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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히트1세 |
루돌프3세 |
(단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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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1세 |
프리드리히 |
(단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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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폴드1세 |
(단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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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히트2세 |
루돌프4세 |
(단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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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2세 |
(단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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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히트3세 |
알프레히트4세 |
알프레히트2세 |
라디슬라우 |
(단절) | ||
레오폴드3세 |
빌헬름1세 |
(단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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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폴드4세 |
(단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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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1세 |
프리드리히3세 |
막시밀리안1세 |
필립 | |||
알프레히트6세 |
(단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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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4세 |
시기시문트 |
(단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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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
(단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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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1세 |
프리드리히2세 |
(단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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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폴드2세 |
(단절) |
알프레히트 3세는 형제간에 영지가 자꾸 분할되자 친족들을 살해합니다.
특히 막내 오토1세의 두 아들을 독살시켜 대를 단절시키고 받은 영지는 자신의 아들에게 줍니다.
그 덕분에 알프레히트 2세는 황제의 사위가 되네요... 왜? 영지가 많은 귀족이니까...
가만히 들여다보면 가문원들 줄이는데(암살과 독살 등등) 1등 공신은 아마 가문의 종가일 껍니다. 방계를 없애어서 종가로 영지를 집중시키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또 자신은 자식 많이 낳아서 또 분할시키고...
어쩌면 분할균분상속이라 고대 게르만의 상속 제도를 고치지 않는 한 단절되는 가계는 부지기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저런 암살과 독살 덕분에... 알프레히트 2세 가계가 종가가 됩니다. 그 덕분에 장남 알프레히트 3세는 오스트리아 공작을 독차지하고 차남 레오폴드 3세는 슈타이어마르크 및 카린티어 공작 그리고 티롤 백작이 됩니다. 많은 가지들이 하나의 줄기로 모아지는 겁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주력으로 차지하려고 공들인 지방은 바로 보헤미아왕 헝가리 왕국이었습니다. 이 두 왕국은 몽골의 침공과 십자군 원정으로 엄청난 출혈이 있었던 터라 왕가의 힘이 약체화되고 있었죠. 더구나 전통 왕조가 자손이 없어 단절되고 있었습니다. 결혼을 통해 외손자들이 왕위를 차지하고 있어 황제를 배출하여 위상이 높아진 합스부르크 가문은 어떻게 해서든 통혼으로 영토를 차지하고 싶어 했죠. 거국적으로 먹는 것이 남는 장사...
알프레히트 1세가 부친 루돌프 1세를 이어 황제가 되었을 때 가장 먼저 자신의 장남 루돌프 3세를 프랑스의 공주에게 보냈다가 폴란드 공주에게 장가보냅니다. 자식을 얻지 못하고 시도는 끝나버리지만 왕국 단위로 먹고 싶어합니다. 즉 안정된 가문의 힘을 바탕으로 장남을 정략결혼 시키는 겁니다. 후손 알프레히트 4세도 이 방법을 또 사용하죠. 가문이 안정되게 오스트리아를 통치하고 있으니 다음은 국가 삼키기... 장남 알프레히트(Albrecht II of Germany, 1397-1439)를 헝가리와 보헤미아 왕이자 신성로마황제인 시기스문트(Sigismund, 룩셈부르크 가문)의 외동딸과 결혼시킵니다. 이 결혼에서 1남 3녀가 태어납니다. 알프레히트는 장인의 후광으로 다시 독일 왕관(King of Germany)을 차지합니다. 만쉐~ 알프레히트 1세의 죽음으로 내쫓긴 왕관에 다시 도전... 이제 우리 가문의 중흥이다!!!
알프레히트 2세는 결혼 한 방에 독일왕이자 보헤미아왕, 크로아티아왕을 겸합니다. 그리하여 오스트리아를 공작령에서 대공작령으로 승격시키죠. 왕위 3개를 받쳐주는 오스트리아야말로 공작 중의 공작이니... 대공작이다!!!
지하의 바벤베르크가 통곡 중...
그렇지만 세상은 호락호락 하지 않다고 이미 말씀을... 알프레히트 2세는 딸만 3명이 있을 뿐 아직 아들이 태어나질 않습니다. 아들이 태어나야 황제를... 그러나... 1439년 10월 그 많은 영토를 두고 저 세상으로... 당시 왕비는 임신 중이었죠. 결국 독일왕관은 사촌인 프리드리히 3세(Frederick III, 1415-1493)에게 넘겨줍니다. 딴 넘에게 주는 것보다 사촌에게...
이 사촌 프리드리히는 별명 ‘the Peaceful’에서 보듯 상당히 너그럽고 조용한 인품을 가졌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무난한 성격... 알프레히트 2세가 겨우 결혼으로 차지한 독일왕관 이외의 왕좌는 폴란드왕 블라디슬라우 1세에게 도전 받지만 놀라웁게도 1440년 2월 임신했던 왕비가 왕자를 낳습니다.
그의 이름은 라디슬라우... 잠시 상실한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왕관을 태어나자마자 돌려받습니다.
다시 합스부르크 가문이 중흥하는 듯이 보이지만... 이 유복자 왕은 17세 일기로 사망...
결국 합스부르크 가문은 독일 왕위만 확보하고 결혼을 통한 동유럽 정벅(?)은 잠시 막을 내리죠.
아들을 달란 말이야~ 아들...
이제 남계 단절로 모든 합스부르크의 영지를 받은 행운아는 오스트리아공작으로는 프리드리히 5세, 독일왕으로는 프리드리히 4세 그리고 1452년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되면서 프리드리히 3세가 됩니다. 그의 성격은 어느 타인보다 무난했지만 그가 추진한 정책은 아주 대담했죠. 가문원들이 모두 자신보다 앞서 죽어나갈 때... 모든 영지들을 주워 모은 그는...
대담하게도 부르군디공작 샤를(이 공작의 칭호가 대담공인데 말입니다)에게 외동딸을 황제의 외아들에게 내놓으라고 강요합니다. 안 그러면 전쟁이야 전쟁... 한번 제국이랑 붙을래...? 공국 주제에 제국이랑 맞짱...?
며느리 데리고 오는 방법까지 대담했던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결혼도 상당히 대담하게 합니다. 조용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는 말이 딱... 여기에 어울리죠.
그는 아주 먼 곳에서 아내를 데리고 옵니다. 지참금 때문에... 티롤의 가난한 백작령에서 태어났던 프리드리히는 알프스 깡촌에 익숙해 있었죠. 아침은 오트밀 한 그릇에 만족... 살림을 아껴야 된다는 모토는 검박하기 짝이 없었다는...
마침 포르투갈 왕에게 적령기의 딸이 있는데 상당한 지참금이 걸려있단 지인의 소리에 번뜩... 공주의 이름은 엘레오노어(1434-1467)로 자신보다 19살이나 어린 여성이었죠. 지참금이 한 가득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데리고 옵니다. 시집 온 공주는 경악... 도대체 공작급이라는 집안 꼬라지가 이게 뭔가...? 따듯한 대서양의 햇살은 고사하고 알프스의 눈덩어리... 한가득...
프리드리히는 9살에 아버지로부터 티롤 백작령을 물려받습니다. 어려서 근검절약해야 살 수 있다는 경험상... 물론 다른 친족들이 먼저 죽어줘서 영지를 하나씩 받을 수 있었죠. 사촌님의 죽음은 나의 행복... 1455년 장남 크리스토퍼, 차남 막시밀리안, 삼녀 헬레나, 사녀 쿠니군데, 오남 요한이 차례대로 태어납니다. 그 와중에 사촌님이 먼저 죽어줘서 갑작스럽게 독일왕까지 되죠. 이 얼마나 성공된 인생인가... 물론 자신의 자식들도 막시밀리안과 쿠니군데 빼고는 어른이 되지 못하죠. 어쩌면 아침식사로는 오트밀, 알프스 아래 햇살 부족으로 인한 영양실조인지 허약체질인지... 정확한 원인은 모르지만 다 유아사망 합니다.
왕비님도 1467년 34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는데... 프리드리히는 재혼은 안하고 그냥 아들 막시밀리안 하나 바라보며 1493년에 77세의 여생을 마칩니다. 다산의 자식들은 또 영지를 분할시키겠지요... 겨우 오래 버텨서 영지를 하나로 모았는데...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 1459-1519)은 차남으로 태어났지만 형님이 유아사망하는 덕에 외아들로 남아 합스부르크의 모든 영지를 물려받습니다. 왜냐... 아무도 없으니까...
프리드리히 3세 부부의 초상화... 황후가 확실히 젊군요...
막시밀리안이라는 이름은 그리스 출신의 성인 이름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어쩐지 게르만적인 이름은 아니더라... 하시겠죠.
아마도 포르투갈 왕녀 출신의 어머니가 상당히 지적인 여성이었다는 반증이 아닐런지...
옛날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연대기를 읽은 적이 있는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엘레오노라 관련 이야기는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수전노인 황제와 맞서 아이들을 튼튼하게 키우려고 했는데 오트밀 한 그릇이면 족하다는 황제의 고집에 자주 다투었다는 이야기... 결국 살아남은 자식이 1남 1녀라는 사실... 영지가 많으면 뭐해... 자식 입까지 굶기는 통에...
뭐 이런 저만의 생각을 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납니다.
그의 후손들은 검소하게 살았던 선조의 덕은 잊고 화려하게 그리고 호사스럽게 놀았겠죠... 뭐...
막시밀리안은 황제였던 아버지의 대담한 정책(?) 덕분에 중부 유럽에서 가장 많은 영지를 가진 여성과 결혼합니다. 물론 그는 이 여인과 한평생 산 것은 아닙니다. 3번에 걸친 결혼을 했지만 자식은 이 여인에게만 얻어서 결국 외동아들이 상속하는 셈이 되지만요.
마리아(Mary of Burgundy, 1457-1482)는 샤를(Charles the Bold)과 이사벨(Isabella of Bourbon)의 외동딸로 태어났고 그녀와 결혼하는 남자는... 그야말로 대박 인생을 살게 되었죠.
원래 부르군디 공작 가문은 카페 가문의 분가로 역사가 300여년 넘게 지속되어 왔습니다. 고조부 필립부터 결혼을 통해 플랑드르 지역의 백작령들을 지참금으로 받아들였죠. 즉 증조모 마가레트(House of Dampierre의 마지막 상속녀, 이 가문도 원래 결혼으로 대박 터트림)가 중부 프랑스 영지랑 플랑드르 지방의 영지를 가지고 시집왔고 조모가 룩셈부르크 인근의 영지를 왕창 들고 시집왔죠. 조모는 포르투갈 왕실 출신인데 잉글랜드의 랭카스터 공작 가문을 외가로 둬서 왕위계승권 확보... 어머니는 부르군디 공작의 외손녀이자 부르봉 공작의 딸이라서 또 카페 가문의 분가 출신...
아무튼 이 여성의 혈통은 합스부르크 출신의 남편 보다 더 화려함을 자랑했습니다... 진짜 황제빨만 아니면 그리고 외가로 포르투갈 왕가를 두지 않았더라면 이 결혼은 어려웠을 지 모릅니다. 결혼의 가장 중요한 근본 이유는 프랑스가 이 여인을 통해 독립 공국인 부르군디를 합병시킬 근거를 제공하지 않아야한다는 문제가 더 문제... 플랑드르 지방의 상인들은 프랑스왕의 지배를 거부했죠. 백년전쟁도 이런 거부의 연속 선상이었지만... 이걸 프리드리히는 알고 협박...
내 아들에게 오면 좋아~ 독일이란 큰 시장을 갖고 싶지...? 안그래...? 플랑드르의 양모 상인들이여...
막시밀리안과 마리아의 결혼은 훗날 ‘결혼만 잘하면 만사 OK'이라는 이상한 명언을 만들어냈다고들 하지만... 결혼을 통해 국가를 거국적으로 얻은 사례는 수 없이 많습니다. 결혼도 결혼이지만 국력이 받쳐줘야 획득 영토를 유지를 하는데... 합스부르크의 가문원들이 이 유지에 달인이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16세기에 획득하여 20세기까지 유지했기 때문에 대단하다고 평가를 받는 겁니다. 오늘날까지 가문을 유지했기 때문에 전설이 못되고 역사가 되었죠... 아마 류리코비치 가문이 20세기까지 유지되었다면 그야 말로 전설과 역사가 하나로 뒤엉켰을 겁니다. 이게 아깝죠... 로마노프 가문은 그야말로 빈껍데기...
합스부르크가 결혼에 의해 팽창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먼저 중세의 질서가 붕괴되어 근대국가의 성립이 꿈틀거리고 있던 전환기였습니다. 봉건제도의 폐쇄적 경제가 무너지고 자본과 무역 중심의 자본주의의 맹아가 확대된 시장을 갖추길 원했죠. 이때 등장한 것이 근대국가 형태... 즉 장자세습을 통한 하나의 거대 영지와 굳건한 왕권... 그리고 세습귀족을 억압하고도시의 시민을 우대해 세금을 왕창 걷어 상비군을 만들고 싶어하는 군주의 성향 등등이 맞아 떨어지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이라는 거대 가문이 등장하게 됩니다. 정치는 반드시 경제를 따라가지 정치가 경제를 앞서가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결국 한자동맹과 같은 도시 시민계급의 성정은 지역분할을 좋아하는 귀족들과 맞서 강력한 왕권이 거대한 시장을 만들어주길 바라는 경제적 염원에서 대제국이 건설됩니다. 이러한 상징성을 합스부르크 가문이 차지하게 되는 겁니다. 물론 부작용도 없지 않지요...
막시밀리안은 마리아가 낙마 중 사고로 25세로 사망하자 다시 재혼을 합니다. 이번에 획득하고자 한 영토는 브리타뉴 공작령이었죠. 프랑소아 2세(Francis II, Duke of Brittany)와 마가레트(Margaret of Foix) 사이의 살아남은 유일한 아이였던 앤(Anne of Brittany, 1477-1514)은 많은 약혼자들이 몰려들었죠. 18세 연상의 막시밀리안은 이 어린 공녀와 결혼해서 브리타뉴까지 얻고자 했습니다. 상속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합스부르크를 명품 가문으로 만든 두 사람... 막시밀리안과 마리아 초상
저의 생각인데요... 정말 ‘황제’라는 타이틀이 엄청 매력적인가 봅니다. 귀족 여성들에게는요. ‘황후’란 자리가 재혼에다가 후계자가 있으며 나이도 엄청 많은 단점도 그냥 커버... 앤도 막시밀리안의 재취 자리에 가겠다고 하네요... 참네...
이 결혼 소식에 난리 난 곳은 프랑스왕국... 이러다간 합스부르크 가문에 의해 둘러싸일 것이 분명... 죽어라 반대... 결국 앤도 카페 가문의 분가인지라 황후 자리 단념하고 왕후가 되기로 합니다. 그래서 3살 아래의 샤를(Charles VIII of France)에게 시집가면서 이 소동은 종결됩니다. 프랑스는 이 결혼으로 브리타뉴를 왕국의 일부로 편입시키죠.
휴... 다행... 안도의 한숨을 쉬는 카페 가문...
그나저나 이제 막시밀리안이 재혼 할 곳이 마땅치 않군요. 거국적으로 반대가 생기니...
막시밀리안의 삼혼은 상당히 상징적입니다. 북이탈리아의 시민계급에서 르네상스의 물결을 타고 승승장구한 스포르차 가문에서 황후를 구해옵니다. 이제 토지보단 돈...? 벌서 자본주의의 물결이 독일로...?
비앙카 스포르차(Bianca Maria Sforza, 1472-1510)는 13세 연상의 막시밀리안과 결혼해서 황후가 되었고 인스부르크에서 죽었는데 자식은 없었습니다. 그냥 황후를 배출한 스포르차의 영광을 나타내는 인물로 남죠. 비앙카의 아버지는 밀라노공작 갈레아쪼 스포르차 였고 어머니는 사보이 공작 가문 출신이었죠.
이제 막시밀리안의 죽음이 다가옵니다. 마리아가 2남 1녀를 낳았는데 막내 프랑소아는 유아사망을 해서 살아남은 자식은 필립과 마가레트 뿐이군요. 딸 마가레트를 프랑스 왕비로 만들려고 무진 애를 씁니다만...
프랑스가 거부하죠. 시러... 절대 시러... 죽어도 시러... 전쟁에 패해도 시러...
결국 프랑스는 포기하고 그럼 스페인을 통째로 먹기로 합니다. 황제빨에 안 넘어가는 가문 없지...
마가레트의 첫 남편은 후안(Juan, Prince of Asturias, 1478-1497)으로 아라곤왕 페르디난드(Ferdinand II of Aragon)와 카스틸라왕 이사벨(Isabella I of Castile)의 유일한 아들이었죠. 물론 누이가 몇 명 있었지만...
18세에 결혼해서 그 다음해 사망 신고서 내어버리는 남편 때문에 귀국합니다.
아~ 젠장... 이베리아 반도는 내 것이었거늘... 오빠에게 빼앗기다니...
아버지 막시밀리안은 급 당황... 엉? 딸이 과부... 그럼 이번에는 아들을 보내 왕창 얻자...
외손자 말고 친손자로 획득하면 되지 뭐... 좀 상당한 리스크는 있지만...
그리고 마가레트는 다시 사보이공작 필리베르트(Philibert II, Duke of Savoy)에게 시집갔지만 자식을 못 낳아서 다시 과부가 된 후 결국 네덜란드의 통치자로 만년을 살다 죽죠.
막시밀리안은 이베리아를 먹는데 약간 고민했을 껍니다.
왜냐면... 아들은 하나인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라는...
내 아들은 정말 미남이기로 유명한데... 제 정신이 아니다니...
외아들 필립(Philip I, the Handsome, 1478-1506)은 별명이 미남이었죠. 초상화를 보면 그다지...
아무튼 이제 이베리아의 계승자는 여성 뿐입니다.
장녀 요안나(Joanna of Castile, the Mad, 1479-1555)가 다음 여왕이 되는 건 분명합니다...
1496년 필립과 요안나가 결혼하면서 두 가문이 결합합니다. 요안나는 필립을 무지 사랑했는데 잘 생기고 다정하고...
필립은 여성들에겐 다 다정했다는 후문이... 그래서 요안나를 더 미치게 합니다.
당신은 내꺼야... 나만의 것... 딴 여자에게 눈낄 돌리지 마... 질투 질투 질투...
결혼 후 스트레스는 더욱 그녀를 미치게 했다는 소문입니다. 믿거나 말거나...
아무튼 결혼 생활 단 10년 동안 아이는 여섯이나 태어납니다. 그 자녀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다 왕과 왕비네...
1. 엘레아노르(Eleanor, 1498–1558) 2번 결혼해서 포르투갈 및 프랑스 왕비가 됨.
2, 카알(Charles, 1500–1558) 유명한 인물이죠... 나중에 따로 설명드림.
3, 이자벨(Isabella, 1501–1526), 덴마크와 노르웨이와 스웨덴을 겸한 왕의 왕비가 됨.
4. 페르디난드(Ferdinand I, 1503–1564) 오스트리아 옛 영지를 확보... 신롬제국 황제
5. 메리(Mary, 1505–1558) 헝가리와 보헤미아를 겸한 왕의 왕비가 됨.
6. 캐더린(Catherine, 1507–1578) 유복자로 출생... 포르투갈왕비가 됨.
아들 필립은 아버지 막시밀리안보다 먼저 죽습니다. 다행인건 아들을 두 명이나 낳아주었다는 사실...
요안나는 남편이 죽자 미친 병이 더 도저서 도저히 국정을 운영할 힘이 없었죠.
결국 장남 카알(카를로스)이 모든 실권을 장악합니다. 이제 그의 세상이 도래합니다.
필립과 요안나 부부의 초상화... 그는 정말 핸섬 하나요...?
카알 5세(Charles V, 1500-1558)...
일반인들은 그를 대단한 군주로 말하지만... 독일의 역사에선 그는 종교를 분열시켰고 독일 자체를 혼돈에 빠뜨려서 결국 30년 전쟁을 통해 민족과 국가를 황폐화시킨 원흉일 뿐입니다. 마지막 합스부르크의 분할은 고육지책에 불과했죠.
누군가 엄친아라고 하던데... 저의 개인 의견을 물어보신다면 No~!라고 대답합니다.
6세 때 아버지가 죽자 오늘날 네덜란드와 룩셈부르크 등등 엄청난 영지를 물려받고 1516년 외조부모의 사망으로 어머니가 카스틸라와 아라곤의 여왕이 되자 공동 통치자가 됩니다. 그리고 1519년 친조부가 죽어 오스트리아 공작령을 물려받고 1530년 드디어 신성로마황제가 되죠. 누구보다도 축복 받은 인생이었지만 그의 고집은 독일을 미궁 속으로...
카알 5세의 주요 관심은 오로지 이베리아 반도의 통일에 있었죠. 즉 포르투갈을 먹어서 통일하려는 야망이 모든 것을 우선했습니다. 이는 가족들의 결혼을 통해 잘 파악됩니다. 누이들 모조리 포르투갈 행... 자신도 포르투갈 왕녀 이자벨(Isabella of Portugal, 1503-1539)고 결혼하여 5명의 자녀를 얻습니다. 이러한 집착은 결국 근친 결혼으로 이어집니다.
왜냐... 포르투갈 왕실(당시 House of Aviz)도 버티는 능력이 만만치 않았거든요...
카알 5세의 치세 당시 가장 중요 현안은 먼저 외적으로는 오스만 투르크의 확장과 내적으로는 신교도들의 확대였습니다. 카알은 외적 방어에 소홀했죠. 엄청난 영토 중 오스트리아만이 오스만투르크와 인접했기 때문에 귀차니즘에 빠집니다. 자신의 관심은 오직 포르투갈...
결국 동생 페르디난트를 스페인 궁정에서 빈으로 파견합니다.
동생이 동쪽 영지를 좀 지켜라... 즉 독일문제를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죠.
자신은 네덜란드와 스페인만 오고갑니다. 간혹 이탈리아에 가서 놀지요... 교황이랑...
오스만투르크를 죽어라 방어한 당사자는 바로 동생 페르디난드(Ferdinand I, 1503-1564)였습니다.
그는 차남으로 태어나서 형님에 비해 빛을 발할 수 없었죠. 카알이 일찍 통치자 노릇한다고 네덜란드로 떠나자 홀아비였던 외조부 페르디난드가 외손주 페르디난드를 붙잡고 자신만의 교육을 시키는 통에 페르디난트는 완전히 ‘에스파니아인’ 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독일 내 제후들이 그를 좋아하지 않죠. 혈통은 독일인일지 몰라도... 내면부터 겉모습까지 완전히 ‘에스파니아인’ 이었으니까요. 그래도 페르디난드는 차남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엄청 노력했죠. 그리고 자신만의 영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공주 앤(Anne of Bohemia and Hungary)과 결혼해서 차기상속권을 확보합니다. 그리고 빈에 지속적으로 머무르면서 오스만의 진출을 방어해 나갑니다. 페르디난트의 활약은 형에 비해 역사에선 모습이 가려 있지만 빈을 잘 방어한 덕에 서유럽이 평온했죠.
카알 5세는 포르투갈 왕녀 사이에 펠리페 2세(Philip II of Spain, 1527-1598)를 얻습니다. 이 아들을 또 포르투갈 왕녀 마리아(Maria Manuela of Portugal)과 결혼시킵니다. 그녀의 족보를 보면 친할머니와 외할머니가 자매였고 그녀들은 남편 페리페의 친할머니와 또 자매였습니다. 이중 삼중 사촌지간끼리 왕위계승권 확보한다고 결혼시킨 카알 5세... 그러나 그 유명한 합스부르크의 주걱턱은 펠리페의 자손들인 소위 ‘스패니쉬 라인’에서 엄청 발달합니다. 오로지 포르투갈 하나 먹겠다고 저 난리... 결과는 입이 닫히지 않는 주걱턱...
펠리페 2세의 장남 카를로스(Carlos, Prince of Asturias)는 13세에 죽었는데 그 유명한 백치죠... 완전 근친혼의 완결판...
그렇다고 펠리페 2세가 정신을 차렸느냐고요...? 아뇨... 또 근친혼을 자행합니다.
사촌 막시밀리안 2세의 딸 안나(Anna of Austria, 1549-1580)와 결혼하죠. 엄밀히 말하면 5촌 조카입니다. 22세나 어린 조카딸을... 이건 완전 도둑 심뽀죠. 그러니 그 자손들이 단절 안 되겠습니까...? 이 결혼은 당시 펠리페가 네 번째 결혼으로 한 건데 세 번 결혼에 살아남은 자식은 없고 후손은 낳아야 되는데...
아버지 땜에 구교와 신교가 완전 분리... 종교가 다르면 신부를 내놓지 않습니다.
거기다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에 필적할 가문이 몇 없었죠. 프랑스는 등 돌렸고 사보이는 내부 사촌끼리 결혼...
그나마 바이에른은 쿠니군데의 후손들이라 가장 가까웠지만 적령기 신부감이 적었고...
북유럽의 여러 왕국들은 대부분이 신교도화... 동유럽 왕실은 자신의 가문이 다 먹어 마땅한 가문이 없고...
남유럽엔 더 마땅한 수준 가문과 신부도 없고...
결국 조카딸 데려다 왕비로 삼고 자식을 얻었으니 주걱턱이 발달할 수밖에... 사필귀정...
카알 5세는 신교도의 성장을 너무 무시했죠. 특히 루터와 같이 튀어나온 인물을 받아들이기는 커녕 교황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며 탄압을 자행합니다. 그러나 북부 독일의 제후들이 합스부르크 가문이 결혼을 통해 자신들의 영지만 불려 나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죠. 결국 베틴 가문과 같은 작센 공작이 앞장서서 황제에게 대항합니다.(이건 베틴 가문 소개 때 이야기 드렸으니 참조하세요) 카알은 자신의 치세 때 거대한 북부 독일 연방이 떨어져나가는 걸 목격합니다. 자신의 한계를 깨닫은 거죠. 결국 동생에게 이 문제를 떠넘깁니다. 난 몰라... 그냥 칩거... 죽을 때까지 무책임...
가문의 유산을 나누기로 결심한 카알은 자신의 외아들 펠리페에게는 눈앞에 통일을 앞둔 이베리아, 젖과 꿀이 흐르는 네덜란드 및 이탈리아를 물려줍니다. 그리고 동생에게는 오스만투르크나 잘 막으라고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랑 잘 싸워보라고 부르군디를 넘겨주죠. 이렇게 합스부르크 가문은 카알 5세 때 펠리페의 '스패니쉬 라인'과 페르디난드의 '오스트리쉬 라인'으로 분가됩니다.
합스부르크의 무한 확장을 지도로 나타낸 것인데... 정말 상세하군요~
펠리페 2세도 결혼을 통해 왕국을 넓혀나가고 싶어 합니다. 첫 결혼으로 포르투갈을 확보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결혼으로 잉글랜드를 먹기로 합니다. 그 유명한 메리(Mary I of England, 1516-1558)와 결혼하면서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왕을 겸하게 되죠. 그녀는 엄밀히 촌수로 따지면 아버지의 사촌누이... 즉 당고모였습니다. 헨리 8세 이후 신교로 개종한 잉글랜드르 구교의 나라로 다시 바꾸기 위해 이 결혼을 단행... 만일 메리가 아이를 낳았으면 네덜란드를 상속하기로 약정되었다고 합니다. 즉 펠리페의 장남은 스패인과 포르투갈을 차남은 잉글랜드와 네덜란드를 상속받는 셈이 됩니다. 이러한 야망은 달성되지 못하죠. 장남은 백치로 요절하고 메리 또한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으니까요. 특히 처제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하자 다시 펠리페는 도전합니다. 나와 결혼하면 네덜란드를 주겠다...
어쩌면 이 결혼이 성립했으며 잉글랜드엔 합스부르크 가문이 들어서고 네덜란드를 획득했을 겁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이 결혼을 거절하죠. 이설에 의하면 자신이 불임할 것을 예상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아버지가 매독으로 죽었고 언니도 불치병에 죽고 자신도 애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식이 생기지 않으니... 결혼해서 구교도를 끌여들이는 것 보단 신교도의 나라로 그냥 두는 것이 잉글랜드의 미래가 더 안전하다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당시 엘리자베스를 두고 프랑스와 스페인이 엄청 달아올랐다는 전설이... 한방에 왕국을... 그것도 잉글랜드...
아무튼 펠리페 2세는 무력으로 포르투갈을 점령... 왕이 됩니다만...
나중에 포르투갈은 왕실의 서자 후손을 내세워 독립합니다. 결국 이것도 저것도 다 상실... 주걱턱의 댓가치곤...
부르봉 가문만 좋은 일 시키는 일이 발생하죠. 뭐... 최후의 승자는 역시 카페 가문이군요... 흠~
그럼 페르디난드의 후손은 어떻게 되느냐구요...?
이 가문도 비실비실 버티다가 1740년 카알 6세의 죽음으로 남계는 완전히 단절됩니다.
이에 고종사촌 하나 물어다가 모계결혼을 단행... 결국 House of Habsburg-Lorraine을 새로 창시하죠.
결국 이 오스트리쉬 라인도 단절 되었다는 소리입니다.
페라디난드의 후손 '오스트리쉬 라인'이 소유했던 영토입니다.
중세의 가문 위주의 상속이 아니면 이런 형태의 국토를 확보하지 못하죠.
이게 '크루세이더 킹즈'가 내포하고 있는 가문 게임의 매력 입니다
이제부터는 저의 개인적 의견인데요...
크루세이더 킹즈의 시대가 종결될 무렵...
봉건제도는 거의 힘을 잃어버리고 교회의 힘도 약체화됩니다.
그 와중에 몸 보신 잘하고 영지 관리 잘한 가문이 뒷심으로 승천하게 됩니다.
합스부르크나 룩셈부르크 그리고 카페 같은 가문들이 이런 부류에 속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전래의 균분상속을 버릴 순 없지만... 가문원의 제거를 통해... 그리고 결혼을 통해 영지를 합쳐 나가는 겁니다.
십자군 원정으로 엄청 많은 수의 봉건 귀족가문이 빚에 눌려 영지를 팔거나... 가주가 전사함에 따라 가문이 단절되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합스부르크도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성장했죠. 특히 몽골침공이나 동로마제국이랑 가까워서 십자군의 영향이 컷던 동부 유럽의 여러 왕실의 타격은 가히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시실리는 카페 가문이, 폴란드는 훗날 바사 가문이 가로채고, 보헤미아와 헝가리는 처음 룩셈부르크가 가로챘다가 다시 합스부르크가 가로챕니다. 십자군 전쟁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국가들은 이래저래 교체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될 때 기회를 포착한 가문들이 결국 르네상스의 시대를 맞이하면서 오늘날 네임 밸류의 가문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제가 합스부르크 가문에 호감을 가지지 않는 이유는 너무 ‘가문의 확장’에만 전념한 나머지 시대의 흐름을 보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 결과 독일은 대항해시대에 참가하지 못하고 3류 국가로 전락... 즉 식민지를 갖지 못했죠.
신교와 구교의 대립이라는 역사의 흐름에선 가장 후진적인... 종교전쟁이 발목을 단단히 잡았거든요.
더구나 한 가문이 황제 자리를 독점하는 통에... 정치제도는 도로 후퇴하면서 독일 연방 자체의 발달은 엄청 늦어집니다.
결국 프랑스와 영국 만의 세계확장을 용인하는 꼴이 되었죠. 심지어 네덜란드도 식민지 개척하는 판에...
훗날 비스마르크가 독일 통일 과정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를 제외시킨 것은 어쩌면 혜안이었죠.
그들을 데리고는 발전이 없다 라는 사실을 절실히 통감했던 것입니다.
당시 독일 통일에 쌍수 들고 반대한 당사자가 바로 합스부르크 가문이었거든요.
민족국가의 출현은 그들에겐 엄청 불리한 조건이었죠. 다민족을 지향했던 그들... 지도 보시면 이해가 가실거에요.
오죽하면 나폴레옹이 신성로마제국을 해체시켜버렸겠습니까...? 제위 하나 들고 너무 설친다는 겁니다.
1차 대전의 발발도 합스부르크가 너무 남부 유럽에 야욕을 부리면서 발생한 것입니다.
민족국가가 대세였던 20세기 초의 시점에서...
아직도 여전히 중세적인 관념인 가문 위주의 통치를 하려다 보니 시대에 역행한 것이죠.
그 대표적인 것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입니다. 다른 나라들은 모두 민족 단위로 국가를 형성해 발전하는데...
유독 합스부르크 가문만이 기존의 영토들을 쥐고 각 민족들을 억압합니다. 결국 세계대전으로 터져버리는 거죠...
'빅토리아'나 '유로파' 같은 게임이 바로 유럽이 민족국가로 전환할 때 시스템을 구현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크루세이더 킹즈보다 더 어려울 겁니다. 정치 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 발전도 다 고려해야 되니까요.
결혼 한방에 다 차지하던 중세의 낙후된 시스템이 상상도 못할 수준으로 발전했다는 반증입니다.
전 이 게임들을 잘하진 못하지만... 플레이하다가 깜놀했습니다. 대단하다...역설사...
반대로 영국은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 왕을 영입하여 역행적인 통합을 이룹니다.
만일 잉글랜드 왕이 스코틀랜드를 차지했다면 분명 더 일찍 스코틀랜드는 독립국가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프랑스... 너무나도 한 가문이 독점하려는 야욕으로 가장 먼저 중앙집권을 이루었지만 그 결과는 더욱 놀랍죠.
카페 가문만이 전 프랑스 영토를 독점하려는 야욕은 프랑스혁명이라는 인류 역사상 놀라운 사건을 초래하죠.
게임을 접한 지가 몇 년인지 모르겠지만...
저의 회원 가입 연도가 아마 게임을 처음 접하게된 역사적인 해이군요. 한번 살펴봐야겠네요...
이 게임을 하면 할수록... 역사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어쩌면 서양사를 더욱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되지 않았겠는가 합니다.
또한 역사를 풍부하게 생각토록 도와주었던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여러분에게 한 면만을 강요하는 게 아닐까 생각도 듭니다. (그냥 소개 글로만 봐 주세요...ㅎㅎㅎ)
와... A4로 11장이 되네요... 가문의 역사 만큼이나 소개 글도 정말 길군요...
장문의 졸렬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왼쪽은 루돌프 1세의 합스부르크 백작 시절 문장이고
오른쪽은 카알 5세의 문장입니다.
오른쪽과 같은 문장 만든다고 몇 개의 가문이 단절되었을까요...?
한 사람이 독점한다고... 정말 수고했죠... ㅋㅋㅋ
첫댓글 크으 따끈한 글 잘 읽었습니다 ㅜㅜ 개인적으로 통치도 힘들 그 땅들을 유지했다는 것만으로도 카를 5세가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평은 사람마다 다르니까요.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가 없으면 그정도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의문도 갑니다. 아무튼 좋은글 감사합니다!
요즘 해주시는 가문 소개에 꽂혀서 올리신 모든 글 다 읽었습니다. 배경을 알고 게임을 하니, 이벤트 결정 하나에도 신중해지더군요. 제 가문은 소중하니깐요~
햐.. 너무 잘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사견이든 아니든 약간의 평가?로 글이 더 재밌네요
아 ㅋㅋ 요번편은 뭔가 재밌네요 ㅋㅋ 오트밀 한그릇이면 충분해 ㅋㅋㅋㅋ 안닫히는 턱주거리 ㅋㅋㅋ 잘보고갑니다.
합스부르크 무시무시하군요;;;;;
모범 크킹러ㅋㅋㅋ
한번 합스부르크로 결혼만으로 영토늘리기 해봐야겠네요
이야 ㅋㅋㅋㅋㅋ 정말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ㅋㅋ
프리드리히 3세는 사람은 좋았으나 친척물리치고 왕이된 헝가리왕 마차시 대왕에게 시달려 빈을 뜯기는 고생을 했고 카를5세경우 전영토를 아들에게 줄려고 했지만 그간 갖은 고생을 다한 페르디난트가 반발이 커서 형제우애가 파탄 났고요. 막시밀리안 1세는 말년에 오스만 상대로 전유럽국가의 단결을 모색하다 으앙 주금했죠. 간지 주걱턱대왕에 대한 변을 하자면 아무래도 뎌4기준으로 식민지와 네덜란드란 보물창고덕에 그나마 독일문제에 신경쓴거라 봅니다
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다민족 국가이고 민족국가가 아니었다는 걸 나쁘게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게 19세기말 20세기 초 약점이 되긴 했지만...
20세기를 넘어 21세기를 살고 있는 지금 민족을 넘어 다민족-다문화가 공존하는 세계에 대한 기대가 많으니까요.
당장 EU만 해도 유럽이라는 어떤 가상의 테두리 안에 다민족-다문화를 하나의 국가로 만들려는 시도이니...
다른 세력인 미국은 주도 세력이 있지만 다민족 국가이고...
막시밀리안 시대의 부르고뉴는 카페 방계가 아닙니다. 넓게 보면 그렇겠지만 카페-부르고뉴 공가는 단절되었고 그 대신 발루아 왕가의 장 2세(백년 전쟁에서 흑기사에게 쳐발린 그분 맞습니다)가 셋째 아들인 필리프(용감공 필리프. 마리의 고조부이자 용담공 샤를의 증조부)에게 단절된 카페-부르고뉴 가문을 대신해서 부르고뉴 공작령을 하사해서 새롭게 발루아-부르고뉴 공가가 들어섭니다. 발루아도 물론 카페의 방계라 아주 넓게 보면 발루이-부르고뉴도 카페의 핏줄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11세기의 카페-부르고뉴 가문이 계속 이어졌다는 설명은 분명한 오류입니다.
번외편으로 황제와 독일왕 로마왕,선제후들도 써주시면 안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