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대학교/낯선철학하기/지리교육과/2021104054/김재현
익숙한 낯설움에 관하여
익숙한 낯설움이라는 것을 처음 접했을 때 정말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고등학교 때 고등학교 선생님께 받았던 책이 하나가 있다. 그것은 ‘지리학자의 인문여행’이었다. 책 도입부에서 언급하는 관점이 있다. 바로 ‘낯설게 보기’라는 관점이다. 이것은 주위에 익숙한 것들도 낯설게 자세히 들여다 보라는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접하고 ‘낯설게 보기’라는 관점을 내가 인생을 살면서 가끔씩 애용해 왔었다.
내가 이 관점을 가지고 가장 주의 깊게 보았던 것은 평생을 같이 살아오며 누구보다 가장 많이 보고 많은 시간을 보냈던 ‘엄마’이다. 나에게 엄마란 존재는 언제나 늙지 않고 평생 나와 살아갈 존재로 느껴졌다. 하지만 얼마 전 엄마와 오랜만에 같이 밥을 먹었다. 그날따라 유독 엄마가 외로워 보였다. 나보다 강하고 나보다 굳건하게 버텼었던 이미지가 아니라 차디찬 북극에서 혼자 살아가는 북극곰 같다고도 느꼈다. 손에 없던 주름도 못 본 새에 많이 늘었고 행주도 강하게 비틀어 물을 짜던 옛 모습은 없고 이제는 손목이 좋지 않아 삼다수 한 팩을 들지 못하는 세월이 찾아왔다. 항상 익숙하고 내가 알고 있던 엄마가 낯설게만 느껴졌다.
엄마는 나에게는 때로는 고민이 있으면 조용히 들어주는 상담사가 되어주었고 때로는 강하게 혼내며 훈장님과도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으며 때로는 장난을 치며 친구와 같은 존재로 기억되고 있다. 나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 낯설게 보인다니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이 순간을 계기로 나는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내가 엄마에게 관심을 가진 적이 없는지 아니면 나에게 수시로 보여주었지만 내가 무시했는지 등 다양한 측면을 생각해보았다. 모든 측면을 생각해 보았을 때 내가 엄마의 세월의 흔적을 몰랐던 이유는 익숙함이었던 것 같다. 매일 보는 친구의 변화를 알아차리는 것보다. 오랜만에 본 사람의 모습이 더욱 변화가 뚜렷하다. 엄마의 모습 또한 마찬가지이다. 항상 봐왔고 평생 같이 있을 존재로 느껴졌다. 하지만 엄마도 나이를 먹고 있다. 나도 나이를 먹고 있다. 그 변화를 알아차리기란 어렵지 않다. 조금의 관심만 있다면 주름이 생기고 어디가 아픈지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이처럼 익숙함이라는 핑계로 엄마를 무관심 속으로 나도 모르게 던져버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지 말자‘ 는 말이 있다. 익숙한 것이 소중한 것인지 모르고 잃고 나서 깨닫는 것이다.
앞에서 ’엄마‘라는 단어를 통해서 익숙한 낯설움에 대해서 말해보았다. 엄마라는 존재는 항상 내 옆을 지켜주는 존재이면서 가장 외로운 존재인 것 같다. 가정을 위해서 경제적인 활동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줄어드는 교류와 활동 시간이 맞지 않는 나와는 정말 보기 쉽지 않은 존재이다. 요즘 들어 엄마와의 교류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평생 내 옆을 지켜주는 존재가 아닌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이별이 찾아올 수도 있다. 그래서 ’있을 때 잘하자!’라는 말을 새기고 요즘 저녀식사를 가지는 시간을 많이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다. 외로운 존재로만 느껴지는 엄마의 옆을 지켜주고 채워줄 수 있는 건 김재현이라는 ‘아들’의 존재일 것이다. 그렇다고 나머지 가족들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나의 최선을 다하며 앞으로 효도를 행하며 살아갈 것이다. 익숙한 낯설움에 대해서 생각하며 엄마의 소중함을 들여다보며 부모에게 효를 행하는 유교의 가르침을 깨달으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첫댓글 철학하기가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기'에서 출발한다고 했지만, 실은 인문학은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는 데서 출발합니다. 가족, 특히 엄마는 '나를 낳고 보살펴주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로 한정되는 순간, 한 여자, 한 사람이라는 의미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역할에 엄마의 전존재가 수렴되어버리는 것이지요.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엄마도 나와 같은 시절이 있었을 것이고, 지금도 나처럼 바라는 것이 있고, 힘들게 느끼는 것이 있는 한 여자,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엄마의 소중함을 들여다보며 부모에게 효를 행하는 유교의 가르침"이라는 결론에 이르기 전에 엄마에 대한 공감이 선행되면 좋겠습니다. "엄마라면서 왜 이래?", "엄마가 이럴 수 있어?"라고 하는 것에서 벗어나려면 그 엄마가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점, 곧 엄마로만 규정될 수 없는 부분을 가진 존재라는 점에 공감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효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그 복잡한 정체성을 가진 존재에 대한 공감과 감사의 표시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