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작가 애니타 브루크너의 소설 <호텔 뒤락>은 세계 3대 문학상에 꼽히는 부커상 수상작이다. 여성 최초 케임브리지대학교 슬레이드 석좌교수를 지낸 애니타 브루크너는 ‘좀 심심해서’ 53세에 처음 소설을 썼다. 첫 소설이 호평받자 매년 소설을 냈고, 네 번째 작품 <호텔 뒤락>으로 문학성은 물론 대중성까지 확보했다. 1984년 9월 출간된 <호텔 뒤락>은 그해에만 5만 부 이상 판매되었고, 이후 BBC에서 드라마로 방영되었다.
<호텔 뒤락>은 아주 재미있다. “진정한 고전, 지금부터 100년 동안 모든 사람이 즐겨 읽을 작품”이라는 서평대로 흥미로우면서 의미 있다. 섬세한 심리묘사를 곁들여 논하는 사랑과 일이 매우 설득력 있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이 심화된다고 해도 사람들의 본질적인 마음가짐과 삶의 질서는 앞으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게 분명하다.
재미있지만 책장이 술술 넘어가지 않는 점이 매력이다. 사람들의 마음, 미묘한 감정을 대변하는 주변 풍경, 핵심을 찌르는 대화를 격조 있게 풀어내는 장면에서 쉬어가며 음미하게 되기 때문이다. 스토리만 이해하며 휙휙 넘기는 책들과 다른 품위와 독서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소설이다.결혼식 대신 한적한 호텔로 온 작가
<호텔 뒤락>의 주인공인 서른아홉 살 이디스 호프는 로맨스 소설 작가로 꽤 성공했다. 부인이 있는 데이비드에게 마음을 빼앗긴 그녀는 그에게 미련이 남아 있음에도 놓치면 안 된다는 친구의 부추김에 제프리와 결혼을 결심한다. 하지만 결혼식 날 차를 돌려 식장에 가지 않았고, 피신하다시피 호텔 뒤락으로 온다.
사람들과 부딪치고 싶지 않던 이디스는 휴가철이 지나 투숙객이 별로 없는 호텔 뒤락에서 마음을 정리하며 글을 쓰려 했지만 어쩔 수 없이 관계 속으로 빠져든다.
호텔 뒤락에는 4명의 여성이 묵고 있다. 1) 엄청난 자산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남편 덕에 쇼핑을 즐기며 최고급으로만 치장하는 퓨지 부인과 2)엄마에게 철저히 예속되어 있는 딸 제니퍼. 그녀는 수십 년간 이용한 덕에 호텔 뒤락에서 VIP 대접을 받고 있다.
3)또 다른 여성인 보뇌이유 부인이 호텔 뒤락에 묵는 이유는 서글프기 그지없다. 아내가 어머니와 한집에 사는 걸 껄끄러워하자 아들이 유배 아닌 유배를 보냈기 때문. 보뇌이유 부인은 호텔이 문을 닫는 겨울이면 시설이 형편없는 종교시설의 펜션으로 가야 한다.
4) 마지막으로 ‘키키’라는 강아지를 항상 안고 다니는 모니카. 키키에게 음식을 먹이고 커피와 케이크를 조금씩 먹는 거식증 환자다. 남편이 잘 먹고 잘 쉬라며 그녀를 요양차 호텔로 보냈지만 깡마른 몸으로 강아지 키키에게 애정을 쏟는다.
이디스는 작가답게 투숙객들과의 대화를 통해 금방 모든 걸 파악하지만, 속내는 드러내지 않는다. 자신에게 도취되어 남의 사정에 관심 없는 투숙객들은 그녀를 만만하게 보고 두런두런 얘기하며 심심함을 달랜다. 이디스는 그들을 통해 결혼에 대해 다양한 생각을 하게 된다. 이디스가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는 내용은 데이비드에게 쓰는 편지에 담겨 있다. 이는 애니타 브루크너가 서간체를 통해 이디스의 마음을 알리려는 장치이면서 소설 속 이디스의 어리석음과 한심함을 드러내는 장면이기도 하다
.현명한 결정과 현실 사이
데이비드에게 부치지 못하는 편지를 쓰지만 이디스는 로맨스 소설을 발표한 명민한 작가다. 실제로 독신인 애니타 브루크너의 일상이 이디스에게 투영되어 작가의 일상과 창작자만이 할 수 있는 고민이 소설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래서인지 ‘한심한 캐릭터’ 이디스는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 어디선가 만난 적 있는 듯한 인물인 이디스에게 빠져들다 보면 소설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호텔 뒤락에 묵고 있는 유능한 사업가 네빌은 이디스와 몇 차례 마주친 적이 있다. 이디스의 심리 상태를 정확히 꿰뚫은 그가 함께 타고 나간 배에서 느닷없이 청혼한다. 네빌이 “서로를 속박하지 않으면서 서로에게 안정을 안겨줄 이상적인 결혼”을 제안할 때 이디스는 데이비드에게 작별 편지를 보내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인생사가 계획대로 안 되듯 <호텔 뒤락>에서도 마지막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이제 돌아가야 하는 이디스, 짧은 기간 세 남자에게 상처를 받기도 주기도 한 그녀 앞에 어떤 일상이 기다리고 있을까. 소설 속에 몇 차례 거론되는 ‘버지니아 울프’와 이디스, 이디스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 이디스의 아리송한 결정들이 계속 머릿속을 오가며 여러 생각을 불러온다.
‘현대 영문학의 제인 오스틴’이라 평가받는 애니타 브루크너는 1928년 유대계 폴란드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53세라는 늦은 나이에 첫 소설을 발표했을 때 브루크너는 이미 미술사학자로 명망이 높았다. 유학시절을 제외하고 태어나 줄곧 런던에서 살았지만 늘 스스로를 이방인이라 여겼고, ‘남의 눈에 띄지 않기를’ 열망해 평생 미혼으로 은둔자적인 생활을 했다. 폐쇄적인 생활은 오히려 삶의 모든 파편들을 정제해 순수한 상태로 작품에 담는 역설을 낳았다. 브루크너는 자신이 경험한 세계, 삶에 대한 통찰과 미제의 물음들을 자신의 대리인격인 여성 화자가 등장하는 소설로 실체화했다. 1984년 발표한 네번째 작품 『호텔 뒤락』에는 이러한 작품성향이 가장 매혹적으로 드러난다. 특히나 이 작품은 ‘2인치 상아’에 ‘섬세한 붓’으로 그림을 그린 듯한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 비견되어 ‘18세기 소설의 전범’이라는 평으로 브루크너에게 그해 부커상을 안겨주었다.
『호텔 뒤락』에서 작가는 필명으로 로맨스 소설을 쓰는 주인공 이디스 호프를 통해 부모와 자식, 남자와 여자, 여자와 여자 간 관계망을 예리하게 살핀다. 이를 바탕으로 실존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사회적 일과 정서적 안정을 제공하는 결혼이 왜 여성에게는 여전히 양립될 수 없는지를 묻고 이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한다. 소박한 가정생활의 즐거움을 꿈꾸던 이디스는 모두가 그녀에게는 과분한 남편감이라고 평가한 제프리와의 결혼식 당일, 충동적으로 하객들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이 사건으로 얼마간 유배생활을 하며 반성과 참회를 하도록 호숫가에 위치한 휴양지 호텔인 ‘호텔 뒤락’으로 떠밀려오게 된다. 이 호텔에 머물며 이디스는 자의든 타의든 유배된 일단의 여자들을 만나 여성성과 결혼이 내포하는 여러 질문들과 마주하게 된다.가정이라는 울타리에서 내쳐져 ‘집’도 아니고 ‘방’도 아닌 호텔이라는 차용된 공간에서 유예된 주변적 삶을 사는 여성들을 통해 이디스는 ‘결혼해 아이를 낳은 여자는 정상이고 그렇지 않은 여자는 비정상’이라는 ‘사회가 허용하는 여자’라는 오래된 담론을 직시한다.
이 소설의 마지막은 일과 결혼 사이 양가적 딜레마에 처한 이디스의 능동적 선택을 보여준다. 전보의 내용을 ‘집으로 감’에서 ‘돌아감’으로 고치는 행위는 이디스가 이제 더는 집으로 함축되는 결혼과 안정에 연연치 않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언제나 수정이 가능한 글쓰기(썼다가 지우고 다시 쓸 수 있는 능력을 지님으로써 살아보지 않은 삶을 계속 수정하며 살아보는 정체성을 획득한다)를 자신의 몫으로 하겠다는 다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