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막한 황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는 무엇을 찾으려 왔느냐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평생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
녹수 청산은 변함이 없건만
우리 인생은 나날이 변했다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평생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
이 노래의 가사는 원래의 것과는 많이 다르다. 세월의 부침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라 잃은 설움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슬픔은 여전하다.
‘이 풍진 세월’(희망가)이 우리나라 대중음악사의 여명이라면 ‘사의 찬미’는 이 땅에 음반 산업 시대의 본격적인 개막을 알리는 비극적인 팡파르였다. 어느 대중가요 평론가의 음악사적 평가이다.
염세주의적 탄식을 흠뻑 머금은 이 한 곡의 노래는 놀라운 선풍을 일으켰다. 유성기가 모두 2000대에 불과했던 당시 한반도의 시골구석까지 신드롬을 몰고 가며 레코드 산업의 기폭제가 되었던 것이다.
‘사의 찬미’는 그래서 2개월 뒤 단성사에서 개봉한 나운규의 항일 민족영화 ‘아리랑’과 쌍두마차를 이루며 1926년이 한국 대중문화 혹은 문화산업의 원년임을 선포했다.
이 노래의 대유행에는 그만한 사연이 있었다. 희대의 정사(情死)사건이 터진 것이었다. 식민지 시대의 최고 엘리트인 일본 유학파 남녀의 동반 자살이었다. 그것도 유부남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비관한 현해탄 밤바다 위의 투신이었다.
여자는 우리나라 최초의 소프라노 성악가인 윤심덕이고 남자는 목포 부호의 아들로 극작가 김우진이었다. 조선팔도를 강타한 충격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유명인이나 인기 스타의 스캔들과 정사는 센세이션 그 자체이다. 더구나 유교적인 윤리와 정서가 시퍼렇게 살아있던 1920년대의 정사가 아닌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대서특필과 기획연재로 희대의 사건은 대중의 지대한 관심을 모았다.
‘현해탄의 격랑 속에서 청춘 남녀의 정사-남자는 김우진, 여자는 윤심덕’ ‘극작가와 음악가가 한 떨기 꽃이 되어 세상 버려두고 끝없는 물나라로 가다’라는 제하의 기사는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며 한반도 인구에 회자되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비련, 사랑의 완성을 위한 죽음, 가난한 로맨티스트 성악가와 부유한 이상주의 극작가의 투신자살은 신파극 이상의 극적 효과를 연출했다.
‘장한몽’이 허구였다면 ‘사의 찬미’는 실제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윤심덕의 ‘사의 찬미’는 이렇게 가수가 죽은 후에 히트곡이 되었다. 유성기가 처음 들어온 일제강점기에 10만장이라는 기적적인 레코드 판매고를 기록한 것이다.
‘사의 찬미’는 번안곡이다. 루마니아 작곡가 이바노비치가 작곡한 ‘다뉴브강의 잔물결’이라는 관현악 왈츠곡에 윤심덕이 가사를 붙였다. 염세적이고 비극적인 세계관을 담은 것이다.
노랫말은 식민지 시대의 암울한 집단 정서를 건드리는 매혹적인 절망감이 짙게 스며있다. 자유로운 예술혼을 지녔던 한 신여성의 동반 자살을 앞둔 절망에 찬 육성이야말로 식민지 엘리트의 불행한 자화상이었다.
그 충격적인 스캔들과 한탄조의 노래가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한반도를 뒤흔들었다. 하지만 죽음의 센세이셔널리즘에 비해 예술적 완성도는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지적도 없지 않다.
자살했다는 명확한 증거도 없다. 두 남녀가 이탈리아에 살고 있다는 풍문도 나돌았다. 그만큼 사회적인 파장이 컸다는 반증일 것이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식민지 여성 엘리트의 에로틱한 희생제를 통해 한국의 대중음악사가 본격적으로 발진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도 ‘사의 찬미’는 진행형이다. 숱한 가수들이 다시 불렀고, 희곡과 영화와 뮤지컬과 드라마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조향래 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