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의기양양하게 내뱉은 그 말뜻을 이해한 순간 나는 경악해서 입을 떠억 벌리고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눈으로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놀래? 왜, 정원형이 결혼했었다는 게 그렇게 충격이야? 뭐야, 설마 너 원형이 애인이라도 되니?"
뻐끔뻐끔- 너무나 큰 충격에 아직도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못한 나는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난 정원형이 전처야, 전처야, 전처, 전처, 전처......
여자의 말이 머릿속에서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덕분에 방금 전까지의 옷을 돌려줘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하는 고민은 어딘 가로 흔적도 없이 날아간 상태.
완전히 얼이 빠진 나를 보자 한층 더 기세가 등등해진 그녀는 허리에 양손을 얹은 거만한 자세 그대로 새빨간 매니큐어를 바른 손 끝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서. 난 이미 얘기했고. 그러면 다음은 니가 대답하는 게 순서지. 넌 누구야?"
"...저기, 저는...."
"그래, 넌 원형이의 뭐야?"
"저기, 이 집의 살림을 맞아주고 있는 사람인데요..."
곧 죽어도 '식모'나 '가정부' 따위의 호칭을 쓰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말했지만 여자는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럼 그렇지!' 라면서 뭐가 그리 즐거운지 호호홋- 높은 음성으로 웃었다.
"아휴, 하루종일 쇼핑했더니 피곤해 죽겠네. 집에 딸기하고 키위 있지? 얼음 좀 넣어서 시원하게 갈아와, 설탕은 넣지 말고."
남이야 정신을 잃고 금방이라도 현관에서 쓰러지던 말던 내 대답에 아주 만족한 여자는 사뿐사뿐 거실로 가 한가운데의 커다란 소파에 길게 드러눕더니 대뜸 그렇게 명령한다.
미쳤냐? 당신이 뭐 이쁘다고 그런 걸 해다 바치겠냐고, 내가!!
화가 머리끝가지 씩씩대며 여자를 한껏 째려보던 나는 그러나 정신을 차려보니 저도 모르게 냉장고의 야채박스 안을 뒤지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본다면 저렇게까지 말을 하니 그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건 사실이겠지. 미치지 않은 이상 생판 모르는 집에 쳐들어와서 집주인이 돌아오면 뻔히 들통날 거짓말을 할 리도 없고.
수돗물을 틀고 흐르는 물에 그것들을 하나하나 씻어 믹서에 넣고 버튼을 누르자 믹서기는 값비싼 일제답게 조용한 소음을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멍하니 딸기와 키위가 섞이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전처래.. 전처.. 전처-
그 단어가 왜 이렇게 가슴에 와 박히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렇게나 슬픈데 그의 전처를 위해 주스 따위나 만들어야 하는 내 신세가 처량하게만 느껴져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흐윽, 흑... 흑...”
컵에 따르던 주스 속으로 눈물이 들어가는지 말든지 신경 쓸 정신도 없이 나는 눈물을 후두둑 쏟아내고 있었다. 청천벽력도 유분수지. 전처라니, 전처라니이..... 엉엉.
"나쁜 놈. 사기꾼 같은 놈...."
애꿎은 녀석을 원망해가면서 주스를 잔에 따라놓고는 휴지를 풀어 얼굴을 닦아낼 때였다.
딩동, 딩동! 딩동, 딩동, 딩동-
갑자기 현관에서 벨 누르는 소리가 울려오는데- 누르는 사람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듯 성급하기 짝이 없다.
"어머, 원형이 왔나보다! 누구세요.. 원형이니?"
나보다 한발 빠르게 여자가 원피스 자락을 휘날리며 날듯이 현관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들려오는 녀석의 목소리.
"뭐야, 집 안이 왜 이렇게 어수선해?"
정원형, 이 나쁜 놈! 왜 이렇게 늦게 와.... 이제까지 그렇게도 욕하고 원망했으면서도 그 목소리가 어찌나 반갑던지. 나는 다시 차 오르는 눈물로 그렁그렁한 눈을 하고서 현관으로 뛰어갔다.
막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오려던 그는 내 얼굴을 보더니 느닷없이 버럭 소리를 지른다.
"뭐야, 너 왜 울어?!"
그런데 생각해보니... 내가 대체 왜 우는 거지? 이 인간이 결혼을 했던 어쨌던 따지고 보면 나랑은 전혀 무관한 일이 아닌가. 아까 여자 말대로 진짜 내가 이 녀석 애인이라도 되는 것도 아니고.
"뭐냐니까. 너 왜 울어!"
뜻밖의 사실에 놀라 멍하니 서있는 나를 보고 놈이 몹시 기분 나쁜 얼굴로 나를 채근했다.
"저, 저기 그게요..."
"그게 뭐?"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저 여자가 당신 전처라고 했다고 해서 울었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 나도 이해가 안 가는데 당신이 이해가 가겠어? 등등을 생각하며 망설이자 성질 급한 녀석이 한 번 더 닥달을 하려고 입을 여는데 별안간 여자가 불쑥 껴든다.
"너 보기보다 순진하다, 얘. 좀 괴롭혔다고 그깟 일로 울기까지 하니?"
그러고는 허리에 손을 얹은 자세로 호호호홋! 하고 가식적으로 웃어대는 게 아닌가.
"뭐. 뭐야.."
"아씨, 정진형! 자꾸 그런 짓 하지 말랬지!!"
하도 어이가 없어서 내가 한마디 쏘아 주려했으나 역시나 녀석의 성질이 먼저 폭발해버린다.
"어머, 왜 그렇게 소리는 지르고 그래. 깜짝 놀랬잖니."
"형이 자꾸 그러니까 사람들이 오해하잖아! 이번엔 또 뭐라고 거짓말했어?"
잘한다, 계속 소리질러 버려! ...그런데, 뭐? 뭐가 어쩌고 어째? 형- 이라고?!
"아이 진짜. 형이라고 부르지 말래니깐! 정 누나라고 부르기 싫거든 그냥 이름을 불러달라고~"
콧소리가 잔뜩 들어간 목소리로 여자가 말하자 대번에 녀석의 미간에 주름이 팍 선다.
"...골치 아프니까 여러 말 말자."
녀석은 피곤하다는 듯 재킷을 벗어 소파 위로 휙 던지며 차갑게 말했다.
"20분 내로 씻고 올 테니까 그 사이에 뉴욕에 전화해서 부모님께 행선지 알려. 그리고, 형.. 아니 정진형. 당신 때문에 오늘 중요한 약속까지 취소하고 들어왔어. 그러니까 더 이상 피곤하게 하지 마- 알아듣지?"
끄덕끄덕. 녀석의 목소리가 어찌나 위압적이던지 착한 아이처럼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여자, 아니 그의 형과 함께 나까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다.
"좋아. 그리고 너."
"예. 저요?"
뒤돌아보는 그의 모습에 순간 긴장한 나는 예? 하며 눈을 크게 떴다.
"형한테 정신 차리게 찬물이나 한 잔 가져다 줘. 난 샤워하고 이십분 뒤에 나올 테니까."
나는 녀석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까지의 상황으로 미루어보아 내가 깨달은 것은 저 여자는 그의 형(!)이라는 것. 트렌스 젠더라나 뭐라나- 그러니까 원래는 남잔데 여자가 된 그런 부류란 말이렷다?
뭐 어쨌든 그러니까 저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그의 전처는 될 수 없는 거고 따라서 녀석은 적어도 이혼남은 아니란 사실. 자칭 그의 전처가 실은 그의 형- 그것도 성전환자였다니 정말 컬처 쇼크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가 이혼남이 아니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휴우, 다행이다. 이제야 한시름 놓겠네."
따지고 보면 뭐가 그렇게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다행이야. 정말정말 다행이야.... 한결 마음이 놓인 나는 앞으로 닥쳐올 난관을 깨닫지 못한 채 야채박스를 뒤지며 그렇게 중얼거리고 또 중얼거렸다.
(12)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한바탕 소란이 가라앉고 난 후. 45층 아래의 야경이 현란한 거실에 어딘지 대결구도로 자리잡고 앉은 두 사람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샤워하고 나온 뒤부터 머리가 다 말라갈 때까지 말 한마디 없이 인상만 쓰고있던 녀석이었다.
그 찌푸린 표정을 보아하니 <뉴욕에서 사는 게 지겨워 휴가를 좀 즐길까 하다가 오랫동안 못 만난 네 생각이 나서 한국에 왔다>는 여자, 아니 그의 형의 간단한 설명이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하긴 생긴 데로 딱 부러지는 타입이니 그 뒤에 숨겨진 비하인드 스토리를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기도 하겠지.
"원형아~ 나 그냥 여기서 살면 안 될까?"
살벌한 표정에 기가 죽었는지 그의 형이 눈물이 글썽글썽한 눈으로 녀석을 올려다보면서 잔뜩 간지러운 애교를 부렸지만,
"싫어."
그러나 결과는 여지없는 KO패. 한 마디로 딱 잘라 거절하는 녀석의 말에 나는 쌤통이다, 하고 속으로 그 얄미운 여자에게 혀를 내밀어주었다.
"왜 싫어어? 응?"
"이유를 정말 몰라?"
"아이, 고지식하기는.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아직도 그런 걸 같고 그래. 한국도 벌써 하리*라는 연예인 덕분에 트렌스젠더를 보는 사람들 인식도 많이 달라졌고..."
"피곤해. 나는 잘 테니까 2층 올라가서 자던지 볼일 보던지 알아서 해."
보는 사람이 다 민망할 정도로 딱 잘라 말한 그는 더 말할 의사가 없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버렸다. 그리고는 두 어 걸음쯤 갔을까, 갑자기 휙 뒤돌아 서더니 나를 쳐다보며 말한다.
"넌 왜 안 따라와?"
"예에? 저. 저요?"
엉, 이건 갑자기 무슨 소리야?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너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올려다봤더니 그는 한심하다는 듯 짧게 숨을 내쉬며 시선을 잠시 다른 곳으로 돌리더니 이내 예의 그 명령조로 다시 물어온다.
"너 오늘 어디서 잘 거야?"
응? 그야 당연히...
"...제 방에서요."
"그럼 형은 어디서 자라고 할건데?"
"저기, 그건..."
그건 그 사람이 알아서 할 일이지... 는 아니고 내가 준비해줘야 하는 거구나, 참.
"넌 오늘 내 방에서 자."
내가 남들보다 아이큐가 모자라 보이는지 녀석은 전후사정은 다 잘라버리고 대뜸 그렇게 명령한다.
미쳤어?! 내가 어떻게 당신 방에서 같이 자냐!!
"미쳤어? 둘이 아무사이도 아니라면서 어떻게 같이 자니?!"
그러나 나보다 한 발 먼저 흥분해서 소리친 건 원형의 형이었다.
"그럼 형이 얘랑 같이 잘 거야?"
그의 질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우리 둘 다 동시에 벌떡 일어섰다. 말보다 행동이 먼저 앞선다-는 점에 있어서는 이 사람과 마음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싫지? 그러니까 우리 둘이 내 방 쓰고 형이 위층을 쓰라고."
그러자 녀석은 우리 둘을 똑바로 쳐다보며 못 박듯이 말하고는 날더러 '따라와'라며 다시 몸을 돌린다.
대체 이 커다란 집에 방이 딸랑 두 개 밖에 없단 얘기야 뭐야? .....근데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다. 스물 몇 평만 되는 집도 방이 세 개는 되던데 이렇게 백 여 평 가까이 되는 집에 방이 두개밖에 없다니 말이 되냐고?!
나는 필사적으로 그동안 청소했던 방들 중 침실로 쓸 수 있는 방을 떠올려 보려고 애를 썼다.
음 거실하고.... 일광욕실... 세탁실.... 식당.... 다용도실에 발코니랑.... 또.........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봐도 그의 방과 내가 쓰는 방 외에 달리 침실이라고 부를만한 곳이 없는 게- 이 집 대부분은 그 어마어마한 크기의 거실과 옷들이 가득 쌓인 옷 방, 어지간한 음식점 만한 식당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안 된단 말야. 내가 남장을 하고 있어서 그렇지 원래 여자라고. 근데 어떻게 외간남자랑 같이 잘 수가 있겠냐는 말이야.... 라고는 차마 말못하고 거의 울상이 되어 방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느닷없이 완벽하게 매니큐어가 된 하얀 손이 내 목덜미를 덥썩 잡아온다.
"꺅!"
그런데 그 힘이 어찌나 세던지 펄쩍 뛸 듯이 놀라며 나는 저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야 말았다.
"...역시."
중얼거린 여자, 아니 그의 형은 간드러진 목소리로 '원형아~' 부르면서 그의 뒤를 발랄한 걸음으로 쫓아갔다.
"오랜만에 누나랑 같이 잘까? 우리 한 15년만이지?"
팔짱을 끼고 말하자 녀석이 탁 소리나게 팔을 뿌리쳐버린다.
"쫓겨나고 싶어?"
"어머머, 부끄러워하기는! 괜찮아, 괜찮아, 누나가 안 더듬을게~"
"정진형, 너!!"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녀석의 화가 폭발하려는 순간, 내가 '저기, 저 잘데 생각났어요!!' 하고 다급하게 외쳤다.
"옷 방이요. 거기 오른쪽 행거가 왼쪽보다 좀 짧아서 공간이 남거든요. 그 위엔 모자 같은 거밖엔 안 걸려있고 바닥도 넓고 하니깐 하나도 안 불편하게..."
"그럼 됐네! 원형이 넌 신경 쓰지 말고 얼른 가서 자. 얘 짐이랑 잠자리는 둘이서 해결할게~"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 반색을 하며 맞장구를 쳐준 그의 형은 원형의 등을 떠밀다시피 하면서 방으로 들어가길 재촉한다.
".....마음대로 해, 그럼."
자신의 지시를 어겨서 였을까? 녀석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뭔가 기분이 나쁘다는 듯 툭 한마디 내뱉고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바람처럼 휙 하니 사라져버렸다.
"...휴우..."
그렇게 기분 상하게 만든 게 걸리지만 그래도 일단 위기는 모면했다. 끝까지 같이 자자고 우기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얼마나 다행이야..... 하면서도 뭔가 조금, 아주 조금은 아쉬운 기분이 들어 다시 작게 한숨을 쉬다가 문득 그의 형이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말려줬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저. 저기요, 형님. 한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어머머, 얜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형님이라니!"
그래도 님이라고 높여줬는데도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나무란다.
"그럼 뭐라고 불러야..."
"그냥 '언니'라고 불러도 돼."
"네, 네?! 어. 어. 언니라니요, 무슨 그런 말씀을!!!"
갑작스러운 그의 기습에 정말 뛸 듯이 놀란 나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서 마구 버벅거리기 시작했다.
"저. 저는 남자거든요! 그. 그러니깐 오빠.. 아니, 아니, 형님이라고 해야..."
"알았어, 알았어. 그럼 '누나'라고 부르려므나."
귀찮다는 기색으로 손을 휘휘 내저으며 그렇게 얼버무린 그는 더이상 대화를 이어나갈 의사가 없다는 듯 '아, 피곤해. 나도 가서 잘래.'하면서 2층 계단으로 올라가버린다.
"저기, 안녕히 주무세요, 누님!"
일부러 누님이란 단어에 힘을 주어 인사를 하자 그는 계단 참에서 나를 휙 돌아보더니 굉장히 묘한 미소를 한 번 날려주고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올라갔다.
어. 어떡하지? 내가 여자란 걸 눈치챈 건가? 아니면 그냥 놀려본 건가? ...아, 등장부터 심상치 않더니 대체 왜 저러느냐고...!! 요주의 대상, 경계대상 1호야, 진짜!!!
어느새 이마에 축축하게 배어 나온 식은땀을 손등으로 훔치면서 나는 불안감에 휩싸여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13)
"....어...."
뺨에서 살랑거리는 부드러운 감촉에 눈을 뜬 채 잠시 멍하니 누워있었다. 침대 위로는 창백한 달빛이 한줄기 가느다랗게 들어오고 있었지만 방안은 칠흑같이 어두워 '이상하다.' 라고 생각을 했다가 뺨에 와 닿는 감촉이 사람의 머리카락과 몹시 흡사하다는 생각을 하고는 천천히 손을 뻗어 눈앞에서 살랑거리는 것을 만져보았다.
어휴, 누군지 머릿결이 참 예술일세- 란 생각을 할 때가 아니잖아, 지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분명 어제 밤에 옷 방에 이불을 펴고 혼자 누웠는데 웬 침대에, 웬 사람이냐고?!!!! 기겁을 해서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자고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보기 위해 번개처럼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나는 직감적으로 코끝에 와 닿는 시트러스 계열의 셰이빙 로션의 향으로 한 팔을 나에게 두른 채 잠들어 있는 사람의 정체를 알아냈다.
뭐. 뭐. 뭐야!! 저. 정원형이 대체 왜 내 옆에서 자고 있는 거냐고오?!!!!!!!
순간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두 손으로 꼭꼭 막아낸 나는 그를 밀어내고 빠져나오려 했지만 녀석이 어찌나 곤하게 잠을 자고있는지 억지로 팔을 풀면 깨어날 것 같아서 차마 떼어내질 못하고 엉거주춤 반쯤 경직한 상태로 잠들어있는 그의 옆에 나란히 누워 숨을 죽였다.
조금 있다가 녀석이 돌아눕거나 뒤척이면 살짝 풀고 일어나야겠다. 뭐 전후사정을 따지기에 앞서 일단 이대로 있다가 아침에 얼굴 마주치는 일만은 피해야지! 생각하다가 문득 그 전후사정이라는 게 못 견디게 신경 쓰인다.
분명히 난 옷 방에서 잠이 들었으니까 날 여기로 옮겨놓은 건 절대로 정원형 이 인간이라는 말인데- 근데 왜 그랬지? 바닥에 그러고 누워있는 게 불쌍해 보였나? 아니면... 설마, 어제 시키는 대로 안하고 고집 부렸더니 그게 기분 나빠서 그냥 옮겨버린 거 아냐?!!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하도 어이가 없어져서 잠든 녀석을 내려다보니 자면서도 날 꼭 잡고 풀어주지 않고 있는 게 충분히 그럴만한 위인이라는 판단이 선다.
에라, 이 천상천하 유아독존 황제병 인간아!
차마 때리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주먹을 들어 머리를 마구 쥐어박는 시늉을 하는데 갑자기 녀석이 몸을 뒤척인다.
헉!! 하고 놀랐지만 아직 잠들어있는 눈치로 보여서 그가 몸을 뒤척이는 바람에 생긴 틈으로 빠져나오기 위해 슬슬 몸을 빼내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때, 문득 어둠이 눈에 익어 한결 깨끗해진 시야에 그의 잠든 모습이 언뜻 들어왔다. 창백한 달빛 아래 베어질 듯 반듯한 콧날과 단정한 이목구비, 그리고 잠든 상태에서조차 오만하게 보이는 입매까지.
...와, 속눈썹이 무지 촘촘하고 길다....
방심한 사이 달빛에 비친 녀석의 완벽한 얼굴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순간적으로 지금 빠져 나가야할 상황임을 잊고 그의 얼굴 근처에 눈을 바싹 가져다 대고는 좀 더 세밀하게 그의 속눈썹을 들여다보았다.
부채 살 모양으로 곡선을 그리고있는 그 촘촘하고 미세한 솜털들은 마치 물에 젖은 것처럼 촉촉하고 새까만 게 뺨 위로 긴 그늘을 드리울 정도로 짙다. 평소에는 눈을 마주치기도 살 떨리게 날카롭게 치켜 떠서 전혀 알 수 없었던- 의외로 여자처럼 예쁘고 곱기 만한 그의 속눈썹.
"...........어....?"
느닷없이 뺨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서 눈가를 문지르는데 손가락에도 똑 하고 떨어지는 눈물방울.
뭐. 뭐야, 내가 왜 이러지...?! 마음은 하나도 슬프지 않은데 어째서 갑자기 눈물이 나는 거야? 나는 그저 잠들어있는 녀석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뺨 위로 떨어지는 눈물은 조금도 그칠 것 같지 않다. 아니 오히려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것처럼 펑펑 눈물이 쏟아져 내린다.
아무래도 눈물샘이 고장나 버렸나봐. 아까도 원형이 전처라는 말을 듣고도 괜히 막 울고 그랬잖아. 하나도 슬프거나 서럽지 않은 마음으로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그냥 눈물이 흘러내리는 대로 내버려둔 채 잠들어 있는 그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쳐다보고 있었을까. 그의 형의 등장으로 잠시 잊고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그의 선물공세가 생각이 났다.
이봐, 정원형씨. 나 당신한테 묻고 싶은 게 굉장히 많거든. 대체 무슨 마음에서 나한테 그런 거금을 써가며 옷을 한 보따리나 사준 거야? 아무리 돈이 많다지만 그래도 그렇게 아무렇게나 펑펑 낭비해대는 사람은 아니잖아. 설마 내가 당신 병간호 해준 게 고마웠던 거야? 아니면 내가 딸랑 옷 한 벌로 겨울나는 꼴이 불쌍해 보여서? 그럼 당신 저 옷 방이 터져나갈만큼 쌓여있는 것 중에서 아무거나 던져주면 되는 거였잖아, 안 그래? 그래도 당신 귀한 시간 투자해가면서- 또 일일이 직접 봐줘 가면서 나에게 딱 어울리는 옷들로만 골라준 건 그래도 나를 배려해줘서 였겠지? 내게 관심과 호의를 표하는 행동이었겠지? 나 그렇게 생각해도 되는 거지....?
창 밖으로 새벽빛이 희미하게 밝아올 무렵에야 겨우 날아갔던 이성을 되찾은 나는 그가 깨지 않도록 살그머니 빠져나와 그의 방과 연결되어있는 옷 방의 문을 소리 없이 닫다가 말고 그가 잠들어있는 침대를 아쉬운 듯 바라보았다. 그의 체온 때문에서였는지는 몰라도 한없이 따뜻하고 아늑했던 그 곳. 갑자기 가슴 께가 뭉클, 하고 오그라 붙는 것 같아서 왜인지는 몰라도 얼굴이 확 달아오른 나는 어둠에 묻혀 보이지도 않을 얼굴을 감추느라 고개를 푹 수그리고서 옷 방문을 서둘러 닫아 버렸다.
(14)
"너 원형이한테 반했지?"
어제밤 일 때문에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수그린 채 마중을 하고 돌아서자마자 그의 형 정진형씨가 던지듯이 톡, 하고 찔러온다.
헉! 이. 이 사람이 진짜?!
"아. 아니예요! 전 남자한테 관심 같고 그런 이상한 취미 없어요."
또다시 기습을 당해 화들짝 놀라면서도 애써 부인하자 그가 쿡, 하고 웃는다.
"그게 왜 이상한 취미야, 당연한 거지~"
아니, 대체 이 사람 어디까지 눈치채고 있는 거야? 아, 진짜 괜히 어설프게 속일 생각말고 그냥 이실직고하고 사정 봐 달라고 매달려야 하는 건가...?
"저기, 미국은 그런 도. 동성애자 같은 게 많아서 뭔가 오해하시나 본데요, 저는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입은 한번만 더 버텨보자는 심산인지 어설픈 변명을 주워섬기고 있다.
"흐음."
어설프게 변명해봤자 눈에 빤히 다 보여- 딱 이 표정으로 나를 삐딱하게 쳐다본 그의 형은 이내 짧게 웃어버린다.
"너 진짜 귀엽다, 얘. 걱정 마- 다 이해하고 도와줄 테니깐. 우리 원형이가 어디서 또 너 같은 앨 만나겠니?"
아니, 이게 칭찬이야 욕이야?!
"저기, 전 그런 게 아니라니깐요..."
대체 저 혼자 뭘 이해하고 도와주겠다는 건지- 답답한 마음에 다시 입을 열자 그가 갑자기 '참!' 외치며 뭔가 생각났다는 듯 내 팔을 덥썩 붙들고는 질질 끌다시피 해서 거실로 데리고 갔다.
"저기, 왜. 왜 이러세요..."
그리고는 테라스로 뛰어가 내가 엊그제 세탁하려고 꺼내놓았던 시트를 가져와 내 목 주위에 칭칭 감기 시작한다.
"뭐, 뭘 하실려구요..."
다시금 느끼는 그의 무지막지한 힘에 바짝 쫄아 버린 내가 더듬거리며 묻자 그- 정진형씨는 '기다려.'라면서 위층으로 뛰어올라가더니 금새 반들반들 윤이 나는 가죽으로 된 검은 꾸러미를 들고 계단을 급하게 뛰어내려왔다.
"저. 저기요, 배달 올 시간 다 됐거든요..."
날카롭게 번쩍거리는 눈빛으로 긴 손가락으로 내 머리를 제멋대로 이리저리 헤쳐보는 정진형씨에게 애원하듯 말해봤지만 들은 척도 안 한다. '흠.. 그걸로 해야겠군.' 중얼거린 그는 꾸러미를 열어 그 안에 질서정연하게 꽂혀있는 몇 십 개는 족히 돼 보이는 가위들 중 푸르스름하고 날카롭게 손질된 가위를 하나 꺼내들었다.
헉! 대체 뭘 하려고?!
깜짝 놀라 창백한 얼굴로 흠칫 목을 움츠리자 그 정진형씨는 다시 쿡 하고 웃더니 내 머리에 가늘고 긴 빗을 꽂아 빗어 내리며 말했다.
"괜찮아, 쫄지마. 이 누님이 이래봬도 뉴욕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스타일리스트 아니겠어? 게다가 헤어 커팅 만은 비달 사순한테 직접 사사 받은 몸이라구. 예약이 아니면 받지도 않으니까 영광으로 알고 얌전히 있어."
아 굉장한 사람인 건 알겠는데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느냐고요!! 내가 언제 머리 잘라 달랬냐고오..... 내가 버둥거리건 말건 정진형씨는 손가락으로 층을 내가며 내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쓸어보고 넘겨보고 하더니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가위질을 하고 있었다.
서걱, 서걱, 서걱- 귓전을 울리는 가위질 소리에 투두두둑- 장마비처럼 정신 없이 쏟아져 내리는 내 머리카락들!! 내가 경악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빠른 손놀림 사이사이 투덜거리는 것도 잊지 않는다.
"정말 누가 잘랐는지 최악의 센스네. 사이드 라인을 완전 무시하고 제멋대로 잘라냈잖아?"
미안하게 됐네요, 그래요, 그거 동네 미장원에서 4000원주고 자른 머리예요... 흑흑.
"흠, 이제 좀 봐 줄만하게 됐네."
날 선 가위가 무서워 꾹 참는 줄도 모르고 한참이나 멋대로 가위를 놀려댄 정진형씨는 조금 뒤 가방 안에서 크림타입의 향이 부드러운 젤을 꺼내 양쪽으로 슥슥 여기저기 발라주더니 만족스럽다는 듯한 얼굴로 웃는다.
"자, 너도 봐봐."
의기양양한 얼굴로 척 하니 내미는 손거울을 받은 나는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거울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았다. 그랬더니.....
히익, 이거 깻잎 머리잖아?! 그것도 6 대 4 비율!!
"어머머. 너 표정이 왜 그래? 설마 마음에 안 드니?"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얼굴로 나를 보며 묻는 그에게 '당연히 마음에 안 들죠! 이게 웬 깻잎 머리냐구요!!' 소리쳐주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는 못하고 원망어린 눈으로 쫙 흘겨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자칫하다간 또 무슨 짓을 당할까 싶어 체념의 한숨을 내쉬며 거울을 들여다보며 울상을 짓는데...... 어라? 그냥 평범한 깻잎 머리만은 아닌 것 같은데...?
부드러운 머릿결을 한껏 살리며 귀 뒤에 가지런히 꽂힌 옆머리하며 반짝반짝 윤기가 흐르는 데다가 목덜미를 그대로 드러내면서도 단정한 스타일이 마치 머리를 흔들면 그대로 찰랑찰랑 종소리가 날 것만 같아 보이는 게 아닌가.
뭐, 뭘 어떻게 한 거지....?
왠지 생소하게 보이는 내 모습이 낯설지만 신기해서 거울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으려니까 정진형씨가 '그럼 그렇지.'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어때- 잘 보니깐 괜찮지? 머릿결도 좋아진 거 같고, 그치?"
"예에? 아. 예..."
"당연하지. 누가 한 건데!"
드러내놓고 기뻐하지는 못하고 조금 기분 좋은 얼굴로 대답하자 가위를 마른 헝겊으로 닦아 다시 케이스에 집어넣던 정진형씨가 잘난 척하며 냉큼 말한다. 쳇, 그저 기회만 있으면 잘난 척이라니까. 뭐, 좀 얄밉기는 하지만 헤어스타일이 마음에 드니까 그냥 봐줬다.
"그럼 저는 이만..."
바닥에 여기저기 흩어진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내고 나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얌전히 귀 뒤에 꽂은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움직일 때마다 느껴지는 헤어 젤의 오렌지 향이 좀 낯설었지만... 히힛.
줄줄이 배달되어온 옷들과 음식을 정리하는 사이사이 냉장고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자꾸 배시시 웃었다. 녀석이 돌아와서 확 달라진 나를 보면 어떡해 생각할래나? 혹시 예쁘다고 생각해줄까...? 평소보다 배는 더 들뜬 마음으로 집안을 분주하게 휘젓고 다니면서 나는 녀석이 언제 오려나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기다렸다.
딩동, 딩동-
왔다! 11시가 넘은 늦은 시각. 초조한 마음에 이리저리 방황 하다가 시간이 너무 안가는 통에 옷 방에 옷을 끄집어내서 다시 개고 있던 나는 벨소리가 들리자마자 현관으로 뛰어가 확인도 안 해보고 벌컥 문을 열어주었다. 예상대로 현관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머리와 코트에 묻은 흰 눈을 털어 내고 있는 녀석 정원형.
"다녀오셨어요?"
"음."
늘 하던 대로 코트와 재킷을 벗어 건네주고 복도 안쪽의 욕실로 들어간다. 나는 무거운 코트와 재킷을 한 팔에 안은 채 졸졸졸 그 뒤를 따라갔다. 물소리가 나는 욕실을 바라보며 옷을 옷 방에 있는 행거에 걸어놓고는 잽싸게 주방으로 가서 저녁상을 차려주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국도 있는데 그것도 드릴까요?"
조금 뒤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털며 나타난 그에게 두근두근하며 물었지만...
"됐어."
내 얼굴은 보지도 않고 건성으로 찌개를 뜨며 날아오는 대답. 이, 이러면 안 되는데... 나 오늘 뭐 달라진 거 안 보여...? 하는 수 없이 놈이 밥을 먹는 사이 타이밍을 맞춰 말을 건넬 기회를 노렸지만,
"잘 먹었어."
하고 식탁 위에 수저를 소리 없이 내려놓음과 동시에 식사도 상황도 그대로 종료. 아, 허무해. 짜식 사람 얼굴 좀 보면서 말하지!!
다른 때 같으면 밥 먹자마자 설거지부터 하지만 오늘은 예외다. 12시가 가까운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잘 생각이 없는 지 거실의 긴 소파에 앉아 <초미립자 광학>이라고 쓰인 무시무시한 제목의 책을 펴드는 녀석의 뒤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손에 든 <알뜰 주부의 재테크>란 책은 명백한 위장용이다.
한 발짝.. 두 발짝..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극도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는데도 소파에 채 앉기도 전에 녀석이 휙 하고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본다.
에고, 깜짝이야!!
"저기, 과일이라도 깎을까요?"
손에 책을 들고 있다는 것도 깜박 잊고 화들짝 놀라 벌떡 몸을 일으키자 그는 아주 잠깐 미심쩍은 눈길로 나를 보더니 '안 먹어.' 하고는 책으로 시선을 떨어뜨린다.
쳇, 뭐야, 눈은 장식으로 달고 있냐? 왜 코앞에 이렇게 들이대는데도 못 보는 거냐고....!
생각 같아서는 그냥 대놓고 '나 머리 잘랐는데, 뭐 느끼는 바 없냐?' 이렇게 묻고 싶었지만 꾹 참으면서 손에 쥔 책을 건성으로 펼치는 척 다시 녀석의 동정을 살핀다. 이번에야말로.... 다섯 발자국쯤 되는 거리를 좁히기 위해 막 발을 뻗었는데 아뿔사! 녀석이 갑자기 책을 탁 덮고 일어서는 게 아닌가.
"뭐야 너. 나한테 할 말 있어?"
히익! 화났나보다!! 오른쪽 발을 엉거주춤 뻗은 자세로 그대로 얼어붙어 버리자 녀석이 팔짱을 낀 채 인상을 썼다.
"있어, 없어?"
"...어, 없는데요."
"그럼 왜 아까부터 내 반경 5미터 내에서 빙빙 돌아?"
전혀 모르는 거 같더니 그걸 눈치 채고 있었단 말이냐? 근데 왜 내 머리 바뀐 건 못 보냐고!! 발끈한 기분이 들었지만 마음과는 달리 몸은 벌써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10미터쯤 도망을 치고 있었다. 그러자 녀석은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진짜 없는 거지?"
할 말이야 산더미 같이 쌓였지만.... 네 놈 무서워서 어디 입이나 떼겠냐. 흑흑. 잔뜩 쫄아 붙은 나는 순순히 고개를 저어 보인다. 그러자 그는 소파 위에 책을 집어들고 보란 듯이 홱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어가며 말했다.
"그럼 난 가서 잔다."
그야말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상황. 일이 뭐 이렇게 시트콤스럽게 돌아가는 거야...?! 한동안 입을 멍하니 벌리고 그가 사라진 복도 끝을 멀건히 바라만보다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무슨 시트콤 찍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들이댔는데도 본 척도 안하고 싹 무시해버려?! 진짜 나한테는 관심이라곤 개미눈물만큼도 없는 건가...? 나쁜 놈, 냉혈한 놈, 아 진짜 무심하지 짝이 없는 놈 같으니라고...... 괜히 서러워져서 눈물까지 찔끔 나려는데,
"...아, 잠깐."
하면서 녀석이 이쪽으로 휙 돌아본다.
"머리 형이 만져줬어?"
아니, 이제야 깨달아 준거야?! 그래, 당신네 그 굉장하다는 형이 직접 다듬어 준거라고. 어때- 당신이 보기에도 괜찮아 보이는 거야? 응?
뒤늦게라도 알아주는 그가 어찌나 고맙고 반가웠던지 나는 금새 표정을 확 피고선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저기, 아까 낮에요, 형님께서 가위로 직접..."
"미리 경고해두는데-"
느닷없이 녀석이 내 말허리를 뎅겅 짜르고 들어오더니,
"너도 치마입고 화장하면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소름이 끼칠 만큼 살벌하게 엄포를 놓고는 다시 홱 돌아서서 쌩하니 바람처럼 사라진다.
이. 이럴 수가! 그럼 난 평생 치마도 입지말고 화장도 하지말고 살라는 얘기냐..... 로 서러워할 때가 아니다. 어쨌든 내 머리가 달라진 걸 늦게라도 알아봤다는 얘긴데 그 말뜻은 뭐였을까? 내가 여자처럼 보인다는 말인가? 설마 정진형씨처럼 여장한 남자로 보인다는 뜻...?!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는 갑자기 설움이 복받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둔하기 짝이 없는 놈, 죽어도 여자로는 안 봐주는 구나.. 만화나 영화 같은 데서 보면 남장을 해도 대부분 같이 사는 남자들은 다 느끼던데- 아니 느끼지는 못해도 내가 설마 남자를 좋아하고 있나? 하면서 고민도 하고 그러던데. 당신 진짜 나한테 눈꼽만큼도 관심 없는 거야? 겨우 하루 지내보고도 금방 눈치채는 당신형도 금방 눈치채는 걸 아직 의심도 하지 않고 있다니, 나한테 관심이 없는 게 아니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냐고.... 흑흑.
슬픔에만 휩싸여 있느라 그에게 필사적으로 숨겨왔던 사실(내가 여자라는 것)을 녀석이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걸 원망하는 엄청난 아이러니를 저지르고 있으면서도 나는 끝내 서러움에 눈물을 떨구고야 말았다.
"그러니까 반한 거 맞잖아?"
그때였다. 뚝뚝 떨어진 눈물이 바닥에 얼룩을 만드는 모습을 보면서도 조금 심술궂은 마음으로 내버려두고 있던 나의 뒤에서 톡 쏘는 듯한 하이톤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원형이한테 이쁘게 보이고 싶어서 머리 자르고 치장하고 했는데 속도 모르고 칭찬은커녕 엄포만 놓아서 서러운 거잖아?"
언제나처럼 양손을 허리에 척 걸치고 선 정원형씨는 모든 걸 다 알고있다는 듯 그렇게 말하고는 '그게 바로 반했다는 명백한 증거라고!'라는 말로 딱 잘라 결론을 내려버린다.
...역시 그런 거였나? 녀석의 말 한마디에 질질 끌려 다니면서 일희일비하고, 자는 모습만 보면 가슴이 소란스러워지고, 어쩌다 날 생각해주는 것 같으면 그게 또 눈물나도록 기쁘고...
내가 여자라는 걸 눈치채지 못하는 게 이렇게 속상하고 억울한 이유가 몽땅 다 녀석에게 반해서였던 거구나.
깨닫고 나자 오히려 마음이 더 욱씬거려와서 눈물이 앞을 가린다. 그야말로 가망이라곤 1%도 없는 완벽한 짝사랑이 아닌가. 어마어마한 부잣집 아들에 교수를 목표로 공부하는 엘리트조교와 중학교도 중퇴하고 가출해서 떠돌다가 기억상실증이라고 사기처서 어영부영 그의 집에 눌러 앉은 데다가 남장까지 한 가정부가 어디 가당키나 한 커플링이던가.
내가 무슨 동화책에 나오는 신데렐라도 아닌데 더욱이 나한테는 눈꼽만큼도 관심이 없는 녀석과 뭘 어떻게 해보겠느냐고... 엉엉엉.
"얘 좀 봐, 내가 도와준다는 데 뭐가 걱정이니? 이래뵈도 내가 우리 집 장남.. 아니 장녀다, 너. 내 말이라면 부모님도 얼마나 존중해주시는데! 게다가 원형이 쟤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꽉 잡고 있으니까 걱정 말라고!!"
자신만만하게 장담하고는 한쪽 손을 그대로 허리에 얹고 다른 손으로는 입을 가린, 무슨 만화에서나 나올법한 전형적인 자세로 '호호호호홋'하는 가식적인 소리를 내며 웃는다.
꽉 잡고 있기는, 녀석이 버럭 소리만 쳐도 팍 금방 쫄면서. 그래도 도와준다니 고맙기는 하네... 가 아니라 도와줘? 뭘...?
"저. 저기요, 뭘 도와주신다는 건데요...?"
울어서 잔뜩 빨개진 눈을 하고서도 의아한 듯 물으니 그 정진형씨가 높은 소리로 웃다가 갑자기 뚝 그치더니 나를 내려다보며 미간을 찡그린다.
"대체 넌 둔한 거니, 멍청한 거니?"
그게 그 말이잖아! 소리치며 항의하고 싶은 걸 꾹꾹 참고서 '제가 좀 말귀를 잘 못 알아들어요..'하고 대답해주니 그는 어쩔 수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한숨을 폭 내쉰다. 그리고는 다시 고압적인 자세로 양손을 허리에 척 올린 채 명령이라도 내리는 것처럼 이렇게 말했다.
"이제부터 너는 신데렐라가 되는 거야. 이 몸이 도와줄 테니 저 정원형이의 발목을 확 낚아채 버리라고!!"
(15)
신데렐라가 되라고...? 그래서 저 정원형이의 발목을 낚아채 버리라고....??
푹신한 오리털 이불을 누에고치처럼 둘둘 말고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면서 나는 멍하게 아까 정진형씨가 내뱉은 말을 몇 번이고 곱씹어보고 있었다.
정말 미친 척 하고 한 번 시도해 볼까? 최악의 경우는 그 자리에서 집 밖으로 내쫓기는 거지만 만약, 만약 그 반대의 경우라면.. 저 정원형이랑 지금처럼 오래도록 함께 살게 되는 건가......?
정원형과 오래도록 함께 산다-는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가슴이 휙 하고 크게 부풀어오르는 것만 같아서 나는 흥분한 채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 어차피 여기서 더 잃을 것도 없는데 안 해보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해보고 후회하는 게 낫지.
뭐 성질이 더러운 거야 잘 가르쳐서 길들이면 되는 거고, 돈도 많고 얼굴도 잘 생겼으니 잘만 잡으면 꿩 먹고 알 먹고 둥지 털어 불 때는 격이잖아?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좋아해 본 건 태어나서 처음이란 말야.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해보고 헤어지게 되면 분명히 평생을 후회하면서 살아가게 될 거야.....
문득 가슴 언저리가 욱씬 아파 와서 나는 주먹으로 아픈 곳을 꾹 하고 눌렀다. 헤어진다는 생각을 떠올렸을 뿐인데 벌써 가슴이 아파 온다. 그에게 반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부터는 가슴이 너무 솔직한 반응을 해와서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그래, 나 당신이랑 못 헤어져. 그러니까 미친척하고서라도 발목을 잡아서 신데렐라가 되어볼 거라고!!
『일단 시작은 고전적이면서도 찬란한 '남자의 마음을 얻으려면 그 위를 먼저 공략하라.' 갈 것. 매일 외식으로 질린 녀석이니까 니가 제일 자신 있는 메뉴들로 단번에 승부를 걸어 보는 거야.』
오늘 아침 여느 때처럼 녀석이 학교로 가고 나자 그의 형 정진형씨가 뜬금 없이 여행가방을 질질 끌고 나타나서는 '3일 동안 여행을 갖다올 테니 그동안 잘 해 보라'며 손에 쥐어주고 간 쪽지 <정원형 발목잡기 매뉴얼> 1번에는 그렇게 적혀있었다.
"식사하세요오~"
그가 집에 돌아온 걸 확인하자마자 나는 오전, 오후시간을 몽땅 투자해서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린 음식을 식탁 위에 늘어놓으면서 그를 불렀다.
메뉴는 일단 그가 비교적 잘 먹는 한식을 기본으로 밥반찬으로 곁들여 먹기 좋은, 손이 많이 가서 배달메뉴에는 잘 오르지 않는 몇 가지의 탕과 찜, 조림, 구이, 무침 등을 위주로 상을 차려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남자를 홀리려면 요리를 잘해야 하는 법. 일단 이렇게 정성스럽게 차린 상으로 그의 혀와 위를 즐겁게 해주면 기분도 녹녹하게 풀어질 테고 그러다 보면 분위기도 훈훈하니 따땃하게 데워질 테지. 후후후후.
혼자 잔뜩 들떠서 웃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째 한참을 불러도 녀석이 오지 않는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이상하네. 자나? 연달아 서 너 번을 더 불러도 감감무소식이라 나는 참다못해 방으로 가 문을 두드려보았다. 그래도 역시 대답이 묵묵부답.
"저기요..."
답답한 마음에 빼꼼히 문을 열고 방안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니 침대 위에 길게 누워 한 팔로 눈가를 가리고 있는 녀석이 들어온다.
"저기, 저녁 드셔야지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조심조심 물었더니 홱, 하고 고개를 돌린다.
뭐야, 잠든 건 아니었나 보네. 깨어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용기를 얻어서 조금은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심혈을 기울여 차려낸 저녁 메뉴에 대해 설명을 해주기로 했다. 듣다보면 배가 고파져서 당장이라도 안 오곤 못 배길 껄?
"저기 꽃게랑 아구살을 발라서 숙주 넣고 얼큰하게 쪄낸 찜이랑요.."
"생각 없어."
"예에...?"
"속 안 좋아. 너나 먹어."
뭐야,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해 놓고선 지가 먹은 게 뭐가 있다고 속이 안 좋아? 기껏 있는 정성 없는 정성 다 쏟아 부어서 저 먹이려고 차려놨더니!! 그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속이 확 상했지만 그래도 아프다니 걱정이 되어서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그럼 죽이라도 해 드려요? 뭘 먹어야 약을 먹어도...."
"생각 없다고 했다! 자꾸 귀찮게 할래?"
안 먹으면 그만이지 왜 소리는 지르고 그래!
"뭐야, 진짜!!"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해버린 나는 식당으로 돌아와 식기 건조기에서 커다란 사기 대접을 꺼낸 다음 하루종일 죽어라 만들어놓은 음식들을 종류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다 쓸어 넣어 밥을 비빈 다음 분한 얼굴로 씩씩거리며 퍼먹기 시작했다.
진짜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속이 아프고 그러는 거냐고?! 안 맞아도 나랑은 이렇게 안 맞을 수가 없어. 아주 상극이야, 상극!!!
"흥, 그래도 내가 포기할 줄 알아?"
이제 시작이다 이거야! 전투적인 자세로 숟가락을 휘두르며 나는 사기 대접을 박박 소리나게 바닥까지 긁어댔다. 그래, '안되면 되게 하라' 도 있고 '하면 된다'란 말도 있다고! 칠전팔기-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나서 끝까지 해 보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