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진상규명과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천주교 인천교구 단식기도회 - 5일째
+ 평화
7/3(금)은 단식기도회 5일차입니다.
단식기도소에는 여러 신부님들과 신자들, 인천시민들이 오셔서 단식 신부님들과 담소를 나누며 소통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세월호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점점 사그라들고 있지만, 잊지않고 기억하자고 함께한 사람들 모두가 다짐하며 기도회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후 6시에는 가톨릭회관 5층 대강당에서 11분의 사제 집전과 70여명의 수도자, 평신도가 참여한 가운데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이어서 오후 7시부터는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천주교 인천교구 세월호 유가족 간담회'를 진행하였습니다.
간담회에는 박성호(임마누엘) 학생의 어머니 정혜숙(세실리아)님, 오준영(스테파노) 학생의 어머니 임영애(아가다)님, 김다영 학생의 아버지 김현동님 3분의 유가족과 정의평화위원회 부위원장 황세현(레오나르도) 변호사, 민변 인천지부 대변인 윤대기(아타나시오) 변호사, 잼스토리미디어교육연구소 김덕석(라우렌시오) 소장으로 구성된 정의평화위원회 3명의 패널이 참여하고, 노동사목부 조대원(바르나바) 사무국장이 사회를 맡았습니다.
간담회를 통해 지난해 세월호 참사 이후 바뀐 것 없는 현실과 특별법과 시행령의 문제점, 사고 이후에도 제대로 세워지지 않고 있는 우리나라의 안전대책, 진실을 왜곡하고 외면하는 언론들에 대한 내용 발표와 함께 유가족들의 근황, 치유되지 않은 아픔 등을 나누고 연대를 이어가기 위한 희망의 불씨를 다시한번 일으키는 소중한 자리가 되었습니다.
집전: 김병상 몬시뇰, 한의열(주례), 김윤석, 김동건, 김일회, 오용호, 장동훈, 김영욱, 장세윤, 정현기, 마영남 신부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강론: 김동건 신부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다른 제자들을 향해 토마스 사도는 직접 예수님의 못자국을 보기 전까지는 믿지 못하겠다 하십니다. 부활한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란 어떤 모습이길래 다른 제자들은 믿는다 하지만 토마스 사도는 못 믿겠다 할까 궁금해집니다.
부활한 예수님을 믿는 것과 못 믿는 것 사이의 갈림길 사이에 서서 바라봅니다. 이 두 길은 사실 뒤를 돌아보면 하나의 길이였습니다. 단 뒤를 보지 않으면 다른 길처럼 보일 따름입니다. 하나의 길인 이유는 부활은 죽음의 자리에서 시작되었고 죽음의 자리는 고통의 십자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의 아들은 단순히 거룩하고 멋지기만한 신이 아닌 바로 죽음과 고통의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모두가 누리고 가지고 싶은 그 멋진 하늘의 자리는 행복하고 기쁘기만한 곳이기에 그렇게 행복하고 기쁘기만 해서 갈수 있는 곳이 아닌 죽음과 고통을 통해 행복과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런 하늘의 자리를 신의 아들은 보여주고 선택합니다. 어쩌면 그 고통과 죽음에 대한 선택이 예수님을 신의 자리로 올려주고 신의 아들이라 불리게 했을 것입니다.
종교가 신의 자리를 보여주는 그 모습 또한 그러합니다. 더 많은 이들의 행복과 기쁨과 평화를 빌지만 가장 고통스런 자리의 죽음과 억울함과 원통함을 거치지 않고는 가짜 신의 모습, 신의 아들의 흉내를 내는 거짓 신의 모습에 머무르고 맙니다.
지금 신의 아들의 못자국 즉, 고통의 흔적을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하는 토마스 사도는 이미 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토마스 사도는 바로 우리의 진짜 믿음 또한 예수님의 진짜 모습을 오히려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알려줌은 신에 대한 이야기일 뿐 신을 향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믿지 못함이 거짓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수 많은 순간 우리에게 다가온 고통과 죽음을 바라보고 뼈 속 깊이 느끼며 신에 대해 말합니다. “신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의 나의 고통을 들어줄 그 신은 무엇을 하는가?”
이 이야기는 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우린 이미 신을 찾고 있지만 신을 향해 있지는 못합니다. 그 끝없는 고통이 우리의 온 존재를 무너뜨리고 절망케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신은 그 자리에서 새롭게 창조됩니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고백 또한 역설적으로 인간이 신을 찾는 자리에서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필요한 것은 신을 향한 믿음이 아닌 오히려 인간의 고통에 대한 울부짖음입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처절함을, 인간의 지성과 조직과 관계의 무의미함과 거짓됨에 대한 체험을, 울부짖고 외치고 거짓이 거짓임을 부패와 탐욕과 위선이 난무하는 세상임을 부르짖고 외치는 예언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쩌면 이 세상의 더러움은 또 다른 예언자의 탄생을 예고하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자리에서 믿음과 신의 존재 또는 고통의 의미 따위 보다 더 깊은 곳에서 고통을 고통으로 받아들이고 그 고통을 만든 거짓에 대해 울부짖고 있는 것입니다. 거짓에 대한 울부짖음이 바로 의심을 버리는 과정이며 치유의 시작입니다. 울부짖음이 거짓을 없앤단 보증은 없지만 울부짖는 예언자는 신의 부르심으로 그 자리에 서게 되었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에 삶을 유지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신이 선택했던 그 고통에 자리에 서게 됩니다.
오늘 독서 말씀에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나는 교회의 시작도 이 고통의 자리에서 시작하게 됩니다. 고통의 자리를 통해 신을 만나고 신의 아들의 자리를 선택하게 된 이들은 하느님이 머무는 자리를 발견하고 함께하게 됩니다. 그들은 독서 말씀처럼 더 이상 외국인도 이방인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신의 아들이 바로 모통잇돌이십니다.
이 자리에서 우리는 신의 탄생과 부활에 대한 의심을 버리고 믿게 됩니다. 새로운 신의 창조이며 우리가 체험한 부활의 믿음입니다. 고통은 우리에게 하늘나라를 가르쳐줍니다. 그 학교에서 우리는 배우고 커가며 믿게 됩니다.
온 국민이 국민에 들어간 국, 즉 나라가 얼마나 부패하고 거짓되며 위선적인지 체험하게 된 사건이 세월호였습니다. 너무나도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 체험을 너무나 아깝고 귀한 이들의 희생을 치루고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 고통의 자리를 피하고 일상을 지속하고 싶은 것이 일상을 유지하고픈 이들의 심정이라면 오히려 이 고통의 자리를 통해 배우고 신을 만나는 것이 바로 신을 믿는 이들의 모습입니다. 민의 정신은 고통을 피하고 싶다하더라도 신의 정신은 고통을 떠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 시대와 사회의 정신 한 복판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 정신은 처절한 고통 가운데 이 시대와 사회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세월호의 고통에 대해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이 나라의 수장과 정치인들과 위정자들은 모른다 하고 민은 나의 일이 아니기만 바란다. 그러나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린 이미 알고 있습니다. 버릴 수 없음을, 그 귀한 목숨들을 살려낼 순 없지만 그 억울함은 풀어줘야 함을,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또한 함께 그 고통의 자리, 신의 아들의 자리로 뛰어들어 신을 만나야 함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