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 21,28-32
세례자 요한이 가르친 ‘의로운 길’이란?
오늘 복음은 두 아들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 둘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합니다.
맏이는 싫다고 했지만, 마음을 바꾸어 일하러 나갑니다.
둘째 아들은 처음엔 좋다고 했지만 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결론지으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마태 21,31-32)
여기서 예수님은 요한이 알려준 ‘의로운 길’을 믿고 안 믿고에 따라 하느님 뜻에 순종하고 순종하지 않는 상황이
벌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하느님 뜻을 그냥 따르면 되지 굳이 요한을 만나서 그가 알려주는 방법을 믿고
따라야만 할까요? 그 이유는 인간 스스로는 하느님 뜻을 따를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요한이 알려준 ‘의로운 길’이 무엇일까요?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을 그리스도께 이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어린양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피를 흘려 문설주에
발라져야 하고 살이 먹혀야 하는 운명입니다.
곧 이스라엘 집과 살과 피로 하나가 되는 운명을 말합니다. 이것으로써 죽음을 면하게 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하신 말씀과 이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된다는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을 묵상합시다.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살려고, 율법과 관련해서는 이미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 2,19-20)
왜 율법을 지켜야 하는데 율법을 지키려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할까요?
그 이유는 그래서는 율법, 곧 하느님 뜻을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나 대신 살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뜻입니다.
요한은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처럼 자기 힘으로 하느님 뜻을 실천하면 안 되고 그리스도가 되어야만
하느님 뜻이 실천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행위를 중요시하는 유다인들은 요한을 믿지 않았지만, 오히려 죄인들이 요한의 말을 듣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는 믿음으로 구원의 길을 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나라 스윙댄스의 대표주자인 김잔디 씨 이야기입니다.
스윙댄스는 째즈 음악을 춤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음악이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뜻을 내 몸으로 담아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작정 배우면 될까요? 김잔디 씨는 처음에 남성들과 경쟁하는 업체에서 상도 많이 받고 잘나가는
직장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스트레스가 너무 심하여 몸이 안 좋아졌습니다.
친구는 몸치, 박치였던 잔디 씨를 믿어주며 “얘는 챔피언이 될 애예요”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거의 남성 혐오증에 시달리던 잔디 씨는 남성들과 땀을 흘리며 손을 잡고 춤을 추어야 하는 스윙댄스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누군가의 믿음, 또 자신도 챔피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3년 동안 댄스를 배웁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챔피언이라는 증명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직장을 때려치우고
영어 한 마디도 못 하며 미국으로 건너가서 스윙댄스 대회에 참가합니다.
이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복장도 있어야 하고 준비된 음악과 남성 파트너,
그리고 잘 짜진 안무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다행히 자신과 파트너가 되어주겠다는 키다리 아저씨를 만납니다.
그 미국인은 김잔디 씨가 어떤 복장의 옷을 입었는지, 그가 어떤 박자를 원하는지 딱 두 개만 묻습니다.
그리고 청바지를 입으면 안 되는 규정이 있음에도 자신도 청바지를 입고 키 작은 김잔디 씨를
자기 코트 안으로 들어오게 한 다음 무작정 무대로 던져버립니다.
얼떨결에 무대로 튀어나온 김잔디 씨는 어떻게 춤을 추었는지에 대한 기억도 없이 무아지경으로 춤을 춥니다.
그리고 첫 국제대회에서 1위를 수상합니다.
째즈 음악을 춤으로 표현하려면 먼저 내가 그럴 자격이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하지만 체력장 5급 받은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서 세례자 요한의 역할이 필요합니다.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의 친구가 그랬고 처음 자신에게 용기 있게 춤을 춰 달라고 해도
믿어주고 함께 맞춰주었던 키다리 아저씨도 그러했습니다.
10년 차 때 돈이 안 되는 이 춤을 포기하려고 했을 때 90세가 넘은 스윙댄스의 전설인 노마 밀러라는
키작은 흑인 댄서의 말도 그녀를 다시 일어서게 하였습니다.
우리가 말로만 하느님 뜻을 따르겠다고 하며 따를 수 없는 이유는 자기 능력을 믿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믿음을 주는 사람입니다. 내가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믿음이 없으면 무아지경,
곧 나를 버리고 노마 밀러가 되어 춤을 출 수 없습니다. 교회가 이런 역할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하면 하느님 뜻을 따르는 사람은
교회에 하나도 남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영화 ‘토르: 라그나로크’(2017)에서는 토르는 헬라라는 엄청난 힘을 지닌 여왕과 싸웁니다.
헬라의 힘은 너무나 강력해서 토르를 압도합니다. 토르는 망치의 신이었습니다.
하지만 헬라가 망치를 부수어버립니다. 토르는 망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는 망치 없이는 이길 수 없다고 믿습니다.
지금까지 너무 자기 망치에 의지해왔기 때문입니다. 헬라는 말합니다.
“나는 죽음의 신이다. 너도 무슨 신이긴 했었지?”
그런데 돌아가셨던 아버지가 나타나 이렇게 묻습니다.
“네가 망치의 신이었냐?”
토르는 사실 천둥과 번개의 신입니다. 망치는 그저 그 힘을 제어하는 도구였을 뿐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한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분명 그분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서는
어떤 도구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은총’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힘은 내 안에 계신 바로 그분에게서 나옵니다.
우리에게는 은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은총으로 나와 하나가 되시는 하느님이 필요합니다.
은총으로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잉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성모 마리아께서 가브리엘 천사를 만나신 것처럼 우리도 믿음을 주는 누군가를 만나야만 합니다.
그것을 각성하게 해 주는 누군가를 만나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를 수 없습니다.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불가능하다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도구를 찾기보다는
내가 가능한 존재임을 믿게 만드는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은총은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라는 믿음을 가지게 만드는 도구일 뿐입니다.
내가 말씀이 되어야 하느님 뜻이 나를 통해 이뤄집니다. 이것이 순종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은총이 가득하신 채로, 하지만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지 않으신 채로 엘리사벳을 방문하셨다면
엘리사벳에게 어떤 도움이 되셨을까요? 인간적인 도움을 되실 수 있지만
하느님의 도움, 곧 성령으로 가득 차게 만드시는 그런 도움을 주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노력만으로는 안 됩니다. 둘째 아들이 노력으로 하려고 하다가 포기하는 상징입니다.
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며 말씀에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가 된다는 사실을 그저 자기암시로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야곱은 레베카의 말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하느님 말씀을 감당한 능력이 있음을 먼저 믿어야 합니다.
개가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따르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느님임을 믿지 않으면 하느님의 말씀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하느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존재는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말씀이 나를 통해 일하게 할 때 내가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로운 길입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먼저 되어야만 하느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