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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31. 묵상글 (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 방문으로 완전해지는 사랑.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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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31.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방문으로 완전해지는 사랑
“궁핍한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손님 접대에 힘쓰십시오.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십시오.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
오늘은 성모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축일인데
교회 전례는 스바니아서 말씀을 보통 첫째 독서로 쓰지만
로마서의 말씀도 오늘 독서로 쓸 수 있도록 배정했습니다.
이 말씀을 독서로 쓸 수 있게 한 뜻은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울라는 말씀 때문일 것이라고 저는 추측하는데
그것은 성모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한 이유가
엘리사벳의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이 잘못됐다고 생각지 않는데
제 생각에 최고로 기쁠 때 생각나는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고,
마찬가지로 최고로 슬플 때 생각나는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누가 기뻐할 때 같이해주는 사람이 그를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고,
슬픔을 같이해주는 사람이 그를 진정 사랑하는 사람일 뿐 아니라
기쁨을 같이해주는 것보다 어쩌면 더 사랑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거나,
미워하거나 경쟁하는 사람에게 기쁜 일이 생기면
결코, 기쁘지 않거나 더 나아가 시기심이 생기지 않습니까?
아무튼, 성모 마리아는 엘리사벳이 아이를 갖게 된 것을
함께 기뻐해 주기 위해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것이 틀림없는데,
이때 성모 마리아가 정작 자신의 잉태를 기뻐하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복음을 보면 마리아의 잉태 사실을 알리려고 천사가 마리아를 방문했을 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마리아께 얘기한 것을 보면 성모 마리아는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컸던 것이 틀림없는데, 그런데도
엘리사벳의 기쁨을 함께하기 위해서 성모님은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겁니다.
그러니 성모님의 엘리사벳 방문은 방문이 아니라 축복이고,
인간적인 사랑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는 신적 사랑입니다.
둘에게 오신 하느님의 방문을,
둘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사랑을,
둘을 통해 인류에게 주어질 하느님의 구원을 서로에게 확인하고,
두려움 가운데서도 기쁨을 함께하려는 그 초월적 사랑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모님의 엘리사벳 방문을 제가 이렇게 의미 새기게 된 것은
어제 한 분이 세상을 떠난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제가 알 때부터 이미 암이 발병한 상태였고,
이러저러한 이유로 안타까워 그때 이후로 기도해 드린 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병문안을 자주 가지 못했고,
재발해 이제 어렵겠다는 얘기 또 위독하다는 얘기를 듣고 난 뒤에도
방문해야지 생각만 하고 방문하지 못했는데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고,
가장 힘들었을 때 손을 잡아드리지 못한 것이 너무 마음에 걸립니다.
아무튼, 성모님의 엘리사벳 방문 축일에,
기뻐하는 사람과 같이 기뻐해 주는 사람,
슬퍼하고 아파하는 사람은 더더욱 같이 슬퍼하고 아파하는 사람,
더 나아가 방문으로 그 사랑을 완전하게 하는 사람이 되기로 다짐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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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31.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카 1,45)
오월, 성모성월을 마감하면서, 우리는 “복된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을 지냅니다. 오늘 <복음>은 두 개의 ‘아름다운 만남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첫째 만남>은 두 여인의 만남입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놀라운 손길을 체험한 여인들입니다. 한 여인은 동정인 채 아기를 가진 처녀이고, 다른 한 여인은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나이가 많은 돌계집인데도 아기를 가진 여인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이성으로는 납득할 수도 받아들일 수 없는 놀라운 일이 두 여인들에게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만남에서, 나자렛의 시골 처녀 마리아에게 생긴 하느님의 놀라운 개입이 기쁨과 찬송이 되어 터져 나옵니다. 먼저, 그것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치는” 엘리사벳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옵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루카 1,44)
그리고 마리아는 스스로 가난하고 비천한 종임을 고백합니다. 곧 작고 낮은 자 안에 벌어진 하느님의 자비를 찬송합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겸손한 만남입니다. 동시에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믿음을 찬송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카 1,45)
오늘 우리가 성모님처럼,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는다면 우리 안에서도 놀라운 탄생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일을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를 낳으신 분을 내가 다시 낳는 것입니다.”
<둘째 만남>은 더욱 더 의미심장한 만남입니다. 마리아의 태중에 계신 예수님과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는 세례자 요한의 만남입니다. 사실, 요한이 6개월 형이지만, 아우 예수님께 먼저 태중에서 기뻐 용약합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방문을 받고 당황하여 몸 둘 바를 몰랐듯이, 요한도 태중에서 하느님인 예수님의 방문에 몸 둘 바를 몰라 태중에서 기뻐 뛰놀았습니다.
마리아와 함께 벌어진 아기 예수님의 이 신비로운 방문은 동시에, 하느님이 인간세상을 방문하신 것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벌어지는 친교요 소통입니다. 그들은 믿음 안에서 서로의 임신에 대하여 의심을 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서로 소통하고 친교를 나눕니다. 아기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신비로운 소통과 친교도 그렇습니다.
사실, 이 두 여인은 무명의 시골 아낙이었습니다. 궁중의 여인도, 부잣집 마님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신분과 지위에서 보통 여인이었지만, 믿음에 있어서는 위대한 여인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어머니가 된 여인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갈수록 '능력 있는 사람'을 원합니다. 그러나 정작 필요한 사람은 '믿을만한 사람이요, 거룩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믿음으로 교제하는 깊은 친교가 필요합니다. 또 서로 믿음 안에서의 만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더 능력 있는 부모, 더 이익을 주는 동료, 더 똑똑하고 재주 많은 후배가 아니라, ‘더 믿어주는 이’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행복하십니다.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카 1,45)
행복하십니다. 어머니!
경청만 하신 것이 아니라, 믿고 영접하셨으니 행복하십니다.
믿고 영접한 것만이 아니라, 순명하셨으니 행복하십니다.
순명한 것만이 아니라, 이루어지기를 희망하셨으니 행복하십니다.
오늘 제가 당신의 희망을 품고, 행복의 찬미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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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31.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음으로 행복하기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지난주 우리는 성모의 밤을 지냈습니다. 촛불을 봉헌하면서 자신을 녹아내려 세상에 빛을 밝힐 수 있기를 소망하였고 아름다운 꽃을 봉헌하면서 꽃처럼 예쁜 삶을 다짐하였습니다. 성모님께 드리는 멋진 노래와 사랑의 마음을 담은 편지 봉헌을 통해 어머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어머니와 함께하는 가운데 어머니를 통하여 우리의 모든 바람이 주님께 전구 되고 가슴에 담았던 아픔과 시련의 상처들이 치유되기를 기도합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첫 기적이 성모님의 청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이루어주셨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성모님의 전구를 통하여 모든 바람이 열매 맺기를 희망합니다.
일상 안에서 누군가를 찾아갈 수 있는 마음을 지닐 수 있고 또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만나서 끝까지 기쁨을 나눈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도와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실컷 도와주고서는 그것으로 끝나면 좋은데, 나중에 고맙다는 인사를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고 서운한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차라리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스스로 해 놓고는 서운한 감정을 지니고 마음을 화로 가득 채우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만남을 위한 노력과 헌신은 그 자체가 보상이고 기쁨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마리아는 서둘러 유다 산골에 있는 한 동네로 갔습니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습니다. 서둘러 간 것은, 적극적인 이웃 사랑 실천입니다. 그리고 둘은 배속에 든 세례자 요한과 함께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사실 엘리사벳은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라고 손가락질받던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임신하였고 더욱이 마리아의 방문에 성령을 받아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 그러자 마리아가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하며 찬미의 노래를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이 비천한 여종이라는 사실,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겸손을 지니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는 일은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위대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 두 여인은 참으로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석 달가량이나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서로가 통하지 않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겠습니까? 제가 해외에서 있을 때 보니까 ‘손님이 오실 때 반가운 손님, 떠나실 때 더 반가운 손님’이라고 합니다. 결국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으며 행복한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믿음과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할 때 풍요로워지는 것입니다.
누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까?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11,27-28). 하고 말하였는데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이렇게 보면, 성모님께서 “모든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신 분”이라는 것은, 예수라는 훌륭한 아들을 낳아서 젖을 먹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행복이란 그렇게 하면 행복해진다는 말씀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이러이러 해서 행복하다면 그 행복은 무엇이 저러저러해질 때 없어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실행함으로써 복되었듯이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믿고 행하는 것이 곧 행복이어야 하겠습니다. 이러저러한 조건과 환경이 마련되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주님 안에 있다는 자체가 행복의 순간입니다. 미사를 봉헌하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이 더없이 행복한 시간입니다. 주님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시고 마리아를 통하여 큰일을 하셨듯이 오늘 우리의 부족함도 굽어보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를 희망합니다.
이 시간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던 성모님의 믿음을 간직할 수 있는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베르나르도 성인은 “성모님을 통하여 은총을 구하십시오. 성모님을 통하여 반드시 얻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우리에게 든든한 후원자가 계시다는 것을 기뻐하고, 준비된 마음 안에 우리의 모든 바람을 성취시켜 주시길 바랍니다. “성모님의 일생은 사람의 기림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다만 하느님의 뜻에 맞기만을 원하셨습니다”(성 암브로시오). 오직 주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사는 것으로써 행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옛날 한국에는 고려장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먹고 살기가 힘들고 그래서 부모가 나이가 많이 들면 깊은 산속에 모셔다 놓고 그냥 돌아오는 것입니다. 한 아들이 늙은 어머니를 지게에 짊어지고 깊은 산 속으로, 산속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지게 위에서 나뭇가지를 계속해서 부러뜨려 놓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이 어머니에게 무엇을 하시느냐고 물으니 ‘네가 늦게 내려가다가 길을 잃을까 봐 그런단다.’ 하셨답니다.
당신을 버리는 아들이지만 아들에 대한 어미의 사랑은 더욱 애절하기만 합니다. 바로 이런 어미의 사랑이 우리 어머니 성모님의 사랑입니다. 성모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십니다. 우리의 허물과 부족함에도 우리의 바람을 아들 예수님께 전구 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기적을 오늘 우리에게도 이루도록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모님을 통하여 모든 것을 예수님께로 향할 수 있다는 믿음을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성모님이 생각하는 것을 생각하고 그분께서 바라신 것을 바라고 그분께서 하고자 하시는 바를 행하고 그분께서 지향하시는 바를 지향하십시오. 그분의 마음으로 사랑하고 거기에 견주어 마음을 성찰하고 그분을 닮지 않은 것이면 무엇이나 마음에서 몰아내십시오.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 있기 위해서 먼저 성모님 안에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을 통하여 모든 것을 예수님께로!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성모님께로!(복자 마르첼로 심파냐). 그리하여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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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31.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이스라엘에는 성지가 많습니다. 그중에서 오늘 축일로 지내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 방문’ 장소인 ‘아인카렘’은 산 속에 있는 아름다운 동네입니다. 복음서는 마리아가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했다고 전합니다. 엘리사벳은 이미 아이를 잉태한지 9개월이 되었습니다. 이제 막 아이를 잉태한 마리아는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갔고 그곳에서 3개월을 머물렀다고 합니다. 아인카렘 동네에서 마리아의 방문 성당까지 30분 정도 걸어가면 됩니다. 약간의 비탈을 올라가면 동정마리아의 방문 성당이 반갑게 맞이해 줍니다. 성당 입구에는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서로 마주보며 인사하는 동상이 있습니다. 성당 마당에는 각 나라의 말로 ‘마리아의 노래’가 붙어 있습니다. 계단으로 올라가면 아름다운 성당이 있습니다. 벽에는 성모님과 관련된 성화가 있습니다. 성모님이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성화, 교회의 어머니라는 성화, 은총의 중개자인 마리아를 의미하는 가나의 혼인 잔치 성화, 성모님께 전구하여 승리했던 레판토 해전의 성화, 성모님이 원죄 없이 잉태되었음을 전하는 성화가 있습니다. 성모님과 엘리사벳의 만남이기도 하지만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첫 만남이기도 한 장소입니다.
저는 1982년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신학교의 교가 ‘진세를 버렸어라, 이 몸마저 버렸어라, 깨끗이 한 청춘을 부르심에 바쳤어라. 성신에 그느르심 아늑한 이 동산에 우리는 배우리라 구원의 베리타스(Veritas)’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동창들을 만났습니다. 41년 동창들과 함께 지냈으니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앳된 젊은이들이 이제 모두 60이 넘었습니다. ‘삼인행이면 필유아사’라는 말처럼 친구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친구들의 좋은 점을 많이 보았습니다. 독학으로 오르간을 배워서 어려운 ‘토카타와 푸가’를 연주한 친구도 있습니다. ‘삽자루’라는 별명처럼 신학교의 굳은 일을 도맡아서 하는 친구도 있습니다. 멋진 노래로 분위기를 살려주는 친구도 있습니다. 말이 없지만 있는 그 자체로 빛이 나는 친구도 있습니다. 힘들게 필기한 것을 기꺼이 나누어 준 친구도 있습니다. 방학 때면 나환자 마을로 봉사를 갔던 친구도 있습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만나서 하느님을 찬양했듯이, 동창들과의 만남으로 앳된 젊은이들이 부르심에 응답한 사제가 되었습니다.
노 사연은 ‘만남’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히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 잊기엔 너무한 나의 운명 이였기에/ 바랄 수는 없지만 영원을 태우리./ 돌아보지 마라 후회하지 마라./ 아 바보 같은 눈물 보이지 마라/ 사랑해 사랑해 너를 너를 사랑해” 뉴욕에 와서 운명처럼 만난 분들이 있습니다. 4년 동안 함께 신문을 만드는 직원들이 있습니다. 매주 월요일 직원미사를 하고, 매주 수요일 직원회의를 합니다. 매주 신문을 제작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모두들 기쁘게 하고 있습니다. 3년 동안 함께 하는 ‘동북부 엠이’ 모임이 있습니다. 함께 했기에 팬데믹의 파도를 넘어 설 수 있었습니다. 피정, 나들이, 주말체험은 제게도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3년 동안 함께 하는 ‘부르클린 한인 성당’이 있습니다. 공동체는 저의 서품 30주년을 축하해 주었고, 저의 회갑도 축하해 주었습니다. 제가 도움을 주는 것 같았지만 제가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물고기는 물에 있어야 하듯이, 사제는 신자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4년 동안 함께하는 ‘동북부 사제 모임’이 있습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만나서 하느님을 찬양하였듯이, 사제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위로를 받았고, 팬데믹이라는 시련을 헤쳐 나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매일 새벽에 묵상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글을 통해서 저의 내면과 만납니다. 그 만남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그 만남이 제게 힘과 용기를 줍니다. 성찰과 묵상이 있으면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만남에서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에너지를 이웃들과 나눌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욕심과 교만이 가득차 있으면 우리는 만남을 통해서 위로를 받기 어렵습니다. 만남을 통해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기 쉽습니다. 마음을 열면 길가의 꽃에게서도, 하늘의 구름에게서도, 불어오는 바람에서도 배울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닫으면 아무리 좋은 글을 읽어도, 좋은 사람을 만나도 배울 것을 찾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는 엘리사벳을 찾아가는 마리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찾아온 마리아를 축복하여 주었고, 마리아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찬가를 부릅니다. 이것은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그러나 우리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마음에 품어야 할 가르침입니다. 오늘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해서 ‘마리아의 노래’를 불렀듯이 우리들 또한 각자의 노래를 만들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이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를 고백하는 신앙의 노래를 만들어 보면 좋겠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분이 나에게 큰일을 하셨으니, 모든 세대가 나를 복되다 하리라. 그분 이름은 거룩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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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31.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새벽에 일어나 기도와 묵상을 한 뒤에 책 좀 읽으면 창밖이 환합니다. 그러면서 오늘 날씨를 예측해봅니다. “맑겠구나.”라고 예측할 때는 구름 한 점 보이지 않고 저 멀리 해 뜨는 것이 선명히 보입니다. 그날도 이렇게 맑은 날씨를 예측했습니다. 너무나 맑고 깨끗한 하늘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의 예측과 달리 오후부터 우중충해지더니 결국 저녁이 되면서 빗방울이 떨어집니다. “맑겠구나”라는 저의 예상이 완전히 어긋나는 날이었습니다.
우리 삶도 이렇게 될 때가 있지 않습니까? “맑겠구나.”라면서 모든 것이 원만히 진행되겠다고 생각했는데, 비바람과 같은 고통과 시련이 갑자기 찾아올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비바람이 1년 365일 계속되지 않는 것처럼, 우리 삶도 비바람, 폭풍과 같은 시련의 시간이 오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삶이 올 것입니다.
이 사실을 늘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또 비바람, 폭풍 불 것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기쁨과 행복을 주는 맑고 쾌청한 삶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주님께서는 희망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까? 따라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만 있다면 포기도 절망도 하지 않고 기쁘게 지금을 살 수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 가사는 이렇습니다.
사노라면 언젠가는 맑은 날도 오겠지. / 흐린 날도 날이 새도 해가 뜨지 않더냐.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밑천인데, / 쩨쩨하게 굴지 말고 가슴을 쫙 펴라.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 해가 뜨지 않더라도, 분명히 가까운 시간 내에 해가 뜹니다. 가슴을 쫙 펴고 힘차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희망을 놓지 않았던 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 잉태 소식에도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길 바랍니다.”라고 하시면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사촌 언니인 엘리사벳 성녀를 방문하면서 하셨던 말씀을 통해도 그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이를 마리아의 노래를 통해서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면서 보여주십니다.
우리의 믿음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오늘이 되셨으면 합니다. 믿음을 갖춘 사람은 절대로 좌절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바라보면서 그 안에서 감사의 기도를 바치게 됩니다. 기쁨의 노래를 힘차게 부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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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이란 지금 이 순간 평화와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다(틱닛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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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31.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정의 여정
-주님과 더불어 도반 형제들과의 우정-
오늘은 5월 성모성월 마지막날이자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입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한 날을 경축하는 날이며, 마리아가 석 달 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니 엘리사벳의 환대가 얼마나 극진했으며 두분간의 우정이 얼마나 깊었는지 감동하게 됩니다. 이에 근거하여 반가운 손님이 수도원의 저를 방문했을 때는 저는 주저없이 “아, 오늘은 형제(자매)님의 수도원 방문 축일이네요!”덕담을 드리며 환대하곤 합니다.
나이 70을 넘어 제가 주로 심취하여 읽는 책은 성인들이나 위인들의 평전(評傳)입니다. 요즘 감명깊게 읽은 평전은 금장태 교수의 퇴계평전, 율곡평전, 다산평전이요 이분들의 우정에 정말 감동했고 부러워했습니다. 길다 싶지만 나누고 싶은 분이 율곡과 성혼의 우정이요, 다산 정약용과 그의 형 손암 정약전과의 우정입니다.
1.율곡과 성혼의 우정은 깊어 항상 서로 그리워하며 찾고, 만나면 밤을 새워 이야기가 끝이 없었다. 43세때(1578) 세모에 눈이 많이 내렸는데, 율곡은 문득 친우 성혼이 보고싶어 소를 타고 눈길을 뚫고 찾아가 밤을 새우고 정담을 나누면서 작별의 아쉬움을 읊기도 하였다.
“한해는 저물고 눈은 산에 가득한데,
들길은 가느다랗게 숲속으로 갈라졌네.
소를 타고 어깨 으스대며 어디로가나?
우계(牛溪;성혼) 냇가 아름다운 사람 그리워서라네.
슬퍼라, 반평생에 이별도 많았으니,
온갖 산 험한 길들 다시금 생각하네.
이야기 끝에 뒤척일제 새벽 닭 울어,
내다보니 창문 가득 서리 달빛 차갑네.”
율곡이 죽었을 때, 성혼은 30년간 율곡과의 우정을 돌아보며 제문에서 율곡의 인물됨을 다음처럼 요약합니다.
“형은 뜻이 크고 원대하며, 학문은 깊고 명석하며, 재주는 영민하고 넉넉하며, 도량은 크고 굳세니, 하늘이 인재를 낳으심이 의도가 있는 것 같았소. 일찍이 큰 도의 근원을 깨쳤으나 스스로 만족하지 않았고, 스스로 백성을 위한 책임을 맡으면서 자기 몸을 아끼지 않았소. 일을 당해서는 세차게 밀고 나가니 얽히고 설켜 어려운 마디도 그 생각을 얽맬수가 없었으며, 남과 다툼이 없었으니 백성들이나 천박한 사람은 그 도량을 엿볼 수 없었소.”
2.다산 정약용은 둘째 형 손암 정약전이 1816년 6월6일 유배지 흑산도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피맺힌 슬픔을 두 아들에게 처절하게 토로하는 편지를 보냅니다.
“오호라. 어질면서도 곤궁함이 이와같을 수 있는가. 원통하여 무너지는 가슴을 호소하니 목석도 눈물을 흘리는데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느냐. 외로운 천지 사이에 우리 손암(정약전)선생님만이 나의 지기(知己)였는데, 이제는 그분마저 잃고 말았다. 앞으로는 비록 깨달은 바가 있다하더라도 누구에게 입을 열어보겠느냐. 사람이 자기를 알아주는 이가 없다면 죽느니만 못하다. 아내도 나를 알아주지 못하고, 자식도 나를 알아주지 못하고 형제 종족들이 모두 나를 알아주지 못하는 처지에 나를 알아주던 우리 형님이 돌아가셨으니 슬프지 않으랴. 경집(經集) 240책을 새로 장정하여 책상 위에 두었는데 나는 이 저술을 불살라야 한단 말인가.”
정약용 아우의 지기지우(知己之友)였던 형 정약전이 정약용의 <주역사전>에 붙인 서문에서 그 아우의 인물됨에 대한 간결한 서술도 감동적입니다.
“그가 젊어서 성균관에 다닐 적에는 과거시험의 문체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으니, 나는 그를 재치가 번뜩이는 재사로 여겼다. 장성하여 규장각에 출입하면서 문학으로 명철한 임금(정조)을 섬기게 되었을 때는 나는 그를 문장과 경학의 선비라고 여겼다. 지방수령으로 나가 행정을 담당하면서는 크고 작은 안팎의 일이 모두 지극한 성과를 이루었기에 나는 그를 재상될만한 그릇이라 여겼다. 만년에 바닷가에 귀양가서 <주역사해>를 지었는데, 나는 처음에는 놀라고 그 다음에는 기뻐하다가 마침내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릎이 꿇어질 뿐만 아니라 그를 어디에 비겨야 할지 모르겠다. 다만 내가 섬에 유배되어 죽을 날이 멀지 않았지만, 그와 같은 세상에 같은 형제가 되어 이 책을 읽고서 이책의 서문을 쓸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나는 진실로 유감이 없다. 아아, 그도 또한 아무 유감이 없을 것이다.”
정약용의 저술을 통해 도를 들었으니 이제 죽더라도 아무 유감이 없다는 뜻으로 공자의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말씀을 연상하게 합니다. 정말 깊고 아름다운 우정의 형제들입니다. 하늘의 도(道)를 중심으로 날로 깊어졌던 형제간의 깨끗한 우정의 여정이었음을 깨닫습니다. 하늘의 도를 중심으로 하기로는 율곡과 성혼의 우정의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마리아와 엘리사벳 간의 우정의 깊이와 아름다움이 확연히 이해됩니다. 오는 제1독서의 스바니야 예언서의 시온은 그대로 우리에 해당됩니다. 삶의 중심인 주 우리 하느님을 확실히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시온아, 두려워하지 마라. 힘없이 손을 늘어 뜨리지 마라.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 계시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 축제의 날인 양 그렇게 하시리라. 나는 너에게서 불행을 치워버려, 네가 모욕을 짊어지지 않게 하리라.”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하여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사는 모든 이들을 당신 사랑으로 끊임없이 새롭게 하시며 기쁨과 즐거움을 선사하십니다. 바로 스바니야의 아름다운 예언이 하느님 중심의 삶에 최선을 다하며 주님과의 우정에 충실했던 두 영적도반인 마리아와 엘리사벳을 통해 그대로 실현됨을 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삶의 중심으로 모시고 우정을 깊이할 때 성령충만한 삶이겠습니다. 마리아의 인사말을 듣고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환호하며 환대하는 엘리사벳입니다. 두분의 영적우정의 깊이와 아름다움을 엿볼수 있는 대목입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영적우정과 더불어 태중의 아기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영적우정도 이미 시작됐음을 봅니다. 아, 이런 영적도반이 있다면 그대로 구원이요 태어난 보람이 있는 성공인생입니다. 마리아의 내적 불안과 두려움은 완전 사라지고 그 영혼은 꽃처럼 활짝 피어났을 것입니다.
참 좋은 하느님의 선물이 참 좋은 영적도반에 영적우정입니다. 예전 우정깊은 선비들이, 또 선사들이 만났을 때 시로 마음을 주고 받듯이 엘리사벳과 마리아 역시 성령에서 샘솟는 시로 서로의 마음을 나눕니다. 엘리사벳의 성령충만한 환대에 응답한 마리아의 노래가 참 절창(絶唱)입니다. 개인 감사고백시로 시작하여 집단감사시로 끝납니다.
역시 가난한 이들을 대변한 아나뷤의 노래에 속합니다. 바로 우리 수도자들은 물론 가톨릭 교회 신자들이 2000년 이상 저녁 성무일도시 마라아와 함께 부르고 있는 구구절절 희망과 기쁨을 가득 선사하는, 어느 하나 생략할 수 없는 찬미감사가입니다. 첫 부분과 끝 부분만 나눕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습니다....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시온이요 이스라엘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과의 우정을 날로 깊게 하시며 더불어 당신 중심으로 살아가는 도반 형제들과의 우정도 날로 깊게 하심으로 우리 모두 성공적 우정의 여정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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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31.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벌써 성모님의 성월도 다 지났습니다.
오월의 마지막 날에 성모님은 자기 친척인 엘리사벳을 방문하십니다. 오늘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을 기리는 날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두 사람의 만남을 기릴 뿐만 아니라 마리아와 엘리사벳을 통해 하느님의 능력을 찬미하는 날입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아이를 가졌고 그 아이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아이도 마리아의 아이도 모두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이에 마리아도 유명한 ‘마리아의 노래’(마니피캇)로 응답합니다. 그런데 잘 들어보면 두 여인은 서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이야기합니다.
두 여인의 삶의 중심은 하느님입니다. 두 여인은 만나서 그렇게 하느님의 일을 이야기하고 하느님께서 베푸신 자비를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삶의 중심은 어디 있습니까? 세상입니까? 하느님입니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을 믿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오늘 만난 두 여인의 삶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두 여인은 그리 순탄하게 살지 못했습니다. 엘리사벳은 전승에 의하면 일찍 하늘나라로 갔다고 합니다.
마리아의 삶은 더욱 분명하게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자기 아들이 박해받고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볼 수밖에 없었던, 그래서 예수님과 같은 고통을 받으셨다고 우리가 말하는 그분의 삶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 중심으로 산다는 것은, 하느님을 찬미하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만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과 함께 고통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고통에 찌들어 산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고통 중에도 하느님 한 분 때문에, 예수님 한 분 덕분에 행복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하느님은…. 으로 시작하는 말을 해 보십시오. 오늘은 예수님은…. 으로 시작하는 말을 해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 가운데에서도 성령께서 활동하시어 대화하는 그 순간마다 행복하도록 이끄실 것입니다.
종이학
옛날 옛적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그 옛날
종이학을 접어 선물하던 문화가 있었습니다.
천 마리를 접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속설과 함께….
가수 전영록 님의 노래 ‘종이학’에도 이런 가사가 등장합니다.
‘천 번을 접어야만 학이 되는 사연을…. 나에게 들여주며 울먹이던 너….’
종이학을 접는다는 뜻은
이루고 싶은 소원을 그 작은 종이에 담아
종이학을 만들면, 그 학이 소원을 가지고 하늘로 올라가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마음속 종이학을 접어보면 어떨까요?
한가지 소원을 담아
마음속 작은 종이에 적고
천 번이고 만 번이고 곱게 기도로 접어
하늘로 올려보면 어떨까요
그렇게 하늘에 올라간 기도들이
오월의 끝자락에 모두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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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31.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길이 된 사람 길을 떠나네>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길을 품어
길이 된 사람
하늘을 바라는
땅을 품으러
길을 떠나네
땅에서
하늘로 오르는
길을 품어
길이 된 사람
땅을 보듬는
하늘을 나누러
길을 떠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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