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유경고등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나는 마음이 바빠진다.
앞으로 반경 30km 내에서 주유소를 찾지 못하면 그대로 이 사막같은
벌판에 갇힐 운명인 것이다.
공산주의자였던 아버지는 이순간 이렇게 말씀하실게 뻔했다.
"네가 할 수 없다고 느끼는 것에 대해 고민하지 마라."
내게 있어 아버지란 그다지 도움이 안되는 존재에 불과하였다.
마치 어느집에나 늘 있을법한 조악한 산수화처럼 내게 느껴질 뿐이다.
그가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나이가 먹으면 누구나 덧없이 지나간 세월에 보상을 받고 싶어 하니까.
'공산주의자'라는 말이 풍기는 위대창연함과 무게감을 그의 밋밋했던 삶에
어떤 식으로든 대입하고자 함으로써 그런대로 자기삶이 알록달록했노라
얘기하고 싶은 것이다.
이런! 내가 아버지 회상 따위를 할 때가 아니다. 아버지를 머리속에서
끌어내려 뒷자리에 앉히고, 나는 'E'에 거의 다가가 있는 바늘을 본다.
그리고 불안한 시선을 좌우로 살펴 주유소를 찾는다.
언덕 하나를 넘으니 멀리 주유소의 반짝반짝 빛나는 네온이 보인다.
다행이다. 어쨌든 사막을 빠져나갈 수 있으니 말이다. 기름도 넣으면서 맥주라
도 마셔야지.
가까이 다가가보니 기묘한 형태의 주유소다. 어느 주유소에나 있을법한
미터기 조차 없었다. 단지 길다란 호스 여러개가 천정으로부터 길게
늘어뜨려져 있다. 그리고 엉뚱하게도 그 호스 끝에는 갓난아기들이 사용하는
것과 똑같은 모양의 젖병이 매달려 있다.
"어서오십쇼. 저희 주유소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아이구, 종업원의 복장은 나를 경악케 한다. 종업원은 포르노 비디오에
나오는 여장남자처럼 반짝거리는 비닐소재의 속옷차림에 가터벨트를 착용하고
빨간 롱부츠를 신고 있다. 부츠사이로 허벅지 털이 새까맣게 보인다.
"가득 채워 드릴까요?"
뭐, 기름만 넣으면 돼지, 그까짓 종업원의 복장이 중요한가?
이른바 생존경쟁의 일환으로 주유소에도 세기말적 패션경향이 불어닥친
탓이겠거니 생각하고, 나는 가득 채워달라고 주문한다.
"네, 알겠습니다."
종업원은 여자라도 된듯이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면서 걸어가더니,
천정에 매달린 호스하나를 끌고 내차로 왔다. 그러더니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이렇게 말한다.
"손님, 입을 벌려주세요."
"뭐? 입을?"
"네, 손님의 입말입니다. 입을 벌려주세요."
"어쩌자고 나의 입을 벌리하고 그러는 거지? 설마 내 입에 기름을
쳐 넣을 수작은 아니겠지?"
"물론 아닙니다. 우리는 손님에게 절대 누를 끼치지 않습니다. 자, 어서
입을 벌리세요.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저 다른 손님들을 보세요.
지금 한창 주유중이죠. 다들 행복한 표정이지 않습니까?"
종업원은 교태섞인 웃음을 흘리며 호스끝을, 그러니까 젖병을 내 입에
물린다. 어, 이런, 도대체 무슨 일이 내게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제기랄, 될대로 되라. 난 언제나 이런 식이다.
찝질하고, 비린 액체가 입으로 흘러들어온다. 익숙한 맛이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어릴적 맛보았던 틀림없는 엄마의 젖맛이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안락하고 아늑하고 행복한 공기가 내몸 전체를 감싸안는다.
나는 어린 아기가 된듯이 마냥 즐겁다.
스물여덟해동안 내가 겪은 많은 상처의 흔적들과,
남극의 빙산처럼 녹을 줄 모르던 세상에 대한 어설픈 비아냥거림과,
침대의 온기만을 남겨두고 새벽바람처럼 사라진 그녀를 그리움과 아픔들과,
아버지의 비뚤어진 상(像)들이 서서히 사라져 간다.
오후3시의 오수같은 마음의 평정심.
더이상 외/롭/지/않/다는 생각이 온몸에 퍼진다.
"손님, 주유가 끝났습니다."
종업원의 복장은 어느새 그 괴기한 복장에서 단정한 작업복차림이 되어있다.
사물을 바라보는 왜곡되었던 시선을 이제 회복했다는 뜻임을 나는 깨달을 수
있다.
"돈을 내실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손님의 어두운 마음을 이미
지불받았으니까요. 세상을 살아갈 힘이 떨어져 갈 때, 우리 주유소는
사막 한가운데에서 손님을 기다릴겁니다. 그때까지 부디 안녕. "
"고마워, 안녕!"
나는 사막을 금새 빠져나와 푸른 풀로 덮혀있는 낮은 구릉을 지난다.
구름 한조각은 지평선위를 흘러가고, 시원한 바람은 내 겨드랑이를 스친다.
다시 찾은 삶의 의미는 어머니의 눈빛이 되어 내 삶을 길잡이한다.
아주 기묘하면서도 행복한 체험이다.
삶의 고단한 길을 걷고 있는 나의 친구들이여,
너희들도 언젠가 경험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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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2.20 0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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