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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경환의 명시감상 제1권에서
아득한 성자
조오현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 있지만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
----조오현, [아득한 성자](시학사, 2007년) 전문
근대철학의 아버지인 데카르트는 그의 {방법서설}에서 자기 자신의 행복한 삶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가 있다. 첫째는 전통과 관습을 존중하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의 명제, 하나의 행동방식이 결정되면 제 아무리 더 좋은 방법이 떠오른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겠다는 것이다. 셋째는 세계를 변혁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변혁시키는 것이고, 넷째는 자기가 하고 싶고 좋아하는 일에만 전념을 하겠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공동체 사회에서 태어나 공동체 사회가 제공하는 여러 가지 혜택을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회적 동물인 것이고, 따라서 전통과 관습을 존중한다는 것은 사회적 동물로서 그 공동체 사회의 이익을 위해서 살아가겠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의 명제, 하나의 행동방식을 끝까지 밀고 나가겠다는 것은 분명한 역사 철학적인 목표를 향하여, 언제, 어느 때나 끊임없이 정진하겠다는 것을 뜻하고, 세계를 변혁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변혁시키겠다는 것은 어설프거나 섣부른 혁명보다는 자기 자신이 먼저 그 혁명가로서의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뜻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가 하고 싶고 좋아하는 일에만 전념을 하겠다는 것은 오직 뜨거운 열정으로써 그의 삶을 아름답고 행복한 삶으로 연출해내겠다는 것을 뜻한다. 자기 자신의 사적인 이익보다는 공동체 사회의 이익을 중요시 했던 인간, 언제, 어느 때나 우유부단하지 않았던 인간, 자기 자신을 늘, 항상, 이상적인 미래의 인간형으로 연출해낼 수 있었던 인간, 자기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었던 일(학문)에만 전념했던 인간----. 요컨대 데카르트의 철학은 데카르트의 행복론이며, 그는 그의 행복론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신적인 인간으로 끌어올렸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조오현 시인은 1932년 경남 밀양에서 출생했고, 1939년 소머슴으로 절간에 입산을 하여 큰스님이 된 시인이다. 필명은 조오현曺五鉉이고 법명은 무산 霧山이다. 법호는 만악萬嶽이고 자호는 설악雪嶽이다. 그는 [아득한 성자]라는 시를 통해서 ‘정지용문학상’을 수상한 바가 있으며, ‘최고의 선서禪書’인 {벽암록}과 {무문관}을 ‘역해’로 펴낸 바가 있다. 그는 시인이면서도 스님이고, 또한 스님이면서도 시인이다. 그의 시세계는 자기 자신과 중생제도를 위한 ‘자비의 세계’를 지향하고, 다른 한편, 그의 시세계는 만행萬行과 만덕 萬德을 통하여 ‘화엄의 세계’를 지향한다. 자비의 세계는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의 고통을 어루만져주는 것을 말하고, 화엄의 세계는 그 만행과 만덕을 통하여 모든 것을 다 끌어안는 세계를 말한다. 자비의 세계는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향하고, 화엄의 세계는 높은 곳으로, 더 높은 곳으로 향한다. 더 낮은 곳은 현실의 세계이며 이 세상의 중생들이 살고 있는 세계이고, 더 높은 곳은 이상(극락)의 세계이며 부처님이 살고 있는 세계이다. 그는 [동산의 삼 세 근]({벽암론}, 불교시대사, 2007년)의 사족蛇足에서 이렇게 역설한 바가 있다. “이 세상에 부처 아닌 것이 어디 있는가. 반드시 고귀한 사람만이 부처인가. 아니다. 천하의 무식하고 가난한 사람, 삼베 짜는 직녀도 부처고, 똥 푸는 농부도 부처다. 몸 파는 여자도 부처고, 거지나 장애인도 부처다. 동산 화상은 이것을 일깨우기 위해 ‘삼 세 근’이라 했고, 운문화상은 ‘똥 묻은 막대기’라고 했던 것이다”. 지배계급, 즉, 브라만 계급의 가치관에 반발하여, 수없이 짓밟히고 개 같이 학대를 받고 있었던 피지배계급, 즉, 민중계급을 구원해냈던 부처, 남녀차별은 물론, 그 어떤 차별도 없이 만인평등과 최초의 민주주의 이상을 실천해보였던 부처, 무욕망과 무집착을 통하여 ‘공空의 사상’을 실천하고 모든 민중들을 극락의 세계로 구원해냈던 부처----, 바로 그 부처를 ‘삼 세 근’이나 ‘똥 묻은 막대기’라고 표현한 것처럼 더 이상의 신성모독적인 표현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신성모독적인 표현은 불교의 창시자로서의 부처와 그의 업적을 함부로 무시하는 행위가 아니다. 스승을 만나면 스승을 죽이라는 말도 있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말도 있다. 아들이 아버지보다 못하면 그 가정의 미래의 희망은 없게 되고, 또한 제자가 스승보다 못하면 그 국가의 미래의 희망은 없게 된다. 부처는 미래의 부처이지, 유일무이한 절대적인 부처가 아니다. 유일무이한 절대적인 부처는 기독교의 하나님처럼, 만인 위에 군림하는 부처이지만, 그러나 미래의 부처는 불교의 창시자로서의 그 업적을 간직한 채, 새로운 부처로서 거듭날 수가 있는 부처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무조건적인 숭배의 대상이지만, 불교의 부처는 어느 누구나 그 부처가 될 수 있는 부처이다. 모든 욕망을 다 비우고 이 세상의 참된 ‘도’를 깨우치기만 하면, 천하의 무식한 사람도, 가난한 사람도, 똥 푸는 농부도, 몸 파는 여자도, 거지도, 장애인도 모두가 다같이 부처가 될 수가 있는 것이다.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내려와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을 어루만져주고, 그들을 다같이 화엄의 세계(극락의 세계)로 인도하여 주는 불교의 참된 진리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조오현 시인의 [아득한 성자]의 세계는 그 자비의 세계와 화엄의 세계에 맞닿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니, 조오현 시인의 [아득한 성자]는 그 자비의 세계에서 화엄의 세계로 나아가는 길목에서, 그러나 잠시 잠깐 동안 길을 잃어버리고,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회한을 토로하고 있는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왜 아득한 성자인가? ‘아득한’이라는 무엇이며, ‘성자’란 무엇인가? ‘아득한’이란 형용사로서, ‘1,끝없이 멀다; 2, 까마득하게 오래다; 3, 앞길이 멀어서 정신이 까무러질듯하다; 4,막연하다‘의 뜻’을 지니고 있고, ’성자‘란 지혜와 덕이 뛰어난 사람으로서 온갖 번뇌를 끊고 이 세상의 삶의 이치(진리)를 깨달은 사람을 말한다. 따라서 ’아득한 성자‘란 ’나는 성자가 되기에는 터무니 없이 부족하다‘라는 뜻과, ’지혜와 덕이 뛰어난 성자의 길은 끝없이 멀기만 하다‘라는 뜻이 된다. 하루살이 떼는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를 살고도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열반에 들었지만, 나는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여전히 살아 있고, 그리고 아직도 이 세상의 삶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어서,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중생에 지나지 않는다. 하루살이 떼는 하룻만에 이 세상의 삶의 이치를 깨달았지만, 그러나 나는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그 삶의 이치를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하루살이 떼는 성자이고, 나는 가엾은 중생이다. 따지고 보면 손오공이 제 아무리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부처님의 손바닥을 벗어날 수가 없듯이, “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에 지나지 않는다. 요컨대 “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라는 시구는 천년 만에 깨우친 성자는 하룻만에 깨우친 성자와 그 법력의 크기가 똑같고, 따라서, 그 천년이라는 기나 긴 시간과 그 어리석음만큼 ’아득한 성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왜 하루살이 떼이며, 그 하루살이 떼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란 무엇이란 말인가? 또한, 성자란 왜 성자이며, 그 성자는 어떤 사람이어야만 한단 말인가? 하루살이는 하루살이목과의 작은 곤충이며, 굽은꼬리하루살이, 무늬하루살이, 밀알락하루살이, 별꼬리하루살이, 병꼬리하루살이 등, 전 세계적으로 2,000여 종이나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유충은 담수에 살고, 성충은 봄에서 여름까지 호수와 하천 등에서 산다. 홑눈은 3개이며 겹눈은 잘 발달해 있다. 더듬이는 짧고 입은 씹는 입으로 퇴화해서 작다. 다리는 3쌍으로 잘 발달해 있지만, 가늘고 약하며, 앞다리가 가운데다리와 뒷다리보다 길고 암컷이 수컷보다 길다고 한다. 성충은 그 수명이 매우 짧아서 짧은 것은 1시간에서 2~3일, 좀더 오래사는 것은 기껏해야 3주일 정도라고 한다. 하루살이떼는 물속에다가 알을 낳는데, 부화하는 데는 일주일에서 수 개월 정도 걸리며, 그 애벌레들은 물속에서 2년내지 3년 정도를 살게 된다. 애벌레에서 다 자란 성충이 되면 하루살이라는 날개를 달고 그토록 아름답고 달콤한 성교 끝에, 또한, 그토록 아름답고 장엄하게 최후를 마치게 된다. 흔히들 하루살이라는 말은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가는 사람’을 지시하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지만, 조오현 시인은 그 부정적인 의미를 뛰어 넘어 서서, 그 하루살이 떼를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위대한 성자로 이끌어 올리고 있는 것이다. 하루살이 떼는 ‘하루하루 겨우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인 것이다. 하루살이 떼의 삶은 맑고 깨끗한 삶이며, 마치, 언어가 절제되어 있듯이,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는 삶이다. 그 어느 누구보다도 맑고 명료한 의식으로 그토록 아름답고 달콤한 성교 끝에, 그리고 그 2세를 생산해놓은 끝에, 이 세상의 삶을 맑고 깨끗하게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루살이 떼의 죽음보다도 더 아름답고 멋진 죽음이 있을 수가 있겠으며, 또한, 어떻게 하루살이 떼의 죽음보다도 더 고귀하고 위대한 죽음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그 죽음 앞에서는 알부민과 항암제에 의존하는 구차함도 없고, 또한 그 죽음 앞에서는 이 세상의 삶에 대한 애걸이나 눈물 따위가 개입할 여지도 없다. 아름답고 멋진 죽음은 예술적인 죽음이며, 예술적인 죽음은 삶의 완성으로서의 죽음이다.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은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며, 삶은 죽음의 완성이다. 엠페도클레스는 자기 자신의 영원불멸의 삶(신적인 삶)을 위하여 에트나 화산에 몸을 던졌고, 스파르타의 아버지인 리쿠르고스는 스파르타의 법률을 완성하고, 스파르타의 왕이라는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의 목숨을 과감하게 끊어 버렸다. 부처와 예수는 수많은 민중들을 구원하고 십자가에 못 박혔고(득도를 했고), 반고호와 모차르트는 그들이 그토록 사랑하는 예술을 위하여 순교를 했다. 조오현 시인의 ‘하루살이 떼'는 이러한 고귀하고 위대한 성자와도 맞닿아 있으며, 그의 시집, {아득한 성자}에서처럼, 비록, 사회적인 천민의 삶을 살고 있을지라도 그 직업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갔던 성자와도 맞닿아 있는 것이다. 조오현 시인의 {아득한 성자}는 정말로 아름답고 뛰어난 시집이며, 그 법력의 크기가 앉은뱅이도 달려가게 만들 수 있는 기적을 연출해내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제일로 환한 웃음], [어미], [어간대청의 문답問答], [망월동에 갔다 와서], [업業아, 네 집에 불났다], [염장이와 선사] 등이 바로 그것이다. 성자란 직업의 귀천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그 혈통의 고귀함이나 그 업적의 크기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성자란 데카르트처럼, 또는, 수많은 예술가들처럼, 오직 뜨거운 열정 하나로 자기가 하고 싶고 좋아하는 일에만 전념을 하고, 바로 그 무한한 성실성으로 자기 자신을 고귀하고 위대한 미래의 인간으로 끌어 올린 사람을 말한다. 그는 가장 아름답고 멋진 예술적인 삶을 살다가 갔던 사람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삶을 살다가 갔던 사람이다. 성자는 하루살이 떼이며, 하루살이 떼는 미래의 인간이고, 이 세상의 부처이다.
조오현 시인의 [아득한 성자]는 자기 자신의 반성과 성찰이 돋보이는 시이며, 그 반성과 성찰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이상적인 미래형의 인간(부처)으로 끌어 올리는 시라고 할 수가 있다. 반성과 성찰은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내려오는 방법적인 수단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나는 하루살이 떼만도 못하다’라는 자기 인식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반성과 성찰은 높은 곳으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방법적인 수단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그 자기 인식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보다 더 높은 곳으로 이끌어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비는 내려옴(하강)의 세계이고, 화엄은 올라감(상승)의 세계이다. 중생을 구원하려면 자기 자신이 먼저 중생이 되어야만 하고, 또한, 중생을 구원하려면 자기 자신이 먼저 구원자(혁명가)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자비와 화엄은 둘이 아닌 하나이며, 바로 이 지점에서 그 방법적 수단으로써의 ‘반성과 성찰’이 중요시되고 있는 것이다. 조오현 시인은 ‘하루살이는 성자이고 나는 가엾은 중생이다’라는 깨달음을 통하여, 궁극적으로는 이 세상의 삶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자기 자신과 모든 중생들을 구원해낸다. 이미, 앞에서, 조오현 시인의 [아득한 성자]는 “잠시 잠깐동안 그 길을 잃어버리고,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회한을 토로하고 있는 시”라고 말한 바가 있지만, 그러나 그의 [아득한 성자]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회한을 토로하고 있는 시가 아니다.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 있지만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
모든 성자는 천년을 산다고 해도 하루살이 떼에 지나지 않는다. 하루살이 떼는 하룻만에 자기 자신의 삶을 완성하지만, 아득한 성자는 천년 만에 자기 자신의 삶을 완성한다. 하루살이 떼의 삶은 언어와 시간이 절제되어 있지만, 아득한 성자의 삶은 언어와 시간의 낭비가 너무나도 심한 것이다. 하루살이 떼의 삶은 맑고 깨끗하고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지만, 아득한 성자의 삶은 더럽고 추하고 온통 군더더기 뿐인 삶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하루살이 떼는 성자가 되고, 아득한 성자는 하루살이 떼가 된다. ‘모든 성자는 하루살이 떼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이 진리의 말은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중생들, 그러나 자기 자신이 그토록 하고 싶고 좋아하는 일에만 전념을 하고 있는 중생들을 더욱 더 크게 끌어안는 말이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미래의 부처로 끌어 올리고 있는 말이기도 한 것이다. ‘모든 성자는 하루살이 떼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당신도, 당신도, 그 어느 누구도 성자가 될 수 있다’라는 이 전언 속에는, 그러나 모든 욕망을 다 비우고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는 예술적인 죽음을 죽어가야 한다는 참된 의미가 숨어 있는 것이다. 조오현 시인의 [아득한 성자]는 화엄의 세계----자비까지 포함된 화엄의 세계----이며, 시적 화자인 ‘나’는 소승적인 ‘나’가 아니라, 대승적인 ‘나’라고 할 수가 있다.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 있지만”은 이 세상의 중생과 격리된 소승적인 ‘나’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 ‘나’는 “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라는 깨달음을 통하여 자기 자신과 모든 중생들을 구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승적인 ‘나’----통개인적이며 보편적인‘나’----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조오현 시인의 [아득한 성자]는 언어도 절제되어 있고, 시간도 절제되어 있다. 자연은 언제, 어느 때나 최단의 행로를 선호하고, 또한, 자연은 언제,어느 때나 변화가 필요할 때에도 논리적인 비약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 절약의 법칙과 연속의 법칙이 그의 간결하고 섬세한 시구가 되고, 그리고 그 시구보다도 여백이 더 꽉 차 보이는 그 ‘여백의 미학’ 속에는 수천 년의 시간을 찍어 누른듯이, 천세불변의 잠언적인 경구(진리)가 새겨지게 된다. ‘하루살이는 부처이고 부처는 하루살이이다’라는 잠언적인 경구가 바로 그것이다. 조오현 시인의 [아득한 성자]는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 ‘뜨는 해/ 지는 해’, ‘하루살이/ 나’, ‘성자/ 하루살이’라는 힘 있는 대립을 통해서 그 긴장감이 감돌게 되고, 그리고 그 긴장감에 의해서 갑자기 모든 시대, 모든 문화를 대표할 수 있는 천하 제일의 명시가 탄생을 하게 된다.
오오, 아름답고 멋진 삶이여!
오오, 아름답고 멋진 죽음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