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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묘년 대정 23년(1183, 명종 13) 공의 나이 16세.
봄에 엄군이 수주(水州)의 원으로 나갔는데 공은 경사(京師)에 머물러 있으면서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고, 가을에 수주로 가서 근친(覲親)하였다.
갑진년 대정 24년(1184, 명종 14) 공의 나이 17세.
을사년 대정 25년(1185, 명종 15) 공의 나이 18세.
봄에 수주에서 경사로 들어와 드디어 사마시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자 가을에 또 수주로 되돌아갔다.
병오년 대정 26년(1186, 명종 16) 공의 나이 19세.
봄에 엄군이 수주 원에서 갈리게 되자 공은 경사로 따라왔다.
정미년 대정 27년(1187, 명종 17) 공의 나이 20세.
이해 봄에 또 사마시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했다. 공은 이 4, 5년 동안 술에 쏠려 멋대로 놀면서 마음을 단속하지 않고 오직 시 짓기만 일삼느라고 과거(科擧)에 대한 글은 조금도 연습하지 않아서 계속 응시했어도 합격하지 못하였다.
무신년 대정 28년(1188, 명종 18) 공의 나이 21세.
기유년 대정 29년(1189, 명종 19) 공의 나이 22세.
이해 봄에 사마시에 응시하여 첫째로 뽑혔다.
10자의 운(韻)을 달아 지었는데 그 시제(詩題)는 ‘옛날 임금이 헌면(軒冕)을 만들어 귀천(貴賤)을 나타내도록 하고 아름다움은 구하지 않았다. [先王制軒冕著貴賤不求美]’였는데, 공이 지은 파제(破題)에 이르기를
상고 시대에는 헌면도 없었는데 / 太古無軒冕
누가 귀천이란 등급을 구분했으랴 / 誰分貴賤流
만들어낸 후라야 나타내게 되므로 / 制之然後著
아름다운 것은 본래 구하지 않았다오 / 美也不曾求
하였고, 또 한 글귀에 이르기를
황제가 처음 만들었다 들었는데 / 始造聞黃帝
공구인들 어찌 그냥 걸어다니랴 / 徒行豈孔丘
했었는데, 좌주(座主 고시관(考試官)) 유공(柳公)이 탄복하여 마지않고 드디어 공의 시를 첫째로 뽑았다.
경술년 대정 30년(1190, 명종 20) 공의 나이 23세.
6월에 예부시(禮部試)에 응시하여 동진사(同進士)에 뽑혔는데, 공은 과제(科第)가 낮은 것을 못마땅히 여겨서 사양하려 하였으나 아버지가 준절히 꾸짖었고 또 전례(前例)도 없으므로 사양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술에 만취하여 하객(賀客)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과제는 비록 하등(下等)에 뽑혔으나 어찌 3, 4차 도야된 문생(門生)이 아닌가?”
하자, 모든 하객들이 입을 가리면서 몰래 웃었다.
공은 과거(科擧)에 대한 글을 일삼지 않았으므로 글 짓는 것이 거칠고 서툴러서 격률(格律)에 잘 맞지 않았고, 또 과장(科場) 안에서 봉명승선(奉命承宣) 박순(朴純)이 좌주(座主)와 더불어 선온(宣醞)을 받고 공을 불렀는데, 큰 잔으로 한 잔 마시고 곧 취해서 휘갈겨 쓴 글을 찢어 버리려 하자 옆에 앉았던 손득지(孫得之)가 빼앗아 올렸다. 그 시제(詩題)는 임금을 떠받드는 데는 마치 큰 거북이 큰 산을 머리에 인 것처럼 해야 한다. [戴君若鰲冠靈山]’였는데,
공의 시 넷째 글귀에 이르기를
웅장한 모습 삼신산을 인 듯한데 / 壯似支三聳
육오(六鰲)를 누가 감히 낚아 가랴 / 憂無釣六逃
하였고, 다섯째 글귀에는,
하늘 받드는 태도 우뚝해 보이고 / 奉天呈屹屹
산악을 짊어진 형세 끊어짐 없지 / 負嶽出滔滔
했는데, 지공거(知貢擧) 이지명(李知命)이 이 구절을 좋아하여 드디어 물리치지 않았다.
신해년 금(金) 명창(明昌) 2년(1191, 명종 21) 공의 나이 24세.
8월에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자, 천마산(天磨山)에 우거하여 백운거사(白雲居士)라 자칭하고 천마산(天磨山)를 지었는데, 중간에 유실되어 전집(前集)에는 기록하지 못했다가 나중에 찾아서 후집(後集) 첫째 권에 실었다. 첫째 구에 이르기를,
사람들은 다만 산이 우뚝하다 하여 / 世人但取山崔巍
여기에 천마산이라 이름 붙였다. / 乃以天磨而號之
한 말이 바로 이것이다. 나중에도 늘 이 산에 들어와 노닐면서 시를 지었는데 ‘북산잡제(北山雜題)’니 ‘중유북산(重遊北山)’이니 하는 시가 바로 이것이다.
임자년 명창 3년(1192, 명종 22) 공의 나이 25세.
이해에 《백운거사 어록(白雲居士語錄)》과 전(傳)을 저술하여 자신의 행지(行止)를 차례로 이야기하였다.
계축년 명창 4년(1193, 명종 23) 공의 나이 26세.
이해에 백운시(百韻詩)를 지어 시랑(侍郞) 장자목(張自牧)에게 올렸는데, 장공이 후히 대우하여 매양 찾아뵐 때마다 술을 차려 함께 마셨다.
4월에 《구삼국사(舊三國史)》를 얻어 동명왕(東明王)의 사실을 보고 이상히 여겨 고시(古詩)를 지어서 그 특이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갑인년 명창 5년(1194, 명종 24) 공의 나이 27세.
이해에 논조수서(論潮水書)를 지어 동각(東閣) 오세문(吳世文)에게 바쳤고 천보영사시(天寶詠史詩) 43운(韻)을 지었는데, 모두 협주(挾註)하였으며 또 이소원기(理小園記)도 지었다.
을묘년 명창 6년(1195, 명종 25) 공의 나이 28세.
이해에 오동각에게 화답한 삼백운시(三百韻詩)를 지었다.
병진년 명창 7년(1196, 명종 26) 공의 나이 29세.
4월에 경사(京師)에 난이 일어나서 자부(姊夫)가 남쪽 황려(黃驪)로 귀양갔었는데 5월에 공이 자씨(姊氏)를 데리고 자부에게 찾아갔었다. 이해 봄에 어머니는 상주(尙州) 원으로 나간 둘째사위에게 가 있었다.
6월에 공이 황려에서 상주로 가 어머니에게 문안하고 한열병(寒熱病)에 걸렸는데 몇 달 동안 낫지 않아 10월에야 돌아왔다.
시집(詩集)에 실려 있는 남유시(南遊詩) 90여 편이 모두 이때 황려와 상주에 있으면서 지은 것이다.
정사년 승안(承安) 2년(1197, 명종 27) 공의 나이 30세.
12월 어느 날 총재(冢宰) 조영인(趙永仁)ㆍ상국(相國) 임유(任濡)ㆍ상국(相國) 최선(崔詵)ㆍ상국(相國) 최당(崔讜) 등이 연명 차자(聯名箚子)를 올려 공을 추천하였다. 우선 외기(外寄)에 보충시켰다가 후일의 문한(文翰)에 대한 책임에 대비하도록 간청하여 임금이 드디어 윤가(允可)하였는데 어떤 장주 승선(掌奏承宣)이 일찍이 공에게 조금 감정이 있어서 차자(箚子)를 빼앗아 천조(天曹)에 붙이지 않고 거짓말로 갑자기 잃어 버렸다고 핑계하니, 총재도 그 차자를 붙이지 않았다는 것으로 해명하여 공을 등용하지 않았다.
시집(詩集)에 조 영공(趙令公)에게 올린 시가 있는데 아래와 같다.
옛날에 은배가 공중으로 날아갔다는 말을 들었더니 / 昔見銀杯嘗羽化
오늘날 차자도 갑자기 신선이 되어 갔구나 / 今聞箚子忽登仙
했는데, 사림(士林)이 탄식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또 상조태위서(上趙太尉書)를 지어 나중에 그 이유를 아뢰기도 하였다.
무오년 승안 3년(1198, 신종1) 공의 나이 31세.
기미년 승안 4년(1199, 신종2) 공의 나이 32세.
5월에 지주사(知奏事) 상공(相公) 나중에 진강공(晉康公)이 되었다. 댁에 천엽 유화(千葉榴花)가 만발하자 손님을 불러 구경시키고 이어 시인(詩人) 이인로(李仁老)ㆍ함순(咸淳)ㆍ이담지(李湛之)와 공을 불러 시를 짓도록 하였다. 그 다음 어느 날 상공이 우연히 좌우에게 이르기를,
“요즈음 듣자니 글하는 선비 네 상국(相國)이 아무를 추천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또 차자를 빼앗은 사람도 있었다는데.”
하고, 잇달아 이르기를,
“글하는 사람은 서로들 질투하는 마음이 대개 이렇구나.”
하면서, 이때 비로소 공을 등용하려는 생각이 있었다.
6월 반정(頒政) 때에 공을 전주목 사록(全州牧司錄)으로 보임하여 서기(書記)를 겸임하도록 하므로 가을 9월에 전주로 부임했는데, 이해에 지은 고시(古詩)와 율시(律詩)가 무려 15, 16편이나 되었다.
경신년 승안 5년(1200, 신종3) 공의 나이 33세.
이해에 지은 시는 30편이 훨씬 넘었다.
겨울 12월에 파직을 당해 전주를 떠나게 되었다. 처음 공이 전주를 다스릴 때 통판 낭장(通判郎將)인 어떤 이가 탐하고 방자하였는데, 공이 굽히지 않아서 공사(公事)로 인해 여러 차례 노여움을 격발시켰다. 통판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또 제마음대로 하려고 드디어 터무니없는 말을 이리저리 꾸며서 공을 모함했기 때문이다.
광주(廣州)에 이르렀는데 마침 섣달 그믐날이었다. 이때 처형(妻兄) 진공도(晉公度)가 서기(書記)로 있었으므로 그의 집에 들어가 함께 과세(過歲)하면서 시 한 편을 써서 주었는데, 첫구에 이르기를
우연히 하찮은 녹을 바라 강남까지 갔었구나 / 偶霑微祿宦江南
하였으니, 바로 이것이었다.
신유년 승안 6년(1201, 신종4) 공의 나이 34세.
정월에 광주(廣州)에서 왔다.
여름 4월에 죽주(竹州)로 가서 어머니를 모시고 경사(京師)로 왔다. 이보다 앞서 자서(姊壻)가 황려(黃驪)에서 죽주 감무(竹州監務)에 보임되었기 때문에 자씨와 어머니가 그 임소(任所)에 가 있게 되었는데, 4월에 어머니가 경사로 돌아오려고 하자, 공이 가서 모시고 왔으니 죽주만선사(竹州萬善寺)가 바로 이때 지은 것이다.
5월에 사륜정기(四輪亭記)를 지었고, 6월에 남행기(南行記)와 자죽주여모부장안시(自竹州與母赴長安詩)를 지었다.
임술년 태화(泰和) 2년(1202, 신종5) 공의 나이 35세.
5월에 어머니 상을 당하였다.
12월에는 동경(東京)의 반도(叛徒)가 운문산 적당(雲門山賊黨)과 군사를 일으키므로 조정에서 삼군(三軍)을 내어 정벌하게 되었다. 군막(軍幕)에서 산관(散官)ㆍ급제(及第) 등을 핍박하여 수제원(修製員)으로 충당시킬 때 세 사람을 거치도록 모두 꾀로 회피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공에게 이르자 공은 개연(慨然)한 모습으로 말하기를,
“내가 나약하고 겁이 많은 자이기는 하나 역시 한 국민인데 국난(國難)을 회피하면 대장부가 아니다.”
하고, 드디어 종군(從軍)하였다. 따라서 막부(幕府)에서는 매우 고맙게 생각하고 임금께 주달하여 공을 병부 녹사 겸수제원(兵部錄事兼修製員)으로 삼았으니 이는 대개 공의 마음을 펴 준 것이다. 이달에 청주(淸州)로 가서 막중서회고(幕中書懷古) 18운(韻)을 지어 동영(同營)의 제공(諸公)에게 주고, 또 상주(尙州)로 나가 ‘김 상인의 초서를 보고[觀金上人草書]’라는 고시 15운(韻)을 지었다.
계해년 태화 3년(1203, 신종6) 공의 나이 36세.
이해에 공이 동경(東京)의 군막(軍幕)에 있었다.
2월에 상도통부사서(上都統副使書)를 지었고 전망(戰亡)한 사람들 장사 지낼 일을 의논하였으며 고시(古詩)와 율시(律詩)도 10여 편이나 지었다.
갑자년 태화 4년(1204, 신종7) 공의 나이 37세.
3월에 군사들이 개선하고 돌아오자, 공도 따라 경사(京師)로 왔었는데 시집(詩集)에
이번 싸움에 세운 공이 누가 제일이냐 / 獵罷論功誰第一
지금도 지휘한 사람은 기억조차 않는다네 / 至今不記指縱人
한 글귀가 실려 있다. 이때 군사들은 상을 많이 받았으나 공만은 참예하지 못했던 까닭에 감정이 없을 수 없어 이 시를 지었다.
을축년 태화 5년(1205, 희종1) 공의 나이 38세.
이해에 상최상국서(上崔相國書)를 지어 벼슬을 구하였다.
병인년 태화 6년(1206, 희종2) 공의 나이 39세.
정묘년 태화 7년(1207, 희종3) 공의 나이 40세.
12월에 직한림원(直翰林院)에 권보(權補)되었다.
공은 이미 세상에 불우한 신세가 되어 문을 닫고 들어앉아 출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해마다 사관(史館)ㆍ한원(翰院)ㆍ국학(國學) 등에서 유관(儒官)들이 인물을 추천할 때면 늘 공을 우두머리로 삼았고, 또 좌우에서도 공을 칭찬하는 이도 많았다.
이래서 진강후(晉康侯 최충헌(崔忠獻))도 여러 사람의 뜻을 반대하기가 어려워 공을 등용할 생각이 있었으나 쓸만한 계제가 없는 것을 늘 서운해 하였다.
이때 바로 그가 모정(茅亭 지붕을 띠로 덮은 정자)을 짓고, 이인로(李仁老)ㆍ이원로(李元老)ㆍ이윤보(李允甫)와 공에게 명하여 기문(記文)을 지으라 하고, 이어 유관 재상(儒官宰相) 네 사람으로 하여금 시험 보이도록 했는데,
공이 첫째로 뽑히자 현판에 새겨 모정 벽에 걸어놓았다. 그리고 12월에 이르러 이 관직을 맡게 되었는데, 초입한림(初入翰林) 2수를 짓고 지지헌기(止止軒記)도 지었다.
무진년 태화 8년(1208, 희종4) 공의 나이 41세.
6월에 한림의 권보(權補)를 면하고 진보(眞補)되었다.
기사년 태화 9년(1209, 희종5) 공의 나이 42세.
경오년 대안(大安) 2년(1210, 희종6) 공의 나이 43세.
신미년 대안 3년(1211, 희종7) 공의 나이 44세.
임신년 대안 4년(1212, 강종1) 공의 나이 45세.
정월에 천우위 녹사 참군사(千牛衛錄事參軍事)가 되고, 6월에 한림겸관(翰林兼官)에 궐원이 있자, 반정(頒政) 때를 기다리지 않고 겸직한림원(兼直翰林院)이 되었으며 본직은 그대로 가졌다. 재입옥당(再入玉堂) 2편을 지었다.
계유년 숭경(崇慶) 2년(1213, 강종2) 공의 나이 46세.
12월에 진강후(晉康候)의 아들인 상국(相國)이 야연(夜宴)을 크게 베풀고 모든 고관(高官)을 불러 모았는데, 공은 홀로 8품(品) 미관(微官)으로 부름을 받고 참석하였다. 밤중에 상국이 공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문장을 잘한다는 소문은 들었으나 아직 보지는 못했다. 오늘 한번 시험해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고, 이인로(李仁老)를 시켜 운(韻)을 부르도록 했는데, 40여 운(韻)에 이르렀다. 촛불을 시제(詩題)로 삼고 이름난 기생에게 먹을 갈도록 하였다. 시가 완성되자 상국은 탄복하여 마지않았다.
다음날 상국은 그 시를 가지고 부(府)로 나아가 진강후에게 아뢰고 공을 불러들여 재주를 시험해 보라고 하였다. 진강후가 처음에는 쾌히 승낙하지 않다가 두 번 세 번 여쭌 후에 공을 불러들이도록 하였다. 공이 부(府)에 이르자 상국이 진강후에게 여쭈기를,
“이 사람은 술을 마시지 않으면 시를 제대로 짓지 못한답니다.”
하고 바로 빠른 자를 시켜 집으로 가서 술을 갖고 오도록 했는데 술이 미처 이르기 전에 진강후는 벌써 술상을 차려 놓고 함께 마시고 있었다.
상국은 또 말하기를,
“이 사람은 취한 다음이라야 시를 짓습니다.”
하고 술잔을 번갈아가면서 취하도록 마시게 한 뒤에 이끌고 진강후 앞으로 나아갔다. 진강후의 앞에 바로 필갑(筆匣)이 있고 붓도 열 자루가 넘었는데, 상국이 친히 그중 좋은 붓을 골라서 공에게 주었다. 이때 마침 뜰에서 오락가락하는 공작(孔雀)이 있기에 진강후가 이 공작을 시제(詩題)로 삼고 금 상국(琴相國)을 시켜 운(韻)을 부르게 했는데 40여 운(韻)에 이르도록 잠시도 붓을 멈추지 않으니 진강후는 감탄하여 눈물까지 흘렸다.
공이 물러나오려 할 때 진강후가 이르기를,
“자네가 만약 벼슬을 희망한다면 뜻대로 이야기하라.”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내가 지금 8품(品)에 있으니 7품만 제수하면 됩니다.”
하자, 상국이 여러 번 공에게 눈짓을 하면서 바로 참관(參官)을 희망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날 상국은 집으로 돌아와 공을 불러 꾸짖기를,
“자네가 벼슬을 희망하는 것이 왜 그렇게 낮으냐? 무슨 이유로 참관을 희망하지 않았느냐?”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나의 뜻이 그럴 뿐입니다.”
했었는데, 12월 반정(頒政) 때에 이르러 7품을 뛰어 사재승(司宰丞)에 제수되었다.
갑술년 정우(貞祐) 2년(1214, 고종 1) 공의 나이 47세.
을해년 정우 3년(1215, 고종 2) 공의 나이 48세.
7월에 공이 시를 지어 참직(參職)의 품계를 구하자 진강후(晉康侯)가 그 시를 가지고 그 부(府)의 전첨(典籤) 송순(宋恂)에게 내보이면서 이르기를,
“이 사람은 뜻이 고상한 자라서 품계 올려주기를 희망하지 않을 텐데 임시로 자신을 굽혀 말한 듯하다. 만약 임금께 주달하여 바로 참관(參官)을 제수한다면 그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하니, 순이 대답하기를,
“그렇게 하면 그도 기쁨을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이고, 여러 사람도 그것을 바랄 것입니다.”
하였다. 하비(下批)에 우정언 지제고(右正言知制誥)로 삼았다. 7월에는 초배정언(初拜正言)를 지었고, 10월에는 조향태묘송(朝享太廟頌)을 지었다.
병자년 정우 4년(1216, 고종 3) 공의 나이 49세.
정축년 정우 5년(1217, 고종 4) 공의 나이 50세.
2월에 우사간 지제고(右司諫知制誥)를 제수하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하였다. 이해 가을에 공사(公事)가 정체(停滯)되었다는 것으로 상진강후서(上晉康侯書)를 지었다.
무인년 정우 6년(1218, 고종 5) 공의 나이 51세.
정월에 좌사간(左司諫)으로 옮겨졌고 나머지 겸직(兼職)은 그대로였다.
기묘년 정우 7년(1219, 고종 6) 공의 나이 52세.
봄에 공이 탄핵을 당하여 면직되었다. 지난해 12월 어느 날 외방(外方) 수령들이 팔관하표(八關賀表)를 미처 올리지 못한 자가 있자 공이 탄핵하려 했으나 금 상국(琴相國)이 굳이 그만두도록 하였다. 이달에 이르러 진강후(晉康侯)가 이 내용을 조사하여 상국과 공을 탄핵하였는데 상국은 용서되고 공만 파직 당하였다. 4월에 외직(外職)인 계양도호부부사 병마금할(桂陽都護府副使兵馬鈐轄)이 되어 5월에 계양으로 부임하였다.
경진년 정우 8년(1220, 고종 7) 공의 나이 53세.
여름 6월에 시예부낭중 기거주 지제고(試禮部郎中起居注知制誥)로 소명(召命)을 받고 계양(桂陽)에서 경사(京師)로 돌아왔다. 지난해 9월에 진강후가 죽고 그의 아들 상국(相國)이 대신 정권을 잡은 까닭에 이 소명이 있었다. 12월에는 시태복소경(試太僕少卿)에 옮기고 기거주(起居注)는 그대로 두자 양사표(讓謝表)를 짓다.
신사년 정우 9년(1221, 고종 8) 공의 나이 54세.
6월에 보문각대제 지제고(寶文閣待制知制誥)를 제수하자, 양사표(讓謝表)를 지었다.
임오년 정우 10년(1222, 고종 9) 공의 나이 55세.
6월에 태복소경 즉진(太僕少卿卽眞)이 되었다.
계미년 정우 11년(1223, 고종 10) 공의 나이 56세.
12월에 조산대부(朝散大夫) 시장작감(試將作監)이 되었는데, 대제(待制)는 그대로였다.
갑신년(1224, 고종 11) 공의 나이 57세.
여름 6월에는 장작감 즉진(將作監卽眞)으로 되었고, 겨울 12월에는 그 다음 해의 사마시 좌주(司馬試座主)가 되자 양사표(讓謝表)를 지었다. 12월에 또 조의대부(朝議大夫) 시국자좨주 한림시강학사(試國子祭酒翰林侍講學士)가 되고 지제고(知制誥)는 그대로였는데 양사표를 지었다.
을유년(1225, 고종 12) 공의 나이 58세.
봄 2월에 사마시(司馬試) 시관(試官)으로 시부(詩賦)에는 이유신(李惟信) 등 16인을 뽑고 음시(音詩)에는 안겸일(安謙一) 등 5인을 뽑고 명경(明經)에는 강득희(康得希) 등 3인을 뽑아 임금께 아뢰고 방방(放榜)하였다.
12월에는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를 제수 받았으나 딴 직함은 그대로 있었으므로 양사표(讓謝表)를 지었다. 이해에 왕륜사장륙영험기(王輪寺丈六靈驗記)를 지었으며, 또 칙명(勅命)을 받고 태창니고상량문(太倉泥庫上樑文)도 지었다.
병술년(1226, 고종 13) 공의 나이 59세.
12월에 좨주 즉진(祭酒卽眞)이 되었다.
정해년(1227, 고종 14) 공의 나이 60세.
무자년(1228, 고종 15) 공의 나이 61세.
정월에 중산대부(中散大夫) 판위위사(判衛尉事)가 되었는데 딴 직함은 그냥 있었다.
5월에는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춘장(春場)에는 이돈(李敦) 등 31인, 명경(明經)에는 국수규(鞠受圭) 등 4인을 각각 뽑아 임금께 아뢰고 방방(放榜)하였다.
기축년(1229, 고종 16) 공의 나이 62세.
경인년(1230, 고종 17) 공의 나이 63세.
11월 21일에 멀리 위도(猬島)로 귀양 갔다.
이해 팔관회(八關會) 잔치를 열 때 옛날 규례에 어긋난 일이 있었는데 이는 추밀(樞密) 차공(車公)이 시킨 것이었다.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왕유(王猷)가 밑에서 일보는 자가 제대로 따르지 않은 것을 몹시 꾸짖자, 차공은 왕유가 재상(宰相)을 꾸짖었다고 오해하여 임금께 일렀다. 마침 공과 좌승상(左丞相) 송순(宋恂)도 그 좌석에 있었으므로 왕유를 도왔을 것이라고 의심하여 모두 먼 섬으로 귀양 보냈다.
공은 이날 바로 청교역(靑郊驛)으로 나가 자고, 12월에 보안현(保安縣)에 이르러 머물다가 순풍(順風)을 기다려 26일에 위도로 들어갔다.
신묘년(1231, 고종 18) 공의 나이 64세.
정월 15일에 고향인 황려현(黃驪縣)으로 양이(量移 멀리 귀양간 죄인을 가까운 곳으로 옮기는 것)되자 22일에 죽주(竹州)에 이르러 만선사(萬善寺)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공이 옛날 신유년(1201, 신종 4)에 나그네로 이 절을 유람할 때 제공(諸公)의 판상운(板上韻)을 화답한 그 끝구에 이르기를
푸른산 한없이 좋게 있지 / 好在靑山色
벼슬을 그만두고 다시 찾아올 거야 / 休官欲重尋
했는데, 이때 우연히 면직되어 거듭 오게 되었으니, 이는 아마도 시참(詩讖 자신이 지은 시가 우연히 뒷일과 꼭 맞는 것)인 듯하다.
또 시 두 편을 화답하였다.
7월에 황려(黃驪)로부터 경사(京師)에 이르렀고, 9월에 호병(胡兵)에 대비하기 위해 백의종군(白衣從軍)하여 보정문(保定門)을 지켰으니, 이는 시집(詩集)에,
장기(瘴氣) 꽉 찬 저 더운 지방에서 / 猶勝炎州嵐瘴地
허리 굽혀 해촌 백성 상대하기보다 낫다오 / 折腰甘向海村民
한 것이다. 공은 산관(散官)에 있으면서도 달단(達旦 몽고)에게 통하는 서표(書表)와 문첩(文牒)을 모두 맡아 지었다.
임진년(1232, 고종 19) 공의 나이 65세.
지난 기축년(1229, 고종 16)에 왕사(王師)가 죽었는데 이해에 문인들이 임금께 아뢰자 공에게 비명(碑銘)을 지으라고 명하였다.
4월에 귀양에서 풀려나 정의대부(正議大夫) 판비서성사 보문각학사 경성부우첨사 지제고(判祕書省事寶文閣學士慶成府右詹事知制誥)에 제수되었다.
6월에 도읍을 옮겼는데 공은 이 서울에 있었으나 집을 마련하지 못해 하음 객사(河陰客舍)의 서랑(西廊)에 살면서 시 두 수를 지었다. 9월에 유수중군 지병마사(留守中軍知兵馬事)가 되었다.
계사년(1233, 고종 20) 공의 나이 66세.
6월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추밀원부사 좌산기상시 한림학사 승지(樞密院副使左散騎常侍翰林學士承旨)에 제수되었는데 아들 함(涵)이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된 까닭에 친혐(親嫌)을 피하기 위해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로 바꾸었다.
8월에 추밀원(樞密院)에서 숙직하면서 시 네 수를 지어 내성(內省) 상국(相國) 김인경(金仁鏡)에게 부쳤다.
12월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지문하성사 호부상서 집현전태학사 판예부사(知門下省事戶部尙書集賢殿太學士判禮部事)를 제수받고 또 양사표(讓謝表)를 지었다.
갑오년(1234, 고종 21) 공의 나이 67세.
5월에 춘장 지공거(春場知貢擧)로 열시(閱試)하여 김연성(金鍊成) 등 31인과 명경(明經)에 이방수(李邦秀) 등 2인을 뽑아 방방(放榜)하였다.
12월에 정당문학 감수국사(政堂文學監修國史)에 제수되어 칙명(勅命)을 받고 송광사 주법(松廣社主法) 진각국사(眞覺國師)의 비명(碑銘)을 지었다.
을미년(1235, 고종 22) 공의 나이 68세.
정월에 태자소부(太子少傅)가 되었다.
12월에 참지정사 수문전태학사 판호부사 태자태보(參知政事修文殿太學士判戶部事太子太保)가 되었다.
병신년(1236, 고종 23) 공의 나이 69세.
5월에 지공거(知貢擧)로서 춘장(春場)을 고시하여 박희(朴曦) 등 29인과 명경(明經)에 이극송(李克松) 등 3인을 각각 뽑아 방방하였다.
12월에 걸퇴표(乞退表)를 올렸으나 임금이 그 표문을 궐내(闕內)에 머물러 두고 내시(內侍) 김영초(金永貂)를 보내어 극진히 타이르고 다시 벼슬하도록 했는데, 공은 병이 위독하다고 핑계하였다.
진양후(晉陽侯 최우(崔瑀))가 호적(戶籍)에서 나이를 줄였다고 하면서 머물러 있도록 권면하므로 공은 하는 수 없어 12월에 다시 나아가 일을 보았다. 그러나 늘 불안한 생각을 갖고 여러 차례 시를 지어 편치 못하다는 뜻을 나타냈다. 공은 특히 호적에서 나이를 줄였다는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지 않고 사실대로 아뢰었으니 사퇴할 생각이 진실로 간절한 것이었다. 그래도 물러날 수 없자, 늘 읊은 시가 있었는데
얼굴이 있어도 감히 바로 들 수 없으니 / 有面不敢擡
부끄러운 일 벌써부터 적지 않구나 / 慚愧已不少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정유년(1237, 고종 24) 공의 나이 70세.
7월에 칙명(勅命)을 받들고 동궁비주(東宮妃主)의 시책문(諡冊文)과 애책문(哀冊文)을 지었다. 공은 또 표를 올려 걸퇴(乞退) 하기를 매우 간절히 했다.
12월에는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수태보 문하시랑평장사 수문전태학사 감수국사 판예부사 한림원사 태자태보(守太保門下侍郞平章事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判禮部事翰林院事太子太保)로 치사(致仕)하였다. 이해에 또 칙명을 받고 대장경 각판(大藏經刻板)에 대한 군신 기고문(君臣祈告文)을 지었다.
무술년(1238, 고종 25) 공의 나이 71세.
12월에 칙명을 받들고 몽고 황제(蒙古皇帝)에게 올릴 표장(表狀)과 진경당고관인(晉卿唐古官人)에게 보낼 편지를 지었다.
기해년(1239, 고종 26) 공의 나이 72세.
칙명을 받들고 몽고 황제에게 올릴 표장을 지었다.
12월에 또 몽고 황제에게 올릴 표장과 진경(晉卿)에게 보낼 편지를 지었다.
경자년(1240, 고종 27) 공의 나이 73세.
신축년(1241, 고종 28) 공의 나이 74세.
공은 비록 벼슬에서 물러나 집에 있었으나 국조(國朝)에 대한 고문대책(高文大冊)과 이조(異朝)에 오가는 서표(書表) 등 일이 있으면 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7월에 병이 심해지자, 진양공(晉陽公)이 듣고 이름난 의원들을 보내 문병과 치료를 끊임없이 하였다.
또 공의 평소에 저술한 전후 문집(前後文集) 53권을 모두 가져다가 공인(工人)을 모집하여 빨리 새기라고 독촉까지 한 것은 공이 죽기 전에 한번 보이고 마음을 위안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공역이 워낙 거창하여 그만 끝을 보지 못한 채 9월 초이튿날 갑자기 늘 누었던 자리를 떠나 바로 서쪽을 향해 누워 오른쪽 갈빗대를 자리에 붙이고 밤이 되자 잠든 듯이 졸하였다. 임금이 부음(訃音)을 듣자, 놀라고 애통해 하면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초상을 잘 치르도록 하고 또 근시(近侍)를 시켜 뇌시(誄詩)를 지어 잘 죽은 것을 찬미하게 하고, 문순공(文順公)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다.
12월 6일 경인(庚寅)에 진강산(鎭江山) 동쪽 기슭에 장사 지냈다.
공은 평생에 집안 살림은 경영하지 않고 늘 시(詩)와 술로 오락을 삼았는데 비록 의상(蟻床 침상)에 누워서도 시를 끊임없이 읊었다. 또 《능엄경(楞嚴經)》을 좋아하여 심지어 경(經)을 등지고 앉아 외기까지 하였다.
나중에 임종 때 이르러서는 아내와 자식들을 물리쳐 시끄럽게 떠들지 않도록 하고 조용히 세상을 떠났으니 활달하고도 참다운 군자(君子)라 하겠다. 아, 함(涵)은 이때 외직으로 홍주(洪州)에 나가 있었으므로 임종을 미처 보지 못했으니 평생에 애통한 심정을 어찌 말로 형용할 수 있으랴.
[주-D001] 선인장(仙人掌) : 신선이 손에 쟁반을 받쳐든 모양으로 만들어 감로(甘露)를 받게 한 것. 《한서(漢書)》 교사지(郊祀志)에 “무제(武帝)가 구리로 승로반(承露盤)을 만들었는데 위에다 선인장을 설치하여 감로를 받도록 했다.” 하였다.
[주-D002] 궁루(宮漏) : 궁중에서 쓰던 물시계. 그릇에 담은 물이 새어 흐르는 것을 보고 시간을 알았다.[주-D003] 구화장(九華帳) : 화려한 휘장 이름.[주-D004] 어로(御爐) : 어전(御前)에서 쓰던 화로.
[주-D005] 헌면(軒冕) : 옛날 귀인들이 타던 수레와 쓰던 면류관. 전(轉)하여 높은 벼슬아치를 말한다.[주-D006] 황제(黃帝) : 상고 시대 삼황(三皇)의 하나인 헌원씨(軒轅氏).
[주-D007] 은배(銀杯)가……날아갔다 : 《당서(唐書)》 유공권전(柳公權傳)에 “유공권이 모든 공경(公卿)에게 글씨 값으로 선물받은 돈이 누만금(累萬金)이나 되었는데 종들이 거의 다 훔쳐 써버리고 또 선물로 들어온 은배(銀杯)도 한 상자쯤 있었는데, 하루는 종이 여쭈기를 ‘상자 속의 은배가 모두 없어졌습니다.’ 하니, 공권은 웃으면서 ‘은배가 날개가 생겨 다 날아갔다는 것이냐?’ 하고 더 꾸짖지 않았다.” 하였다.[주-D008] 반정(頒政) : 관리의 임면(任免)ㆍ천전(遷轉)ㆍ출척(黜陟)에 관한 명령을 반포하는 일.[주-D009] 자금어대(紫金魚袋) : 뿌연 구리로 물고기 모양을 새겨 만든 주머니. 임금이 고관(高官)에게 하사하는 물품의 일종.
[주-D010] 팔관하표(八關賀表) : 팔관회는 고려 때 개경(開京)과 서경(西京)에서 토속신에게 제사지내던 의식인데 이날 각 고을 수령들이 글을 올려 하례하고 외국의 상인들이 방물(方物)을 바치고 축하하였다.
[주-D011] 춘장(春場) : 예부(禮部)에서 보이던 과장(科場). 춘관(春官)이 예부의 별칭이란 데서 나온 말.[주-D012] 걸퇴(乞退) : 늙은 재신(宰臣)이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임금에게 청원하는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