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6일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열왕기하 5,1-15ㄷ
루카 4,24ㄴ-30
충고를 들을 때 화가 난다면 나의 확신에 교만이 붙어있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제2차 세계 대전 때 망한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는 그의 불같은 성격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히틀러는 머리가 명석하고, 관찰력이 깊고, 예리한 판단력과 비상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지만, 어찌나 화를 잘 내는지 자기의 비위를 조금만 거슬려도 미움과 분노가 충천하므로,
그의 부하들은 사실을 제대로 보고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의 가장 큰 실수 중 하나는 영국과 프랑스 등 자유 진영과 힘겨운 전쟁을 하면서도 참모들의 말을 무시하고 주력부대를 빼돌려 러시아를 침공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그의 일생에서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상과는 다르게 러시아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고 러시아의 크기와 날씨 탓에 히틀러의 군대는 전멸하다시피 하였습니다.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개시했을 긴박한 상황에서도 히틀러는 참모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을 감행한다는 정보를 들었을 때, 러시아로 향하는 기갑 사단을 만 쪽으로 돌렸다면 상륙을 저지할 수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충고를 할 때 화를 낸다면 그 사람의 미래는 암울할 뿐입니다.
오늘 독서에 나아만이 엘리사를 통해 나병이 치유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나아만은 시리아 사람이었는데 거의 자신들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이스라엘로 나병의 치유를 위해 내려옵니다.
이때 엘리사는 나아만 장군이 도착했을 때 밖을 내다보지도 않고 심부름꾼을 시켜 요르단 강에서 몸을 씻으라는 말을 전합니다.
미국 국방성 장관이 한 시골 본당 신부를 찾아왔는데 내다보지도 않고 냇가에 가서 목욕이나 하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아만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무시당한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화는 일반적으로 자신을 스스로 들어 높인 사람들의 전유물입니다.
이때 부하들이 “아버님, 만일 이 예언자가 어려운 일을 시켰다면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아버님께 몸을 씻기만 하면 깨끗이 낫는다고 하지 않습니까?”라고 설득합니다.
그러자 마음이 누그러져 엘리사가 시키는 대로 하였고 그 덕분으로 나병이 치유됩니다.
나아만은 화를 이기고 자신의 의견을 바꿀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나자렛 사람들에게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라고 하시며, 나아만과 사렙타 과부의 사례를 그 예로 들었을 때 나자렛 사람들은 화를 내며 예수님을 절벽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들이 만약 화가 난다는 것을 통해 자신들의 믿음이 교만과 하나가 되어있음을 깨달았더라면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간을 이식해주려면 간과 붙어있는 쓸개도 함께 잘라내야 합니다.
간만 따로 잘라서 이식해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지금 기술상으로는 간에 붙어있는 쓸개를
분리하고 자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나 확신을 바꾸기가 어려운 것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 믿음 안에는 믿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얽힌 것들이 함께 있기 때문에
그 믿음을 바꾸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럴 때 자주 쓰는 방법이 ‘화’라는 감정입니다.
화를 내어서 분명 자신에게 화가 나니 자기 생각이 옳다고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
화를 자신의 확신을 바꿀 수 없는 자기 합리화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신천지에 빠진 이들이 왜 신천지에서 빠져나오기 힘든 것일까요?
사실 교리는 허접하기 짝이 없다고 합니다.
거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몇 달 동안 친구들과는 다 끊어지고 남은 사람들이 자신들 주위에서 자신을 따뜻하게 맞아준 신천지 신도들뿐이기 때문입니다.
교리만이 아니라 소속감이 주는 안정감 때문에 그것을 잃기 싫은 것입니다.
또 하나는 자신들이 몇 달, 몇 년 동안 확신을 두고 믿었던 것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기 어렵기 때문에도 그렇습니다.
그 믿음을 버린다는 것은 자신이 바보였음을 인정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창피해서 믿음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믿음을 바꾸라고 충고하면 성을 내며 그 핑계로 절대 믿음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을 바꾸는 것은 곧 자신을 버리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만약 나에게 무언가를 충고할 때 화가 올라온다면 이는 분명 암세포가 섞인 오염된 확신입니다.
분명 그 확신과 나의 교만이 함께 붙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확신은 바꾸는 것이 좋습니다.
교만에 의해 생긴 믿음이기 때문에 그것이 진리일 확률이 매우 희박하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16일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열왕기하 5,1-15ㄷ
루카 4,24ㄴ-30
쓸쓸하고 허전한 마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어떤 의미에서 나자렛 사람들은 하느님으로부터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오랜 세월 기다려왔던 구세주 예수님께서 자기 마을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보통 큰 경사가 아니었습니다.
오랜 기간 함께 동고동락해왔던 고향마을 사람들!
예수님께 참으로 고마운 사람들, 정겨웠던 사람들, 꿈과 추억을 만들어준 따뜻한 이웃들이었습니다.
나자렛 사람들!
예수님께서 각별한 애정을 지니고 계셨던 사람들이었기에, 그 어떤 사람들에 앞서 가장 먼저 복음을 전파하고 싶으셨습니다.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데 있어서 첫 번째 대상자가 나자렛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철저하게도 무시합니다.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인정하기는커녕 오히려 불경한 사람으로 단죄하고 돌로 쳐 죽이려고 까지 합니다.
더욱 가관인 것은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 모두가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즉결심판에 처하려고 합니다.
일정한 법적 절차도 거치지 않습니다.
죽입시다! 옳소! 하는 식의 인민재판식으로, 다수의 폭력으로 예수님 한 사람을
처단하려고 합니다.
산벼랑까지 끌고 가서 밀어뜨리려 합니다.
다행히 예수님은 구사일생으로 궁지에서 빠져나오셔서 자신의 갈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자신을 끝까지 거부하고 단죄하는 나자렛을 영원히 떠나십니다.
해도 해도 안 되다보니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눈물을 머금고 고향마을을 등지십니다.
이제 고향마을 사람들은 예수님 복음, 구원의 기쁜 소식과는 거리가 먼 철저한 이방인이 되고 맙니다.
반대로 비록 동향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인 이방인들이 복음의 수혜자가 됩니다.
세례 받은 지 오래 되었다고 해서, 수도생활이나 사제생활의 연륜이 많다고 해서, 성당 가까이에 산다고 해서, 단체장을 맡는다고 해서 절대로 신앙의 프리미엄이 붙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언제나 겸손하고 진지하게 하느님의 뜻을 찾고, 하느님의 섭리를 믿고, 하느님의 자취를 찾아나가려는 매일의 노력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쓸쓸하고 허전한 마음으로 동족으로부터 발길을 돌리시는 예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묵상하며,
우리 각자가 몸담고 있는 신앙공동체의 영적인 상태는 어떠한지 진지하게 반성해보면 좋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3월16일 [사순 제3주간 월요일]
복음: 루카 4,24-30: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예수님은 당신이 자라나신 고향과도 같은 나자렛을 당신의 공생활 초기에 방문하신다. 나자렛을 위하여 방문하셨지만 나자렛 사람들의 태도는 달랐다. 그들을 회당에서 가르치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다.예수님은 그들에게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24절)고 하시면서 하느님 앞에 회개하라고 하신다. 나자렛 사람들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믿음으로 대하지도 않았다.
예수께서는 구약의 엘리야가 찾아간 사렙타 마을의 과부 이야기와 엘리사 시대에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을 고쳐주신 이야기(24-27절)를 하시면서, 기적을 팔레스티나 밖에서 행하신 것은 바로 당신의 백성들이 믿음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사실 사렙타 마을의 그 과부(1열왕 17-18장)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2열왕 5장)이 얼마나 큰 신앙을 입증해 보여주었나를 알 수 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의 영역을 넓혀주고 확장시킨다. 예수님을 자신의 편의와 이익을 위해서만 잡아두려고 하는 것은, 즉 하느님을 나의 편의와 이익만을 위해서 이용하려고만 한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계획과는 거리가 먼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더 이상 새로운 길로 나아가지 못하고 하느님께서 제시하시는 새로운 일들도 받아들일 마음의 문을 열 능력도 없게 된다.
바로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께서 선포하신 새로운 것들에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에게 적개심을 갖게 되었고 그분을 배척하고 마침내 그를 죽이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분이 불편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선 영원한 예언자이신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는 어떤가? 그분은 어떤 면에서 ‘불편한’ 분이시다. 이 불편한 분의 말씀에 부응하여 우리 자신을 변모시켜 나가고자 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자렛 사람들과 같이 폭력은 행사하지 않았더라도 그분에게 어떤 제약을 가하려 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결국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산벼랑으로 예수를 끌고 가 그 곳에서 떨어뜨려 죽이려고 한다. 사람이 악하다는 것이 여기서도 드러나고 있다. 거부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곧 박해로,죽음에로까지 가게 하는 인간의 잔인성이 보이는 것이다.우리의 마음 안에도 어떤 면에서 이러한 나자렛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날 수도 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면서도,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선지식으로, 혹은 선입견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못한고 만다면, 그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 주님을 산벼랑으로 밀어내어 죽이려고 하지나 않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항상 주님의 자녀로서 어떠한 판단을 갖지 않고, 이웃에게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 실천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우리가 되도록 은총을 구하자.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