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클 세계 1위 기업 '우진프라스틱' 창업주 故 백남일과 후계자 백지숙
"1000가지 넘는 버클마다 특징살린 이름 붙여"
1950년 7월 역사가 시작됐다. 그 무더웠던 여름, 피란민 대열에 백남일(白南日·1939 ~2008)이 있었다. 전쟁은 그의 행로(行路)를 뒤바꿔 놓았다. 고향 황해도 신계면을 떠나는 그를 기다리는 것은 머슴살이였다.
옛 관재청 급사였던 그를 한 공무원이 눈여겨봤다. 그리곤 중년 여성에게 백남일을 소개했다. 그는 김성수(金性洙) 부통령의 부인이었다. 부인은 '똑똑하고 부지런하다'는 공무원의 칭찬이 사실이란 걸 금세 알아차렸다.
고단한 삶에도 볕은 든다. 그의 소개로 백남일은 중앙고에서 일하며 건국대 경영학과를 다녔다. 졸업 후 호남비료에 취직했다. 호비(湖肥)사장 김재규(金載圭)의 퇴임 당부는 이랬다고 한다. "자재과 일은 백군에게 맡겨…."
그 삶에 만족했다면 세계 1위 중소기업 우진(宇進)프라스틱은 없었을 것이다. 8년 만에 호비를 떠난 그는 공구(工具)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망했다. 집 장사를 하다 또 망했다. 그 뒤에도 서너 번을 더 망했다.
애써 마련한 2층 양옥집이었다. 장군들만 산다는 장위동 집에는 하루가 멀다고 빨간 딱지가 붙었다. 백남일은 다시 신광프라스틱에 취직했다. 아내와 네 딸 먹여 살리는 게 그때 그의 유일한 목표였다.
1979년 8월, 사장이 말했다. "우리가 소화 못하는 물량을 줄 테니 회사 차려!" 기나긴 터널 끝으로 빛이 보였다. '우주로 나아간다'는 우진, 나이 사십이 된 사내는 웅지(雄志)를 이 두 글자에 새겼다.
- ▲ 백지숙(왼쪽)과 지원이, 아버지가 평생을 일군 기업을 잇고 있다. 철부지 딸들 앞에는‘우진 프라스틱’이라는 이름을 세상에서 지우려는 일본과 중국 기업이 이빨을 드러내고 있다. 딸들은 그런 걸 아는지 모르는지“이마가 너무 넓게 나왔네. 이마가 넓어야 남편한테 좋다곤 하지만…”이라고 했다. ☞ 동영상 chosun.com / 최순호 기자choish@chosun.com
1979년 8월20일 장위동 다섯 평 공장에서 덜컹대는 소리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플라스틱 사출기(射出機) 2대와 직원 2명이 전부였다. 몇 달 안 가 위기가 찾아왔다. 애써 만들었는데 재료비 살 돈도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백남일은 실패의 원인을 곱씹어봤다. 잡탕식(雜湯式)으로 이것저것 제품을 만든 게 문제였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제부터 한우물만 파자!" 그가 파기로 한 '한우물'이 바로 배낭에 쓰이는 버클(buckle)이었다.
'아웃도어'라는 용어 자체가 생소하던 시절이다. 그는 앞을 내다봤다. "몇 년 후 잘살게 되면 건강에 도움되는 상품이 팔리는 날이 올 것이다." 고작 한 개에 1g나가는 150원짜리 버클이 그의 눈에는 황금덩어리로 보였다.
공장은 1년이 안 돼 번창했다. 사출기가 5대로 늘었다. 직원들과 냇가에서 투망(投網)으로 물고기 잡아 끓인 매운탕에 소주 곁들이다 그는 깨달았다. "행운과 기회는 바로 옆에 있는 거구나." 생전의 그가 남긴 말이다.
80년대는 인생 전반기의 불운을 보상받은 시대였다. 삼성, 대우, 진흥기업이 백남일 공장 물량의 70%를 가져갔다. 욕심 많은 사내가 오십줄에 영어, 일어, 러시아어 공부를 시작한 것도 그때다. 딸들과 경쟁하며 그는 말을 익혔다.
국내 봉제산업이 하나 둘 붕괴했다. 여파는 우진프라스틱에도 왔다. 90년, 91년, 92년 연속 적자(赤字)였다. '하청업체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신기술과 독창적인 디자인만이 살 길이다.' 백남일의 등에서 진땀이 났다.
그는 1993년 미국으로 갔다. 최고 플라스틱업체 내셔널몰딩의 조셉 앤셔 회장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이 회사가 만든 '듀라플렉스'는 대박상품이었다. 듀라플렉스는 명품 브랜드의 공식(公式)처럼 부착되고 있었다.
유대인 앤셔는 뉴욕으로 무작정 찾아온 백남일을 한참 째려보다 툭 한마디 내뱉었다. "왜 왔소?" '우진프라스틱 백남일'을 진작에 알고 있었던 그다. 왜 왔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기를 죽여놓겠다는 심사였다.
백남일은 말했다. "동업합시다. 당신들이 만든 듀라플렉스를 우리가 생산하겠소. 대신 앞에 '우진'을 넣읍시다." 당시 내셔널몰딩은 밀려드는 주문을 채 소화하지 못했다. 10분으로 예정됐던 만남이 세 시간을 넘기고 있었다.
그 눈치 빠른 유대인도 앞에 들어간 '우진'이라는 단어가 뭘 뜻하는지 미처 계산하지 못했다. 하청은 하청이되 동업처럼 보이는 게 바로 'Woojin'이라는 여섯 글자의 힘이었다. 우진과 듀라플렉스는 등가(等價)처럼 인식됐다.
1996년 우진이 다시 한 번 발돋움했다. 나이키 제품에 들어가는 버클의 100%를 따온 것이다. 그는 '두 달 안에 원하는 물량을 다 보내주겠다'고 제안했다. 경쟁사들이 내세운 4~6개월 기간을 절반으로 뚝 자른 것이다.
■연애도사
아버지가 지옥과 천국을 맛보고 있을 때 셋째딸 지숙(智淑·40)도 나름대로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광운초교 시절 그는 유명한 말괄량이였다. 머리를 길게 따고 다녀서 붙었다는 '백마 말꼬랑지'를 모르는 이가 없었다.
월계중에 진학한 후 전공이 바뀌었다. 연애도사(戀愛道士)가 된 것이다. 별명이 '마로니 인형(人形)이었다. 이름에 J자(字)가 들어간 여자아이 6명을 규합해 'J파(派)'를 만든 뒤 장위동, 삼선교, 청량리를 휘젓고 다녔다.
'J파 7명이 떴다!'는 소리가 들리면 남학생들이 날파리 모이듯 했다. 남들의 눈에는 분명 '날라리'인데 본인은 강력하게 부인했다.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예쁜 여학생들의 리더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의 소녀시대를 암시하는 비화가 있기는 하다. 그의 어머니는 지숙을 낳을 때 아들이길 바랐다고 한다. 그때 주변에서 누가 속삭였다. "밤 12시에 능(陵) 옆 샘물을 100일간 떠 마시면 아들을 낳는데…."
어머니는 열심히 물 마시고 딸을 낳았으며 그 뒤 딸 하나를 더 뒀다. 그는 '사주에 딸만 열둘'이라는 점쟁이 말을 듣고서야 아들 낳기를 포기했다. 그는 실망했겠지만 몇십 년 후를 보면 전혀 맹탕 비방(秘方)은 아니었다.
백지숙이 다닌 혜화여고 앞에는 '만득이'라는 40대 남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경신, 동성고생에게서 혜화여고생을 지키려 학교 정문과 버스 정류장을 하루 100번씩 왔다갔다했다. 만득이가 제일 보호한 게 지숙이었다.
그는 대학 때도 '퀸카'였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 8개월쯤 연애한 뒤 찼다. 3학년 때는 양다리 걸치기의 진수를 보여준다. 분명 '고무신 꺾어 신은 것'인데 그는 "고무신 신고 트위스트를 춰봤을 뿐"이라고 했다.
대학에서 화학(化學)을 전공한 그는 1992년 3월 태흥산업에 입사했다. 신동아그룹 계열사로 원래는 경기도 안양 연구소로 배치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 애송이 신입사원이 '너무 멀다'고 버티자 회사에서 무역파트를 맡겼다.
그는 자기가 '미스 63'이었다고 주장했다. 회사가 있는 63빌딩에 출근하기만 하면 주변의 시선이 확 쏠렸다는 것이다. 그즈음 그는 여의도 GS칼텍스에 근무하던 지금의 남편과 재회했다. 둘은 1996년 결혼했다.
그의 남자 보는 눈은 상당히 특이했다. 목이 굵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괴상한 기호는 어머니에게서 비롯됐다고 한다. 백지숙의 어머니는 입만 열면 "남자는 목이 굵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아직 밝히지 않고 있다.
■경영수업
월남실향민으로 자수성가한 아버지와 천방지축 딸이 1996년 도킹했다. 이 일은 아버지 백남일의 한마디로 시작됐다. 결혼 앞두고 "이제 마음껏 놀아야지"하고 마음먹었던 딸에게 아버지가 말했다. "놀면 뭐해. 회사로 나와."
백지숙은 태흥산업을 그만둔 지 두 달 후인 5월부터 장위동에 있던 무역부실장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혼자 무역업무까지 맡던 아버지의 짐을 나눠진 그때 우진은 아침 바다를 뚫고 떠오르는 태양처럼 발전하던 시기였다.
―청소년기의 주유천하(周遊天下)에 비하면 꿈이 소박했습니다. 현모양처(賢母良妻)가 꿈이었다면서요.
"TV드라마나 영화,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 중 현모양처가 제일 행복해보였어요."
―남편이 다시 만난 후 불평하지 않던가요.
"지금 시달리고 있는 십이지장궤양이 제 탓이라고 말도 안 되는 투정을 부리곤 합니다."
―아버지가 딸이 그렇게 놀고 다니는 데 아무 소리도 안 하던가요.
"아버지는 지켜보고만 있었어요. 자식들에게 하고 싶은 것을 모두 해보라고 했어요. 우릴 믿었기 때문이겠죠."
―어렸을 적 가난이 생각납니까.
"저는 전혀 몰랐어요. 아버지는 회사 일을 집에서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굉장히 힘든 시기였는데요.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딸들을 전부 불러놓고 노래를 시켰어요. 크리스마스 때는 꼭 트리를 만들어 놓으라고 했어요. 색종이 오려 고리를 만들어 집안 곳곳에 걸던 기억이 지금도 나요. 케이크도 사다 놔야 했어요."
―공장에 재료 살 돈도 없었다면서 네 딸을 전부 사립학교에 보냈다면서요.
"아버지가 어렸을 때 힘들게 자랐고 공부했기 때문에 우리들에게는 해줄 수 있는 모든 걸 해주고 싶어했던 거 같아요. 꼭 사립학교가 최고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요."
―아버지의 힘든 시절이라는 게 뭡니까.
"아버지가 다섯 살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대요. 큰고모가 장티푸스를 앓았는데 정작 병구완하던 할머니가 큰일을 당하신 거죠.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형수들에게 맡겼어요. 젖동냥을 시킨 거지요. 형수들의 젖은 자기 아이 먹이랴 어린 도련님 먹이랴 가만히 있을 새가 없었겠지요. 할머니도 그런 일을 예감했는지 마지막 남긴 말이 '불쌍한 녀석….'이었대요."
―'낙하산'으로 무역부실장이 됐는데 직원 중에 불만을 품은 사람은 없던가요.
"장위동 집에서 공장 할 때 저는 초등학생이었어요. 학교가 끝나면 버클 조립을 하곤 했어요. 껄끄러운 부분은 칼로 다듬기도 했고요. 아버지가 워낙 회사를 가족 같은 분위기로 경영했어요. 저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어요."
―오너의 딸은 월급도 '오너급(級)'인가요.
"120만원 정도 받았어요. 태흥산업에서 받던 월급과 비슷한 수준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월급을 터무니없게 주지 않는 스타일이에요."
―'낙하산'일 때도 거리낌이 없었습니까.
"항상 조심했어요. 제가 잘못하면 아버지가 욕을 먹게 되잖아요. 그래서인지 연세 든 분들과도 잘 지내게 됐어요."
―동생(백지원·白智媛·38·무역부 차장)이 '언니가 조금만 잘못하면 막 욕을 한다'고 일러바치던데.
"동생은 저보다 나이가 두 살밖에 어리지 않지만 어렸을 적부터 제가 키우다시피 했어요. 제가 제 가족에게는 좀 엄하게 해요."
―아버지도 백 부사장 가르칠 때 욕을 하던가요?
"아버지는 제게 잘했다, 잘못했다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 ▲ 백지숙이 환하게 웃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그의 눈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 동영상 chosun.com / 최순호 기자 choish@chosun.com
작년 4월 8일 백남일은 새벽 영어공부를 마치고 한강변으로 나갔다. 바로 전날 4박5일 일정으로 일본 출장을 다녀와 몸이 피곤했지만 들고 나간 골프채를 휘두르며 걷는 운동 습관 때문이었다. 그때 갑자기 현기증이 몰려왔다.
집으로 불길한 전화가 걸려온 것은 백남일이 집을 나선 지 30분쯤 지나서였다. 백지숙이 집 밖으로 나갔을 때 아버지는 남의 등에 업혀 있었다. 쓰러진 '버클 할아버지'는 "엄마에게 연락하지 마!"라고 했다.
―왜 어머니를 찾지 말라고 했을까요.
"마지막까지 어머니를 걱정한 거예요. 아버지는 그런 분이었어요. 서울대병원으로 옮긴 지 채 한 시간도 안 돼 세상을 떠나셨어요. 누구도 믿지 않았어요. 지병(持病)은커녕 얼굴에 주름 하나 없는 분이었거든요."
―후계 구도가 어떻게 결정됐습니까.
"가족회의가 열렸어요. 만장일치로 제게 회사를 맡으라고 했어요. 지분은 똑같이 어머니를 포함해 5분의 1씩이지요."(이때부터 백지숙의 눈 주위가 붉어졌다. 그때마다 대화가 끊겼다.)
―왜 셋째딸이 회사를 잇게 됐을까요.
"제가 기대를 가장 많이 받고 자란 건 사실이에요. 성격도 저만 남자 같아요."
―아버지가 그립습니까.
"보고 싶지요. 거목(巨木)의 그늘이랄까, 그 그늘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크다고 느낄 때는 더해요."
―그럴 때마다 웁니까.
"회사에서는 절대 안 울어요."
―내셔널몰딩과의 결별로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내셔널몰딩이 중국기업의 유니텍스라는 기업에 갑작스레 매각됐어요. 15년간 함께 일했으면서도 우리에게는 일언반구 이야기도 하지 않았어요. 아무 말도 없다가 갑자기 뉴욕으로 오라고 해 갔더니 그 이야길 하더군요."
―분개했습니까.
"딱 한 번 그때 아버지와 의견충돌이 있었어요. 저는 소송을 하자는 입장이었어요. 아버지는 '오랜 파트너와 끝을 이렇게 마무리할 수는 없다'고 했어요. 저는 1+1=2라고 생각했어요. 아버지는 1+1=2가 아닐 수도 있다고 했어요."
―그런 눈치를 채지 못했습니까.
"아버지는 내셔널몰딩에 관대한 편이었어요. 저는 꼬치꼬치 따졌어요. 조셉은 그때마다 펄펄 뛰었어요. 아버지에게 '딸을 왜 그리 가르쳤느냐'고 하다 안 되면 제게 '지숙, 제발 내게 이메일을 보내지 마!'라고 답을 해오곤 했어요. 중요한 회의 때면 아버지에게 '우리끼리 이야기하자'는 식이었지요. 제가 있으면 따지니까요."
―유니텍스와는 관계가 괜찮은가요.
"유니텍스의 목표는 우진을 없애는 것입니다. 그래서 듀라플렉스라는 상표를 쓰지 말라고 주장하지만 우리는 내셔널몰딩과 정당히 계약했기 때문에 계약기간에는 쓸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듀라플렉스라는 상표를 안 쓰면 타격이 옵니까.
"어느 정도는 있겠지만 미리 대비해왔어요. 우리 독자 브랜드가 60, 듀라플렉스가 40 정도니까요. 중국 유니텍스가 전 세계 바이어들을 상대로 '우진은 이제 듀라플렉스를 쓸 수 없다'고 떠들고 다니지만 그때마다 바이어들이 우리에게 알려줘요. 걱정하지 말라고."
―무역의 세계에도 의리가 있습니까.
"아버지가 쌓아놓은 게 바로 그런 겁니다."
■아버지의 길, 딸의 길
백남일의 우진프라스틱은 경기도 구리시 갈매동 골목에 있다. 몇번 골목을 꺾어 돌아가자 건물 일곱 채가 전부인 공장이 보였다. 누구도 세계 버클 시장 최강자라고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평범한 모습이었다.
우진프라스틱의 공장은 두 군데다. 경기도 구리와 베트남 호찌민시의 '우진 비나'다. 24시간 풀가동되는 한국과 베트남에서만 버클이 각각 120만개, 200만개씩 쏟아지고 있다. 종류는 1000가지가 넘는다.
―나이 많은 임원 중에는 '백지숙'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요.
"남들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아버지 시대의 왼팔 오른팔은 정리해야 한다는. 저는 생각이 달라요. 그분들이 저와 함께할 수 없으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끝까지 함께 가야 한다고요."
―아무도 반기 든 사람이 없었나요.
"딱 한 분 있었어요. 제가 뭔가를 지시했는데 계속 모른 체하더군요."
―화나지 않았습니까?
"제가 남자였다면 그분을 내보내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저는 그분에게 생각할 시간을 줬어요. 지금은 호흡이 잘 맞습니다."
―부친 사후(死後) 거래처들이 동요하지 않던가요.
"아버지의 후광을 업긴 했지만 저도 이 일을 한 지 10년이 됐는데요."
―여성에게 영업은 힘든 일입니까.
"영업이나 마케팅이 여성에게는 굉장히 매력적인 분야라고 생각해요. 남자보다 부드럽게 접근할 수 있잖아요. 무역은 더 쉬울 수도 있어요. 외국인들이 동양여자에게 매력을 금세 느낄 수 있잖아요."
―회사가 월급이 그다지 많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공장시설도 초일류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런데도 직원들이 똘똘 뭉치는 이유가 뭡니까.
"직원들이 대부분 다 동네 분들이에요. 담배가겟집 딸, 그 건너편 집 아저씨, 이런 식으로요. 우리 회사는 월급을 많이 주지는 못해요. 그렇지만 직원을 머슴 부리듯 하지도 않아요. 아버지가 직원들에게 참 인간적으로 대했어요."
―백 부사장도 아버지의 종신고용 원칙을 지킵니까.
"저는 생각이 약간 달라요. 아무리 보직을 바꿔줘도 적응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분들이 자진해서 많이 떠났어요."
―'많이'가 몇 명입니까.
"세 분요. 우진의 이직률은 거의 제로(0)였는데 세 명이면 많은 거지요."
―아버지의 인정주의(人情主義)를 계승할 생각인가요.
"한때 다른 생각을 하긴 했어요. 월급을 파격적으로 주더라도 똑똑한 사람을 데려올까 하는 생각요. 그런데 접었어요. 그런 인재가 경기도 구리까지 올 리 없고 무엇보다 직원 간에 위화감이 생길 수 있잖아요. 회사 모토가 '개인은 조금 모자라더라도 뭉쳐서 완벽하게 된다'는 건데, 아버지 말이 맞았어요."
―백 부사장이 아버지의 카리스마에 영원히 의존할 수는 없겠지요.
"그래서 회사 경영진단을 받은 적이 있는데 제가 받아들이기 힘든 사항을 많이 말하더군요. 예를 들면 직원 대표자 협의회를 진단한 사람은 계속 노조라고 부르는 거예요. 저는 노조라는 단어가 싫어 '우사모'라고 이름붙였어요. '우진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이에요."
한때 우진의 세계시장 점유율은 70%가 넘었다. 지금도 50%다. 버클 시장에서는 한중일(韓中日) 삼국지 같은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지퍼로 유명한 일본 YKK, 내셔널몰딩을 인수한 유니텍스가 '우진 타도'의 기치를 올린 것이다.
그 결과 YKK에 나이키 물량을 다 빼앗긴 적도 있다. 그들이 '지퍼 가격을 내리는 조건으로 우리 버클을 쓰라'는 전략을 들고 나온 것이다. 우진은 2년 만에 다시 YKK 물량을 일정 부분 탈환했다.
―스트레스가 심했겠군요.
"아예 없었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죠. 그런데 제조업 시장은 다 그래요. 뺏고 빼앗기고. 빼앗겼다고 실망하고 있으면 다시 빼앗아올 기회를 놓치게 되죠."
―뚝심 있는 성격입니까.
"우유부단하다고 봐야지요. 그걸 사람들은 뚝심 있다고 보지만요."
―경영을 맡으면서 마음먹은 게 뭡니까.
"첫째는 듀라플렉스 없이도 우진이 잘해나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 아버지가 없어도 우진이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두 가지예요."
―백남일은 우진프라스틱을 일궜습니다. 당신은 뭘 일굴 겁니까.
"지금까지는 아웃도어 제품만 생산했는데 전기전자 부품으로 사업을 확장할까 생각 중입니다. 우리 기술력이면 그 분야에 진출해도 크게 무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회사는 그냥 아버지 때처럼 놔두면서 가능할까요.
"제가 아버지에 비해 잔소리를 많이 해요. 아버지 때는 위에서 시키는 것만 했지만 이제는 스스로 문제의식을 가지고 찾아내라고 요구하지요. 경영자의 독단보다는 모두의 힘을 합치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합니다."
―경영을 맡은 지 1년 반이 가까워집니다. 뭐가 제일 어렵던가요.
"'말'요. 저는 그런 뜻이 없는데도 직원들은 제 말을 마치 신(神)의 뜻처럼 여겨요. 그래서 항상 말을 조심합니다."
―버클마다 특유의 이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한 버클을 가리키며) 이 버클이 '스텔스'예요. 안 보인다는 뜻이 아니라 날렵하게 생겨서 붙은 이름이지요. 이건 '이글아이', 이건 '에일리언'. 영화 에일리언에 나오는 괴물과 흡사해 얻은 이름이지요. 저도 붙이고 디자이너가 작명할 때도 있어요."
―버클 종류가 1000개가 넘는다는데 다 만듭니까.
"제품 종류가 다양하면 바이어가 요청하는 사항에 대해 즉각 대처하기가 쉽지요."
―1년에 몇 차례나 외국에 나갑니까.
"버클 1년 장사는 사실 전시회에서 다 이뤄진다고 봐도 무방해요. 미국에서는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여름과 겨울에 열리고 독일 프리드리히 샤펜에서는 7월 말부터 8월 초까지 열립니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자신의 월급을 물었다. 비보도(非報道) 조건이었다. 웬만한 대기업 신입사원 월급에도 못 미치는 액수였다. 그는 "그래도 섭섭해할 직원이 있을 테니 쓰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첫댓글 아름다운 자료 감사합니다...최선을 다하는 것을 배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