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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그룹 창업자 호암 이병철 회장 증조부모 묘소
삼성가 이병철회장의 부모와 조부모 묘역입니다.
李東烈(雨)추천 0조회 186. 23.05.10 11:42
잘 조성된 삼성가 이병철회장의 부모와 조부모 묘역입니다. |
1. 솥바위 부근서 國富 3명 난다
연초 중앙일보에 "솥바위 부근서 國富 3명 난다"는 제목의 조용헌씨가 기고한 대단히 흥미로운 칼럼이 필자의 시선을 끌어 당긴 적이 있다.그렇지 않아도 그 전부터 한번 답사해 보고 싶었는데 마침 영남대 박시익 교수팀의 답사예정이 있으므로 금년 첫 답사를 의령지역으로 잡았다. 당초 계획한 답사일정은
① 삼성그룹 창업자 호암 이병철 회장 증조부모 묘소(의령군 유곡면 마두리)
② 삼성그룹 창업자 호암 이병철 회장 생가(의령군 정곡면 중교리)
③ LG 그룹 창업자 연암 구인회 회장 선조 묘소(함안군 지수면 승내리)
④ 효성그룹 창업자 만우 조홍제 회장 선조묘소(함안군 군북면 동촌리 신창마을)
⑤ 지수 초등학교(함안군 지수면)
이렇게 5곳을 답사할 예정으로 아침 일찍 대구를 출발하였다.
그러나 가는 도중에 곽재우 장군 묘소와 박희도장군 조부모 묘소를 답사하느라고 시간을 보내는 바람에 정작 당초 일정은 절반도 소화하지 못하고 말았다.
당초 일정중 답사를 한 곳은,삼성그룹 창업자 증조부모 묘소와 생가만을 답사하고 LG그룹 창업자 선조 묘소와 효성그룹 창업자 선조 묘소,지수 초등학교는 답사하지 못하고 아쉽지만 다음 기회로 미룰수 밖에 없었다.
* 곽재우 (증 병조판서 행 함경도 관찰사,忘憂堂 忠翼公)묘소
ㅇ 소재지: 창녕군 구지면 대암리 산22
ㅇ 지도좌표: 1/5만, No 90 (창녕) ,가로좌표: 146,세로좌표:236.5
* 박희도 장군 생가 및 조부 묘소
ㅇ 소재지: 창녕군 이방면 거남리 양정마을
ㅇ 지도좌표: 1/5만,No 90 (창녕),가로좌표: 145.5,세로좌표:233.5
아래 내용은 연초에 중앙일보에 게재된 기사를 인용하여 일부 편집한 내용이다.
중앙일보(2004.01.12)[week& 클로즈 업] "솥바위 부근서 國富 3명 난다"
경남 의령군과 함안군 경계에는 남강이 흐르고, 그 남강의 중간에는 흡사 솥단지처럼 생긴 바위가 하나 있다. 이 지역 사람들은 이 바위를 '솥바위'(鼎巖)라고 부른다. 이 바위는 물속에 반쯤 가라앉아 있는 형국인데, 동네 사람들 이야기로는 물속에 솥단지의 다리처럼 세 발이 달려 있다고 한다. 솥도 구분이 있다. 다리가 없는 솥은 부(釜)라 하고 다리가 있는 솥은 정(鼎)인데, 솥바위는 다리가 있기 때문에 정(鼎)에 해당한다.
솥바위는 10여명 정도가 앉아 놀 만한 공간으로 의령군 쪽에서 뻗어온 암맥(岩脈)이 힘차게 뻗어가면서 남강 가운데까지 돌출돼 나갔으며 지맥이 힘차게 내려와 강물 쪽으로 뻗어나간 지점은 풍수적으로 보아도 명당이다. 용과 호랑이가 만나는 지점이라고 본다. 이러한 포인트는 바위에서 나오는 화기(火氣)와, 물에서 나오는 수기(水氣)가 교접하면서 묘용을 이뤄내기 때문이다. 바위의 화기는 호랑이와 인물로 보고, 물에서 나오는 수기는 용과 재물로 보기도 한다.
솥바위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이곳에서 부자가 배출된다는 전설 때문이다. 조선 후기에 어느 도인이 이 솥바위에 앉아 놀면서 "앞으로 이 근방에서 나라를 크게 울리는 국부(國富) 세 명이 태어날 것이다"라는 예언을 했다고 전해진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이 솥바위 인근에서 삼성(三星)의 호암(湖巖) 이병철, 금성(金星: 현재는 LG로 바뀜)의 연암(漣巖) 구인회, 효성(曉星)의 만우(晩愚) 조홍제가 태어났다.
공교롭게도 세 그룹의 창업자들이 솥바위로부터 반경 20리 이내에서 탄생했다. 의령군 정곡면 증교리에서 이병철이 태어났고, 진양군 지수면 승산마을에서 구인회가, 함안군 군북면 신창마을에서 조홍제가 태어났다. 이 세명의 생가는 솥바위에서 따져보면 남과 북, 그리고 동남방에 자리잡은 셈이다. 세 사람 모두 솥바위에서 직선거리로 20리 거리다.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이 세 사람이 같은 초등학교를 졸업했다는 점이다. 진양군 지수면에 있는 지수 초등학교를 같이 다녔다. 지수 초등학교 동창들이라는 말이다.
삼성.금성.효성이라는 작명도 공교롭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모두 별 성(星)자가 들어 있다. 기업의 작명은 함부로 하지 않는다. 세 기업이 모두 별 성자를 집어넣은 이유는 무엇일까. 의령 출신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이야기에 따르면 鼎巖(솥바위)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솥바위에서 국부가 난다는 전설을 의식한 작명이라는 것이다.
솥단지의 다리가 세 개라는 사실을 유념한 이병철은 석 삼자를 써서 삼성(三星)이라고 짓지 않았나 싶다. 풍수에서 솥바위 자체는 별로 본다. 그런데 그 별은 다리가 세 개였으니까. 그 다음에 구인회는 '황금 별'이라는 의미의 금성이었고, 조홍제는 '새벽 별'이라는 의미로 효성이라고 지었지 않았을까. 물론 추측이긴 하지만 전혀 엉뚱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병철의 호인 '호암'도 같은 맥락이다. 구인회의 호는 연암이다. 그런가 하면 허정구(許鼎九)의 이름 석자에도 정(鼎)자가 들어간다. 모두 정암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솥단지와 밥이 내포되어 있다. 조 용헌(원광대 초빙교수)
2. S그룹 창업자 L회장 선조 묘소
S그룹 창업자 L회장은 1910년 2월12일 경남 의령에서 1천섬 지기의 부농(富農)인 이찬우(李纘雨)씨와 안동 권 씨 사이에 태어난 4남매의 막내(차남)이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L회장의 조부는 거유(巨儒)로서 풍수지리에 조예가 깊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L회장의 조부 생존시 손자의 손을 잡고 가끔 증조부의 묘소에 데리고 가서는 손자인 L회장에게 "니가 조선 제일의 갑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L회장의 조부모와 부모의 묘소도 의령에 산재해 있었으나 1966년 5월에 발생한 이른바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이 발각되면서 2남이 옥고를 치르는 등 흉사가 발생하자 평소 역학, 풍수 등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진 L회장은 지관을 통하여 조상의 묘를 감정하기에 이르렀으며,
수강 류종근 선생의 말에 의하면,L회장측에서는 처음에는 수강선생의 스승인 목산선생에게 묘소의 감정을 의뢰하였으나 당시 밀수업자라는 부도덕한 기업주에게 명당을 점혈하여 줄 수 없다고 생각한 목산선생은 자신은 풍수를 잘 모른다고 하면서 L회장측에서 온 사람들을 돌려 보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이들이 이모씨의 소개로 하남 장용득 선생을 찾아가게 되었다고 한다.
영남대 환경대학원 박시익 교수의 말에 의하면 장용득선생이 L회장의 조상의 묘를 감정한 결과 증조부모 묘소는 명당이지만 부모와 조부모의 묘소는 흉지라고 설명하자 L회장 주변의 사람들이 "풍수는 미신인데 묘자리 때문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터무니 없는 지관의 농간이므로 믿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하남선생은 L회장 조부의 묘소에는 물이 가득차 있는 상태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말이 틀리면 자신을 사기죄로 고소해도 좋다고 장담하자 후손들이 반산반의 하며 한번 파 보기나 하자고 동의하였다는 것이다.후손들 여럿이 지켜보는 가운데 구묘를 개장하여 보니 정말로 광중에 물이 가득차 있었다는 것이다.
깜짝 놀란 후손들은 그제서야 하남선생의 말을 믿으며 이장에 관한 모든 일을 하남선생에게 일임하게 되었고 결국 하남선생의 평가에 따라 명당인 증조부모의 묘소는 손대지 않고 흉지에 있는 조부모와 부모의 묘소는 수원시 이목동에 있는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하남선생이 그 당시 L회장의 묘소도 용인에 점혈하여 두었는데 L회장 사후 당초 하남선생이 점혈한 자리를 두고선 사유는 알수 없으되 청오 지창룡선생에게 자문을 구하여 현재의 자리에 조장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용인에 있는 L회장의 묘소 역시 철저한 통제와 경비로 출입이 불가능 하며,그런데도 재주 좋게 답사한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정혈이 아닌 곳에 자리잡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증조부모 묘소는 경남 의령군에 소재해 있으며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묘소를 가기 위해서는 마두리 동네입구 까지만 자동차가 갈수 있고 자동차에서 내려서도 30분 정도 산길로 걸어 들어가야 하는 깊은 산중에 있으므로 찾는 이가 많지 않으며,이곳은 출입을 제한하지도 않고 경비원도 없다.
묘소를 가는 길에는 물론이고 묘소에도 누구의 묘소인가를 알리는 표지판이나 비석이나 묘표 등 아무런 표시도 없으므로 처음 답사하는 경우에는 안내를 받지 않으면 찾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지난해 대형 태풍이 지나 가면서 계곡 중간쯤에 산사태가 발생하여 계곡의 개울이 훼손되어 지금은 한창 복구공사를 진행하고 있으므로 산소로 가는 길은 더욱 험난하다.
그러나 수원 이목동에 있는 조부모 및 부모의 묘소는 서울에서 가까이 있고 입구까지 자동차 진입도 가능하지만 일반인은 물론이고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경우에도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고 있으며 경비원이 상주하며 보안시스템이 설치되어 있어서,사전에 출입에 대한 허가를 받지 않고는 답사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영남대 환경대학원 김기선교수의 말에 의하면 김교수께서 2003년말 수원 이목동에 있는 이회장의 조부모묘소와 부모묘소를 답사할 기회를 가졌었는데,모두가 정혈에 정확하게 한치의 오차도 없이 잘 들어가 있다고 한다. 김교수의 말에 의하면 김교수께서 지금까지 수많은 명당을 점검해 봤지만,이렇게 3대에 걸쳐 모두가 정확하게 정혈처에 자리를 잡은 것은 극히 드문 경우라고 한다.김교수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호남의 명문가로서 조상을 대대로 명당을 찾아 모시기로 유명한 울산김씨 인촌 김성수선생의 가문과 L회장 선조(부모,조부모,증조부모) 묘소 정도라고 한다.
3.간산기
① L 회장 증조부모 묘소
ㅇ 사진은 "사진자료"의 사진을 참고하시고 지도는 "풍수자료집"의 "간산지도 자료실"의 지도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ㅇ 소재지: 의령군 유곡면 마두리
ㅇ 지도좌표: 1/2.5만,No 76-3 (부림), 가로좌표: 138,세로좌표:212
ㅇ 찾아 가는 길: 마두교 건너서 마두마을 복지회관 앞에 자동차 주차,우측길 따라 진행하며 계곡의 개울 좌측 산옆의 소로를 따라 30분 정도 골짜기를 들어가면 골짜기 깊숙한 곳에 증조부와 증조모의 묘가 있다
ㅇ 좌향: 묘입수 갑좌경향
② L회장 생가 및 결혼후 분가한 살림집
ㅇ 사진은 "사진자료"의 사진을 참고하시고 지도는 "풍수자료집"의 "간산지도 자료실"의 지도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ㅇ 소재지:의령군 정곡면 중교리(문곡마을) 726번지
ㅇ 지도좌표: 1/2.5만,No 76-3 (부림),가로좌표: 138.6,세로좌표:209.7
ㅇ 좌향: 생가:계좌정향 ,결혼후 분가한 집: 해좌사향
L회장 증조부묘소와 생가는 같은 룡맥의 북쪽과 남쪽에 위치해 있다.
내룡의 용맥을 보면
백두대간 남덕유산(1507) →거창 기백산 →산청 황매산 →합천 철마산 →합천 쌍백면 대곡리 한실재 →성현산 →산성산 →한우산 →응봉산 →우봉산 →막실고개→옥녀봉으로 이어 진다.
생가는 룡맥의 남쪽에 있으며 증조부 묘소는 집뒤 산줄기 너머에 있다.
증조부 묘소는 우봉산에서 재기성봉(再起成峰)한 룡맥이 유곡면과 정곡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막실고개에서 결인속기(結咽束氣)하면서 큰 과협을 만들고 다시 솟구쳐서 간방(艮方)으로 행도를 계속한다. 크게 기봉(起峰)한 룡맥은 십자맥(十字脈)을 만들면서 90도 좌선(左旋)으로 방향을 틀어 손방(巽方)으로 한마디를 진행한 다음 다시 90도 우선(右旋)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기복 굴곡하며 간방(艮方)으로 행도하여 옥녀봉을 만들고 있다.
곤방(坤方)에서 간방(艮方)으로 행도하는 룡이 L회장 증조부묘소 후고산(後고山)에서 다시 십자맥을 만들면서 건방(乾方)으로 뻗은 룡맥은 외백호를 만들면서 마을 입구까지 길게 뻗으며 유곡천의 물 빠지는 수구의 한문(한門)이 되었다.십자맥(十字脈)의 한 맥은 손방(巽方)으로 길게 나가면서 L회장 생가 뒷산을 다시 한번 감싸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전체적인 국세는 청룡과 백호가 이중 삼중으로 혈장을 감싸고 있으며 외당수(外堂水)인 유곡천은 혈장에서 보이지는 않으나 멀리서부터 혈앞으로 조래수(朝來水)로 흘러 들어 오다가 마을 입구에서 백호를 감싸고 구곡수(九谷水)로 구불구불 흘러 나갔다.
내당수(內堂水)는 깊은 골짜기이므로 청룡과 백호에 의하여 교쇄되어 있으며 물이 흐르는 개울의 바닥은 바위로 이루어 져 있으므로 오랜 세월이 흘러도 하천이 쓸려 내려가지 않을 것이므로 오래 동안 보존될 수 있을 것이다.
혈장은 경사가 급한 룡맥이 맥척(脈脊)에 붙여서 결지 하였는데,맥척은 도끼로 찍어도 들어가지 않을 만큼 단단히 뭉쳐 있다.급경사로 내려 왔으니 음맥에 해당하며 음맥으로 오면 혈은 양으로 받아야 음래양수가 되어 합법이다.용이 태음룡이니 혈은 태양혈로 받아서 와혈이 되며,와혈의 혈증은 개구처가 있어야 하며 순전이 갈라지지 않고 포만해야 한다.또한 태양혈은 제일 넓은 곳이 정혈처이다.
이곳은 순전이 바위로 이루어 져 있고 순전아래 횡대도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순전과 횡대는 혈장으로 들어온 기운이 혈을 결지하고 남는 기운이 빠져 나가는 여기(餘氣)에 해당하므로 순전과 횡대가 바위로 되어 있음은 혈장에 들어온 기운이 그만큼 강하다는 것을 알수 있다.혈장은 백호 쪽을 많이 쌓은 것으로 봐서 당판이 약간 기울어져 있다.
룡맥이 청룡쪽으로 빠져서 혈장 아래 3,40 미터 아래 쪽에 큰 바위가 있으며 바위가 방향을 틀면서 혈장을 감싸고 있다. 룡은 청룡쪽으로 흘러 나간 것처럼 보이나 혈 뒤의 승금 바로 위에서 바위로 팔자를 벌리면서 개팔(開八)한 중심으로 맥이 내려 왔는데,정확하게 봉분 뒤로 들어 왔으며,크고 작은 바위로 훈(暈)을 만들면서 혈증을 드러내고 있다.바위로 된 훈이 내청룡과 내백호 역확을 하며,골짜기의 물을 격수(隔水)한 좌우의 능선이 청룡 백호가 되고 있다.
맥척에 가파르게 붙여서 청룡과 백호도 없이 결지한 형태가 전북 순창의 노사 기정진 선생의 조모묘소인 "황앵탁목"과 그 형태가 비슷하며,삼척시 미로면에 있는 "청학등공"으로 알려진 조선 이태조의 5대 조모 묘소인 영경묘와도 비슷하다. 이 모두가 초보자들은 알아볼 수 없는 괴혈(怪穴)에 속한다고 볼수 있다.
필자 역시 초보수준을 면하지 못한지라 그 자리 때문에 국부가 나왔다고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그러나 말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당판에 들어서면서 혈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강한 기운에 압도 될 듯한 느낌이 드는 것으로 봐서 그 자리가 범상한 자리가 아니라는 것은 감지할 수 있었다.
주변에 탈살되지 않은 바위가 널려 있고 사방을 둘러 봐도 바위산이므로 살기가 내포된 강한 기운이 흐르는 것으로 짐작된다.
이렇듯 살기가 있는 자리는 이를 감당할 만한 기운을 지닌 경우에만 발복을 받을 수 있으며,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살기에 눌려서 발복은 커녕 오히려 화로 작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 대신 살기를 이겨내고 발복을 하게 되면 크게 발복하는 특징이 있다.호랑이를 잡을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든가 잡아 먹히든가 하지 않겠는가.요새말로 하면 "High Risk,High Return" 이라고 하면 비슷한 표현이 되는지 모르겠다.
좌향은 묘입수에 갑좌경향을 하여 내룡의 기운을 비스듬히 받으면서 조래수인 유곡천의 기운도 동시에 받아 들일수 있는 향을 취하였다.
묘입수에 경향이면 납갑팔대국법을 취하였다.
생가는 증조부묘소 후고산 넘어 동네에 있다 산 넘어 이지만 행정구역상의 면도 다르고 흐르는 물도 다른 물이 흐른다.
생가가 있는 중교리는 면소재지 정도 되는 것으로 보인다.생가와 결혼 후 분가한 집은 불과 몇집 건너 바로 옆에 있다.
그러나 두집 모두 대문을 굳게 잠그고 출입이 허용되지 않은 관계로 옆집으로 들어가서 담넘어로 넘겨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생가는 "ㄷ"자 형태로 되어 있으며 안채와 사랑채는 남향으로 배치하였다.
담너머로 본 광경으로는 집은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었으나 사람은 살지 않는듯 하였다.
생가는 집뒤 산 밑에 바짝 붙여서 있었으며 뒷산은 탈살이 되지 않은 바위산이었다. 뒷산이 청룡쪽을 감싸면서 앞으로 나온 것이 돋보였다.
그러나 생가의 입지 역시 필자의 눈에는 두드러지게 특출나 보이는 부분은 발견하지 못하였다.필자가 아직 초보수준을 면하지 못하고 개안하지 못하였음을 부끄러워 하면서 당일의 일정을 마감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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