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빠싸나’ 노스님과 아짠의 타심통
여러 가지 사건이 많았던 사리카 동굴로 이르는 산기슭에는 나이 든 한 스님이 홀로 머물고 있는, 소위 ‘위빠싸나’ 본사라고 하는 곳이 있었다. 어느 날 밤 아짠은 그 스님이 무얼 하고 계시나 알고 싶어서 그의 마음을 그 스님의 마음에 맞추었다. 그는 놀랍게도 노스님이 자신이 떠나 있는 동안 가족에게 일어났던 지난 일들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날 밤 아짠은 다시 노스님의 마음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가 여전히 무언가를 걱정하며 계획하고 있음을 알았다.
동틀 녘 그는 세 번째로 노스님의 마음을 읽기를 시도하였다. 결과는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이 나이 든 ‘위빠싸나’ 스님은 가족들에 대한 걱정을 떨칠 수 없어서 항상 그들을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모든 걱정과 계획은 속세 가장의 일로 위빠싸나 수행이나 내적 계발과는 아무 관련이 없었다.
아침에 아짠은 동굴에서 나와 탁발을 위해 마을로 들어갔다. 동굴로 돌아오는 도중에 그 노스님을 방문하고는, 무심코 그 스님에게 새 집을 지을 계획과 그의 전부인과 아이들을 위해 준비한 계획들이 어느 정도 진전되었는지를 물었다.
노스님은 놀라서 일그러진 미소로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압니까?”
아짠이 대답했다.
“제가 그걸 어떻게 아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가족에 대한 걱정과 자신의 계획으로 밤을 꼬박 새워서, 스님은 잠깐의 휴식도 취하지 못하셨지요.”
이 말에 노스님은 부끄러움과 두려움으로 창백해졌다. 그는 말을 더듬으면서 혼잣말로 무언가를 중얼거리더니 이내 어지러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에게 너무 상처를 입힌 것 같아 아짠은 화제를 바꾸었고 곧 그를 떠나 동굴로 돌아왔다.
사흘 후에 그 노스님을 따르는 한 세속의 제자가 동굴에 올라왔다. 아짠은 그에게 노스님에 관해 묻자, 노스님은 어제 아침에 어딘가로 떠났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제자가 ‘왜 떠나시는지’ 묻자 노스님은 아짠이 자신을 거의 실신시킬 만큼 진지한 설법을 하였다면서,
“아짠 문이 내 모든 생각을 아는 것 같아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르면서 그에게 짐이 될 수는 없다.”
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제자는 노스님이 떠나는 것을 만류하려고 애쓰며,
“스님께서 아짠 문에게 짐이 되실 것이라는 생각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그 짐이란 건 설령 있다 하더라도 스님의 짐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스님께서는 아짠 문의 도움으로 그 짐에서 벗어날 시도를 하셔야 합니다. 그편이 이곳을 떠나시는 것보다 훨씬 나은 방법입니다.”
라고 설득하였다 한다. 그러나 노스님은 당황하여 쩔쩔매면서도 가야 한다고 우겨서, “어디로 가시느냐”고 묻자 그냥 떠날 뿐이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 제자는 한 아이에게 노스님을 얼마간 따라가 보게 했으나 그 아이에게 조차도 노스님은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아서 어디로 가셨는지 모른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아짠은 연민으로 가득 찼으며, 좋은 의도로 행한 일도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그 제자에게 자신이 노스님에게 한 말을 간접적으로 들려주면서, 그 말이 그토록 심각하게 받아들여질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아짠은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교훈을 얻었다. 그때부터 그는 절대로 다른 사람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비평하지 않았다. 상대가 스스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낼 수 있도록, 그리고 너무 많은 상처를 입지 않도록 우회적인 방법으로만 언급하곤 했다. 수행을 하지 않은 일반인의 마음은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와 같다. 아이는 반드시 전후좌우로 뒤뚱거린다. 어른은 단지 아이가 다치지 않도록 지키고 보호해 줄 수 있을 뿐, 아이가 뒤뚱거리며 걷지 못하도록 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마음의 수련이 덜 된 사람들은 때때로 즉흥적인 생각이나 기분에 의하여 동요되기 쉬운 것이다.
동굴에서 머무는 동안 아짠은 내면의 진실뿐만 아니라 끝없는 외면의 진실을 통하여 더 많은 새로운 진실을 깨닫게 되었다. 수행 중에 그는 자신의 수행에서 더욱 용기를 얻었고 기쁨을 느꼈으며 시간의 흐름을 의식하지 못했다. 우기 중에는 더 세차게 흘러나오는 계곡의 물처럼 더 많은 내면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 맑게 갠 오후에는 나무 그늘이 진 꼬불꼬불한 오솔길을 따라 거닐었다. 그곳에서 직관력을 계발시키며 아름다운 경치와 고독을 즐겼다. 그는 그 비옥한 지역에서 자유롭게 뛰노는 다양한 종류의 짐승들과 함께 지내다가 오후 늦게 동굴로 돌아오곤 하였다. 그곳 짐승들의 분위기는 서로간에 매우 호의적이어서 각기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남에게 간섭하지 않았다. 아무도 해를 끼치지 않을 걸 것을 알고 서로 서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으므로 두려움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아짠은 짐승들과 함께 있을 때면 언제나 자신에게서 짐승들에게 자비의 빛이 방사되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기쁨을 누렸다. 생․ 노․ 병․ 사를 포함하는 모든 고통을 함께 나누기 때문에 짐승들은 자신들이 다른 무리보다 우월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인간과 짐승이 지니고 있는 정신적인 공덕(業, pārami)의 수준은 다르다. 그러나 이 차이는 때때로 역설적으로 몇몇 짐승들이 몇몇 인간들보다 훨씬 더 성숙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이따금 악업의 결과로 인간은 일시적으로 짐승으로 태어나기도 한다. 인간의 세상에서도 짐승들의 처지보다 나을 게 없는,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똑같은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악업이 소진될 때까지 혹은 선업이 원숙하여 악업을 대체할 때까지 그런 상태에서 고통을 겪어야만 한다. 따라서 불자(佛子)들은 인간과 짐승을 포함한 의식을 지니고 있는 모든 존재들은 똑같이 선업과 악업을 지니고 있으므로 짐승들을 멸시해서는 안 된다고 배운다.
저녁에 아짠은 동굴 앞 주변을 쓸고 좌선과 경행을 번갈아 하며 번뇌를 근절시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마음의 고요함(定)과 지혜(慧)에 대한 향상과 삼법인[三法印, 변화(無常), 괴로움(苦), 자아 없음(無我) 즉 주체가 없는 상태]을 중심으로 오온(色· 受· 想· 行· 識)을 꿰뚫어 보고 탐사(探査)하고 반추(反芻)하는 명상 수행은 꾸준히 계속되었다. 이와 같이 그의 통찰력은 계발되었으며 궁극의 목표에 대한 더 강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