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있다.”(18,10)
예전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마니또’ 게임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베트남에 있을 때 저도 학생들과 마니또 게임을 통해서 자신이 뽑은 형제의 보이지 않는 수호천사가 되어 그를 위해 기도하고 말없이 도와주다가 어느 정한 시기가 되면 미리 준비한 선물을 주면서 내가 바로 너의 수호천사였다, 하고 고백하도록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게임을 통해서 우리는 수호천사가 누구인지를 확실히 알지 못하지만, 누군가가 나를 위해 기도하고 나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려고 한다는 사실이 삶에 큰 위로와 힘이 되리라 봅니다. 또 누군가에 관심을 가지고, 그 사람에게 수호천사임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그의 행복을 빌어주고 그가 잘되길 바라면서 살아갈 때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관심의 폭이 넓어지고 깊어지면서 본인 역시도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수호천사가 분명히 누구인지 알지는 못해도 수호천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의 안정을 느낀다면 우리 또한 누군가의 수호천사가 되고자 할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광주 망월동 5,18 국립묘지에서 어느 분의 묘비에 ‘당신의 나의 천사’였습니다, 라는 표현을 보면서 더 실감 나게 다가왔었습니다.
사실 과거보다 현대에 들어와서 천사들에 대한 공경은커녕 언급조차 회피하고 존재마저 의심하는 경우가 많음을 느낍니다. 어느 분의 표현에 의하면, 이런 현상은 성전 건축물에서 그대로 드러난다고 하더군요. 중세기부터 근대 이전에 봉헌된 유럽의 성전들에서 쉽게 볼 수 있던 천사들의 성상이나 성화들이 요즘 현대식 성전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음을 저도 안식년 동안 유럽 각 나라를 여행하면서 유심히 살펴보니 그러더군요. 이는 곧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에만 의존하려는 유행이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정서에도 영향을 미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천사들은 오늘도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또 앞으로 오실 분!”하고 외치면서(묵4,8) 성인들과 함께 천상 예배를 드리며, 지상에서도 수많은 영혼과 함께하여 그들을 지켜주고 보호하며, 기도를 하느님께 바치고 있음을 우리는 매일 미사 감사송에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클레멘스 10세 교황(1670-1676)은 10월 2일을 수호천사 축일로 정하여 온 교회가 기념토록 하였습니다. 수호천사들은 “모두 하느님을 시중드는 영으로서, 구원을 상속받게 될 이들에게 봉사하도록 파견된”(히1,14) 존재들입니다. 이와 같이 수호천사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인간들을 위험과 악마의 해로부터 보호하고 지켜주며, 선한 생각과 관심을 불어넣어 주며, 사람을 위해 스스로 기도하고, 사람의 기도를 하느님 대전에 올려주는 영적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수호천사의 보호와 도움을 받고 살아가는 어떤 사람도 세상에서 업신여김을 받아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있다.”(18,10)라고 하신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런 시선에서 시편 8편을 음미하면서 들어 보도록 합시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천사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당신 손의 작품들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습니다. (...) 온 땅에 당신 이름, 이 얼마나 존엄하십니까?”(시8,5.7.10) 오늘 수호천사의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섭리와 배려에 감사하면서 늘 수호천사들의 보호하심과 돌보심에 힘입어 하느님의 모상적 존재로서 품위와 존엄함을 잃지 않도록 깨어 살아가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