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군 점곡면 사촌마을에 들어서면 천 년의 숲 서림(천연기념물 405호) 곧 가리쑤를 만난다.
긴 세월을 품어 안은 깊은 숲 속에 소소한 가을바람이 인다.
회나무와 팽나무 잎들이 짙푸름을 살짝 거두는가 하면 굴참나무 아래에선 자갈색 열매를 떨어뜨린다.
마을의 북쪽에서 남쪽으로 1.4㎞ 가까이 가로로 난 숲은 마을의 오랜 내력을 지닌 채 길손의 무거운 걸음을 내려놓게 한다.
14세기 후반, 안동에서 처음 이곳을 찾아든 김자첨(사촌마을 입향조)이 마을의 빈 서쪽을 채우기 위해 가리는 숲이라 하여 서림(西林)이라 칭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가리쑤라는 이름에 더 익숙하다.
가리쑤는 마을의 동과 남, 북쪽에 비하여 허한 서쪽을 탄탄하게 가려주어야 인물이 난다는 풍수지리설에 근거할 뿐만 아니라 샛바람을 막아주고, 또 북쪽의 한실골에서 서쪽을 거쳐 남으로 흘러내는 대곡천의 범람을 막는 등 삶의 터전을 보호하고자 조성한 인공 숲이다.
가리쑤 덕분일까. 이 마을에는 조선조를 거치면서 많은 인물이 배출된다.
문무 대과로 등과한 인원만도 13명이라 하니 반촌의 자긍심과 품격을 지켜온 마을이다.
이 마을은 서애 유성룡이 태어나 유년을 보내기도 한 그의 외가마을이지만 일찍이 안동으로 떠났고 누대를 걸쳐 이 마을에서 살아오고 국가에 봉직한 인물군은 김씨들이어서 사촌마을은 안동김씨 집성촌으로 지역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다.
자하산에 등을 기대고 남향으로 평평하게 자리 잡은 이 마을은 앞개울 기수(미천)의 발원지인 황학산이 동쪽 부분을 부드럽게 감싸준다.
그것도 부족하여 안산이라 할 병봉산이 마을을 굽어 살피듯 지켜준다.
그 산자락으로 흐르는 기수는 남쪽을 돌아 안동 영호루 앞에서 합강이 되는데 물길이 곧 삶의 길이고 보면 사촌은 비록 예로부터 의성 땅이되 안동과 정서를 같이한듯하다.
의병대장인 김상종 선생의 생가터에는 현재 흔적(돌무더기)만 남아 있다.
김상종 선생은 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단발령을 내리자 전국 유생들이 결성한 항일의병 의성지역 의병장으로 추대된다.
김상종 선생의 고향인 의성 사촌마을 사람들은 그를 나라 사랑을 몸소 실천한 우국지사로 칭송하고 있다.
김진홍 기자 solmin@idaegu.com
◆ 충을 무기삼아 보국의 길로
사촌마을에서 만취당이라 하면 둘을 칭한다.
하나는 안동김씨 종택(도평의공파)의 정자를 말하고 나머지 하나는 임란 때 의병장으로 창의한 부호군 김사원을 가리킨다.
임란 전, 김사원은 자신이 살 집과 정자를 짓고 자신의 증조부 송은 김광수를 흠모하는 뜻을 담은 ‘만취당’을 당호로 지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자호로 삼는다.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만취당(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69호)은 봉정사의 극락전과 부석사 무량수전에 이어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민가의 목조 건물로 임란 이전의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열한 칸의 만취당 대청마루 위에는 한석봉이 쓴 아정한 편액이 걸려 있는데 휘호를 목판으로 음양각하여 그의 고른 숨결이 배인 듯하다.
여러 차례 전화가 마을을 할퀴고 갔지만 유독 만취당만은 건재했기에 지금까지 그 위용과 미감이 돋보이고 있다.
만취당의 옛 주인 김사원은 왜군이 안동과 의성 일원으로 내침한다는 소식을 듣고 두 동생과 조카를 불러놓고 비장한 어조로 말한다.
“나라가 위란에 놓여있는데 선비가 어찌 지켜보고만 있겠느냐. 내 비록 출사하여 임금을 모시지는 않았지만 의와 충을 무기 삼아 내 강토를 지키기 위해 출정하련다.
그 또한 증조부께서 당부한 보군(保君)의 뜻을 몸으로 실천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동생들과 창의를 선언한 그는 기수 언덕바지에 있는 영귀정에 올라 생전의 증조부와 주고받던 시문을 떠올리면서 선대들이 살아온 마을을 한참 내려다본다.
그리고는 ‘나라를 구하고 다시 돌아와 내 마을을 지키리라….’ 고 다짐하다.
그즈음 안동 일직현에 모여든 동북지역의 여러 의진들은 함락된 경주성을 되찾는데 목표를 두고 ‘안동열읍향병’이라는 군기를 높이 올린다.
김해를 의병대장으로 세우고 김사원과 신홍도를 의성정제장으로 추대한다.
‘안동열읍향병’은 경주성 진중에서 의병장 김해가 일찍 사망하여 해산되고 말지만 김사원은 소임의 끈을 놓지 않는다.
전쟁 중에 속출하는 기아민들을 찾아 구휼활동을 전개하는 등. 사재를 털어서 까지 지역구제 활동에 전념한다.
그의 적덕의 손길을 본 향민들은 그를 향해 김씨의창(金氏義倉)이라하며 칭송을 마다하지 않았다 한다.
의성 사촌마을입구에는 구한말 일제에 항거하기 위해 의성 점곡 지역에서 일어난 의병활동을 기록한 ‘병신창의 기적비’가 세워져 있다.
이 비에는 아픈 역사적 사실과 후세를 위한 교훈이 새겨져 있다.
◆ 의병장 김상종의 집을 불살라 버려라
만취당 김사원으로부터 130여년 뒤, 그의 방후손 북오 김이중은 노구를 이끌고 창의의 걸음을 재촉한다.
영조 4년(1728년), 집권에서 밀려난 소론의 과격론자(이인좌)들이 일부의 영남세력과 연합하여 일으킨 대규모의 무신난을 평정하기 위해서다.
무관이던 북오는 큰 키에다 기골이 장대하고 성품이 호방하였다.
독서를 즐기다가도 틈만 나면 서림에 나가 노목에 표적을 두고 시위를 당기기도 하고 하늘 높이 날아가는 날짐승을 돌팔매질로 쓰러뜨리곤 하였다.
유가에서 익혀온 지도자의 덕목인 예악뿐만 아니라 사어수서(射御數書)를 몸으로 익히기를 즐겼다.
그러다 조금 늦은 서른여섯에 무과에 올랐고 오위장을 끝으로 벼슬길을 마치고 노년에는 고향산천을 벗하면서 지냈다.
그러던 중 무신의 난이 일어나자 고희를 넘어선 북오는 분연히 의성의병대장이 된다.
선대 만취당이 실행해온 나라사랑과 어려운 이웃의 보살핌이 있었던 집안의 내력이 그의 피에 맥맥히 흘러 왕을 직접 경호한 무관으로 살아온 충성심과 하나가 되어 의기로운 행동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로부터 다시 170여 년의 세월이 지날 무렵 온 나라에 또 한 번의 위난이 홍수처럼 들이닥친다.
동서의 문물이 충돌하여 소용돌이의 장이 되었던 1895년 10월, 일본군에 의하여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전국의 유생들이 근왕창의(勤王倡義)의 기치를 내걸고 항일의병을 일으킨다.
영남 곳곳의 선비들도 자원하여 의진을 조직하는데 만취당의 11세손, 운산 김상종도 분연히 일어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리라 맹세한다.
운산은 다만 문약한 서생이 아니었다.
학문과 현실을 균형 잡아 나가려 한 실천적인 유인이었다.
마침내 운산은 그 뜻을 밝히는 격문을 돌리고 사재를 털어 의인들을 규합하기로 한 것이다.
/…돌아보건대… 임진난 때 왜병을 물리친 것은 소모(召募)의 힘 덕분이었고 종묘사직을 유린하던 무신난 때는 의리를 규합하여 나섰도다.
지금 또한 섬 오랑캐가 중외에 창궐하는데 모름지기 사람이라면 부모에게 받은 은공에 보답해야 하지 않겠는가. 간특한 무리가 조야에 퍼져있으니 국가의 권위가 땅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적당을 섬멸하고 괴수의 목을 잡아올 날 어찌 없겠는가.//
1896년 병신년 2월, 의성향민들은 의성학교에서 창의를 선언하고 운산을 의병장으로 추대한다.
그러자 운산의 집안은 비통에 빠진다.
만취당의 위패를 모신 후산사에 들려 알묘를 하고 나오는 운산을 가족들이 에워싸고 거병을 말리며 통곡을 하지만 운산은 조금도 미동을 하지 않는다.
“어머니 아버지, 후사를 두지 못한 저의 불효를 용서하십시오. 그러나 이제 나와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이 모두 내 형제와 자식이 되어 줄 것입니다.
임란 때는 만취당 할배가 의창을 열었고 영조조의 오위장 할아버지가 또한 충정의 칼을 빼 들었습니다.
나도 창검을 들고 일본의 앞잡이가 된 관적들을 배격할 것입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운산은 의성의 관문인 구성산에서 관군과 맞선다.
안동지역의 의병을 소탕하고자 북상하려던 관군과의 접전에서 대승을 거둔 것이다.
이어 3월 하순, 사촌마을 동편의 황산에서 대구지역의 관군 150여 명과 격전을 벌이게 된다.
전의에 불탄 의병들은 산골짝에 숨어 일제를 앞세운 관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봄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이었다.
궂은 날이 달갑지 않았다.
장비가 부족한데다 화승총에 물이 새어들어 격발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그날 전투는 27명의 대원이 토해낸 핏빛으로 황산골을 붉게 물이고 만다.
크게 전상을 입은 운산도 몸을 피해야 했다.
관군은 사촌마을을 그냥 두지 않는다.
“의병장을 찾아라. 마을을 모조리 불 살라버려라” 마을은 수일 동안 불바다가 되었다.
400여 년을 지켜오던 기와집은 물론 많은 전적들이 소실되는 참변을 겪는다.
이 사건을 두고 마을 사람들은 ‘황산참혹의 변’이라 한다.
비록 패했지만 운산은 다시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이천 의진과 연합하여 여러 전투를 거듭한다.
이승과 저승, 승패의 경계를 넘어설 즘 의병진을 해산하라는 국왕의 명령이 내려지자 의병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관군으로부터 쫓기는 몸이 되고 만다.
졸지에 역적이라도 된 듯 운산은 몸을 숨긴 채 몇 해를 전전하다 고향으로 되돌아오지만 사촌의 옛 모습은 다시 찾아볼 수가 없었다.
운산의 큰 집채는 잿더미로 변해버렸고 무너져 내린 담벼락과 폐허가 된 마당가에는 강아지풀이 자부록하게 돋아나 있었다.
잿내가 코를 찌르고 통한의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리고 운산은 회향한 그 1년 후인 1908년, ‘충렬로 담장을 삼고 실상을 구하는 것으로 집을 이루었네’라는 묘갈명을 남진 채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렇다.
가리쑤가 마을을 가리고 집집이 쌓아올린 토담이 가옥을 지킨 것이라면 의기로 축조한 충렬의 담은 나라를 두른 청사의 큰 담이리라.
그의 충절은 뒤늦게야 평가된다.
1990년에 독립유공건국훈장이 추서되고, 2009년에는 황산전투에 참전했던 의병의 후손들이 힘을 모아 ‘병신창의기적비’를 세워 그 넋을 기리고 있다.
사촌마을에는 세한에도 지지 않는 구국의 무궁화 꽃이 늘 피어 있는 것 같다.
역사의 전환기마다 의성의병을 주도했던 의기의 뿌리는 그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 것일까. 선대가 남긴 의로운 족적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서 자란 가학에서 비롯된 것일까. 처음 이 땅을 일구어 낼 때 다진 초심을 세세손손 지켜나가게 한 올곧은 내림의 기운에 머리를 조아리게 된다.
송은은 가훈 10조를 만들어 전가토록 했는데 그 두 번째가 보군(나라사랑 실천)이라 하니 숭고한 충의의 뜻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김정식
담나누미스토리텔링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