뛰어다녔던 것이오. 그것이 무엇이 잘못 됐다는 말이오? 아지태의 말이 맞소이다. 미쳤소이다. 황제는 미쳤단 말이오. 그래서, 나도 살려고 뛰어다닌 것이야. 미친 황제에게 물리지 않으려고 말이오.
백씨 나으리....?
씬 9 임춘길의 집 사랑
임춘길, 능달, 기전이 모여 있다.
임춘길이 생각이 많다.
임춘길 아무튼 이번에는 왕건시중의 도움을 받았네 그려.
능달 그러하옵니다. 왕시중이 장군을 살려 주신 것은 참으로 뜻밖이옵니다.
기전 뭔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사옵니까?
임춘길 형을 당한 아지태 그 어른이나 또한 나나 모두가 청주인들일세. 지금은 조정 곳곳에 많은 청주인들이 있어. 그들의 불만을 사지 않으려는 것이겠지. 아무튼 다행이야.
능달 입전, 신방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배신을 했는지 소인들은 아직도 모르겠사옵니다.
임춘길 아지태 어른이 너무 방심을 했어. 그 어른은 너무 자신의 머리만 믿었던 것 같아. 아무튼 이쯤에서 끝난 것이 다행이야. 향후 조심들 해야 할 것이야. 모든 계획은 일단 이쯤에서 중지를 하고, 폐하께 충성한다는 것을 보일 필요가 있어, 알겠는가 들? 이제부터 좀 조심을 해야 해.
그들 예, 장군.
생각하는 임춘길의 표정에서.....
씬 10 왕건의 집 외경(낮)
씬 11 동 집 부엌
두 여인이 하녀들과 함께 다과상을 살펴보고 있다.
유씨 서방님께서 어젯밤에 늦게 돌아오신 후에 걱정이 많으신 것 같네 그려. 오늘 내내 저렇게 말씀이 없이 마당만 서성거리시네.
수인 그러게 말이옵니다.
유씨 내원 그 사람을 만나고 오셨다고 했는데, 좋은 일이야 있겠는가? 나는 내원이라는 사람의 말만 나오면 그냥 가슴이 철렁거린다네.
수인 이야기 들었사옵니다. 그렇게 서방님을 괴롭힌다 들었사옵니다.
유씨 (끄떡이며) 그러게 말일세. 자, 그 찻물 좀 끓나 보게. 여기 다과도 좀 마련해서 오늘은 우리가 상을 들여가세.
수인 예, 형님.
씬 12 동 마당
왕건이 연못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 그 옆으로 태평과 능산, 유금필, 왕식렴, 왕신이 함께 해 있다.
능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시옵니까, 주군?
왕건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아서 말일세.
유금필 허허허, 그림이라 하셨사옵니까? 무슨 그림 말씀이옵니까?
태평 (눈치 보다가) 어제 내원에게 다녀오신 이후 숙제를 많이 받아오신 것 같사옵니다. 그렇게 어려운 일이옵니까?
왕건 글세..... 내원 그 사람은 나에게 아주 어려운 흥정을 해왔어.
유금필 무엇이옵니까?
왕건 내가 중단한 북벌 계획을 폐하를 위해서 다시 되돌려 놓아달라는 것이야.
능산,유금필 그것이 말이 되옵니까? 이미 폐하께서 중단해도 좋다고 윤허하신 일이옵니다. 백성들도 좋아하고 있구요.
왕건 정치란 때때로 명분이 필요한 것일세. 지금 그 명분을 좀 달라는 것이야.
태평 물론, 환후 중이신 페하의 그 위엄을 되찾기 위해서겠지요.
왕건 자네는 마치 내 옆에서 본 듯이 말하고 있구먼 그래.
태평 허허허, 주군. 내원은 일생을 폐하와 더불어 살았고, 함께 숨쉬고 존재하는 인물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폐하께서 운명하실 때에는 함께 숨을 거둘 사람이옵니다.
모두들 ........?
능산 헌데, 북벌 얘기는 왜 또 꺼낸단 말입니까?
태평 이미 폐하는 환후가 깊으셔서 거의 나라를 다스릴 여력이 없으신 분이옵니다. 위엄도 땅에 떨어졌고, 미륵으로써의 체신도 또한 없사옵니다.
왕건 ........
태평 이제 유일하게 폐하께서 내세우셨던 그 명분마저도 북벌이 중단된 것과 동시에 찾아볼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자연 내원은 그 위엄을 되찾으려 할 것이옵니다.
왕건 옳은 말일세. 마땅히 그 위엄을 돌려드려야 할 것일세. 명분만이라도 좋다고 하였어. 그것이 내원이 내놓은 조건이야. 나와 화해하겠다는 조건 말일세.
능산 내원과 화해할 수 있다면 그 이상 좋은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왕건 태평이 자네가 이 숙제를 한 번 풀어보게나.
태평 글세올습니다, 주군. (빙긋이 웃으며) 길을 찾자면야 하나도 어려울 것이 없는 일이옵니다.
왕건 이 사람아 몇 년을 끌어오면서 나라가 휘청거리는 일이었어. 어려울 것이 없다니....? 북벌이 어찌 어렵지 않다는 얘긴가?
태평 지금 당나라의 관리를 받던 옛날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이 폐허로 변한 채 그대로 방치되어 버려져있사옵니다.
모두들 ........?
태평 우리 형제국인 발해 또한 나라 사정이 어지러워 그곳을 넘볼 여력이 없고, 당나라 또한 그것을 관리할 능력을 잃었사옵니다.
왕건 그야 알고 있는 일이네.
태평 그렇사옵니다. 그곳을 도모하시오소서. 군소지방 호족들이 제각각 주인행세를 하고 있는 그 땅들을 이제 도모할 때가 되었사옵니다. 우리는 옛 고구려를 표방하고 있사옵니다. 호족들 모두가 고구려의 유민들이옵니다. 크게 싸우지 않아도 잘 설득이 될 것으로 아옵니다.
왕건 일리가 있는 이야기일세. 우리는 그 동안 평양을 잊고 있었어.
왕식렴 잊고 있었던 것이 아니옵니다. 그쪽과는 서로의 이해가 같기 때문에 충돌이 없었던 것이옵니다.
왕신 이번에 우리 태봉국에서 영토를 확실히 하려고 한다면 분쟁이 생기지 않겠사옵니까?
왕건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나, 명분은 되네 그려. 그 또한 북벌이 아니겠는가? 그 땅을 얻을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진정한 북벌의 의미가 있을 것일세. 좋은 지적을 해주었네. 일단 시도해 볼 충분한 가치가 있네 그려. 싸우지 않고 얻을 수 있다면 더 좋겠지...
상기되는 왕건의 표정에서...
씬 13 동 집 사랑
지형도를 펼쳐 놓고, 왕건과 가신들이 숙의를 거듭하고 있다.
거기 평양성의 위치가 지도에 보여지면서 해설. 신라의 9주5소경 지도 스파된다.
해설 평양, 후삼국이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던 이 때까지만 해도 크게 부각되지 않았던 이름이다. 그러나, 그곳이 어디인가? 그야말로 역사적 도읍지로써 평양만큼 그 의미가 깊은 곳이 없다. 일찍이 기원전 2333년 단군 왕검이 고조선의 도읍을 삼았던 곳이 평양이고, 더불어 기원전 813년에 또한 기자가 후조선의 도읍지를 삼은 곳이 이곳이다. 또한, 기원전 194년에는 위만이 위만조선을 이곳에 세웠으며, 서기 313년에 이르러서는 고구려가 낙랑군을 멸망시키고 14년 후인 427년에는 국내성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겨와 무려 240년 동안이나 거대한 대제국의 수도로 삼았던 곳이다. 그리고, 나당연합군에 의해서 고구려가 멸망 된 이후 당나라에서 관리하다가 이때에 이르러서는 당나라조차 사분오열이 된 때였는지라, 누구의 땅도 아닌 채 버려져 있었던 것이다. 지금 태평은 이곳을 취하자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왕건들은 계속 고개를 끄떡인다.
왕건 우리는 백제와 신라와 싸우느라고 도무지 이곳에 잊고 있었네 그려. 이야말로 진정한 북벌이야. 힘 안들이고도 얻을 수 있는 땅이 아닌가 말야. 참으로 좋은 생각을 해주었네, 태평이. 곧 병부와 순군부의 사람들을 보아야겠네. 이 안을 폭넓게 물어 볼 필요가 있어.
태평 그리하시오소서. 아무 모두들 반대는 아니할 것이옵니다.
왕건 암, 그럴 것이야.
밝은 왕건의 표정에서......
씬 14 황궁 외경
씬 15 동 대전 안
궁예가 물을 마시고 있다.
그리고, 아직도 깨지 않은 흐릿한 눈으로 종간을 보고 있다.
종간 좀 어떠하시옵니까, 폐하?
궁예 아주 푹 자고 났더니, 좀 낫소이다. 헌데, 영 기운이 없어. 그 탕제라는 것이 독한 약인 모양이야. 먹으면 잠이 오고, 사람이 영 나른해지는 것이 말이야.
종간 (안쓰럽게 본다).......
궁예 내가 또 헛것을 본 모양이오. 그리고, 난리를 부린 것 같아.
종간 아니옵니다. 그저 잠시 취하시고 과로하셔서....
궁예 (다시 물 마시며) 왕건아우가 왔다가 그냥 갔다면서요?
종간 예, 폐하. 그동안 정리한 여러 가지 정책들을 폐하께 고하려왔었사옵니다.
궁예 그럼, 다시 오라고 해야겠소이다. 나는 이제 괜찮아요.
그러나, 궁예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다. 매우 피곤해 보인다.
종간 폐하, 좀 더 쉬시오소서. 왕시중이 잘 할 것이옵니다.
궁예 암, 그래야지요. 내가 기운을 내야 하는데, 갈수록 왜 이러는 지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어....
종간 곧 좋은 약을 올려 올 것이옵니다.
궁예 (믿지 않는다) 좋은 약...? 그런 것이 어디 있겠소이까? 유일한 것이 소주요. 마시면 통증은 가라앉는데, 자꾸 헛것이 보여. 깨고 나면 기운이 없고....
종간 백두산에서 온 도인이 있사옵니다.
궁예 (시덥지 않다) 도인이오? 허허허, 제까짓 것들이 뭘 알겠소이까?
종간 그래도 믿어보시오소서. 영산에 약재들을 골라다가 백일 기도로써 다스리고 있사옵니다. 도인이 온 지 꽤 되었사오니, 곧 약을 다 다릴때가 되었사옵니다.
궁예 허허, 그런 것이 어디 있겠소이까? 오직, 정신력이오. 우리가 수도를 많이 한 사람들은 약보다는 정신이올시다. 내가 이 병마를 쫓아내야지요. 이 마군이들을 밀어 낼 것입니다.
종간 그리하실 수 있사옵니다. 폐하께서는 충분히 그리 하실 수 있사옵니다. 하오나, 백두산 도인의 약도 한 번 들어보시오소서. 나쁠 일은 없지 않겠사옵니까?
궁예 허허, 글세올시다. 뭐, 기왕 시작한 일이라고 하니 어디 보십시다. 최응아?
최응 예, 폐하.
궁예 다시 또 소주 생각이 나는 구나. 해가 지는 모양이지.
최응 예, 폐하. 밖에 일러 놓겠사옵니다.
종간 소주보다는.... 차라리 꿀물을 한 잔 드시는 것이....
궁예 그래도, 소주가 낫소이다. 시중부에 일러서 내일 왕건아우나 보자구 하시구료.
종간 예, 폐하. 그렇지 않아도 다시 폐하를 알현하려고 할 것이옵니다.
궁예 약이라.... 도사가 내 약을 만들어요? 허허허..... 대 미륵인 내가 도사들이 만든 약을 마신다.....? 글세올시다.
씬 16 동 황궁 법당(밤)
도인이 기도를 올리고 있다. 미동도 없이 앉아서 그렇게 기도를 한다. 동남동녀들이 지켜 서있고, 향로 위의 탕기에서는 약이 끓어오르고 있다. 은부가 금대와 더불어 보고 있다.
금대 하루에 한끼 맑은 죽을 먹는 것을 제외하고 낮밤을 내내 저렇게 기도하고 있사옵니다.
은부 (끄떡인다) 큰 도인은 도인인 모양인데.....
금대 저 자에 관해서 상당히 많은 일을 알아 보았사옵니다. 지난번에 설도인처럼 도력이 높은 사람인 것은 틀림이 없는 모양이옵니다.
은부 그래야지.
금대 백일을 다린다는 저 약재 또한 이 세상에서는 도저히 한 번 보기도 어려운 영약재들이라 하옵니다. 수백년 묵은 산삼에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영초하며, 신기한 갖가지 약재들을 준비해 왔다 들었사옵니다. 폐하께서 쾌차하시면 크게 상급을 내려주시오소서.
은부 그래야지. 상급뿐이겠는가? 폐하께서 일어만 나신다면야.... 원하는 것은 다 줄 것이야. 도인들이라.... (끄떡이며) 나는 처음에 믿지 않았어. 허지만, 저 사람들은 신선의 경계에서 산다는 것이야. 때로는 수백년도 살고, 신선이 돼서 날아가 버리기도 한다는 것이야. 과연 그런 것인지.... 아무튼 기다려보세.
기도하는 그 도인의 모습에서 디졸브.....
씬 17 시중부 (낮)
무신들이 모두 모여 있다. 왕건, 태평, 복지겸, 염상, 환선길, 이흔암, 홍유, 배현경, 김락, 유금필, 능산, 천부장, 왕식렴, 왕신, 원극유, 임춘길, 기전, 능달 들이 모여 있다.
복지겸 시중께서 지금 평양을 도모하신다 하셨사옵니까?
왕건 그렇습니다, 복장군.
복지겸 아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하셨사옵니까? 결과적으로 그곳은 또 다른 북벌이 되지 않겠사옵니까?
환선길 아, 북벌이지요. 어쨌든 북쪽으로 땅을 넓혀 간다는 것은 그쪽을 정벌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까?
이흔암 그렇구 말구요. 또 다시 전쟁을 하자는 것이지요.
배현경 허허허, 전쟁도 전쟁 나름이올시다. 나는 이 회의에 오기 전에 충분한 사정을 알아보았소이다. 지난번과 같은 무모한 대륙 진출 계획이 아니라 전쟁보다는 외교로써 비어 있는 땅을 되찾자는 것이옵니다.
홍유 그렇소이다. 소장도 들었소이다. 지난 번 아지태가 추진했던 것은 현실과 맞지 않았던 것이지만, 이번만은 아주 실리적이올시다.
염상 평양은 당나라에서 관리하던 땅이올시다. 이미 당나라는 거의 무너졌고, 그곳을 관리할 사람들도 없다고 들었소이다. 그렇다면, 도모해 볼만하지 않겠습니까?
김락 어쨌든 전쟁은 전쟁입니다. 전선이 넓어지는 것은 바람직한 일은 아니지요.
왕건 원병부령께서 한 말씀하시지요.
원극유 이 사람도 이곳에 오기 전에 충분하게 검토를 했사옵니다. 지난 북벌과는 성격이 아주 다르옵니다. 추진하시오소서, 시중어른.
왕건 임장군께서도 한 말씀하시지요.
임춘길 소장은 지금 근신 중이옵니다.
왕건 그래도, 순군부의 장이올시다. 한 말씀 하시지요.
임춘길 소장은 오랫동안 북벌을 맡아 왔었사옵니다. 지난 북벌은 분명 무리가 많았사오나 이번 평양에 관한 일은 상당히 근거가 있고, 해볼만한 일이라 사료되옵니다. 소장은 찬성이옵니다.
태평 소인이 시중어른을 뫼시고, 신중히 검토한 일이옵니다. 모두들 기탄없이 말씀해 주셔야 시중어른께서 폐하께 청할 것이옵니다.
왕건 솔직히 말씀 드리리다. 북벌이 나빴던 것은 아니었소이다. 우리 분수에 넘게 추진하고 계획하다 보니, 일이 어렵게 꼬였던 것이오이다. 군사적인 것보다는 외교적으로 평양 쪽을 노려보는 것이 어떻소이까? 병부와 순군부에서도 공히 찬성을 하고 있소이다.
이흔암 아, 뭐 크게 전쟁을 하지 않고 땅을 취할 수 있다면야 왜 그것을 반대하겠소이까? 이 사람도 찬성입니다.
환선길 그렇다면, 소장이 한 번 평양을 가고 싶소이다. 사실 그쪽을 취한다면 나라에 엄청난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암요.....
김락 소장도 반대는 아니하옵니다. 큰 군사력을 출동하지 않고 하는 일이라면 분명 해볼만하옵니다.
왕건 좋습니다. 나는 시중으로써 어떤 일이든 독단으로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꼭 관계된 분들과 충분한 상의를 거쳐서 폐하께 아뢸 것입니다. 이 새로운 북쪽의 영토 계획은 제장들의 충분한 협의를 거쳐 폐하께 아뢰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이의들이 없소이까?
모두들 예, 시중어른.
왕건 그러나, 충분한 계획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첩자들의 보고를 모두 검토하고 일부 군대와 장수들을 선정하고 계획을 세우기로
하겠습니다.
환선길 선봉은 소장이라고 하였사옵니다, 시중어른?
염상 평양이라면 소장도 한 번 가보고 싶사옵니다만은.....
배현경 아니, 저라도 빠질 수 있겠사옵니까, 시중어른?
왕건 하하하, 모두들 이렇게 관심이 크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전선은 넓고 큽니다. 신라와 백제의 그 많은 전선들을 어찌하겠습니까? 특히나, 백제가 요즘 심상치 않다고 들었습니다.
능산 그러하옵니다. 백제군의 동향을 들어보니, 견훤왕이 또 다시 나라 안 곳곳에서 대병을 준비중이라 하옵니다. 경계를 늦춰서는 아니 될 것이옵니다.
유금필 당연한 말이옵니다. 지금의 전선은 잘 지키면서 북쪽을 도모해야 할 것이옵니다. 백제는 특히 촌보도 경계를 게을리 해서는 아니될 나라이옵니다.
왕건 알겠소이다. 아무튼, 제장들의 의견을 충분히 섭렵하였으니 각 전선의 형편을 살펴보고 제장들의 소임을 다시 정할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모두들 예, 시중어른.
씬 18 백제 황궁 외경
씬 19 동 황후 전
박씨와 고비, 금강(12세 정도), 신검, 양검(성장한 양검), 박영규 부부, 능애가 견훤과 마주해 다과를 들고 있다.
견훤 이거 오랜만에 우리 황실 가족이 함께 모였구먼 그래.
능애 그러게 말이옵니다, 폐하. 이제 금강 태자께서도 아주 의젓하게 크신 걸 보니 참으로 든든하옵니다.
금강 고맙사옵니다, 숙부님.
박영규 한동안 폐하께서 국사에 전념하시느라 황실을 미처 돌보지 못하신 것 같사옵니다. 황후마마께서 걱정이 많으셨을 것이옵니다.
박씨 왜 아니겠는가, 사위? 말도 마시게. 전쟁터에 나가실 때마다 뜬눈으로 밤을 세우는 게 습관이 되었네 그려.
고비 사실이옵니다. 황후마마도 그러하셨고, 신첩도 전쟁 이야기만 나오면 깜짝깜짝 놀라는 병이 생겼사옵니다.
견훤 허허허, 후삼국이 모두 전장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어요. 싸우는 것이 무서워서야 어찌 큰 일을 하겠소이까? 그나저나, 양검이는 지방에서 공부를 많이 하고 왔느냐?
양검 예, 아바마마. 많은 공부를 하였사옵니다.
신검 무예도 늘었고, 아주 장수답게 변해서 왔사옵니다, 아바마마.
견훤 그래야지. 너희들의 이름에는 검자가 붙어 있어. 용감하고 크게 되라는 뜻이야. 이 삼한을 제패한다 이런 뜻이란 말이야. 이 아비의 얼굴과 백제국의 이름에 욕되지 않도록 쉼 없이 단련해야 할 것이야.
신검, 양검 예, 아바마마.
견훤 금강이도 잘 새겨들어야 할 것이야.
금강 예, 아바마마.
견훤 암, 그래야지. 그래야지.
견훤은 금강을 믿음직스럽게 바라보고 있는데, 박씨가 입술을 삐죽한다. 못마땅한 것이다.
씬 20 동 황실 어느 전각
최승우, 능환, 추허조, 공직, 김총, 애술, 최필, 신덕 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고 있다.
능환 오늘 폐하께서는 모처럼 황실 분들과 차를 들고 계시오. 자, 우리끼리 그 동안 모아본 전략을 숙의해보십시다.
최승우 폐하께서는 대야성에 목적을 두고 계시옵니다. 이번에는 우리 장수들이 실질적인 전투 방향과 주 공격로를 설정해야 할 것이옵니다.
신덕 우리가 대야성을 공격하자면, 저 고창(안동), 대구, 대야주(합천) 등의 전선도 살펴가며 전략을 짜야 할 것이옵니다. 특히나, 벽진군(성주)은 우리 백제와 신라, 태봉이 함께 맞부딪치는 전략적 요충지이옵니다. 이 많은 전선들의 상황을 상세히 살펴 볼 필요가 있사옵니다.
최승우 중요하기로 따지면 모두 다 중요한 것이올시다. 다른 전선은 그곳의 장수나 호족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고 주 목적지를 함락시키는 것이 우선 과제올시다. 일단 폐하께서 정하셨으니 그 준비를 해드리는 것이 옳은 일이올시다.
능환 전쟁을 하기 전에 적국의 동태를 알아보는 것은 전략에 있어서 필연적인 것이오. 태봉과 신라는 어떻소이까? 지난번에 특히나 태봉국에 관해서는 파진찬의 관심이 아주 크지 않았소이까?
최승우 태봉국은 지금 겉으로 보기에는 왕건이가 시중이 된 이후 정국을 단단하게 움켜쥔 것 같사옵니다. 전선에도 별 동요가 없고, 나라 사정도 평온하옵니다.
애술 역모사건이 있었는데 어떻게 나라가 평온하다 할 수 있겠사옵니까?
최필 그러게 말이옵니다. 이해가 안가옵니다.
공직 우리 수달장군이나 여기 이찬 어른, 추장군과 같은 분들이 폐하와 의형제를 맺은 것처럼 시중이 된 왕건이가 궁예왕과 그런 사이라고 합니다. 그 때문에 역모 사건도 왕건이가 해결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일단 나라 사정은 별 무리가 없다고 봐야겠지요.
추허조 그건 그렇다고 봐야 합니다. 궁예왕과 왕건이는 단단하게 연결된 것 같습니다. 아, 그러니까 황제 다음 벼슬에 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태봉국을 잠시 접어 두고 역시 대야성을 치는 것이 옳은 일일 것 같습니다.
김총 소장도 그리 생각하옵니다.
최승우 허지만, 태봉국이 그렇게 안심할만한 입장에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지금 여기서 말씀드릴 수 없지만, 우리는 태봉국에 대해서 많은 것을 좀 더 신중하게 보고 있는 중입니다. 태봉국의 황제는 지금 아마도 무서운 정신병을 앓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모두들 예...?
최승우 저들의 약점을 잘 이용한다면 의외로 큰 소득을 얻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 그 방책을 연구중입니다. 허나, 어디까지나 좀 더 두고본 다음의 일입니다. 허허허허..... 자, 다 다시 대야성 이야기나 논하십시다.
추허조 이보시오, 파진찬. 그것 참 궁금하구료. 나는 처음 들었습니다. 태봉국의 궁예왕이 그럼 실성을 했다는 것이 아닙니까?
최승우 그렇다고 합니다. 어쨌든 좀 더 귀추를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첩자들의 보고를 계속 받고 있습니다.
씬 21 철원 황궁 외경
씬 22 동 대전 안
술을 마셔 가며 궁예가 왕건이 가져 온 정책안을 읽고 있다.
그 앞에 왕건이 앉아 있다. 한참을 보던 궁예가 그것들을 내려놓으며 왕건을 본다.
궁예 아주 이건 뜻밖이네 아우. 평양성을 도모해?
왕건 그러하옵니다. 여러모로 군부의 의견을 취합한 결과이옵니다.
궁예 좋지. 어쨌든 북벌이 아닌가? 우리는 수군과 더불어 대대적인 군비를 갖추고 황해와 저 북쪽을 동시에 치고 들어가려고 했었어. (계속 서류 보며) 평양성이라..... 내가 생각한 것 보다 규모는 작지만 해볼만 하겠네 그려.
왕건 망극하옵니다, 폐하. 그 평양은 고구려가 무너진 이후 당나라의 영역에 속해 있었사옵니다. 지금 그곳을 도모한다는 것은 어쩌면 실질적인 북벌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 될 것이옵니다.
궁예 자네는 나라의 재정이 피폐하고 백성들이 고단하다고 하여 중지하자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다시 시작해?
왕건 실리적인 싸움이옵니다. 즉, 이득이 우선이라는 뜻이옵니다, 폐하. 그곳의 호족들을 다독거리고 한편 군사들이 시위를 벌리면서 양면작전을 써보려 하옵니다.
궁예 허허허, 좋은 생각이야. 다시 북벌을 얘기한다? 이건 아우가 나에게 주는 선물인게로구먼. 그런 것인가?
왕건 예, 폐하. 실은 내원께서 소신에게 청한 일이옵니다. 폐하를 기쁘시게 해드리려고 말이옵니다.
궁예 내원이? 내원이 말인가, 아우?
왕건 그러하옵니다. 그리하여, 신과 신료들이 머리를 맞대어서 생각한 결과 평양을 도모하자는 결론을 얻어냈사옵니다.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이옵니다. 천천히 확실하게 땅을 넓혀 나가자는 것이옵니다.
궁예 고맙네 아우. 이 형을 참으로 많이도 생각했네 그려.
왕건 망극하옵니다, 폐하.
궁예 (다시 서류 보며) 병부와 순군부의 장수들 배치는 아우가 생각한대로 하게. 나는 이미 전선에 나가 본지가 오래 되었어. 내가 뭘 알겠는가? 아우 마음대로 해.
왕건 망극하옵니다, 폐하.
궁예 내가 준 법봉은 잘 가지고 있는가?
왕건 예, 시중부에 뫼셔놓았사옵니다.
궁예 허허허, 자, 우리 정책이야기는 그만 하고... 또 하루가 저무는데 한 잔 어떻겠는가?
왕건 폐하, 소주는 삼가하시오소서.
궁예 왜?
왕건 드실 때는 모르시옵니다. 하오나, 결국은 폐하의 옥체를 크게 상하시게 하옵니다.
궁예 허허허, 지금 나를 위해서 백두산에서 온 도인이 기도를 한다네. 영약을 다린다는 구먼. (재미있게) 그것을 먹으면 온갖 병이 다 낫고, 기운이 펄펄 난다는 게야. 그런데 이까짓 소주가 뭐가 걱정이겠는가?
왕건 ........
궁예 자, 자네도 한 잔 하게. 술이라는 게 혼자 마시면 참으로 재미없는 물건이야. (따라주며) 나는 이미 얼큰하였네. 마셔보게. 아, 들어.
왕건 예, 폐하.
왕건이 마지못해 마신다. 그리고, 얼굴을 찌푸린다. 독주인 것이다. 재미있는 듯 궁예가 웃는다. 그러다가, 한참 왕건을 본다. 그런 궁예가 이상해서 왕건이 묻는다.
왕건 왜 그러시옵니까, 폐하?
궁예 (한참 보다가 석총의 흉내를 낸다) 하하하하, 너는 거짓 미륵이다. 가짜야. 너는 미륵이 아니야.
왕건 (놀라며) 폐하.....?
궁예 (계속 웃으며 이번에는 아지태의 흉내를 낸다) 너는 미쳤다. (사이)불쌍하구나. 황제여, 너는 이미 미쳤다. 제국을 끌어 나갈 힘도 없다. 결국은 왕건이에게 다 내주게 될 것이다. 이 미련하고 불쌍한 황제여.
왕건은 소스라치게 놀란다. 궁예는 삿대질을 하며 그렇게 흉내를 내다가 한참을 웃어 제친다.
실성한 사람처럼 그렇게 웃다가, 다시 정색하며 왕건을 본다.
궁예 이보게, 아우.
왕건 예, 폐하.
궁예 정말 내가 미쳤는가? 그런 것인가?
왕건 아니옵니다, 폐하. 그렇지가 않사옵니다. 이미 아지태는 벌을 받았사옵니다. 그들의 생각을 지우시오소서.
궁예 (한참 생각한다) 그런데, 그게 잘 지워지지가 않아. 그 자들이 자꾸 내 눈에 보여.
왕건 ..........
궁예 아지태 그 놈도 아주 영악스러운 놈이었어. 결국 죽을 때가 되니까 그 발악하는 것 좀 봐. 내게 독설을 퍼붓고 갔어. 그리고, 제놈 혼자만 알고 있던 것을 다 지껄였단 말이야. 지금에서야 말이지만, 그 석총이가 아우를 만났다는 것은 아주 놀라운 일이었어.
왕건 .......?
궁예 그리고, 이건 내가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왕건 말씀하시오소서.
궁예 아지태 그 놈이 아주 이간질도 그럴 듯하게 시킨단 말이야. 그 황후 얘기 말일세.
왕건 .......(충격)
궁예 세상에... 두 태자를 왜 보위에 올리려고 했는지 생각해보라고 하지 않았는가? 아우는 정말 예전에 황후와 정혼 이야기가 있었는가? 그런 일이 있었는가? 혼인을 약속한 적이 있었어?
왕건 .......?
궁예 아, 대답 좀 해보게. 이 사람아. 아지태의 말이 어디까지 사실인가 알아보려고 하는 것이야.
왕건 폐하........?
궁예 아, 말해 보아.
(끝) (0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