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10,5)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10,5)라는 현판은 신자 가정을 방문할 때 가장 먼저 눈에 뜨입니다. 그리고 교회 입교하려는 예비자와 오랜 신앙생활을 하신 신자 분들의 한결같은 대답은 바로 신앙생활 곧 교회를 다니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평화를 얻기 위해서라고 응답합니다. 그러면 이 모든 분은 참으로 평화로우며, 삭막한 세상 한가운데서도 평화를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라는 의문이 듭니다. 여러분 가정의 현관에 붙어있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서 집에 나갈 때와 들어올 때마다 성찰해 보십시오. 절의 일주문一柱門의 의미가 본래 청정한 도량에 들어가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말끔히 씻고 일심이 되어야 한다는 뜻처럼 집에 들어올 때마다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라는 현판을 보면서 나와 내 집에 주님의 평화가 깃들이지 못하도록 저해하고 방해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비우면서 주님의 평화가 머물도록 마음을 되잡는 순간을 갖길 바랍니다. 이는 곧 우리가 참 평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체험하며 살지 못하고 있다면 어떻게 세상의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 평화를 전하고 평화를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평화를 말하고 전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이 평화를 체험하고 평화를 살려는 마음을 간직하는 게 파견된 제자들의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일흔두 명의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이는 곧 그만큼 선교지역이 넓어졌고, “수확할 것이 많아졌기”(10,2)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예수님은 열두 사도들을 파견한 1차 선교 여정과 거의 동일한 여장 규칙 곧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10,4)는 당부와 함께 파견 임무를 주십니다. 물론 파견될 선교지의 여건은 마치 이리 떼가 득실거리는 험악한 곳이며 이런 곳에 파견될 제자들은 어린 양에 비유하신 것은 같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맡겨진 파견 임무는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그곳 병자들을 고쳐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10,8)고 선포하는 일입니다. 이는 곧 거룩한 활동과 말씀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예수님 당대 제자들의 역할이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변하지 않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이렇게 제자의 파견 소명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은 “어떤 집에 들어가든 먼저 평화를 빌어주는 것”(10,5참조)입니다. 그 어떤 집이란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가난한 처지와 상관없이 먼저 따뜻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인사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 “평화의 인사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과 그 사람 위에 머물 것이다.”(10,6)하고 예수님은 당부하십니다. 제자들의 평화는 바로 자신들을 파견하신 예수님의 평화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일꾼은 바로 그리스도의 평화의 사절이기 때문입니다. 음식을 대접한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를 자신에 집으로 환영하고 환대한다는 것이기에 이는 곧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예수님과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행위와 같습니다. 평화란 속마음에 갖고 있던 보이지 않은 무장을 해제한다, 는 표현임을 저는 파푸아 뉴기니와 인도네시아의 정글에서 만난 원주민을 통해서 체험했습니다. 밥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친구로 받아들이며 친구 사이에는 분쟁과 불목이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파견된 제자들에 대한 거부 행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곧 하느님과 복음을 거부하는 행위와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견된 제자들은 단지 거부하는 집이나 고을을 향해 폭력 행위가 아닌 “자신들의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 버림”(10,11)으로 끝나지만, 그들에 대한 거부는 하느님에 대한 거부이기에 마치 심판으로 멸망한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10,12)라고 심판을 경고하십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집과 고을에 대해 제자들처럼 평화의 사절로 파견된 모든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복음 거부에 대한 경고로 고작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 버리는 일일지 모르지만, 훗날에 그로 인한 엄청난 심판은 하느님으로부터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파견된 그리스도인은 그런 상황에서도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라고 끝까지 평화를 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평화의 사도였던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