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나카타'를 위한 영상 화보집이 나왔다.
일본 어뮤즈 북스(amuse books)에서 출간한 '세계 축구선수 톱300(WORLD FOOTBALL PLAYERS TOP 300)'. 이 책에서 나카타는 기술과 신체능력, 정신력의 세 부분에서 점수를 매긴 평가표에서 내로라하는 스타들을 제치고 당당히 30위에 올랐다. 그리고 나카타가 책 속에서 영웅시되는 동안 다른 스타들과 이웃나라 한국은 철저히 나카타의 들러리가 되어 있다.
'30위'-나카타 영웅 만들기의 서곡인가?
스타플레이어들의 화려한 모습으로 시작되는 이 책은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이는 다섯 스타의 인터뷰 기사로 시작된다. 지네딘 지단-가브리엘 바티스투타-루이 코스타-로베르토 바죠 그리고 프란체스코 토티. 이쯤 되면 팬들은 이런 질문을 던질 것이다. '아니, 나카타를 위한 화보집이라면서 왜 나카타는 인터뷰에서 빠졌지'라는.
답은 이렇다. 일본의 영웅 나카타는 이 다섯 스타들에 앞서 책의 서문을 장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칭찬치고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쑥스러운 과찬 속에 등장한다. 책 시작에서부터 이들 다섯 스타를 '영웅 나카타'의 들러리로 세운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태국에서도, 모로코에서도, 브라질 축구팬도 '나카타'. 그리고 한국인도, 중국인도 '나카타'. 들리는 건 나카타에 대한 환호성 뿐. 나카타는 이미 축구 세계에서 동양의 영웅이다. 지단의 등번호 10번은 프랑스의 번호, 요한 크루이프의 등번호 14는 네덜란드의 번호. 그렇다면 나카타의 등번호 10번은... 동양의 영웅을 상징한다"
서두에서 시작된 나카타를 향한 닭살 돋는 오버칭찬은 정말이지 일본인의 과대 포장 상술과 너무나도 닮은 느낌이다.
"나름대로 300인의 세계축구스타를 정의한다. 해석은 자유, 이같은 순위 매김에 야유를 보낼려면 보내고 독설을 퍼부으려면 퍼부어라. 어차피 그런 것도 축구팬들이 가질 또다른 권리의 하나니까"라고 자신하는 이 책은 서두에서 지리잡고 있는 나카타 과대포장에 대한 단순한 질투에서가 아닌, 이 책의 오류와 편견과 우상 만들기의 잘못을 씹지 않고서는 못 견딜 충동 같은 것이 있다.
'나카타는 동양을 대표하는 진정한 영웅인가?'
페루자(약 4억원)→AS로마(207억원)→파르마(약 330억원)로 이어지는 이적료 돌파행진만 봐도 일본이 강조하는 '나카타의 영웅신화'의 객관성은 있다. 또 페루자에서의 활약은 '세리에A에 떠오른 아시아 스타'로 자리매김하기에 충분했고 비록 AS로마에선 벤치신세를 많이 지긴 했지만 경기 출전 기회를 얻을 때마다 보여준 나카타의 활약은 나무랄 데 없었다. 또 최근 컨페드컵에서 일본이 일군 준우승은 나카타가 없었다면 어려웠을 것이란 주장도 충분히 공감이 간다.
하지만 이런 공감에도 불구하고 AS로마 팬들과 이탈리아 축구팬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분명 엄청난 야유를 퍼부어댔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카타를 프란체스코 토티(33위)에 앞선 30위에 랭크시키는 모험을 걸었기 때문. 토티는 나카타가 AS로마에서의 벤치신세를 한탄하며 파르마로 이적하게 한 결정적인 장본인이다. 팀 내 플레이메이커 싸움에서 토티에 밀린 나카타는 60%(나카타가 출장률 60%를 못 넘을 경우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받기로 했다)에 못미치는 출장률을 보이더니 결국 파르마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반면 토티는 바티스투타(20골), 몬텔라(14골)에 이어 13골로 팀내 득점 3위의 맹활약을 펼치며 지난 시즌 AS로마의 자국리그 우승을 견인했다. 그렇다면 이 책의 평가대로 토티보다 세 단계나 위인 나카타를 벤치에 앉히고 토티를 주전으로 활용한 AS로마의 선택은 멍청한 짓에, 외국선수 차별의 한 예일 뿐인가.
*나카타와 토티 평가표
이 책에서는 나카타(74)와 토티(72)의 점수차를 단지 2로 봤지만 정신적인 면에서는 나카타가 토티를 훨씬 능가하는 것으로 평가했다. 나카타는 드리블이나 파워에서는 다소 밀리지만 상황판단이나 침착함에서는 단연 토티보다 돋보인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정신적인 부분에 많은 점수를 준다는 것, 이는 '나카타 영웅만들기'에 잠시 눈이 멀어버린 편집장의 의도된 실수가 아닐까.
이 책은 또 나카타는 토티라는 불가침의 스타가 존재하는 AS로마에서, 얼마 안되는 찬스를 살려내며 그 가치를 보여주었다고 평가한다. 반면 토티는 공격형 미드필더를 강력히 주장하는 바람에 나카타의 입장을 어렵게 만들었으며 킥력이나 게임메이킹은 다소 불안하지만 이탈리아 팬들의 성원에 힘입어 주전자리를 꿰찼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나아가 토티는 나카타와 겹치는 플레이메이커 자리가 아니라 포워드 타입이 맞다는 친절한 해석까지 덧붙이면서.
이외에도 영웅 나카타의 들러리로 떨어진 스타는 많다.
클루이베르트(31) 에드가 다비즈(34)베르캄프(36) 주닝요(37) 가이즈카 멘디에타(47) 메흐멧 숄(48) 크레스포(53) 에메르손(56) 리앙 긱스(57) 등, 이 책으로부터 '나카타보다 이름값 못한다'는 평을 받은 스타들을 일일이 나열한다는 건 손만 아플 뿐이다. 단지 나카타 영웅만들기의 희생양이 아닐까하는 추측만 할 수 있을 뿐, 이 스타들이 나카타보다 뒤처질 이유가 과연 무엇인가!
우리의 스타 '안정환과 홍명보'도 구색 맞추기 위한 들러리
최근에 보여준 화려한 플레이로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나카타는 그렇다고 치자. 이 책에서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이 있다. 한마디로 한국 선수들을 너무 무시했다는 게 그것.
세계축구스타 300명 중 한국 선수로는 안정환과 홍명보, 단지 두 선수 만이 포함됐다. 홍명보는 스피드에서 6점 그리고 파울을 범하지 않는 수비능력에서는 겨우 5점을 받으며 156위(69점)에 올랐다. 하지만 페루자에서 뛰면서 나카타를 넘어섰으면 하는 선수로 기대 받던 안정환은 298등으로 꼴찌에서 두 번째 자리에 겨우 얼굴을 내밀었다. 왼발 사용능력과 헤딩력은 10점 만점의 반도 안되는 4점을 받으면서 얻어낸 총점은 60.
내로라하는 '세계 축구스타 300걸'에 우리나라 선수가 두 명이나 들었다고 '눈가리고 아웅' 해줄 순 있지만 나카타를 제외한 일본 선수가 무려 5명이나 포함된 것을 보면 속이 쓰려도 한참 쓰리다.
나나미 히로시는 스피드에서만 안정환보다 조금 뒤졌을 뿐 9개 항목의 우위를 보이며 66점으로 235위, 이나모토 준이치는 냉점함에서 1점 뒤져 66점으로 236위, 오노 신지도 민첩성에서만 1점 뒤진 237위 그리고 일본의 신예 오가사와라 미츠오는 238위. 게다가 떠오르는 4명의 일본선수를 따로 떼어놓기 미안했는지 나란히 묶어 300걸 안에 포함시키는 친화력을 과시하면서. 이정도도 넘쳐난다 싶은데 한 명이 더 숨어있다. 바로 나카무라 슌수케. 나카무라는 패스와 킥의 능력에서 무려 9점을 받아내며 안정환보다 35계단이나 높은 263위에 랭크됐다.
도대체 이 책의 출간 저의는 무엇일까? 월드컵 붐과 축구 열기에 편승한 상업주의의 한 모습에 불과한 일과성 해프닝인가?
결코 아니다. 우리는 이런 '나카타 영웅 만들기'와 같은 사고에서 일본의 전형을 본다. "원근심려(遠近深慮)"와 같은 무언가 목적을 이루기 위해 미리 미리 알게 모르게 준비하는 그들의 심성을 엿볼 수 있다. 이번 월드컵의 영웅으로 일본 선수를 특히, 나카타를 그 정점에 올리기 위한 사전 포석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 과거 한국을 잡기 위해 설설 기던 자세에서 이제 한국을 넘어섰다는 자신감을 지나친 과장법으로 표현한 것이다. 마치 '도랑치고 가재 잡는'식의 해석과 접근 말이다.
'나카타 영웅 만들기'와 '일본선수 띄우기'에 초점을 맞춘 '세계 축구스타 톱300'을 보면서 우리는 단순한 감정적 비애를 느끼기만 해서는 안된다. 우리도 배워야 할 것은 실상이 어찌 됐든 우리 나름대로 '영웅 만들기'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않된다는 것이다. 스타는 만들어 지는 것이고 '스포츠 스타'는 더더욱 팬들이 키우는 나무와 같기 때문이다.
다소 늦기는 하지만 2002월드컵을 위해 우리도 한국판 영웅 만들기를 하자.
반드시 월드컵 16강의 벽을 넘어 흐트러진 우리의 자존심을 세워줄 영웅을 만들자. 그로 인해 우리 선수 한 10명 쯤은 '세계 축구스타 톱300'의 2002년 개정판에 이름을 올리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