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레터 94]앗! 또 몇 탄인지도 모를 ‘벗길맛’이다
지난 일요일 오전, 궁내동 톨게이트를 막 통과했다는, 언제 들어도 반가운 ‘벗길맛클럽’고정멤버격인 친구의 전화다. 첫 번째 행선지는 ‘익산 오일장’이니 점심 걱정은 말라는 것이다. 오후 3시쯤 주인도 없는 사랑방에 이미 진을 차렸다. 새해 들어 처음이니만큼 악수를 하며 덕담을 주고 받았다. 익산장에서 사온 각종 해물을 냉장실에 얼른 넣어두란다. 싱싱한 농어 2마리, 꼬막 1만원어치, 큼직한 갑오징어 2마리, 해삼, 미나리 한 단까지 장보기를 해왔다. 잘 생긴 홍어 1마리는 처마 밑에 매달아놓았다. 그러고는 여수 친구와 약속을 했으니 ‘새조개 샤브샤브’를 먹으러 가잔다. 불행히도 나는 전주 친구와 모처럼 선약이 있다하니 내일 오겠다며 4시반쯤 길을 재촉했다. 6시반쯤 보내온 사진을 보니 ‘벗길맛’4명 외에 여수와 순천친구 부부가 환하게 웃고 있다. 그 비싼(1키로에 18만원이라던가) 새조개를 끓는 냄비에 뭉텡이뭉텡이 넣고 있고. 흐미, 얼마나 입에 감기겠는가.
아무튼 ‘벗길맛’은 전라고6회가 만든 명품클럽이다. 몇 번 말했지만 ‘벗길맛’은 <벗따라, 길따라, 맛따라>의 약칭이다.‘벗길만(하다)’으로 읽기 쉬워, 자칫 골프 등을 치는 유한마담들이나 꼬시려다니는 한량閑良 친구들로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절대 아니다. 고정멤버도 없고, 언제 어느 때 어디를 가자고 날짜를 정한 바도, 회비도 없는, 아주 프리free한 임의조직이다. 어느 누가 주동을 하면 형편되는 친구들끼리 전국의 친구집, 맛집들을 찾아 2박이든 3박이든 길을 떠나는 것이다. 아직도 몇 명은 생업生業에 매어 있으나, 6학년 2학기가 되니 대부분 ‘인생백수人生白手’인 셈이다. 무엇보다 친구들끼리 부담이 없어 좋다. 저녁에도 여기餘技라고 약간의 오락, 고스톱이나 하이로, 섯따를 하지만, 딴 돈의 80%를 돌려주는 철칙이니, 맘껏 웃으며 즐기게 된다. 서로 아무리 짓궂게 놀려먹어도 화를 내지 않으니, 이만큼 마음 편한 사이가 어디 쉬운 일인가.
하여튼, 여수의 어느 음식점은 아직도 회사의 중역인 친구가 주선했다. 법카(법인카드)를 쓰려하는데, 그중의 한 멤버가 마침 천금같은 친손녀를 낳았다며 자랑값으로 쏘았다고 한다. 그것은 진짜 쏠만한 일이다. 친구가 마련해준 숙소에서 흥겹게 놀다, 다음날 올라오는 길에 점심은 임실 청웅면 면사무소 옆의 다슬기수제비집에서, 차는 정읍 쌍화차거리에서 쌍화차를 마셨다한다. 나는 세미-식도락가食道樂家이지만, 이 멤버들은 모두 식도락가가 다 되었다. 어지간한 맛집은 맛집으로 치지도 않는다. 차 속의 필독서는 허영만의 <식객>이다. 한량이라고 한마디로 욕하지 말기 바란다. 그들도 다 그동안 치열하게 살았다.
오후 네 시쯤 찬샘마을에 도착한 그들중 한 명은 아예 자기네 주방처럼 주방으로 직행해 농어매운탕을 끓인다, 꼬막과 갑오징어를 삶는다, 해삼 배를 딴다고 분주하다. 늘 그렇듯, 노는 놈은 노는 게 장기이고, 요리 담당은 요리 한다고 바쁘다. 흐흐. 그전날에도 여수에서 만나 놀았건만, 순천에 사는 친구가 또 장시간 운전을 하며 달려왔다.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게 그리 재밌을까.
다음날 주인은 아무리 이무러운 친구들이라지만 아침밥이 걱정이다. 이럴 때를 대비한 비상식품이 ‘비비고 시리즈’로 차돌육개장 두 봉지를 뜯었다. 설거지가 약간 귀찮을 뿐이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런 후 원두커피를 내려 ‘대접’하며 끝이다. 군산 원조아구찜을 반드시 먹고 올라가야 한다며 나를 앞장세운다. 불감청고소원. 많은 맛집을 다녀봤지만, 이 집 무조건 강추다. 서너 명이 먹을 수 있는 아구찜 중짜가 7만원. 군산에 사는 신사친구를 불러내니 6명, 중짜 2개를 시켰다. 예약하지 않으면 자리가 없다. 한 식탁에 광어회와 병치회 한 접시가 서비스란다. 게다가 귀한 민물새우탕이라니. 남은 아구찜에 비벼까지 준다. 거한 점심에 뿌듯하다. 점심값은 최근 한 친구가 골프연습장을 지으며 생긴 법카로 쏘았다. 아, 점심 직전에 들른 곳이 군산 이성당빵집이다. 명성은 들어보셨으리라. 일개 빵집이 여느 중소기업을 뺨친다. 굉장하다. 평소에도 늘 줄을 선다고 하는데, 개업연대가 일제강점기까지 올라간다. 최근에는 이성당 주방에서 일하던 쉐프가 독립해 차린 ‘영국빵집’도 성업중이라고 한다. 군산은 근대화거리 등 여러 가지로 매력적인 도시이다. 대기업이 철수하는 바람에 경기가 침체되었다고는 하지만, 관광도시로도 손색이 없으니, 다시 살아날 것이 틀림없다.
오후 1시반, 전주행 직행버스를 탔다. 겨울햇살이 따사로이 비추는 창가에 앉아 방금 헤어진, 좋은 친구들을 생각하니, 갑자기 눈물이 핑 돈다. 행복하다. 화양연화.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전주터미널에 내리기 전, 꾀복쟁이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나랑 같이 내려가 방금 포장해온 매운탕과 돼지고기 구워 우리집 마당에서 깜짝파티를 하자고 제안하니 좋다며 달려온다. 그렇게 또 동네 또래 친구들이 열 명이나 모였다. 흥쾌한 하루가 저물어가는데, 어떤 친구는 흥에 겨워 음치노래를 마구마구 토해낸다. 흐흐. 우좌지간, 벗길맛 친구들아, 춘삼월 꽃 피고 새 울면 한번 또 내려오라. 구례 벚꽃 백리길을 걷자. 은어회는 초보 농사꾼이 쏜다. 고맙고 화이팅이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