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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림절 넷째 주일 낮 예배 설교 +
+ 제 목 : “예수오심!(4) - 주의 은혜로 눌린 자를 자유하게!”
+ 본 문 : 누가복음 4장 16절 – 22절 (신약 93쪽)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22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아멘!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선포하겠습니다.
나는 복의 근원으로 살리라. 그러므로 나는 축복의 통로로 살리라.
나는 나눔의 통로로 살리라. 나는 섬김의 통로로 살리라. 아멘! 아멘!
“인사만 잘 해도 먹고 산다.”
반미고잘 / “반갑습니다.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잘 했습니다.”
“친절인사!” - “나는 김대용목사입니다.”
오늘은 대림절 넷째 주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에 대해서,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인 이사야 61장 1절부터 4절 말씀을 인용하신,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주일에는 마지막 말씀으로
“예수님의 오신 네 번째 주의 은혜의 해로 눌린 자에게 자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선포합니다. “오신 예수님을 믿는 나는 / 모든 눌린 것에서 / 자유하리라. / 아멘!”
우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도무지 오실 수 없으신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반드시 오신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구를 방문하신 것은 뉴스 중에 뉴스입니다.
왜 오셨나요?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의 입으로 친히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오신 목적을 확실하게, 네 가지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시려고 / 눌린 자를 자유하게 하여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시려고”
오늘은 그 네 번째 “눌린 자를 자유하게 하여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무엇에 눌려 있습니까?
첫째로, 우리 예수님은 열등감에 눌린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열등감에 대하여 많은 연구를 한 - 말츠라는 분의 말을 빌리면 94%의 사람들이,
열등감에 눌려 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작든지 크든지 열등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열등감에 사람들은 눌려,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까지도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이렇게 열등감에 시달린 성경 속의 대표적인 이야기를, 민수기 14장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한 후 광야에서 살면서, 가나안을 향하여 행진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자기들이 들어갈 땅을 탐지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정탐을 반대했습니다.
어차피 하나님이 주시기로 작정하신 땅이기에, 그냥 가도 하나님이 주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막무가내였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모세는 열두 명의 정탐군을 보냈습니다.
모세는 한 지파에 한 명씩 모두 열두 정탐군을, 가나안 땅에 파송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민수기 13장 17절 – 20절 말씀입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그들을 보내어 이르되,
너희는 네겝 길로 행하여 산지로 올라가서, 그 땅이 어떠한지 탐지하라. 곧 그 땅 거민이 강한지,
약한지 많은지 적은지와 그들이 사는 땅이 좋은지 나쁜지와 사는 성읍이 진영인지 산성인지와,
토지가 비옥한지 메마른 나무가 있는지 없는지를 탐지하라. 담대하라. 또 그 땅 실과를 가져,
오라 하니 그 때는 포도가 처음 익을 즈음이었더라.” 아멘! - 12명이 40일간 정탐하고 돌아와,
먼저 10명의 정탐꾼이 보고하였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맞지만,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크며, 그 땅 주민은 거인족속인 아낙 자손이요.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았다.“ 고 부정적으로 말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죽이려고 덤벼들었습니다.
이 때 여호수아와 갈렙 두 정탐꾼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그러므로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니 그들을 두려워 말라.”(민 14;7-9)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을 밥이라고 말했으나, 열 정탐군은 우리는 메뚜기 같다고 말했습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도 메뚜기 의식인 열등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의 약점을 보고 상대방의 장점을 보면서 자기 비하를 시킬 때 열등감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렇게 열등감에 눌린 사람들에게 자유함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사람은 열등감이 우등감으로, 약점이 강점으로 바꾸어집니다.
삭개오의 열등감은 키가 작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뽕나무위로 올라갔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모세는 항상 말이 둔하다는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시떨기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에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훌륭한 지도자로 우뚝 섰습니다. 그의 열등감이 우등감이 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들린 여자였고, 창녀였습니다. 그래서 열등감에 눌려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성녀가 되었습니다. 십자가 밑에서 가장 많이 울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가장 먼저 만났습니다. 약점이 장점으로, 열등감이 우등감으로 바뀌었습니다.
아람의 나만 장군도 그렇습니다. 그는 국방부 장관이었습니다. 그러나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그는 불치병 열등감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병의 열등감 때문에 이스라엘로 들어가,
엘리야 선지자를 만났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열등감이 있고, 열등감을 건드리면 아파합니다. 죽일 정도로 아파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열등감을 가지지 않은 것처럼, 포장지로 자신의 인생을 곱게 싸고 살아갑니다.
10명의 정탐군이 가나안을 보니 그 성은 철옹성이요. 거기 사는 사람들은 거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당시로서는 첨단 무기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기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공격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과 비교하는 메뚜기 의식,
열등감에 빠져서 좌절하게 됩니다. 이렇게 열등감에 빠져 좌절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일으켜,
세울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우리는 메뚜기가 아니다. 우리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이긴다.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 그렇게 열등감을 떨쳐버렸던 여호수아와 갈렙만 가나안 땅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기적같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고,
갈렙은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외치며 가장 정복하기 어려운 헤브론 산지를 정복하였습니다.
그러나 열등감에 싸여 부정적인 말을 한 열 명의 정탐꾼들은 물론, 그 말에 동조한 사람들은,
한 사람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를 못하고, 불평하던 땅,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열등감은 이렇게 나를 망하게 만들고 맙니다.
그러므로 열등감을 떨쳐 버려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렇게 열등감에 눌려 좌절하는 자에게,
자유함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열등감을 떨쳐 버리고 일어서십시오. 반드시 승리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못난 자신 때문에 열등감에서, 예수님이 주신 자유함으로 해방되십시오.
둘째로, 우리 예수님은 스트레스에 눌린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현대인을 가장 힘들고 고통스럽게 하며, 영혼도 마음도 육신도 병들게 하는 것이 스트레스입니다.
스트레스에 눌리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만큼 스트레스는 모든 사람에게 심각합니다.
스트레스로 인하여 입는 기업의 손해는, 노사분규로 인하여 일하지 못 하여 입는 손해보다,
무려 30배가 넘는다는 놀라운 보고가 있습니다. 그런데 스트레스에는 두 가지 별명이 있습니다.
하나는 “무언의 살인자” 라는 별명입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슬비인 데 한참을 맞다보면 속옷까지 적셔집니다.
스트레스가 조금 조금 쌓이다 보면 병이,
깊어 어느 덧 돌이킬 수 없는 사망의 문턱까지 와 있게 됩니다. 앗차! 하는 순간 이미 늦습니다.
스트레스의 징조가 있습니다. 불안, 초조, 불면, 위장장애, 두통 등이 스트레스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스트레스의 또 다른 별명이 있습니다. 스트레스는 인생의 양념입니다. 반찬에 양념이 없으면,
맛이 없습니다. 어떤 학생은 시험에 쫓기는 스트레스가 있을 때가 공부가 잘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사업가는 남의 사업이 잘 되어 스트레스를 받을 때가, 가장 사업을 열심히 하게 된답니다.
그래서 스트레스는 인생의 양념입니다. 스트레스가 있어야 합니다. 이같이 스트레스는 이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트레스가 문제가 아니라 스트레스를 이기는 것이 문제입니다
스트레스를 이기고 살아가려면, 하나님이 나와 항상 같이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에게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 아버지는 주시는 분임도 믿어야 합니다.
언제나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맑은 시냇물가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럴 때, 안 되는 것 같은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과 달리 한 차원 더 높은 기적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문제가 생기고, 아픔이 일어나 스트레스가 쌓여도 오직 믿음을 가지고,
한 차원 높이 올라가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스트레스에 눌린 자들을 자유케 하려고 오셨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한 마리의 고기도 못 잡은 밤,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시간에,
예수님을 만나 깊은 곳에 그물을 던져 만선의 기쁨으로, 모든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려 버렸습니다.
모세도 그랬습니다. 앞에는 홍해, 뒤에는 바로의 군대 – 완전 포위된 상태의 스트레스를 받았고,
거기에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잘못 인도하였다고 죽이려고 할 때, 하나님이 홍해를 갈랐습니다.
그렇게 스트레스를 한 방에 다 날려 버리고, 출애굽의 지도자로 확실하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우리 예수님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열등감과 스트레스로 눌린 너희를 자유하게 하려고,
이 세상에 왔다. 그러므로 수고하고 무거운 모든 짐으로 눌린 자들아 다 내게로 와서 자유하라.“
셋째로, 우리 예수님은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은혜의 해를 선포하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은혜의 해는 히브리어로 주빌리” - 희년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희년을 이루려고 오셨습니다.
희년이 무엇입니까? 레위기 25장에 보면, 희년은 자유를 얻어 자기 기업으로 돌아가는 해입니다.
노예생활을 끝내고, 하나님이 주신 기업인 가나안에서 분배받은 땅으로 돌아가는 해입니다.
그리고 희년은 노예로 흩어졌던 가족들이, 분배받은 땅에서 다시 만나 가정을 이루는 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아담과 하와에게,
먼저 땅을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가정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가정이 파괴됩니다.
가난하게 살다보니 빚을 지게 되고, 그 빚을 갚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종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희년이 되면, 조건 없이 종에서 자유함을 얻어 각기 가족에게도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아들을 바라던 어느 가정에서 첫 딸을 낳자, 그 딸의 이름을 “일가” 라고 붙였습니다.
한 명 정도는 가하다는 의미입니다. 둘째가 또 딸입니다. 그래서 “이혹” 이라 이름지었습니다.
다음에는 혹시 아들일 수도 있다는 기대의 의미입니다. 그런데도 세 번째 또 딸을 낳았습니다.
그러자 “삼소” 라고 이름을 지어 불렀습니다. 세 번째도 나를 웃겼다는 실망의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네 번째도 딸을 낳아버렸습니다. 그러자 그 아버지는 딸이 넷이나 되어 남보기에 부끄럽다고,
“나치” 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같이 이름에는 뜻이 있고, 부모의 소원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을 하나님이 붙이실 때에도, 하나님의 소원이 그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라는 헬라어는 여호수아라는 히브리어와 동일합니다. 희년의 나팔소리를 크게 울리게 되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점령하고 분배했던, 여호수아의 사역,
하나님이 제정하신 희년에는 그 분배받았던 땅을 도로 되찾아 경작하게 하였던 여호수아의 사역,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자유하게 하셨던 것처럼, 희년에는 자유를 얻게 한 여호수아의 사역은,
우리 예수님께서 속죄의 십자가와 영생하는 부활로 완성하실, 자유와 해방의 모형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희년을 선포하시고, 그 희년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죄 사함 받습니다. 구원을 얻습니다. 영생도 얻습니다.
주님이 친히 예비하신 천국도 영원한 기업으로 우리가 받게 됩니다. 이게 주의 은혜의 해입니다.
그리고 우리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완전한 희년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완전한 주의 은혜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바로 이런 주의 은혜의 해를 - 우리에게 전파하게 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희년 선포는 우리 편에서는 은혜와 은총으로 거저 받은 은혜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영광스러운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셔야만 했습니다.
편안한 요람이 아니라 말구유에 누이셔야만 했습니다. 가난한 나사렛 동네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30세가 되어 인류를 구원하는 공생애 사역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멸시와 천대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거저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예수님이 다 치루어야 했습니다. 이 모두가 다 은혜입니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린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찬양합니다.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네 번에 걸쳐 말씀드린,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을 정리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물질로 가난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려 오셨습니다.
질병으로 가난한 우리에게, 치유와 회복으로 건강한 몸과 삶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마음으로 가난하여 염려와 근심하는 사람들에게, 평안한 마음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유한한 생명을 가진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예수님은 사탄의 포로가 되어 종노릇하는 죄인 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고,
사탄의 포로가 되어 사이비 종교에 빠지고, 돈에 욕심 부리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고,
영원한 천국 백성의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도록 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그늘진 곳의 이웃들이 보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 보이고,
천국이 보이고, 할 일이 보이는 우리가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열등감에 눌리고, 스트레스에 눌린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주시어서,
오직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도록 하시기 위서,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렇게 오신 우리 예수님을 기쁨으로 영접하는 성탄절이 되고, 다시 오실 재림 예수님을,
영적 신부단장하고 맞이 할 수 있기를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