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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아이연구소 心터 & 엄마를 위한 수다연구소
 
 
 
카페 게시글
일상수다(감사세일) 스크랩 고요하게 듣고 싶다.
Happy재숙 추천 0 조회 45 15.02.05 20:1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기차길 옆 오막살이 아기아기 잘도 잔다.

그 시끄러운 소리에 어떻게 아기는 그렇게 잘도 잘 수 있을까?

소음에 익숙해 지면 고요함이 두렵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다보면 엄마들과의 만남이 소중해진다.

아이들에 대한 정보와 학교생활, 선생님 그리고 과제와 그 밖의 학원정보와 진학정보까지 모든 것이 엄마들의 말 속에서 얻어지는 수확이다.  왜인지 정보를 많이 알고 발빠르게 움직이는 엄마를 보면 부럽기도 하고 그 집 아이가 완벽하게 정상에 우뚝 서 있을 것도 같다. 반면에 내 아이는 못난 엄마 때문에 손해를 보고 세상의 낙오자가 될 불안감이 쓰나미로 밀려 온다. 그래서 뭔가 석연치않으면서도 그 무리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 어렵다.

그렇게 세월이 가던 어느날 문득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고 누굴 바라보고 사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분명 내 아이를 보고 내 아이를 위해 내가 움직인것 같은데 돌아보면  내 아이는 없고 파도 속에 무언가를 풍덩 던져넣고 있는 기분이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가끔 나는 내 아이들이 엄마를 위해 살아 주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엄마의 직업이 아이를 만나고 엄마들을 만나는 일이다 보니 실제 경험에서 오는 공감과 분석, 조언에 힘이 실릴때가 많기 때문이단.

내 첫아이는 엉뚱이었다. 사실 나와 정 반대의 성향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아이라 도대체가 이해할 수 가 없었다. 그 아이의 어떤 일련의 행동 동기와 과정 결과가 모두 낯설고 상상조차 되지않아 항상 막막했다. 그리고 그만큼 미안함도 컸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아이를 이해하지도 공감하지도 못하지만 아 이런 아이도 있구나 하는 마음이 있어서 그나마 전쟁은  항상은 아니더라도 제법 피할 수 있었다.

큰 아이가 2학년일 때 학급 어머니 임원을 했었다. 그 당시에는 급식시간에 밥퍼주는 봉사원으로 활용되기도 하고 아침에 교통지도, 행사시에 돌보미로 활용되는 인력이었다. 큰 아이는 학교에 엄마가 오면 쑥쓰럽다며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엄마가 너 보러 학교 간 건데 모른척 하면 엄마가 섭섭하니까 우리 만나면 한 번 웃는 것으로 인사하자며 규칙을 정했다.

그날은 학교에 행사가 있어서 임원 엄마들이 모두 교실에서 활동을 돕는 날이었다. 한 엄마가 내게 말을 걸었다.

"우리반에는 엄마 없이 할머니나 아버지와 함께 사는 애가 많은거 같아요. 우리가 신경써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요? 어떻게 알았어요?"

"가끔 머리도 안빗고 오기도하고 양말도 짝짝이로 신고 오기도 하고 하는 애가 있더라구요"

"아 그렇구나."

네 대답에 그 엄마는 한 아이를 가리키며 '제가 매일 머리도 이상하게 빗고 오고 양말도 짝짝이더라구요'알려주었다. 누구냐먀 묻는 내게 그 엄마가 저기요를 반복하면서 알려주는 아이는 앞에서 세번째 앉은 노란 코트를 입고 있는 아이였다. 허걱! 내 딸이었다.  

"제 내 딸이잖아."

했더니 이 엄마가 놀라면서 몰랐다며 급하게 사과를 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근데 애를 왜 그렇게 키워?"

어느날 아침 큰 아이가 가방을 메고 학교 간다고 나서는데 한 쪽 양먈은 형광색 연두색이고 다른 쪽은 형광색 주황색이었다. 코트는 노란색이어서 어찌나 색깔즐이 선명하게 보이던지. 그래서 물었다.

"얘야, 양말 색깔 봤니?"

아이는 발을 모으고 서서는 자기 발을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는 '응'이라고 옹골차게 대답했다. 이상하지 않느냐는 내물음에 '난 이뻐'하더니 학교를 향해 간 것이다. 머리도 마찬가지다. 자기 맘대로 묶기도 하고 머리띠를 하고 간다.그 모양새가 어수선한 것은 자명한 일. 그런 아이의 모습을 본 이 엄마가 아마도 엄마없이 크는가보다 했던 것이다.

근데 애를 왜 그렇게 키우냐는 질문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뭘 어떻게 키워? 그냥 지 하고 싶은대로 하고 사는거지 내가 키우나 지가 사는거지.

둘째가 다섯살인가 여섯살 때였다. 그 당시 둘째는 내가 오후에 일하는 엄마여서 오전에는 나와 놀다가 오후 두시부터 여섯시까지 놀이방에서 놀았다. 그때가 5월 말경이었다. 부산의 5월 말은 초여름마냥 제법 더운 날이 많다. 그날은 유독 덥다고 기억되는 날이었다. 그런데 외출 준비하라 했더니 아이는 무지개 색이 있는 겨울 내복을 꺼내 입고 있었다. 밖이 덥다고 알려주어도 자신은 그 옷을 입고 싶다며 괜찮단다. 더구나 이번에는 한복을 꺼내달라고 조른다. 설에도 작아서 약간 치마가 깡똥하니 올라왔던 한복이었는데 굳이 내복위에 한복을 입었다. 저고리가 작아서 소매 밖으로 내복이 손가락 마디 두개 이상 흘러 나왔다. 치마도 복숭아 뼈를 훨씬 올라가 끝을 그었는데 역시나 내복바지가 노골적으로 보였다. 거울을 좀 보라했더니 아이는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매만지며 이쁘단다. 밖은 덥고 그런 아이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삼복 더위같이 느껴졌던게 기억난다. 아이는 깡총 두발뛰기를 하며 놀이방에 갔다. 문앞에서 놀이방 원장님이 둘째를 보고 헉하며 놀라던 표정과 감탄사가 생생하다.

"원장님, 제 작품은 아니구요. 아이가 원한 컨셉이에요" 했더니 웃으시며 알았다하셨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이런 종류의 일들이 내용은 다르지만 그 틀안에서 크게 때로는 작게, 어이없게 때로는 당황하게 나를 놀래꼈다. 

그런 아이를 바라보며 엄마들 틈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나는 개념없는 엄마요 자식을 포기한 엄마이고 우리 아이는 구제불능이었다. 그들과 함께 하면 세상이 마냥 넓어서 할 일도 많고 엄마의 역할이 막중해서 바지런을 떨어야할 것 같고 미래는 막막해서 완전무장하도록 준비를 해야했다. 그리고 숨찼다. 바빴다. 두렵고 막막하기도 했다.

그 소음에서 나를 비껴 세웠을 때의 고요함. 소음보다 더 무서웠던 그 고요함.

하지만 인간의 삶이라는 단순성을 찾았을 때 나는 그 고요함에서 안정을 찾았다.

아이는 아이의 삶을 살려고 왔다. 칼리 지브란의 말처럼 나에게 맡겨진 존재인 것이다.

가끔 아이란 엄마가 하기 나름이라는 말을 들을 때면 정말 그럴까 하는 반감을 갖는다.

태교부터 얼마나 많은 열정을 아이에게 쏟는가.요즘은 영어태교, 음악태교, 골프태교, 요가태교 등 모든 것이태어날 아이를 위해 준비되고 있다. 그러나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아이를 위한다면서 중요한 점은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구심이 든다. 아이가, 한 존재가 어떻게 엄마에 의해 달라질 수 있을까?

첫아이를 임신했을 때 나는 우유를 많이 마셨다. 낯선 곳에 시집와서 홀로 살아서 뱃속의 아이가 친구였다. 그 아이와 이야기하고 공부하고 책읽어주고 음악들으며 살았다. 아이는 유독 돌솥비빔밥을 먹고 싶어해서 나는 자주 주문해서 그 음식을 먹고 집에서는 뚝배기에 그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둘째는 커피를 좋아했다. 나는 커피를 안 마신다. 커피를 마시면 잠도 못자거니와 손이 떨리기도 하고 때로는 온몸의 세포가 뛰기도 해서 잘 마시지 않는다. 더구나 아이를 임신했는데 마시던 것도 삼가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둘째를 임신했던 기간 내내 커피를 하루에 서너잔씩 마셨다. 마시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여성 잡지를 여덟가지씩 매일 읽었다. 개인적으로 여성잡지는 가장 의미없는 책의 하나라고 당시에 생각했던 나였다. 그러나 그 잡지들을 보지않으면 우울했다. 매일 여러권의 잡지를 커피를 마시며 정독했다. 신기하게도 잠도 잘자고 손떨림도 없고 잡지는 아주 아름다운 책이 되었다. 물론 아이가 태어나고 다시 나는 커피와 여성잡지와 대면대면하게 되었다.

세째는 만화와 재즈 음악이 나를 사로 잡았다. 퇴근 길에 남편은 만화책을 빌려왔고 출근하면서 우체통같이 생긴 통에 만화책을 반납했다. 재즈음악은 나를 심취하게 했다. 재즈음악을 들으며, 뿌빠빠하는 흑인가수의 감미로운 목소리에 취한체 만화를 보며 포도를 먹었다. 세째는 지금도 째즈스럽다.

이 세 아이들을 자연분만했다.

아이를 낳을 때 알았다. 엄마란 아이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기르는 것이 아니라 도와주는 존재라는 것을 .

자연분만할 때 내가 힘을 준다고 해서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다. 아이는 충분히 자리를 잡고 숨을 고르고 결심을 하고 기회를 엿보고 용기를 내서 이 세상에 나오려는 것 같다. 그럴때 내게 사인을 보낸다. 힘을 보태달라고. 절대로 내가 먼저 힘을 주거나 용을 쓰지않는다. 아이가 나오고자 할 때 아이의 뜻에 따라 내가 도와 줄 뿐이다. 그렇다. 나는 그저 아이가 원할 때 도움을 주기위해, 목숨을 걸면서 도울 뿐이었다.

이런 모든 일련의 과정이 나를 아이 뒤편에 서게 했다. 아이가 가는대로 따라가는. 어쩌면 아이가 가는 길이 내가 생각하고 바란 길이 아닐 수도 있고 어쩌면 위험한 길일 수도 있고 낭떠러지로 가는 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이를 믿고 따라가 본다. 물론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알려만 준다. 아이가 그것을 경험하고 싶어하면 고통을 감당하고 경험하게 한다. 그리고 믿는다. 그 길은 내 아이가 걸어야 할 길일 것이라고. 낭떠러지 앞에서 아이는 멈추고 자기 길을 만들것이라고. 내가 바란 길은 그것이 안전하고 아름답고 폼나고 멋져도 결국 그건 나의 삶의 조각일뿐 아이의 삶은 아닐거라고.

아이에 대한 수많은 소음 속에서 내가 고요해지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요란한 기차소리에 익숙해져 있는데 침묵이 찾아오면 당황할 것이다. 심심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외롭기도 하고 왈칵 눈물도 솟구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요하게 삶을 바라보고 싶다. 내 아이를 세상의 눈과 엄마들의 수다와 상업적 유혹과 비관적인 현실진단이란 기차소리에서 벗어나 고요하게 아이가 걸어가는 걸음걸음을 바라보며 어떻게 아이가 자신의 삶을 걸어가는지 지켜보고 싶다. 기차소리가 아닌 아이가 내는 눈밟는 소리 낙엽밟는 소리를 행복하게 듣고 싶다. 고요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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