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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21일 주일 [(녹)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전교 주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은 ‘전교 주일’이다. 교회는 전교 사업에 종사하는 선교사와 전교 지역의 교회를 돕고자 1926년부터 해마다 시월 마지막 주일의 앞 주일을 ‘전교 주일’로 정하여, 신자들에게 교회 본연의 사명인 선교에 대한 의식을 일깨우고 있다. 오늘의 특별 헌금은 교황청 전교회로 보내져 전 세계 전교 지역의 교회를 돕는 데 쓰인다. 오늘 전례 ▦ 오늘은 전교 주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하십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받은 선교 사명을 깨닫고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하여 기도하고 행동합시다.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으로 모든 민족들이 밀려드는 환시를 본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으라고 하신다(복음). <모든 민족들이 주님의 산으로 밀려들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2,1-5 1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환시로 받은 말씀. 2 세월이 흐른 뒤에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리라.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언덕들보다 높이 솟아오르리라.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3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4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5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10,9-18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9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0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11 성경도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하고 말합니다. 12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13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4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15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16 그러나 모든 사람이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사야도 “주님, 저희가 전한 말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말합니다.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18 그러나 나는 묻습니다. 그들이 들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까? 물론 들었습니다.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8,16-20 그때에 16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구원이 온 세상에 펼쳐지는 시대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언자는 모든 민족들이 시온산으로 올라가 하느님을 찬미하는 그날, 예루살렘에 있는 하느님의 집으로 올라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구원의 날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이 예언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면서 이루어집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수고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그들이 행하는 업적이 하느님의 눈에 얼마나 아름다운지 감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귀로 들어야 합니다. 그 말씀을 듣기 전에 입으로 고백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선포하는 사람의 능력이나 생각으로 전해지지 않습니다. 말씀을 선포하도록 하느님께 선택되고 파견되는 한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땅끝까지 가서 구원의 복음을 전하도록 명령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가르쳐 주신 복음을 제자들이 전할 수 있도록 파견하십니다. 파견은 예수님과 분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파견되신 예수님께서 언제나 아버지의 뜻에 따라 행하신 것처럼, 예수님에게서 파견된 사람은 언제나 예수님과 함께 머물며 그분께서 행하신 구원의 가르침을 전합니다. 복음은 인간의 힘과 생각으로 전해지지 않으며 오직 그리스도의 권능과 은총으로 전해집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랑으로 변화된 사람들은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보여 줍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 수 없네! 이제는 모든 고통도 상처도 다 내려놓으시고, 주님 제단 앞에 편안히 누워계신 모예수 신부님의 영정사진을 바라보다가, 펄펄 날아다니시던 시절의 여러가지 에피소드들이 하나 하나씩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모 신부님께서는 스페인 출신의 선교사들이 대체로 그러셨던 것처럼, 그분의 마음은 예수님을 향한 확고한 신앙심, 성모님께 대한 지극한 효심, 불타는 복음선포의 열정, 이단을 향한 강한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한번은 전철역을 빠져나갈 때였습니다. 모 신부님의 예리한 레이더에 한 남자가 포착되었습니다. 계단 끝 출구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팻말을 들고 행인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분이었습니다.
평소 틈만 나면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강조하시던 신부님의 거룩한 분노가 순식간에 폭발했습니다. 한 번에 두 계단씩 성큼성큼 뛰어 올라가신 신부님은 피캣을 확 뺏들고서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들을 수 있게 큰 목소리로 외치셨습니다.
“여러분들, 하느님은 두려운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십니다!”
모 신부님께서 수녀님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기 위해 입당하실 때, 입당성가가 울려 퍼졌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 수 없네. 이 세상 부귀영화와 권세도...”
입당성가가 끝나고 제대 위에 서신 신부님께서 수녀님들 향해 크게 외치셨습니다. “거짓말!” 그러시면서 하셨던 말씀이 늘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여러분들 입술로만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 수 없네.’ 하지 마십시오. 아름다운 성가 가사를 노래로만 부르지 마시고, 삶과 행동으로 실천하십시오.”
돌아보니 모 신부님의 신앙이 참으로 깊었으며, 마치 스페인 검투사처럼 적극적이고 능동적이었습니다. 당신의 깊은 신앙을 내면에만 간직하지 않으셨고, 말과 적극적인 행동으로 표현하셨습니다. 물론 때로 너무 지나쳐서 옆에 있던 형제들이 무안해질 경우도 있었지만... 그래서 신부님께서는 당신의 그 적극성을 통해 지극히 소극적이었던 저희 후배들의 신앙에 자극과 활기를 불어넣어주셨습니다.
모 신부님은 미사나 강의, 고백성사 등을 통한 복음선포의 기회가 당신께 주어지면 그렇게 행복해 하셨습니다. 말씀 선포를 위한 준비에 최선을 다하셨고, 큰 제스처와 흥미로운 말씀으로 신자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복음선포를 향한 그분의 발걸음은 언제나 밝고 경쾌했습니다.
첫 번째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외칩니다.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서 10장 14~15절)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도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지상 과제 하나를 부여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오 복음 28장 19~20절)
다시금 맞이한 전교 주일, 그리스도 신자로서 함께 깊은 반성과 성찰의 기회로 삼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매일 우리 앞에 놓여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까? 매일 선포되는 주님의 말씀을 선물이요 은총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생명수같은 축복의 말씀을 이웃들, 가장 가까운 이웃들과 적극적으로 나누고자 하는 열정이 있습니까?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복음화란 무엇인가?>
‘핵소고지’(2016)는 1945년 일본 오키나와 지방 핵소고지를 두고 미국과 일본이 벌이는 전투에서 한 미국 위생병이 혼자 75명을 구해내 나중에 명예훈장까지 받게 된 실화를 그린 영화입니다. 그런데 데스몬드라는 이 위생병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도로서 양심적 병역거부자이고 이 교회는 안식일인 토요일은 절대 일을 하지 않는 좀 특이한 교파입니다. 그래서 그는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지키기 위해 총을 절대 손에 대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남들은 다 전쟁에 나가는데 자신만 안 나갈 수 없다며 군에 입대합니다. 총을 잡으려고도 하지 않는 병사가 전투부대에 입대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같은 부대의 거의 모든 장교들과 부대원들이 그를 내쫓으려 합니다. 군의 사기가 떨어지기 때문이고 전쟁터에서 그 사람 때문에 죽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기 위해 전쟁에 나가겠다며 재판을 받으면서까지 버팁니다. 결국 전투병에서 자신을 보호할 총도 없이 전쟁터에 나가야만 하는 위생병이 됩니다. 그리고 가장 처절한 전투지인 핵소고지로 투입됩니다. 그는 항상 성경책을 몸에 지니고 남이 때려도 용서하고 모든 것을 참아내며 임무를 수행합니다.
일본군의 반격이 거세어지자 정신없이 후퇴하느라고 핵소 고지에는 약 백여 명의 부상 병사들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냥 두면 일본군들에게 모조리 죽는 운명이었습니다. 데스몬드는 자신까지 도망칠 수 없어 밤새 부상병들을 찾아 아군의 진지까지 운반합니다. 일본군들이 득실대는 가운데 그것도 몰래 75명의 부상병들을 혼자서 구한 것입니다. 그는 한 사람을 구하고 지쳐 쓰러지면서 “주님, 한 사람만 더 구할 힘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고 또 한 사람, 그리고 또 한 사람을 구해 결국 75명을 구하게 된 것입니다.
이에 그를 오해했던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바뀌었고 그가 없으면 전투에 나가지 않을 정도로 부대의 마스코트가 되었습니다. 그가 하느님께 기도할 때면 종교에 상관없이 모두가 침묵 중에 그와 함께 기도하고 전투에 나갔습니다. 데스몬드 도스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로서 미국 최초로 의회 명예훈장을 수여받게 됩니다.
영화 ‘미션’(1986)에 보면 복음화란 명목으로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땅을 빼앗는 내용이 나옵니다. 남미는 거의 천주교를 믿는데 그 이유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무력으로 선교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남미에서 지금의 교황님이 나오신 것은 참으로 주님의 섭리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선교가 곧 복음화를 의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선교는 종교를 믿게 하는 것이고 복음화는 사랑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선교는 하느님의 존재를 믿게 하는 것이고 복음화는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력으로 하는 선교는 복음화란 말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도 이웃에게 주님을 전하는데 이렇게 두 차원으로 나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전교보다는 복음화입니다. 그 예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알 수 있습니다. 강도를 만나 길에 쓰러져있는 사람을 돕지 못하는 이유는 종교 때문입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종교를 믿기에 강도를 도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믿는 착한 사마리아인은 종교 활동은 하지 않을지라도 세상에 사랑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당에 미사와 봉사를 위해 나오는 사람들보다 성당에 나오지는 않아도 사랑을 실천한 사람의 손을 들어주십니다.
복음은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사실이 복음입니다. 하느님이 나를 심판하셔 지옥으로 보내신다면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 자체가 무슨 복음이 되겠습니까? 하느님이 사랑이시고 나를 구원해주셨다는 사실이 복음인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사랑을 널리 전하는 것이 민족들의 복음화인 것입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이들은 전철에서 잠깐이라도 눈을 붙여보려는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이런 행위가 전교는 될 수 있어도 복음화는 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부모님에 대해 자랑할 때 부모님이 계신 것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나를 이렇게나 많이 사랑해 주신다는 것을 자랑합니다. 부모님이 계셔서 우리가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태어난 것입니다. 부모님이 사랑하지 않으면 자녀가 태어나지 않습니다. 또한 부모님이 사랑해주시지 않으면 자녀가 두 발로 걷거나 말을 배울 수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자녀가 자랑해야 하는 것은 자신이 부모님이 계셔서 태어나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이 사랑하셔서 지금의 자신이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자녀가 부모님보다 부모님의 사랑을 자랑해야하듯, 우리도 하느님이 계심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자랑해야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자랑하는 방법은 그분의 자녀답게 사랑을 하는 것뿐입니다. 이웃을 미워하며, 이웃에게 자신의 것을 나누지 않으며 하는 전교행위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를 전하는 것입니다.
민족들에게 복음화를 이루는 이들은 종교의 우월성을 전하는 이들이 아니라 그 종교가 더욱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새로 태어나게 만든다는 사실을 전해야합니다. 그러려면 가톨릭신자로서 누구보다 사랑이 많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톨릭신자는 절대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가난한 사람을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사람이어서는 안 됩니다.
데스몬드 도스가 십계명을 철저히 지키도록 훈련받은 사람이지만, 아이 때 형과 다투다가 돌로 형의 머리를 쳐서 거의 죽을 지경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를 때리고 총으로 위협하는 아버지의 총을 빼앗아 아버지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습니다. 데스몬드는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자신이 복음화 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종교를 믿고 있었지만 그 종교에서 가르치는 사랑은 몸에 배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신이 폭력적인 상태에서는 누구에게도 하느님을 증거할 수 없음을 알자 그는 절대로 악을 악으로 갚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절대 폭력을 쓰지 않고 폭력에 사용되는 도구에는 손을 대지 않을 결심을 합니다. 그래서 입대하여 감옥에 갈 상황 앞에서도 절대 총을 만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자기 복음화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신의 위대함을 증거하게 만든 것입니다.
자신이 복음화가 먼저 되어야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사랑입니다. 자신이 먼저 사랑이 되어야 다른 사람도 사랑으로 새로 태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사랑이 아니면 어떤 행동도 하지 않을 정도로 만들어놓아야 합니다.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해 우리 자신을 파견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 자신이 먼저 당신의 사랑으로 복음화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종교보다는 사랑을 전하는 복음의 사도가 되어야합니다. 종교인이 아니라 사랑이 되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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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성녀 우르술라 동정
연대미상(5세기경?)의 성녀 우르술라는 브리텐의 어느 크리스챤 국왕의 딸이었는데, 그녀는 이교인 왕자와 결혼을 원하지 않았기에 결혼식을 3년간이나 연기시켜 두고는,북해를 가로 지르는 항해를 하여 스위스의 린에 상륙한 뒤, 로마로 갔다.
그러나 그들 일행은 로마로 가던 중 퀼른에서 민족 이동중이던 훈족들에게 포로가 되었는데, 이때 그녀가 그들 족장의 청혼을 뿌리치므로써 모두 학살당하였다.
이때 학살당한 사람들은 우르술라 외에 모두 11,000명의 처녀들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설은 어디까지나 전설이지 사실은 아닌듯 하다는게 역사가들의 정설이다.
하지만, 우르술라 일행은 이 지역에서 오래전부터 공경을 받아오고 있음은 확실하다.
성녀 우르술라 동정과 또 그녀와 더불어 최후를 같이 한 성녀들에게 대해서는 언제, 누가, 어디서 났고, 어떤 생애를 보냈으며,전부 몇 명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다만 그들의 순교의 원인이 정조를 지키는 데 있었다 함은 역사적으로 명백히 전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그들을 성인품에 올린 것은 이들 생애의 거룩함을 인정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그들이 정덕을 위해 싸우고 장렬한 죽음을 했다는데 그 본의가 있는 것이다.
교회에서 얼마나 순결을 고귀하게 여기는가는 이것으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성녀 우르술라 등이 순교한 때는 5세기경이며, 저 미개한 훈족이 전 유럽을 휩쓸고, 도시며 촌락을 불사르고 학살을 감행하며 재산을 모조리 약탈하는 찬악한 행동을 하면서 라인강을 타고 쾰른 시에 침입한 때이다.
거기에서 우르술라 등을 발견한 훈족들은 그 야만성을 드러내어 야욕을 채우려 했으나, 동정녀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단호히 항거했으므로 마침내 격분한 야만인들에게 잡혀 깨끗한 정덕의 꽃으로 사라졌던 것이다.
그 수에 대해 어떤 전설에는 쾰른 시 교외에 있던 어느 여자 수도원의 동정 11명이라 하고 이름까지 일일이 기록한 성인전까지 있으나, 로마의 순교록에는 성녀 사울라 동정, 22일에는 성녀 코르둘라 동정이 순교해 모두 네명의 이름만이 기재되어 있다.
그런데 클레미티오라는 사람은 그들의 묘지위에 성당을 짓고 비석을 세웠는데, 그 후 그 묘지를 발굴한 바 의외로 유골이 많이 발견되었음인지 우르술라 등의 동료는 수천 명으로 추산했고, 심지어는 만천명이라고 장담하는 사람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복자 디에고 루이스 데 산 비토레스 사제와 성 베드로 칼룽소 순교자
(예수회 고유 전례력)
디에고 루이스 데 산 비토레스는 스페인 북부 부르고스의 귀족가문에서 1627년에 태어났다.
1640년에 예수회에 입회한 그는 1651년에 사제서품을 받았다.
해외 선교를 희망했던 그는 1659년에 필리핀 선교의 임무를 받았다.
다음 해 1660년에 스페인에 머물면서 선교를 위한 준비를 했던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거리에서 설교를 하였고, 1662년이 되었을 때 마침내 태평양을 가로질러 필리핀으로 출발하였다.
1666년까지 마닐라 대학 (University of Manila)의 학장(dean)을 역임했던 디에고 루이스 데 산 비토레스는 라드 로네스 제도(오늘날의 마리아나 제도)의 선교 책임을 맡아서 활동하던 중에 원주민에게 살해를 당했다.
‘마리아나의 사도’ 디에고 루이스 데 산 비토레스는 선교자로서 이방 원주민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려던 노력을 통해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베드로 칼룽소드(St. Pedro Calungsod (of Cebu) )
평신도 선교사,교리교사
베드로 칼룽소드는 필리빈 세부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예수회 신부들에게 교육을 받았다.
스페인어를 비롯하여 그림, 노래, 연기, 목공 등을 배워 익혔으며, (라틴어로 사제와 주고받는 이전 방식의) 미사 복사에도 소질이 있었다.
이후 괌에서 예수회 선교사들과 함께 차모로 족에게 교리를 가르쳤고, 여러가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신앙으로 이끌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괌에 망명한 한 중국인 범죄자가 '세례수에 독이 들었다'는 소문을 퍼뜨렸고, 일부 병약한 아기들이 병으로 죽자 이를 오해한 사람들이 선교사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클룽소드와 디에고 루이스 데 산 비토레스 신부가 어느 아기에게 유아 세례를 주려 할 때, 아이의 아버비와 다른 원주민이 그들을 창과 칼로 공격했다.
클룽소드는 처음에 공격을 피했으나, 디에고 신부와 함께 결국 18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공격자들은 죽은 두 사람의 옷을 벗기고 발에 돌을 매달아 바다에 던졌다.
두 사람의 시복시성 절차가 진행되던 도중 정치적, 종교적 혼란 때문에 중단되었다가 디에고 신부가 먼저 시복되었고, 이후 잊혀졌던 클룽소드의 기록이 발견되며 그의 삶이 재조명되었다.
그의 전구로 인한 치유 기적이 인정되며 2000년에 시복되었고, 2012년 성인 반열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