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문화전당에서 키르기스스탄과 협력하여 창작/공연까지 진행한 [세메테이]를 봤다. 올해 초에 나온 스케줄에서는 '마나스'라는 가칭으로 준비되고 있었다. 마나스란 키르기스에서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민족 서사시이고, 현재까지 알려진 구전 시들 중에 가장 길다. (예를 들어 오디세이가 약 만 2천 행, 일리아스는 약 만 6천 행이나, 마나스는 총 55만 행 정도로 50배 정도.) 마치 한국의 판소리처럼 이 구전 시를 전달하는 전문가인 마나스치라는 존재도 있을 정도.
듣기로는 총 3부로 이뤄져 있으며, 마나스, 세메테이, 세이테크의 삼대에 걸친 영웅담을 다루고 있다고 한다. 극의 제목에서 알 수 있다시피 표면적으로는 2부의 주인공인 '세메테이'를 다룬 극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디세이와 일리아스의 50배나 되는 내용을 어떻게 다룰 것이란 말인가? (인터넷 서점 알라딘 최상단의 오뒷세이아가 672쪽, 마나스가 책으로 나온다면 33,600쪽, 2부만 고른다 해도 대략 만 쪽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분량일 것이다.)
줄거리만 먼저 이야기해 보면 극은 마나스가 죽고 세메테이가 시련을 극복하게 될 그 사이, 마나스의 아내이자 세메테이의 어머니인 카느케이의 고난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세메테이를 잉태하고, 마나스의 장례를 경험하고, 자신과 결혼하려는 도련님에게 저항하고, 적통을 숨기며 아이를 양육하고,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어 깊은 우울증에 빠진 세메테이를 일으키는 등 사실상 극의 이름을 [카느케이]라고 지어도 틀리지 않을 만큼 극의 중심에 서 있다.
연출은 한국어와 키르기스어 혼합으로 이뤄지고, 주요 주연들을 한국과 키르기스 배우 쌍둥이로 만들어 교묘하게 배치하고 있다. 초반에는 간단한 문장들로 구성해 한국어와 키르기스어로 같은 말을 반복하여 사용하고 있고, 극 중간부터는 자막을 통해 두 개 언어를 교차하며 연기하게 된다.
무대 공간에는 오브제가 거의 없으며 얼마 안 되는 단출한 장치들만으로도 충분히 서사를 거대하게 만들어 주었다. 아시아에서 가장 크다는 식의 홍보가 되어온 예술극장 극장1에서, 대략 4층 높이의 층고를 공간감 있게 살리려고 쓴 장대봉들의 다양한 쓰임이 나쁘지 않았다. 특히 대략 10m 길이의 깃대에서 나부끼던 사부작거리는 비닐 깃발의 규모감은 오랫동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극의 초반에는 들어본 적 없는 언어와 초보적인 한국어가 번잡하게 뒤섞여 약간 혼잡스럽게 느껴졌으나 서서히 분위기와 상황을 따라가게 되고, 중반부터 복잡한 대사들에 맞춰 전개되어 후반에는 꽤 몰입할 수 있었다. 영웅 마나스와 영웅 세메테이를 잇는 인간 카느케이에 극이 집중되다 보니 인간으로서 영웅을 대하는 태도에 이입할 수 있었다. 인간이라면 참고 숨기고 모르는 체하며 살아갈 것을, 영웅이기에 (어쩌면 뻔할) 시련과 극복으로 나아가게 된다. 인간인 어머니로서는 영웅인 아들을 속수무책으로 시련에게 빼앗기고 만다.
흥미로운 것은 보통의 영화나 만화였으면 프롤로그에 불과했을 이야기들이 전면에 나서고, 이제 막 시작해서 오래 진행되어야 할 시련과 극복이 에필로그로 축소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으로 치면 유화가 하백에서 쫓겨나 세상을 떠돌다가 힘들게 고주몽을 낳고 양육하여 길러내어 주몽이 왕이 되려고 떠나는 시점에서 극이 끝나는 것에 가깝다.) 극의 절정은 카느케이가 여성으로서 마나스의 갑옷을 입은 채 모든 명예를 걸고 마상 경주에 참여하여 승리하는 장면일 것이고.
인상적인 장면 하나를 뽑자면, 출생의 비밀이 밝혀진 후 깊게 우울에 빠진 세메테이를 어떻게 일으키느냐다. 아버지의 원수로부터 멀리 떠나와 유년기를 완전히 거짓으로 살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세메테이는 옷을 벗고 죽음에 가까이 다가간다. 겉보기에 얇은 옷 하나만 걸친 그는 매우 가벼워 보이지만 괴수 같은 낙타가 끌어도 꿈쩍하지 않는다. 천 년이 더 된 과거의 영웅도 우울이 큰 문제로 제시된다.
P.S. 좀 더 찾아보니 1부를 암송하는 사람을 '마나스치', 2부는 '세메테이치', 3부는 '세이테크치'라고 따로따로 부른다고 한다.
첫댓글 대서사사군요. 구전으로 전달된다는 이야기들을 볼 때마다 인간의 능력에 늘 놀랍니다.
옛날 사람보다 뇌를 덜 깊게 쓰고 살아간다는 생각은 듭니다. 옛 사람들이 보면 저희는 꽤나 주의 산만으로 보일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