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운주사 천불천탑
김준경
그 누구도 시키지 않았고 그 누구도 떠밀지 않았다
저마다 한손에 정을, 다른 손에 망치를 들고 찾아왔다
운주계곡 조용한 골짜기를 따라 돌을 쪼는 소리가 이어진다
하나의 고통을 담아 한번의 망치질, 하나의 괴로움을 담아 쌓은 한층
사바세계로부터 깎여나간 마음 부여잡고 눈앞의 돌을 깎아 나간다
참아낼 수 없는 아픔을 돌위에 올려 깎아서 내버리면 눈이 나오고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돌위에 올려 깎아서 내버리면 귀가 나오고
벗어날 수 없는 원망을 돌위에 올려 깎아서 내버리면 입이 나온다
고해의 파도 속에서 멈추지 않고 들리는 돌 쪼는 소리
고통이 모여 돌을 가루로 만들고 괴로움이 쌓여 탑을 이룰 무렵,
돌속에서 웅크려 있던 부처님이 들꽃같이 환하게 피어난다
풀내음을 품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 앞의 민초를 맞이한다
투박하고 하찮아 보이지만 그렇기에 누구보다 가까운 그 모습
그 거친 어깨 끌어안고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 조용히 울고 싶다
고해의 파도에 깎여나간 마음 쥐어짜내 입술 깨물고 울고 싶다
마음의 부스러기가 섞여 나온 눈물을 부처님께서 가사자락으로 닦아주면
지나간 괴로움을 땅에 내려놓고 다가올 염원을 부처님께 올린다
염원이 모여 천개의 석탑이 되었고, 천분의 석불이 되었다
천가지 괴로움과 천가지 염원으로 세워진 민초들의 작은 불국토
같은 모양없이 저마다의 모습으로 저마다의 위치에 서서 정토세계를 꿈꾼다
-심사위원; 유자효 시인· (사)한국시인협회장
[심사평]당선작은 작품의 완성도 높아
올 불교신문 신춘문예의 시‧시조 부문 응모작은 1500여 편에 이른다 한다. 이 엄청난 양의 응모작 가운데 예심을 거쳐 선자에게 넘어온 작품은 106편이었다. 10대1이 넘는 경쟁을 거친 셈이다. 선자는 한 편 한 편 꼼꼼하게 읽어 10편을 가려냈다. 역시 10대1이 넘는 경쟁을 거쳐 선정된 작품은 ‘빈자일등’, ‘돌확 발우’, ‘갠지스를 배회하는 불빛’, ‘구석골 동석이’, ‘소금 꽃’, ‘저녁 강’, ‘술래잡기’, ‘나를 만나러 가는 길’ 등이었다. 이 작품들을 다시 읽어 마지막으로 남은 작품은 시조 ‘석등’과 시 ‘운주사 천불천탑’이었다.
시조 ‘석등’은 정형을 잘 지키고 있고, 오랜 습작의 공력이 느껴졌다. 그런데 ‘탯줄의 행렬’, ‘고샅길 펼쳐들고’ 같은 표현이 작품의 신선미를 떨어뜨리는 아쉬움이 있었다. 현대시조의 어려움 가운데 하나가 정형율을 지키다 자칫하면 표현이 진부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시절가조라는 시조 본래의 명칭처럼 현대시조는 현대인의 정서를 담아야 한다.
시 ‘운주사 천불천탑’은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 ‘아픔’과 ‘분노’, ‘원망’을 ‘깎아서 내버리면 눈’과 ‘귀’ ‘입이 나온다’는 표현, ‘고통이 모여 돌을 가루로 만들고 괴로움이 쌓여 탑을 이룰 무렵,/돌속에서 웅크려 있던 부처님이 들꽃같이 환하게 피어난다’는 표현은 크게 새롭지는 않아도 적확하다. ‘운주사 천불천탑’을 ‘천가지 괴로움과 천가지 염원으로 세워진 민초들의 작은 불국토’라고 본 끝부분의 표현은 이 작품의 완결성을 높여주었다.
두 작품을 들고 오래 고심하다가 당선작은 한 편이라는 주최 측의 방침에 따라 ‘운주사 천불천탑’을 당선작으로 하였다.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보내고 마지막 관문에서 아쉽게 탈락한 분들은 더 좋은 작품을 쓰는 계기로 삼아주시길 당부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