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의
기로에 선
독립투사 김 원 봉
-그는 왜 공산주의자가 되었나?
글,편집: 묵은지
일제 강점기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훌륭히 항일투쟁을 한 독립 운동가들의 명성과 업적들은 대부분 우리들에게 잘 알려졌지만 지금까지도 이름조차 생소하면서 그 어떤 누구보다도 '무장투쟁'으로 우선했던 전설적인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김원봉'입니다. 김원봉은 그가 이룬 항일투쟁사의 커다란 족적에도 불구하고 후세 사람들에겐 별로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자신이 선택한 공산주의자라는 이데올로기의 냉정한 결과로 말미암아 그의 빛나는 항일 투쟁사가 캄캄한 어둠속으로 날아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1917년에 러시아에서 일어난 '볼셰비키 혁명'은 때아닌 공산주의 바람으로 불어닥쳐 그 당시의 김원봉에게는 그럴듯한 새로운 사상으로 받아들여져 이념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한 그의 공산주의 사상적인 행적은 남다른 독립투사로서 큰 활약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남북한 양측에서는 항일 공적은 커녕 기피 인물로만 평가하였는데 남한 쪽에서는 그가 해방 이후 북한 정권 수립에 적극 가담한 공산주의자로 지목하였고 북한에서는 정적인 김일성에게 숙청당한 반역자로 낙인찍혀 어느 한 쪽에서도 인정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북한은 그를 반역자로 몰아 처형하였고 그의 가족들까지 생사를 확인 할 수 없으며 남한은 남한대로 얼마전까지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김원봉이라는 이름 석자를 독립 운동가 명단에 감히 올리지도 못하였습니다.
김원봉은 1898년 9월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으며 경성에 있는 중앙중학교(현재의 종로구 계동 소재)를 다니다 일본의 식민지 정치가 노골화 되자 학교를 중퇴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난징 금릉대학과 만주 신흥무관학교를 다녔습니다. 그사이 국내에서는 1919년 비폭력투쟁인 '3.1만세운동'이 일어나 일본에 항거하였고 이에 일본은 잔학한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많은 희생자와 피해를 발생하게 하였는데 김원봉은 이에 자극을 받아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본격적인 항일 무력 행동을 펼칠 것을 결심하게 되었고 3.1운동이 일어나던 그해 11월, 상하이에서 '의열단'을 조직하였습니다. 김원봉은 자신이 단장을 맡아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 '경찰관서' 등 일본의 주요 시설의 파괴와 일제침략의 주요 인물이나 친일파를 암살 할 계획을 세우는 등 항일투쟁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는데 사실 김원봉 자신이나 의열단원들 대부분이 무기를 다룬적이 없거나 실전 경험이 부족하다보니 의욕적으로 거사를 계획하고 행동하였어도 성공한 것에 비해 실패하는 일이 빈번하였습니다. 이에 김원봉과 의열단원들은 부족한 전투능력을 키우기 위해 보다 체계적인 군사교육을 받고자 1926년부터 광저우에 있는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가 설립한 '황포군관학교'에 입교를 하여 본격적인 군사교육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나라의 독립을 위해 노심초사 몸바쳤던 김원봉은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시기에 찾아든 이데올로기의 갈등으로 공산주의에 물들면서 자신의 항일투쟁 방향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는데 군사교육을 받고난 그가 군대를 조직하여 한창 항일투쟁 활동을 펼치던 시기에 중국 대륙에도 국민당의 극심한 부패로 공산당의 바람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었으며 김원봉 역시 이들과 함께 항일투쟁 활동을 하게되어 그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입니다. 김원봉은 처음 조직적으로 무장 항일투쟁을 시작할 즈음에는 국민당의 장제스에게 군사교육을 받고 전투지원을 받았지만 국공내전까지 이어지는 과정에서 중국 공산당에 합류하게 되었고 그들의 지원속에 일본군과 대항하며 전투를 수행하였으며 이즈음 김원봉은 중국 공산당원들과 어울리면서 자연스럽게 공산주의 사상에 많이 물들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의 강렬한 투쟁심으로 보아 항일정신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일어날 것 같지 않았지만 이 와중에도 김원봉은 사랑이 찾아들었는데 의열단 시절 첫 부인과의 실패 이후 의열단에서 함께 활약하던 맹렬여성 박차정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일신여학교(동래여고 전신)를 나온 박차정은 집안 모두가 독립운동에 뛰어든 탓에 일찌기 자신도 같은 길을 걷게 되었는데 그런 박차정에게 김원봉은 무한한 사랑을 느끼게 되었고 특히 그녀의 활발한 성격과 투철한 애국정신은 김원봉을 한층 매료 시켰던 것입니다. 김원봉은 박차정에게 자신과 함께 조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같이 할 것을 굳게 약속하며 1931년 대원들의 축하속에 진중에서 결혼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박차정은 1939년 장시성 쿤륜산에서 일본군과의 전투 중에 큰 부상을 입게 되었고 그 후유증으로 그토록 염원했던 조국의 해방을 느껴 보지도 못하고 1944년 충칭에서 안타깝게도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박차정은 '조선민족전선연맹'이 중국과 연합하여 새로운 무장세력인 '조선의용대'를 구성하자 '부녀복무단'을 설치하여 단장을 맡으며 여군으로서 항일 전투에 열렬히 가담하였습니다. 그러던중 일본군과의 전투로 부상을 당하게 되었고 빈약한 실정에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결국 그녀 나이 34세의 젊은 나이에 조국의 해방을 보지도 못하고 숨을 거두었던 것입니다. 이듬해인 1945년 조국이 해방되자 그 해 12월, 김원봉은 그녀의 유해를 송환하여 고향인 밀양의 '송산 공동묘지'에 안장 시켰으며 박차정 역시 여성으로서 일제에 무장투쟁으로 항거한 독립투사임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에서는 공산주의자였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의 명부에 오르지 못하다가 1995년에 와서야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습니다.
김원봉이 항일 무장투쟁 당시, 일본은 임시정부의 김구 보다도 더 큰 엄청난 액수의 현상금을 걸어 잡으려 했을 정도로 일본은 그를 몹시 골치아픈 존재로 여겼는데 그의 항일 무장투쟁은 강성 노선 일변도로 매우 실천적으로 다양하게 활동하였습니다. 김원봉은 중국 상하이에서 '의열단'을 조직하여 활동을 하였고 군사교육을 받은 그후에도 후베이성, 화북지역을 무대로 '조선민족혁명당'이나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여 일본군과의 격전을 끊임없이 감행하는 등 자신의 강렬한 항일투쟁에 대한 의지를 가감없이 보여주었던 사람입니다. 특히 같은 공산주의자였지만 김원봉은 김일성과는 그 발자취가 달랐는데 만주지역에서 항일운동을 한 것으로 알려진 김일성(한편에선 소련군 장교로도 알려짐)은 조국의 해방과 더불어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려는 자신의 분명한 야망을 지니고 있었는데 반해 김원중은 그런 김일성을 싫어하는 오로지 일본의 압제로부터 조국과 민족을 해방 시켜야 한다는 목적만을 이루려했던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에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김원중은 임시정부내에서 우익계열과 좋은 사이도 아니었는데 항일전선을 펼치는 과정에서 같은 광복군 소속임에도 좌우익이 갈려 있었으며 좌익계열의 김원봉은 우익의 지청천 장군 계열과 사사건건 마찰을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조국이 광복을 찾게되자 이들은 그동안의 활동을 정리하고 각기 자신들의 조직을 앞세워 조국으로 돌아와 독립된 국가로서의 건국을 위한 새로운 계획들을 세우기 시작하였습니다.
한반도는 위치상으로 동아시아의 중요한 교두보로 인식되었고 일본이 패망한뒤,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를 둘러싼 전후 패권주의와 이를 앞세운 대외 전략에 대처하려는 서로간의 정략적인 계산 끝에 북위 38˚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을 나누어 군정을 실시하자는 담합을 하였습니다. 이들이 의도한대로 군정은 곧바로 실시되었고 그동안 우익과 좌익으로 나뉘게된 남과 북은 건국이라는 대 과제를 앞에 두고 서로 한치의 양보없이 첨예한 대립을 하였으며 '반탁'과 '찬탁'의 확연한 견해차로 서로를 탓하고 비방하더니 각기 노골적으로 따로 정부를 세우려는 속내를 비추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뜻있는 몇몇의 인사들이 양쪽 군정을 하루빨리 종식시키고 새로운 정부를 세우고자 좌우익을 오가며 노력을 하였지만 좌우익간의 대립은 갈수록 심각한 양상으로 치달았으며 소련군의 사주를 받은 김일성과 미군의 지지를 받고있는 이승만은 강대국의 각본대로 애당초 남과 북을 가르며 서로 따로국밥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혼란속에 조국의 분단 상황을 우려한 김원봉은 김구, 김규식과 함께 '남북연석회의'를 열고자 북쪽으로 건너갔으며 이때 김원봉은 자신과 뜻을 같이했던 여운형이 피살되어 그의 뜻을 받들어 주장했던 '좌우합작운동'이 성사되기는 틀렸다고 판단되었고 친일파들이 고개를 쳐드는 남쪽의 정치상황도 마음에 들지 않은데다가 항일투쟁 당시 자신을 따랐던 좌익계열의 대원들 대부분이 북쪽에 있었던지라 그대로 잔류를 결심하게 되니 결국 김원봉은 그렇게 월북인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북에 잔류한 김원봉은 처음에는 북한정부 수립에 적극 가담한 덕에 북한의 여러 고위직의 자리에 앉는 등 비교적 순탄한 행보를 걸었습니다. 특히 김원봉은 북한 권력서열 톱 텐 안에까지 오른 고위직에 있으면서 민족상잔의 6.25 전쟁을 거쳤고 1954년에는 남한의 경제혼란과 정치적인 방해를 목적으로 직접 간첩을 남파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1958년에 김원봉은 김일성에 의해 돌연 숙청을 당하게 되는데 어이없게도 김원봉에게 장제스의 국민당 간첩이자 종파주의자라는 죄목을 뒤집어 씌워 처형을 하였던 것입니다.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김원봉은 이데올로기의 기로에서 결국 공산주의를 선택하고 그런 사상을 따른 댓가로 남북한 어디에도 환대받지 못한 억울하고 불행한 인생으로 공산당 정권에 의해 가슴에 한을 품으며 종말을 맞아야 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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