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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창설자편(10) : 샤를르 드 푸코(복자)
20세기 초반에
이슬람 종교권인 중동지역, 그 중에서도 가장 혹독한 기후조건을 가진 사하라 사막에서 복음을 전파하다 피살돼 「사막의 성자」로 알려진 프랑스
출신의 샤를르 드 푸코 (1858~1916) 신부. 엘 골레아(El Golea)에 있는 그의 무덤 묘비에 적혀있는 구절은 그의 삶을 한마디로 대변해 주기에 충분하다. 「나는 일생동안 복음을 외쳐댔다」 칼(Karl) 형제로 불리기 좋아했다는 그는 무신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보다 깊이 그리스도교적 믿음과 삶의 원천에 접근하면서 실현하려고 애썼던, 예수께서 나자렛에서 살으셨던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글자 그대로 살아가려 노력했던 인물이다. 무엇보다 그는 종교에 대한 무관심과 적대감이 팽배해 가던 시대 상황안에서 자신의 삶과 영성으로 새로운 통찰들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당시 교회가 산업화로 부상한 노동자 계층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못하고 또 가난한 농민들에 대해 적절한 종교 교육을 실천하지 못해 이들이 점차 교회로부터 멀어져 가는 환경에서 『복음서의 가난을 실천해 나가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가난한 교회가 되어 가난한 도구들로 그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새로운 힘을 낼 수 있고 그들이 납득하게 지당하게 받아들이게 된다』고 주장했고, 평신도들이 교회 안에 중요한 위치에 있으며 선교를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새롭게 발견해 냈다. 또 말로서 복음을 전하는 것 보다는 생활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사람들이 책이나 말을 통하지 않고도 믿는 이들의 삶을 바라보기만 해도 복음을 알 수 있도록 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샤를르 드 푸코가 나자렛 예수의 삶을 살고자 회심하게 된 데는 한편 여러 과정이 필요했다. 1858년 9월 15일 프랑스 스트라스부르그에서 태어난 샤를르 드 푸코는 5세때 부모를 잃고 외조부모 댁에서 자랐는데 독실한 신앙을 지녔던 외조부모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종교생활을 하면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니던 학교 및 주변 여건의 영향으로 첫 영성체 후 종교적 무관심주의와 불가지론에 빠져들었고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쌩 시르에 있는 육군사관학교를 다녔는데 졸업시험에서 동기생 중 최하위 성적을 기록할 만큼 공부도 잘 해내지 못했다. 사관생도 장교로 살때는 그에 걸맞는 품위를 지키지 못해 가족들에게도 외면을 당했고 친구들에게는 「플레이 보이」라는 의미의 「돼지같은 녀석」이라는 말을 들었다. 물려받은 재산을 쾌락을 누리는 데 탕진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이런 가운데 푸코는 알제리로 파견을 받았고 이때 매춘부 미미를 자신의 아내라 속이고 함께 데려가는 무모함을 저질렀다. 그러한 나태함과 무질서한 생활, 또 무능한 지휘 능력은 그를 결국 파면의 길로 몰고 갔다. 군대를 떠난 후 푸코는 이전과는 다른, 새롭게 자신의 모습을 추스르는 계기를 맞게 된다. 자신의 옛 부대가 알제리에서 전투에 휘말렸다는 소식을 들은 푸코는 다시 군에 입대, 반란을 제압하게 되는데 이것은 느슨했던 삶을 새롭게 일으키는 기회가 됐고 군대와 가족으로부터 새롭게 인정을 받는 결과를 갖게 했다. 1883년부터 1884년까지 푸코는 유럽 사람으로서는 첫 번째로 아르메니아의 유대인 옷을 입은 채 모로코로 탐사 여행을 떠났다. 「모로코 탐험기」는 이때 나온 것이다. 당시 모로코는 유럽인들의 출입이 금지된 상황이어서 그의 시도는 큰 관심을 모았고 파리의 지리학회는 금메달을 수여하기도 했다. 이후 이슬람 사람들의 종교적 열성을 경험했던 푸코는 특히 사촌 누이 마리(Marie)의 신앙적 영향으로 회심의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후에 마담 드 봉디(Mme de Bondy)가 된 마리는 푸코가 난봉꾼으로 온 가족의 외면을 받던 시절에도 관계를 지속한 인물로서 그의 일생에 어머니와 같은 친구이자 영적 동반자 역할을 했다. 『만약 당신이 계신다면 저로 하여금 당신을 알게 해주십시오』 하느님께 대한 질문을 새롭게 던지기 시작한 푸코는 마리의 소개로 당시의 저명한 영적 지도자 위벨렝 아빠스를 만나게 됐고 1886년 10월 어느날 그에게 고해성사를 보게된다. 아빠스는 성사 후 성체를 모시도록 권했고 푸코는 이를 통해 새로운 신앙의 전환점을 찾았다. 『나는 하느님께 대해 믿음을 갖자마자 하느님을 위해서 사는 것 말고는 다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나의 수도 생활은 나의 믿음을 다시 회복하는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마침내 푸코는 위벨렝 아빠스의 추천으로 네제(Neiges)에 있는 노틀담 트라피스트 수도회에 입회했다. 「단순한 삶과 가난한 삶」에 대한 열망을 지닌 채, 낮은 자로 세상에 오시어 인간이 되었다가 배반당하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하느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게 된 것이었다. |
<옮김>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