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조 왕건 <제 104회>
씬 1 황궁 대전(밤)
지난 회와 장면이 연결된다. 궁예가 왕건을 빤히 보고 있다.
왕건은 긴장해 있다.
궁예 이보게, 아우.
왕건 예, 폐하.
궁예 대답 좀 해보게. 도대체 황후와 무슨 일이 있었는가?
왕건 .........?
궁예 그것이 사실이었는가? 아우와 황후가 혼인을 약속한 일이 있
었는가 그 말을 묻는 것이야. 그랬는가? (사이) 아, 괜찮아,
이 사람아. 우리는 형제야. 그저 그런 일이 있었는가 궁금한 것이야.
왕건 사실이옵니다. 그런 일이 있었사옵니다.
궁예 (한참 보다가) 있었어? 그런 일이 있었다고?
왕건 예, 폐하.
궁예 허허, 이런.... (술 마시며) 나는 아지태가 장난을 친 말인
줄 알았는데... 그게 사실이란 말이지? 허, 이런... 사실이
야?
이번에 당황하는 것은 왕건이 아니라 궁예다. 잠시 어쩔 줄 모른다.
궁예 사실이라..... 사실이라.... 아지태가 한 말이 그럼 다 사실
이 아닌가? 석총이 얘기도 사실이고, 황후 얘기도 사실이고?
왕건 그러하옵니다, 하오나...
궁예 말해보게.
왕건 아지태의 말은 다분히 악의에 찬 말이옵니다. 그리고, 모함이
옵니다
궁예 설명을 해주게. 내가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일세. 어떻
게 아우의 정혼녀였던 사람이 나의 안해(발음을 정확히)로 와
서 이 나라 국모이자 황후 자리에 앉을 수 있는가?
왕건 .........
궁예 어떻게 된 일인가?
왕건 지금의 황후마마와 소신의 집안은 대대로 무역업에 종사한 상
인집단이옵니다. 자연스럽게 왕래가 잦고 거래가 많았사옵니
다. 또한, 이해관계도 깊었사옵니다.
궁예 그야 그럴 수가 있겠지.
왕건 집안이 가깝고 이해가 가깝다보니 소신과 황후마마께서 이 세
상에 나오기 전에 어른들끼리 나누신 덕담이었사옵니다.
궁예 (한참 생각하다가 끄떡인다) 그것도 그럴 수 있겠지. 서로가
친하다 보면 말이야.
왕건 그것뿐이옵니다. 신이 성장하면서 그 일은 없던 것으로 되었
사옵니다. 더 자세한 설명을 해 올리오리까?
궁예 (한참 생각한다) 허지만, 내가 황후를 맞을 때 그런 이야기는 없었어. 황후는 누구보다도 깨끗하고 순백하고 그런 사람이라
고 생각을 했단 말이야.
왕건 사실이 그러하옵니다. 황후마마께오서는 패서 일대가 모두 우
러러 존경하였던 맑고 깨끗하신 분이시옵니다. 일점일혹도 잘
못 되신 분이 아니시옵니다.
궁예 그야.... 아우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지. 어쨌든 부담스러운
대목이 아닌가? 이런 이야기가 지금에 와서 오고가서야 되겠
는가?
왕건 망극하옵니다, 폐하.
궁예 그래, 그건 그래.... 어른들끼리 그런 장래를 논할 수는 있
어. 허지만, 아지태라는 자는 이 사안을 아주 비약적으로 만
들어내고 있어. 지금의 두 태자까지도 의심을 하면서 말이야.
그럴 듯 하지 않은가?
왕건 (놀라며) 폐하, 그것이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궁예 아지태가 그랬다는 것이야. 아지태가.....(또 마시며) 사람들
이 듣기에는 얼마나 그럴 듯한 이야기인가 말이야.
왕건 ....... (그런 궁예를 정색으로 본다)말씀이 지나치신 것 같
사옵니다, 폐하. 이 아우를 끝없이 자애 하시는 폐하이시옵니
다. 하온데, 오늘 하시는 말씀은 이 아우가 차마 가벼이 들어
넘기기가 어렵사옵니다.
궁예 허허, 이런, 이런.... 뭘 그렇게까지 과민해지는가? 사람하고
는..... 들어. 한 잔 하자구.
왕건 폐하, 아지태는 간악한 자였사옵니다. 더불어 역모를 꾀한 대
역죄인이었사옵니다. 죽으면서까지도 이 나라 국기를 흔들려
고 한 그자의 말을 마음에 담아 두고 계셨사옵니까?
궁예 아, 담기는 누가 담아? 이래봐도 내가 미륵이야. 한 나라를
건설한 황제야, 이 사람아. 그러나, 황후나 아우에게 의심이
떨어지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야. 아니 그런가?
왕건 (답답하다) 폐하......
궁예 피차 나나 아우는 사내들이야. 나도 이 이야기는 몇 번씩 망
설였어. 해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하고 말이야. 하
지만, 찜찜하게 남겨두는 것보다는 빨리 털어 버리는 것이 좋 지 않은가? 허허, 됐네. 이제 그만 하세. 자, 우리 술 드세.
이러고 보면 내가 자꾸만 옹졸해진단 말이야. 아우 앞에서 이
런 꼴을 보이면 안되는데 말이야. 하하하, 아, 들어.... 오늘
한 번 마셔 보세.
왕건 예, 폐하. (그러나, 왕건은 참담한 표정이다) 예, 폐하.....
씬 2 황후전 복도
씬 3 동 황후전
연화가 슬이에게 묻고 있다.
연화 날이 어두워진지 꽤 되었는데, 대전에서는 아직까지 왕시중이
폐하와 술을 대작하고 계신다고?
슬이 그러하옵니다, 황후마마.
연화 근래에 없던 일이 아닌가? 정사에 관한 일을 보러 오셨다면
벌써 끝났을 것인데.... 왠 술인고? 무슨 얘기가 그리 길으실
꼬....
슬이 두 분은 본래 가끔씩 그런 자리를 만드시지 않사옵니까?
연화 글쎄다... 글쎄다.....
씬 4 내원
종간이 찻잔에 찻물을 우려내고 작은 작에 손수 따르고 있다.
다도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앞에 앉아 있는 은부에게 내어준다.
장일이 서 있다.
그에게도 한 잔 따라 준다.
종간 장부장, 앉아서 한 잔 마시게.
장일 아니옵니다, 내원어른.
은부 어른께서 주시는 차이니라. 한 잔 마시거라.
장일 예, 장군.
종간 그래, 아직도 왕시중이 대전에서 폐하를 뫼시고 있다?
장일 예, 내원어른. 지금 그쪽에 동정을 보고 오는 길이옵니다.
은부 폐하께서 모처럼 술벗을 만나신 것이 아니옵니까? 허허허...
종간 초저녁에 대전에 들어갔다 들었는데, 술자리를 계속하고 있다
면 분위기는 나쁜 것 같지 않구먼 그래. (장일에게) 오늘은
그런 대로 심한 병증을 아니 보이신다니, 다행일세. 요즘 같
아서는 하루하루 참으로 피가 마르네 그려. 거의 매일처럼 병
증을 보이시니... 그 도인이 빨리 약을 좀 만들어 내야 할 것
인데...
은부 소장도 기대가 아주 크옵니다. 제발 그 약에 효험이 있어야
할 텐데...
종간 이보게, 장부장. 대전내관들에게 잘 일러 놓게나. 폐하께서 병증을 보이실 때 소란 떨지 말고 침착하게들 하라고 말이야.
장일 예, 내원어른.
종간 술이 길어지신다....? 하기사, 서로 할 이야기들이 꽤 있을
것이야.
씬 5 다시 대전
궁예는 술이 상당히 취했다. 왕건은 그 앞에 꼿꼿이 앉아 있다.
분위기는 여전히 어색하다.
궁예 그래도, 백성들은 나를 미륵이라고 하였어. 나는 그 백성들을
위해 나라를 세웠고, 오늘에 이르렀어. 아니 그런가?
왕건 그러하옵니다, 폐하.
궁예 허허허, 내가 송악으로 들어갈 때 아우는 참으로 인상이 깊었
어. 사실 사형인 내원 저 사람이 무던히도 우리 둘 사이를 경 계하였지.
왕건 .......
궁예 그건 아우가 너무 총명하였기 때문이야. 아우는 그 총명함을
현실로 보여 주었어. 지금까지 말이야. 나가는 전선마다 승리
하였고, 수많은 인재들을 발굴하고 또 나라에 좋은 정책을 폈
어. 그러니까, 의심을 받는 것이야. 다음 미륵은 왕건아우 자
네라고 말이야.
왕건 .........
궁예 (마시며) 내가 많이 약해졌어. 한낱 이따위에 신경이나 쓰고
말이야. 할 일이 많은 내가 이 얼마나 우스운 꼴인가...?
왕건 폐하의 말씀 그대로이옵니다. 의심을 뿌리를 제거하기 위함이
아니옵니까?
궁예 아니야, 아니야. 예전에 나는 이렇지 않았어. 이런 소소한 이
야기 따위는 소인들이나 하는 것인데 말이야. 나는 보여....
대 미륵인 이 궁예가 소리없이 추락해서 떨어지고 있는 것이
말이야.
왕건 그렇지가 않사옵니다, 폐하. 성심을 굳게 하시오소서.
궁예 (많이 취하고, 졸립다) 저주스러워. 이 병 말이야. 이 병만
나을 수 있다면 내가 이렇게 작아지지는 않을 것인데....
왕건 폐하......?
궁예 졸립구먼. 자고 싶네 그려. 하긴, 그래. (눈 감으며) 왜 꼭
나 아니면 아니된다고 초조해 하는 지 모르겠어. 세상은 짧은
것인데 말이야. 내가 하다 못하면 아우가 있는데 말이야. 뭘
그런 걸 마음에 두고...
궁예는 그렇게 눈을 감으며 잔을 떨어뜨린다. 왕건이 일어선다.
왕건 그만 침수에 드시오소서, 폐하. 오늘 많이 곤하신 것 같사옵
니다.
궁예 그렇게 하세. 정말 졸립구먼. 그럼, 가보게.
왕건 예, 폐하. 하오면...
왕건이 예를 올리며 물러난다. 졸리우며 끄떡이던 궁예가 뭔가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왕건이 나간 쪽을 본다. 궁예는 점차 잠에서 깨어나
는 것이다.
씬 6 동 대전 복도
왕건이 대전내관과 여타 내관들의 인사를 받으며 그곳을 벗어나고 있
다. 까닭 모를 한숨을 쉬며 그렇게 복도를 나간다. 대전내관이 왕건을
보다가 다시 대전 안쪽을 본다.
씬 7 다시 동 대전 안
궁예는 깨어 있다. 다시 술을 따라 마시고 있다. 그러다가, 궁예는 자
괴감으로 표정이 일그러진다.
궁예 사내답지 못한 이야기를 나누었어. 그래서는 안되는 것인
데....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몰라. (괴롭다) 내가 아우를
의심하고... 황후를 의심하다니... 아지태 그 놈이 나를 이
렇게 만들었어. 허, 이런... 이런 부끄러운 일이 있나?
궁예는 그러다가 다시 생각에 골똘한다. 그리고, 의심에 차며 도리질
을 한다.
궁예 (E) 허지만, 말이야. 왕건아우는 사실이라고 하였어. 정혼을
했던 것도 사실이고, 또 석총이가 왕건이를 찾아갔다는 것 또
한 그렇다고 인정을 하였어. 이렇게 되면은 어떻게 되는 것인
가? (혼란스럽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이야? 이 모든 것들은 내
가 물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저들이 미리 이야기를 해 주어
야 되는 일이 아닌가? 맞아. 나는 잘못한 게 없어. 그렇다면,
왜 얘기를 하지 않았을까? 왕건아우가 왜....? 황후가 왜.....?
씬 8 궁궐 밖 저자 길(밤)
왕건이 가고 있다.
장수장이 가신들과 함께 모셔가고 있다.
왕건도 생각이 많다.
왕건 (E) 폐하께서는 너무도 많이 변하셨구나. 어떻게 저렇게 소심
하고 약해지실 수가 있단 말인가? 절대로 저런 분이 아니셨
다. 얼마나 위대한 미륵이셨는가? (사이) 하지만, 아니다. 지
금은 소심하고 나약한 병자가 아니신가? 의심과 불신으로 꽉
찬 나약한 분으로 변하셨다. 아, 이 일을 어이할꼬....
씬 9 다시 황궁 대전
궁예가 깊은 생각에 골몰해 있다.
천천히 도리질을 한다.
그러다가, 또 망설이며 한숨을 내쉰다.
어쩔 줄 모른다.
궁예 듣지 않는 것인데... 아지태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었어. 허
지만, 이대로 끝날 일은 아니지 않는가?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듣고 말았어. 그렇다면, 일의 결과를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왕건 아우는 아니라고 하지만 지난 일들이 게운하지
가 않아.
그때, 밖에서 대전내관이 아뢰는 소리가 들려온다.
대전내관 (E) 폐하, 원봉성령 문후이옵니다.
궁예 최응이가? 이 늦은 시간에 왜? 들라하라.
잠시 후 최응이가 들어와 예를 올리고 조심스럽게 앉는다.
최응 밤이 늦도록 부르심이 없기에 문후 드리고 퇴청하고자 들렀사
옵니다.
궁예 오, 그랬느냐? 그래, 요즘은 밖에서 무얼 하느냐?
최응 책을 읽사옵니다, 폐하. 하오나, 늘 폐하 가까이서 있사옵니
다.
궁예 그래야지. 암, 그래야지. (건성으로 대답하며 다른 생각을 한
다)
최응 하오면,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폐하.
궁예 그래, 그리하거라. (하다가) 아니, 아니다, 최응아.
최응 예?
궁예 (또 잠시 망설인다) 기왕에 잘 왔다. 너 내일 말이다. 내 심
부름을 하나 해주어야겠다.
최응 말씀하시오소서, 폐하.
궁예 이것은 밖에 소문 낼 일이 절대로 아니다. (사이) 기왕에 나
온 이야기이니 가볍게 넘길 수도 없게 되었고.... 그렇다고,
유야무야 그냥 그렇게 가기도 그렇고....
최응 무슨..말씀이신지요, 폐하?
궁예 너도 보았고 들었을 것이다. 지난 번 국문장에서 아지태가 한
말 말이다. 지금 그 이야기를 알아보고 싶은 것이다.
최응 예?
궁예 어쩔 수 없이 분명히 확인하고 짚을 수밖에 없게 되었어. 기
왕에 내가 의심을 품은 것이니 확실하게 알고 빨리 뿌리를 뽑
아 버려야겠구나. 그게 여러모로 좋겠다. 너 내일 강장자 댁
에 좀 다녀오너라.
최응 .......?
궁예 내가 시키는 대로 거짓 없이 모두 묻고 알아와야 할 것이다.
저간에 있었던 일들을 가서 속속들이 물어 오도록 해야겠다.
모두 말이다.
최응 .......?
결심을 굳히는 궁예의 표정에서.....
씬 10 철원 저자 거리
(아침)
나주 다련군의 집사장이 하인 하나와 함께 보퉁이 몇 개를 안장에 달
고 지나쳐 가고 있다. 사라지면....
씬 11 왕건의 집 외경
하인들이 마당을 쓸거나, 할 일들로 분주하다.
씬 12 동 집 사랑
왕건이 생각에 잠긴 채 앞에 책을 펼쳐 놓고 앉아 있다.
한동안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는데, 유씨의 소리가 들려온다.
유씨 (E) 서방님, 의관대령이옵니다.
왕건 오, 드시구료.
유씨와 수인이 왕건이 조정에 입고 출사할 관복을 들고 들어온다.
유씨 출사하실 시간이옵니다.
왕건 오, 그렇게 되었구료. 관복 이리주시구료.
수인 어젯밤 많이 늦으셨사옵니다. 조금 피곤해 보이시옵니다.
왕건 허허허, 술이 좀 과했던 모양이오.
유씨 자, 의관을 정제하시오소서.
왕건 그럽시다.
일어나면, 두 여인이 의관을 차려 입혀 준다.
유씨 안색이 밝지 못하시옵니다. 뭐,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었사옵
니까?
왕건 뭐, 그럴 일이 있습니까? 나랏일이란 원래 복잡한 것이 많아
서..허허허... 바깥 사랑 사람들도 입궐할 준비가 되었는가?
수인 모두들 밖에 기다리고 계시옵니다.
왕건 허면, 다녀오겠소이다.
유씨 모쪼록 매사에 조심하시오소서.
왕건 고맙습니다. 조심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허, 참....
그들은 그렇게 나간다. 두 여인은 걱정스럽다.
씬 13 동 사랑 밖 마당
두 여인의 배웅을 받으며 왕건이 방에서 나온다.
기다리고 있던 태평과 왕식렴, 왕신, 장수장 들이 예를 올린다.
왕건 좀 늦은 것 같으이. 어서들 입궐하세나.
모두들 예, 주군.
그때다. 열려진 문으로 말에서 내리며 들어서는 나주집사장이
보인다. 모두들 뜻밖이라 그를 본다.
집사장 나으리, 지금 입궐하시옵니까? 나주에서 오는 길이옵니다.
왕건 허허, 나주에 집사장이 아닌가? 웬일인가, 이 아침에?
집사장 한동안 적조하여 나주마님께서 문후 여쭈라 하셨사옵니다. 여
러 가지 생선과 소금하며 일용품들을 좀 가지고 왔사옵니다.
왕건 허허, 모두들 별일이 없겠지?
집사장 그러하옵니다. 마님들 모두 편안하시었사옵니까?
유씨 그렇다네. 나주 아우님과 무도 잘 있는가?
집사장 예, 마님.
왕식렴 그곳에서는 별 일 없는가? 전선도 모두 편안하고?
집사장 예, 공자님.
왕건 나는 입궐하는 참일세. 저녁에 보세나.
집사장 예, 나으리. 어서 다녀오시오소서.
왕건들은 그렇게 나간다. 문 밖을 나서자, 모두들 인사한다.
모두들 다녀오시오소서.
왕건이 끄떡하며 간다. 두 유씨가 우울하게 왕건을 본다.
가벼운 한숨을 쉬는데 집사장이 말한다.
집사장 이곳 철원은 요즘 어떻사옵니까?
유씨 들어가서 이야기 하세나. 크고 작은 일들이 늘 많은 곳이 이
곳 철원 아니겠는가? 들어가세.
집사장 예, 큰마님.
씬 14 저자 거리
왕건과 태평, 왕식렴, 왕신들을 장수장이 모셔 가고 있다. 유금필과
능산도 함께 가고 있다.
유금필 (움직이며) 어젯밤 황궁에 늦게까지 계셨다고 들었사옵니다만
은....
능산 허허허, 곡차를 많이 하셨사옵니까?
왕건 그렇다네. 아직도 취기가 가시지가 않는다네.
유금필 말씀이 아주 길어지셨나보옵니다.
왕건 우리가 결정한 그 북벌이야기도 논의도 좀 드렸고, 여러 가지 인사 문제도 있었고, 그랬다네.
태평 .......(뭔가 이상한 눈치를 보고 있다)
왕건 이거 갈수록 술이 약해지는 것 같네 그려. 조금만 마셔도 아
침이 힘이 들어.
유금필 하하하하. 아무래도 주군께서는 이 황도보다는 역시 전장터가
제격이신 것 같사옵니다. 바다 냄새도 맡으시고 말을 타고 칼
을 드셔서 질풍노도로 달리시는 것이 맞지 않겠사옵니까?
모두들 웃는다. 그때, 저만큼 최응이 홀로 가복 하나를 데리고 마주
오고 있다. 왕건들은 뜻밖이다 싶어 최응을 본다. 둘 사이는 가까워진
다. 최응이 예를 올린다.
최응 시중어른 아니시옵니까? 지금 입궐하시나 보옵니다.
왕건 그렇소이다. 이 아침에 어딜 가는 길이시오?
태평 일찍 어딜 가시옵니까?
최응 그럴 일이 좀 있사옵니다. 시중어른, 요즘 여러 가지로 국사 도 바쁘시고 더불어 심기도 불편하신 일이 있으신 줄로 아옵
니다. 그저 대범하게 넘기시오소서.
왕건 .......(무슨 말인가 싶다)?
최응 하오면, 다시 뵙겠사옵니다.
최응은 혼자 인사하고 담담히 그렇게 지나쳐 간다. 모두들 의아하게
왕건을 본다. 왕건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떡인다.
왕건 들, 가세.
그들 그렇게 계속해 가면서.......
씬 15 황궁 법당
동남동녀들이 지켜서 있고, 여러 번 절을 하고 나서 도인이 제자리에 조용히 앉는다. 그 앞에는 여전히 화로 위에 탕약이 끓고 있다.
뒤에서 한 동안 보고 있던, 종간이 다가간다.
종간 도인께서 불철주야로 기도하신 지가 벌써 두어 달이 넘었소이
다. 참으로 그 정성을 생각하면, 어떻게 공을 갚아야 할
지....
도인 (기도하는 그 자세로) 도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공과를 생
각하지 않사옵니다. 그저 자신이 좋아서 하는 것이지요.
종간 (끄떡이며) 사실, 나 또한 하루에도 두어 번씩 꼭 이곳을 보
고 갑니다. 그만큼 도인이 하고 있는 일은 나에게도 중요한
일이올시다.
도인 어찌 모르겠사옵니까? 소인도 그러하옵니다. 소인이 이곳에
자청하여 온 것은 도력의 세계를 폐하를 통하여 세상에 알리
고자 함이옵니다. 누구든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도를 통하면
영원불멸의 세계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을 널리 펴기 위함이지
요.
종간 참으로 덕이 있고, 깊이가 있는 말이올시다. 무엇이든 돕겠소
이다. 폐하께서만 일어나실 수 있다면 말이오.
도인 최선을 다하고 있사옵니다. 이 약은 분명 큰 영험을 볼 것이
옵니다. 그만큼 희귀한 약재와 정성과 산천의 기를 모아 달이
고 있는 약이옵니다.
종간 그렇게 믿고 있소이다.
도인 이 약의 효과는 참으로 크옵니다. 만병을 몰아내고 세상의 만
가지 독을 물리칠 수 있사옵니다. 그러나, 약과 병이 만나 싸
움을 시작할 때 나타나는 반응이 아주 크옵니다. 그것을 참아
내실 수 있을까 소인은 걱정이옵니다.
종간 좋은 약이란 입에 쓰다고 들었소이다. 그러나, 어찌 그것을
폐하께서 참지 못하시겠소?
도인 (가벼운 한숨) 글쎄올습니다. 폐하께서는 워낙 특별한 분이십
니다. 이 약은 처음 몸 속에 들어가면 오장육부가 타는 듯 아
프옵고, 혼백이 격노하여 끓어올랐다가 사흘이 지나면 모든
독과 병을 물리치며 함께 사라지옵니다. 그러니까, 그 사흘이 걱정이옵니다.
종간 병이 나을 수 있다는 데 그것이 문제겠소이까?
도인 글세올습니다. 또 하나 있습니다. 이 약은 단숨에 모두 다 비
워야 하는데, 그것을 조금이라도 다시 토해내면 약효는 그만
큼 줄어들게 되옵니다.
종간 하실 수 있을 게요. 폐하께서는 그보다 더 큰 어려움을 수없
이 겪으신 분이오. 하실 수 있을 것이오. 분명 하실 수 있을
것이오.
도인 .......(한숨만 쉰다)
그때, 내관하나가 달려와 종간 옆에서 멈칫거린다.
종간 무슨 일인가?
내관 폐하께오서 찾아 계시옵니다.
종간 나를 말인가?
내관 예, 내원어른.
종간 (한참 생각하다가) 가세.
종간이 도인에게 묵례를 보내고 그곳을 떠난다.
도인은 하늘을 보며 까닭 모를 한숨을 쉰다.
그리고, 손가락을 짚으며 뭔가를 계산한다.
도인 백일이 되어 이 탕제를 완성하는 날은 길일이 아니다. 어이할
꼬.... 아무리 육갑을 짚어 보아도 길일이 아니야.....
씬 16 황궁 대전 복도
종간이 내관과 함께 걸어 들어온다.
대전 앞에 이르자 대전내관이 아뢴다.
대전내관 폐하, 내원께서 드셨사옵니다.
궁예 (E) 드시라 하여라.
씬 17 동 대전 안
궁예가 들어오는 종간을 보고 있다.
종간이 예를 올리고 앞에 앉는다.
종간 찾아 계셨사옵니까, 폐하?
궁예 그렇소이다. 내원에는 아니 계셨던 것 같소이다?
종간 예, 법당에 좀 가있었사옵니다. 그곳에서 도인이 기도를 올리
며 폐하를 위해 탕제를 짓고 있기에.....
궁예 허허허, 도인이라.... 약이라.... 이제 그런 이야기는 별로
흥미가 없소이다.
종간 허지만, 지금 기울이고 있는 정성으로 보아 꼭 좋은 일이 있
을 것 같사옵니다, 폐하.
궁예 그것보다도 이보시오, 내원.
종간 예, 폐하, 말씀하시오소서.
궁예 어젯밤 왕건아우가 다녀갔소이다.
종간 .......예....
궁예 그리고, 지금 최응이가 가택에 연금되어 있는 강장자에게 갔
소이다.
종간 (꿈틀하고 놀란다) 무슨 말씀이시온지....?
궁예 아무래도 말이오. 아지태가 죽기 전에 한 말에 대해서 그 흑
백을 좀 가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종간 (더욱 놀란다, 충격이다) 폐하, 무엇을 가린다 하시옵니까?
궁예 석총이를 만난 이야기는 다음에 논한다 하더라도 황후와 왕건
아우 사이에 있었던 일은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지 않겠소이
까?
종간 폐하, 당치 않은 말씀이시옵니다. 그 일은 죽은 아지태의 말
장난이옵니다. 현혹되지 마시오소서.
궁예 하지만, 왕건아우가 인정을 했어요. 그런 일이 있었다고 말입 니다. 그렇다면, 나는 남의 정혼녀를 빼앗은 황제가 되는 것
이오.
종간 그렇지가 않사옵니다. 당시 신이 오로지 폐하를 위하여 세상
에서 제일 정결하고 또한 덕이 있는 분을 모셔 폐하께 천거해
올린 일이옵니다. 의심을 하신다는 것은 천부당 만부당하신
일이옵니다.
궁예 이보시오, 사형. 허지만, 정혼한 사실이 있었다는 것이오. 아
시오이까? 사형은 그것을 아셨소이까?
종간 그러하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변화무쌍한 전국시대에 있어서
한 때 호족들의 가벼운 입담이었을 뿐이옵니다. 황후마마는
마땅히 폐하의 배필로써 훌륭하신 분이시기에 신료들 모두가
청한 일이옵니다.
궁예 (잠시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사형, 나는 지금에서야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만 모르는 일이었어
요. 어떻게 세상이 다 아는 일을 당사자인 내가 모른단 말이
오?
종간 잊으시오소서. 아지태의 농간이옵니다. 참으로 그 자는 간악
한 자이옵니다. 잊으시오소서, 폐하.
궁예 사형이 나라면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겠소?
종간 ........?
궁예 나는 그것을 묻고 싶어 지금 사형을 보자고 한 게요. 적어도
내 아우가 된 왕건이가 그런 말도 나에게 해주지 않았다는 것
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오. 사형도 말씀이오.
종간 폐하..... 폐하, 고정하시오소서. 그런 일들을 크게 만들어
폐하와 이 나라에 좋을 일이 없사옵니다.
궁예 (노려보듯 보다가 한숨을 쉰다) 이미 최응이가 갔소이다. 나
는 이 일을 좀 더 정확하게 알고 싶소이다. 가능하면 빨
리......
종간 ...... (답답하다, 그리고 아직도 충격이다) 아지태.... 그
망령의 장난이 너무도 짓궂사옵니다. 통촉하시오소서, 폐하.
씬 18 강장자 집 외경
씬 19 동 집 안
강장자 부부와 최응이 마주 앉아 있다. 부부는 사색이다.
강장자 지금 뭐라고 하였는가? 이보게, 원봉성령? 뭐라? 폐하께오서
정혼한 사실이 있는가 없는가 알아 보라 하시었다?
백씨 세상에... 폐하께서 그런 일을 지금에 와서 물으시다니요?
최응 대부께서는 조금이라도 숨기시는 것이 없이 지난날을 말씀해
달라고 하셨사옵니다.
강장자 무얼, 무얼 숨기고 말고 할 게 있단 말인가? 그것은 그때 그
국혼을 주관했던 내원께 물으면 될 일일세. 나는 할 말이 없
네.
최응 허나, 아지태는 그렇게 말을 하지 않았사옵니다. 그 때문에 폐하께서는 모든 일을 명백하게 따져보고 싶으신 것이옵니다.
강장자 (가슴 치며) 어이구...어이구... 아지태 그 놈이 죽어도 곱게
못 죽고 물귀신처럼 여러 사람 잡으려 하는 구나. (사정처럼)
결코, 아무 것도 아닌 일일세. 물론, 정혼 이야기는 있었네.
허지만, 아무 일도 없었어. 그것뿐일세. 내원께서 다 알아보
신 일이야.
최응 문제는 폐하께오서 그리 생각을 안하신다는 것이옵니다.
백씨 세상에, 세상에... 하늘이 보고 있소이다. 황후마마는 결백합
니다.
최응 페하께오서는 두 분 태자마마에 대해서도 적지 않이 생각이
많으시옵니다. 대부 어른께서는 두 분 태자마마를 아지태와
모의하여 보위에 올리신다는 누명을 받으셨사옵니다.
강장자 아니야, 아니야..... 그건 아지태의 말이었어. 내가 한 말이
아니야.
최응 어떻게 자식이 아비를 물리치고 옥좌를 노릴 수가 있사옵니
까? 폐하께서는 친자식이 아닌 경우에만 생각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물으라 하셨사옵니다.
강장자 글세, 아니라고 하지 않는가? 아니라니까. 하늘이 보고 땅이
보는 일이야. 내가 지금 거짓말 하면 벼락을 맞을 것일세. 그
리 전해주시게. 정말 아무 일도 아니라고 말일세. 아이
구.....
최응 ........?
씬 20 황궁 시중부
왕건이 중심에 앉았고, 태평과 박질, 원극유, 박지윤, 임춘길, 왕식렴
이 함께 해 있다. 모두 서류를 넘기며 끄떡이고 있다.
박지윤 허허, 이러면 결국 왕시중께서 입안한 그 북벌이 현실로 된
것이올시다?
원극유 왜 아니겠습니까? 병부령인 나도 찬성을 한 일입니다. 이런 북벌이라면 큰 무리도 없이 아주 이득이 큰 일입니다.
박질 북벌에 파견할 장수들과 군대가 (서류 보며) 이미 다 확정이
된 것이로 구료, 왕시중?
왕건 그렇습니다. 그 때문에 광평성의 원로분들과 여기 병부령이신
원극유 장자님과 순군부의 임장군이 함께 자리한 것입니다.
폐하께서 재가를 하셨습니다.
임춘길 (서류 보며) 북벌은 폐하의 크나크신 염원이십니다. 시중께서
이렇게 다시 방향을 세워 주신 것은 참으로 다행 중에 다행입
니다.
박지윤 우리 원로대신들이 보기에는 무리한 군사력을 동원하지 않고
저 평양성을 도모하려고 한다는데, 그렇다면 그에 따른 세부
계획도 마련 되었소이까, 왕시중?
왕건 예, 그곳 사정을 들어보니 호족들이 제각각 자신의 고을들만
을 지키고 있을 뿐 연합이 되거나 큰 무리를 이루지는 못하고
있다 합니다. 때문에 일부 군대와 제 아우 식렴이를 보내서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사정을 알아 볼 참입니다.
왕식렴 .......(묵례를 한다)
모두들 끄떡인다.
박질 그렇다면, 군정관격으로 군사의 임무는 왕식렴 공이 맡고, 장
수는 누굴 보내실 것이오이까?
왕건 총사로 환선길 장군을 위시로 그 휘하에 내 아우 유금필 장군
을 부총사로 하고 홍유, 배현경, 김락, 이흔암 같은 장수들을
보내려 합니다.
원극유 병부령인 이 사람의 생각도 같소이다. 처음에는 그렇게 명망
있는 장수들로 보내서 기선을 제압할 필요가 있어요.
태평 그러하옵니다. 그곳에 있는 호족들은 이미 우리 태봉국의 장
수들에 대해서 훤히 알고 있사옵니다. 중량을 무겁게 보일 필
요가 있사옵니다.
박지윤 자, 그러면 북벌에 관한 조치는 이렇게 하기로 하고... 이보
시오, 왕시중. 조정에도 새로운 인사가 있을 것이라 들었는 데....?
왕건 그러합니다. 새로운 직제에 맞는 유능한 분들을 모시려 하고
있습니다. 곧 다시 광평성 원로분들에게 의논을 드리겠습니
다.
박지윤 (끄떡이며) 그렇게 하십시다. 하긴, 이 조정에 왕시중이 오고
부터는 우물쭈물 하는 게 없고 모든 일들이 훤히 눈에 보입니
다. 크고 작은 일들을 우리 광평성 원로들에게 의논해 주는
것도 고마운 일이고 말이오.
왕건 어인 말씀입니까? 당연한 일입니다. 제가 시중으로 있는 한
모든 일들은 공명하게 처리될 것입니다.
박질 그나저나, 이거 해가 저문지 꽤 되었소이다. 저녁이나 들고
들 이야기하십시다. 허허허....
박지윤 정말 그렇습니다. 아까부터 허기가 졌는데 말씀이오. 왕시중,
오늘 저녁은 푸짐하오이까?
왕건 예, 준비가 됐을 것입니다. 허허허, 반주도 있을 것입니다.
허허허....
대본천국 ( http://cafe.daum.net/baekey/ )
씬 21 왕건의 집 외경(밤)
씬 22 동 집 사랑
집사장이 떠날 차림으로 두 부인을 보고 있다.
유씨가 아기옷을 내어놓는다.
유씨 나으리께서는 오늘 늦으실 모양일세. 그렇다고, 그냥 떠난단
말씀인가?
집사장 예, 큰마님. 이 밤으로 부지런히 말을 달려서 가면 내일 저녁
쯤 나주로 돌아가는 물때를 만날 수 있사옵니다.
수인 그래도, 그렇지. 뭘 그리 서두르는가?
집사장 전해 올릴 것은 올렸고, 또한 이곳 사정도 두루 알아보았사옵
니다. 서둘러 가겠사옵니다.
유씨 이건 내가 손수 지은 우리 무의 옷일세. 잘 맞을까 모르겠네.
전해주게나.
집사장 예, 큰마님. 나주마님께서 아주 기뻐하시겠사옵니다.
수인 나주형님이 부럽네 그려. 우리 무와 함께 얼마나 재미있으시
겠는가?
유씨 그렇게 부러우면 아우님도 아들 하나 보시지 그러는가?
수인 (묘한 웃음) 곧 그렇게 되지 않겠사옵니까?
유씨 곧 그렇게 돼? 호호호, 사람하고는.....
수인 그래, 한동안 밖을 다 돌아보고 왔다 했는데 많은 소식 모으
셨는가?
집사장 예, 마님. 조정 돌아가는 얘기하며 여러 가지로 많이 들었사
옵니다. 또한, 챙길 것도 더러 챙겼사옵니다.
유씨 무얼 그리 많이 챙겼는가?
집사장 (잠시 머뭇거린다) 지금 조정 분위기가 조금 묘하다 들었사옵
니다. 아지태가 지껄인 그 황후마마 얘기하며....
유씨 자네 그 이야기도 들었는가?
집사장 예, 마님..... 여러 가지로 나으리께오서 불편하실 것 같사옵
니다만은...
수인 그 이야기는 그만 하게. 드러낼 이야기가 아니지 않는가? 아
지태 그 자의 헛소리일 뿐이야.
집사장 예, 마님.... (그러나, 눈치를 본다)
씬 23 황궁 외경
씬 24 동 황후전
문이 열려 있고, 연화가 어둠 속 마당을 보고 있다. 착잡하다.
진내관이 조심스럽게 보고하고 있다.
진내관 페하를 모시는 원봉성령 최응이 대부어른 댁을 다녀왔다 하옵 니다.
슬이 거기는 무엇 때문에 말씀이오?
진내관 아마도..... 아지태가 한 그 말 때문인 것 같네.
제조 어쩌면 좋사옵니까, 황후마마. 일이 의외로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 아니옵니까?
연화 .....(한숨) 참으로 무섭구나. 살아서도 그토록 간흉스럽더니
죽어서도 아지태는 여전하구나. 지독해....
진내관 아마도 지난 번에 시중께서 다녀가신 것도 황후마마의 일 때
문으로 사료되옵니다. 그리고, 내원도 얼마전에 대전으로 불
려 들어갔다 나갔사온데, 그 안색이 아주 안 좋았다고 하옵니
다.
연화 ........ 그래, 일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것이야. 틀림없어.
씬 25 대전 복도
씬 26 대전 안
궁예가 최응을 보고 있다. 최응이 담담히 말하고 있다.
궁예 그래서? 뭐라고 말하던가?
최응 방금 말씀 올린 대로 전혀 정혼이란 사실 무근이라 하였사옵
니다.
궁예 이런 죽일 것들이 있나...? 왕건아우가 그런 일이 있었다고
그랬는데, 뭐 사실 무근이야?
최응 그런 것이 아니오라, 초반에 이야기는 있었사오나 흘러가는
것이었다 하옵니다. 성장한 이후로는 없었던 것으로 한 모양
이옵니다.
궁예 (도리질) 아니야, 아니야. 정혼이란 말 자체가 그렇게 쉬운
게 아니야. 이거 아무래도 안되겠구나. 쉽게 물어봐서는 될
일이 아닌 것 같아. 아니 그러냐, 최응아? 모두들 내가 장님 이고 귀머거리인 줄 알고 있어. 안되겠어. 쉬쉬하고 알아 볼
것이 아니다. 공개적으로 확실히 좀 알아봐야겠어.
최응 폐하, 신이 알기로는 왕시중께서는 이 일과 무관한 것 같사옵
니다. 또한, 황후마마도 그러하시옵니다. 살펴헤아리시오소
서, 폐하.
궁예 하지만, 기분이 나빠..... 그렇지 않느냐? 아지태도 알고 있
었던 일을 나만 몰랐단 말이다. 황후에게도 다시 물어 보아야
겠다. 황후는 내게 거짓말을 안할 게야.
최응 참으시오소서, 폐하.
궁예 아니다. 물어 보아야겠어. 이건 물어 보아야 할 일이야.
씬 27 황궁 그 시중부
모두다 가고, 어둠 속에서 태평과 왕건이 먼 밖을 보고 있다.
태평 밤이 너무 깊었사옵니다. 그만 퇴청하시오소서. 모두들 갔사
옵니다.
왕건 (한숨) 그렇게 하세나.
태평 나주에 온 집사장도 돌아갔다고 하옵니다.
왕건 (끄떡인다)..... 원봉성령 최응이가 강장자 댁을 다녀갔다고?
태평 예, 주군..... 아마도, 주군과 황후마마의 일 때문인 것 같사
옵니다.
왕건 그럴 게야. 그래서, 그 최응이가 지나치며 내게 묘한 말을 했
었지. 요즘 들어 심기가 불편하겠지만 대범하게 넘기라고 하
였어. 대범하게라.... 허허허, 그 어린 사람이 참으로 속이
깊어.
태평 그러게 말이옵니다.
왕건 나라에는 쌓인 일이 많고 할 일도 많은데 이런 일에 덜미가
잡히다니.... 답답하네 그려. 지금 얼마나 많은 일을
할 때인가, 얼마나....
씬 28 백제 황궁 외경(낮)
씬 29 동 대전
견훤과 최승우, 능애, 능환, 추허조가 차를 마시고 있다.
견훤 결국, 대야성을 공격하는 것은 한참 더 기다려야 한다 그런
말인가?
능애 전선에 나가 있는 첩자들의 말을 들으니 대야성은 여전히 그
방어력이 대단히 크다 하옵니다.
견훤 이미 알고 있는 일이야. 그렇다고 다 계획한 것을 미룬단 말
인가?
추허조 그런 것이 아니오라 대야성을 치려면 많은 병력이 필요한데
그 틈을 비집고 다른 전선이 와해될까봐 일부에서 걱정하고 있다는 말씀이옵니다.
최승우 공격 준비는 완료되어 있사옵니다. 한 번 더 살펴보자는 것이
니, 잠시 허락하여 주시오소서.
견훤 이거 우리가 너무 움츠리는 것이 아닌가?
능환 그렇지는 않사옵니다, 폐하. 준비를 좀 더 단단히 하자는 것
이옵니다.
견훤 그래, 그렇게 하지 뭐. 자네들 생각도 그렇다면 말이야.
최승우 하옵고, 폐하.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그 태봉국의 사정말이옵
니다.
견훤 오, 그래. 지금 저들은 어찌 돌아가고 있는가? 궁예왕은 어떻
게 하고 있는가, 그리고 왕건이는?
최승우 첩자들의 밀지가 계속해 도착하고 있사옵니다. 지난 번 아지
태라는 대신이 처형된 이후 내부적으로 갈등이 심한 것 같사
옵니다.
모두들 ........(관심이 크다)?
최승우 본래 궁예왕의 병이 깊었사온데, 아지태라는 자가 거기다 불 을 지핀 것 같사옵니다.
견훤 오, 그래.
최승우 아지태라는 자가 반란을 획책했던 것도 실은 궁예왕의 병 때
문이었사옵니다. 헌데, 그것이 발각되었고 결국은 시중이 된
왕건이에게 처형이 되었는데.
견훤 그런데?
최승우 태봉국 조정이 시끄러울만한 요언을 남기고 죽었사옵니다. 왕
건이가 왕이 된다는 것이지요.
능환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최승우 오래전부터 도선대사가 도선비라는 책을 통해서 왕건이가 이
삼한의 주인이 된다는 예언을 했다 하옵니다.
견훤 (펄쩍 뛰며) 뭐라? 누가 삼한의 주인이 돼? 왕건이가?
최승우 그러하옵니다. 그런 말이 있다 하옵니다. 이미 태봉국에서는
송악의 예언이라 하여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일이옵니다.
모두들 ........(동요한다)
최승우 그것을 아지태가 죽어가면서 다시 꺼냈사옵니다. 즉, 왕건이 가 궁예왕을 대신하여 황제가 되고 삼한을 통일한다는 이야기
가 되는 것이옵니다.
추허조 저런, 저런.... 그런대도 궁예왕이 가만히 있습니까? 그야말
로 그렇게되면 왕건이는 대역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최승우 그래서, 태봉국이 시끄러울 조짐이 보입니다. 잘해서 우리 쪽
에서 사람을 보내 이간계를 쓴다면 아마도 큰 득을 볼 수도
있을 것이옵니다.
견훤 (끄떡인다) 그렇게 되겠구먼. 궁예왕과 왕건이 사이를 갈라놓
는다?
능애 기가 막힌 발상이옵니다. 해볼만한 일이 아니옵니까?
능환 그럴 듯한 생각일세. 잘만 된다면 말일세.
최승우 예의 주시하며 지금 한편으로는 태봉국을 보낼 유능한 첩자들
을 물색하고 있사옵니다. 그 옛날 궁예왕을 다치게 할 때처럼
목숨 따위는 아끼지 않는 우국충정의 인물들 말이옵니다.
견훤 (기분이 좋다) 좋은 생각일세. 한바탕 뒤집어 보세. 사실 이
런 이간계가 수천 수만의 병력이 동원되는 전장보다 실리가 아주 큰 것이야. 그렇고 말고. (끄떡인다) 헌데, 궁예왕은 참
으로 안되었어. 그런 병이 생기다니 말이야. 그 사람도 영웅
중에 영웅이었는데....
씬 30 나주 관아 외경
씬 31 동 관아 안
집사장의 말을 다련군과 오씨가 듣고 있다.
오씨는 아이 옷을 아기에게 대어 보며 즐거워하고 있다.
오씨 그래, 큰형님께서 손수 지어 보내신 옷이라고, 어디 보자. 어
쩜 이렇게 잘 맞는고... 고맙기도 하셔라.
다련군 그래, 그곳 사정은 어떻던가?
집사장 마님께서 걱정하신 대로이옵니다.
오씨 (굳어진다) 내가 걱정한 대로라니? 무엇이 말인가?
집사장 사정이 아주 나쁘옵니다. 겉으로는 모두들 평안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못하옵니다.
다련군 답답하네. 빨리 말을 해보아.
집사장 아지태라는 자가 죽으면서 남긴 요언 때문에 시중어르신께서
입지가 어려우신 것 같사옵니다.
오씨 말해보게.
집사장 첫째는 미륵을 모시는 법상종 파의 고승 석총대사와 시중어르
신께서 만난 일이 드러난 것과.....
오씨 그건 무슨 말인가? 석총대사와.... 서방님이 만나.....?
집사장 예, 마님. 석총대사는 폐하께 철퇴로 맞아 죽으면서 다음에
올 미륵을 예언했사온데, 그 예언의 당사자가 바로 시중 어르
신이라는 것이옵니다.
다련군 세상에, 이런 세상에... 그런 일이 있었는가? 이거야말로 엄
청난 이야기가 아닌가, 그래서?
집사장 다음은 황후마마와....
오씨 황후마마와....?
집사장 황후마마와 시중어르신께서 옛날에 정혼한 사실이 있었다하옵
는데, 아마도 그 일에 진위를 가지고 논란이 분분한 것 같사
옵니다.
오씨는 입을 다물지 못한다. 다련군도 마찬가지이다. 부녀는 그렇게
서로를 본다.
오씨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그런 일이.....? 그렇게 엄청난 일
들이 있었단 말인가?
다련군 이거야말로 하나도 모르겠구나. 뭐가 뭔지...어쨌든 다급한
일이 오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구나.
오씨 그렇사옵니다. 뭔가 위급한 일이 생기고 있는 것 같사옵니다.
세상에.... 서방님께서 황후마마와....?
그런 오씨의 경악스러운 얼굴에서.....
씬 32 황궁 외경(밤)
씬 33 동 대전
궁예가 연화와 마주해 있다. 주안상이 여전히 마련되어 있다.
궁예는 여늬 때처럼 술이 취해 보인다.
마시며 말한다.
궁예 이렇게 밤이 깊어 황후와 술잔을 마주하고 보니, 참으로 옛생
각이 많이 나는 구료.
연화 망극하옵니다, 폐하.
궁예 한 잔 하세요.
연화 예, (조금 마시고 놓는다)
궁예 나는 본래 여인을 탐하는 사람이 아니었소이다. 그런데 어쩌
다가 내 사형인 내원께서 극구 권하기에 황후를 만났소이다.
연화 그랬사옵니다.
궁예 그리고, 어느덧 나는 황후의 지아비가 되었고 두 아들까지 두
었소이다. 계율을 청정이 하는 승려가 말이오. 그리고, 뭐라
더라.... 미륵이나 황제는 승려를 뛰어 넘는 것이라고 했던
가? 내 사형이 그렇게 말했던 것 같소이다.
연화 .......
궁예 그리고, 한동안은 즐거웠소이다. 남녀간의 정을 알고 배웠소
이다. 그리고, 생각했소이다. 황후는 과연 아름답다고 말이
오. 이 세상 누구보다도 아름답다고 말이오.
궁예는 거퍼 두어 잔을 마신다.
그리고, 물끄러미 연화를 본다.
그러다가는 뭔가 생각하고는 혼자 끄떡인다.
궁예 하긴, 그래. 이만한 황후의 미모라면은 양귀비도 부럽지 않을
것이오. 왕건아우라고 하더라도 분명 사모의 정이 생길 것이
오.
연화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폐하?
궁예 왕건아우 같은 사람과 황후 같은 사람이라면 그야말로 훌륭한
배필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오.
연화 .......?
궁예 어쩔 수 없이 나도 이럴 때는 미륵이 아니라, 인간인가 보오.
그래서, 아지태가 남긴 말을 확인하고 있는 중이오. 왕건아우
에게도 물었고, 내 사형인 내원에게도 물었소이다. 황후의 부
친인 강장자에게도 말이오. 이번에는 황후가 대답해 주시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혼인을 하려고 하였는가 그것이오. (사
이) 그랬소이까?
연화 ........
상위(M) 다음페이지(엔터) 앞
궁예 그렇소이까?
연화 그랬사옵니다. 그런 일이 있었사옵니다.
궁예 있었어. 있었다고? (사이, 그러다 크게 웃는다) 과연 황후시
오. 왕건아우도 그런 말을 했소. 그런 일이 있었다고. 허면
말이오. 황후는 왕건아우를 어찌 생각하시오?
연화 이미 그 옛날에 있었던 정혼 이야기는 사라졌사옵니다. 그리
고, 신첩은 폐하의 안해가 되어 있사옵니다. 그리고, 자식을
낳았사옵니다. 어떤 대답을 듣기 원하시옵니까?
궁예 뭐라? 어떤 대답? (대답이 궁하다) 그렇구먼. 그 이야기는 묻
는 것 좀 그렇구먼. 그렇구먼 그래.
연화 폐하, 이제 알아보실 것은 두루 다 알아보셨사옵니다. 폐하께
서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크신 분이시옵니다. 작은 일에 연연
하지 마시오소서. 폐하의 위엄에 흠이 될까 두렵사옵니다.
궁예 이미.... 그렇게 되지 않았는가?
연화 위대하고 큰 모습을 보여주시오소서, 폐하. 분명히 말씀올리
옵니다. 신첩은 페하의 영원한 안해이옵니다.
궁예 (한참 생각한다) 그야 그렇지. (취했다) 그건 분명하지. 허지
만, 말이오. 내가 지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내가 누구인
가에게 속고 있는 것인가가 아닌가 그것이오. 그것뿐이오.
연화 아무도 페하를 속이지 않사옵니다, 폐하.
궁예 (멍하니 연화를 본다) 그렇겠지요, 황후?
연화 예, 폐하. 이 독주도 그만 하시오소서.
연화 그가 술잔을 치우려 하자, 궁예가 그 손을 잡는다. 그리고, 또
멍하니 본다.
궁예 그래요. 황후는 내가 마음을 주었던 유일한 여인이오.
연화 .........(떨고 있다) 아옵니다, 폐하.
궁예 나는 불법의 계율과 나랏일 밖에 모르는 사람이오. 그래서,
황후를 자주 못보고 있소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멀어
진 것은 아니오. 오늘 보니 황후는 여전히 옛날과 같소이다.
연화 ..........
Page : 20 / 20
궁예 몹쓸 병이 찾아오고부터는 내가, 내가 아니오. 그것이 서럽소
이다. 내가 왜 이렇게 천하게 내려앉고 있는지, 그런 내가 싫
소이다. 황후, 오늘은 이곳에 나와 함께 하십시다.
연화 폐하.....
궁예 (포옹하며 눈물을 흘린다) 나와 함께 이 밤을 지새 보십시다.
이 대전 안의 밤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긴지 황후도 아시게 될
게요.
연화 폐하......
그런 그들의 모습에서....
<104회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