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랬겠지만 이 주제를 처음 들었을 땐 앞이 깜깜했다. 교수님께서 익숙한 낯설음이 대해 설명을 해주셔도 나의 이해도는 제자리걸음이었다. 익숙한 낯설음이 대체 뭘까. 챗지피티에게 물어보았다. 챗지피티는 익숙한 낯설음에 대한 예시로 '오랜만에 간 고향의 풍경이나 환경 등이 바뀌어서 너무 달라졌음을 보며 느끼는 익숙하지만 낯선 느낌' 등을 말해주었다. 나는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더 갑갑했다. 나는 익숙한 낯설음을 겪어보지 못한 건가.
철학에 관한 말들 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이 '철학은 인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이다.' 인 게 생각이 났다. '그래, 그럼 인지를 해야겠지?' 이 다음으로 튀어나온 생각이 '근데 뭘 인지해?' 였다. 아직도 제자리걸음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은 채로 학교를 가기 위해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나오자마자 어으, 소리가 절로 나오는 차가운 공기가 느껴졌다. 나는 더운 것보다 추운 것을 선호하는 편이지만, 옷 속을 파고들며 소름돋게 하는 차가움은 2년 전까지만 해도 그닥 선호하지 않는 추움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 '와 완전 작년 코시때랑 비슷하네!' 라는 생각을 하며 작년 11월, 한국시리즈를 보러 혼자서 서울에 갔던 날을 추억하며 걸었다.
캐리어를 챙겨서 아빠 차 트렁크에 옮겨놓은 뒤 평화로를 타고 공항까지 갔다. 아마도 인생에서 가장 설레었던 평화로였을 것이다. 짐을 쌀 때 서울은 무지막지하게 춥다는 소식을 듣곤 옷을 몇 벌을 챙겼는질 모른다. 이전까지는 차가운 공기를 맡을 때마다 어으, 소리를 내며 인상이 찌푸려지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라서 그런 걸까.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느껴지는 뼈를 찌르는 듯한 그 차가움이 설렘인지 긴장감인지 모를 낯선 감정을 느끼게 해주었다. 지하철을 타고 종합운동장역에서 내려 6번출구로 나왔을 때도 역시나 내가 싫어하던, 얼어죽을 것 같은 공기가 나를 맞이했지만 여전히 설레고 긴장되며, 낯설었다.
잠실구장 가장 높은 구역에서 무려 5시간 동안 찬바람을 얼굴에 정통으로 맞으면서 응원했다. 그런데도 정말 좋았다. 5시간 내내 칼날이 내 얼굴을 무자비하게 썰어버리는 것 같았던 그 매서운 찬바람조차 좋았다. 그리고 다음날, 너무나 당연히 몸살 감기에 걸렸다. 감기 덕분에 밖을 나가지 않아도 찬 공기가 24시간 내내 내 몸을 감싸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좋았다.
싫어했던 그 찬 공기가 나의 경험 하나, '오늘은 특별한 날이다' 라는 이 생각 하나 때문에 똑같고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다르고 낯설게 느껴지는 것. 그제서야 이게 익숙한 낯설음이구나 하며 감을 잡고 또다른 익숙한 낯설음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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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18살은 새로움으로 가득찬 한 해였다.
팬데믹으로 인해 온라인 수업이라는 것을 처음 해보았고, 다른 때보다 시간적 여유가 많았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인가 평소같지 않았던 내 몸의 상태를 제대로 확인해보기 위해 동네 병원에 갔다. 검사 결과, 종양이 발견되어 큰 병원으로 가서 진료를 받아야 할 것 같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엄마와 함께 한라병원으로 갔다. 평화로를 타고 병원으로 가는 길이 너무 불안하고 긴장되어서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병원에서 만난 담당의사는 '종양의 크기가 작은 편이 아니라서 약 복용만으로는 제거할 수 없고, 무조건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수술 날짜를 잡고 그 전까지 엄청나게 많은 검사들을 했다. 수많은 검사들의 결과는 '악성 종양은 아니다.' 라는 것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 생각하고 수술날까지 기다렸다.
수술날이 되었고, 짐을 싸서 병원으로 갔다. 긴장되긴 했지만 수술날짜가 한참 미뤄지는 바람에 처음 갔을 때보단 긴장도가 훅 떨어진 상태였다. 다행히 수술은 잘 끝났고 지옥같은 시간을 보낸 후 며칠 뒤 다음 진료 예약을 잡고 퇴원을 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 조직검사 결과를 듣기 위해 너무나 익숙하게 평화로 위를 달리며 병원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 생길 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태로.
재앙은 방심하는 때에 다가온다고 했었나. 아무런 불안감 없이 들어간 진료실에서 마주한 건 '조직검사를 했는데 악성세포가 발견되어 항암치료를 해야 할 것 같다.'라고 말하는 담당의사였다. 그 순간 긴장도가 훅 떨어졌던 병원이 다시금 긴장과 두려움의 장소로 변했다.
항암치료를 시작한 후 나에게 평화로는 지옥으로 가는 길 그 자체였다. 죽으러 가는 길 같았다. 두려움과 긴장감으로 1시간을 꽉 채운 채로 평화로 위를 달렸다.
2차 치료를 하러 갈 땐 우울함의 길이었고, 3차 치료를 하러 갈 땐 체념의 길이었고, 마지막 4차 치료를 하러 갈 땐 약간의 희망이 보이는 길이었다.
(나의 온 몸에서 약 냄새가 났었는데 그 냄새가 맡아질 때마다 속이 울렁거렸고, 정말 역겨웠다. 그 어떤 음식을 먹어도 약 냄새가 났고, 물을 마셔도 약 냄새+물 비린내가 났었다... 😅 게다가 코로나 유행 시기라 같은 병실 사람들이(환자, 간병인, 병문안 등) 손소독제를 자주 사용했기 때문에 하루종일 약 냄새+손소독제 냄새를 맡으며 지냈다. 달달하고 향이 오래 남는 인스턴트 커피 냄새를 맡으면 약 냄새도 안 났었고, 속이 울렁거리는 것도 덜 했다. 그때만큼은 그 종이컵이 거의 산소호흡기의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 또한 익숙한 낯설음.)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나는 제주관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가게 되었다. 그 학교를 다닐 땐 급행버스를 타고 다녔다. 학기 초엔 깨닫지 못했었는데 알고 보니 내가 18~19살에 항암치료를 받으러 한라병원으로 갔던 그 평화로로 달리는 버스였다. 하지만 내가 그때 느꼈던 평화로의 느낌과는 전혀 달랐다. 긴장감과 두려움은 전혀 없었고, 오로지 편안함과 귀찮음만이 느껴지는 길이었다. 심지어 버스 창밖의 풍경이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했다. 한 번은 실수로 정류장을 지나치는 바람에 한라병원 앞에서 내린 적이 있었다. 18~19살의 나였다면 병원 건물을 보기만 해도 그때의 고통이 느껴지고, 역겨웠겠지만 20살의 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냥 ‘오랜만이네. 어차피 몇 달 뒤에 또 와야겠지?’ 하는 생각만 들 뿐 그 외엔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수술로 인해 긴장감과 두려움으로 가득했던 병원이 집처럼 들락날락하며 익숙해지고 며칠간 입원하며 나름 편해진 장소가 되었지만, 항암치료로 인해 다시금 긴장감과 두려움으로 가득한 장소가 되고, 치료 말미에는 고통스럽고 역겨운 장소가 되었지만 20살의 나에게는 그저 ‘향후 몇 년간 정기적으로 가야 하는 곳’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게 되어버린 것.
18~19살에는 수술과 항암치료 때문에 두려움과 긴장감으로 가득 찬 채 달리는 평화로였지만, 치료가 다 끝난 후 20살에는 매일매일 평화로로 등하교를 하며 이젠 편안함과 귀찮음으로 가득 찬 도로가 되었고, 21살에는 내가 그토록 바라왔던 한국시리즈를 가기 위해 설렘과 행복함을 가득 안고 달리던 평화로가 된 것. 내가 겪어왔던 모든 것이 ‘익숙한 낯설음’ 이었다. 다만 내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 여기까지 생각을 해보니 어릴 적 소소한 경험들에서도 익숙한 낯설음을 찾아볼 수 있었다.
학기 도중 당연하게 가는 학교의 등굣길과 학교의 모습은 방학을 한 후 가는 학교의 모습과는 너무 다르다. 마냥 학교에 가기 싫은 마음 때문에 보이지도 않았던 학교 주변 풍경이 보이고, 학기 도중에는 밝고 꽉 차면서 시끌벅적했던 교실과 복도에서 느껴지는 한기와 텅 비어있는 공간은 너무나 상반되며 마치 다른 장소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평범하게 학교를 마치고 돌아가는 하굣길은 정말 신이 나고, 어쩔 땐 집 가는 길이 너무 길게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성적표가 나온 날의 하굣길은 긴장감으로 가득 찬 채로 걷기 시작하며, 집 가는 길이 너무 짧게 느껴져서 1분이라도 늦게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 똑같은 하굣길인데도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 익숙한 낯설음은 또 다른 때에도 느낄 수 있다.
몇 달 전에 동생과 보고 싶은 OTT 컨텐츠들이 많아져서 리스트를 정리하기 위해 휴대폰 메모장을 켰다. 제목에 <뭐 볼까ㅋㅋ> 라고 적은 뒤 동생과 함께 보고 싶은 컨텐츠들을 다 적었다.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쭉쭉 써내려갔다. 정말 재밌었다.
그리고는 며칠 전에 이 보고서의 틀을 잡기 위해 다시 한번 휴대폰 메모장을 켰고, 제목에 <익숙한 낯설음> 이라고 적었다. 너무 놀랍게도 제목을 적고 나서 10분간 단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 너무 막막하고 지루해져서 첫 날은 그 상태로 메모장을 꺼버렸다. 똑같은 휴대폰 메모장인데 제목을 다르게 적고, 메모를 하는 목적이 다를 뿐인데 아예 다른 느낌을 주는 어플이 되어버렸다.
이처럼 우리는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익숙한 낯설음을 경험하고 있지만 인지를 못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인지함’이란 정말 신기하다.
첫댓글 평화로는 관광객에게는 낯선 제주의 서쪽에 난 관광도로라는 의미를 가질 것입니다. 도민에게는 해안선을 따라 애월 등 제주 서편으로 뻗은 도로라는 의미를 가지겠지요. 그런데 고은지 학생에게 평화로는 치료를 받기 위해 한라병원을 다니던 길, 제주관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다니던 길, 코리안시리즈를 보기 위해 공항까지 가던 길 등과 같은 다양한 의미를 가집니다. 물리적인 길이지만, 그것을 통한 체험 때문에 전혀 다른 느낌과 의미의 길이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서 가치 객관적인 사물의 존재와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만일 그냥 길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리고 그것이 평화로라는 점을 기억해내지 못했다면, 세 개의 다른 기억을 가진 길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돌이켜보는 시간을 통해서 평화로의 의미가 포개지는 것이지요. 재미 있는 것은 사람마다 하나의 사물과 사건을 다르게 인식할 수도 있지만, 한 사람도 하나의 사물과 사건을 각각 다르게 인식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다른 것들이 포개질 때 그것의 보편적인 의미가 만들어지는 것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