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13일 연중 제1주간 월요일
"나를 따라오너라. (마르 1,14-20)
Come after me,
말씀의 초대
한나는 엘카나의 아내이다. 엘카나의 다른 아내 프닌나는 한나에 대해 아이가 없다는 이유로 비웃었고, 한나의 마음은 찢어지듯 아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복음 선포를 시작하시며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신다. 그들은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드실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구약 성경에서 우리는 가슴 찢어지는 아픈 심정으로 하느님께 호소하는 이들을 자주 만납니다. 그들에게서 우리는 마음의 가난이 무엇인지를 그저 비유나 논리적인 사고로서가 아니라 절실한 삶 속에서 보게 됩니다. 오늘과 내일의 독서에서 만나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그 좋은 보기입니다. 사무엘기 상권에서는 시작부터 한나의 한스러운 처지를 생생하게 알려 줍니다. 그 쓰라리고 원통한 마음을 그녀는 억지로 숨기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에게서 해답을 찾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오로지 하느님께 달려가 한없이 흐느끼는 가운데 기도하며 자비를 청합니다(내일 독서 참조). “하느님, 제 권리를 되찾아 주소서. 충실치 못한 백성을 거슬러 제 소송을 이끌어 주소서. 거짓되고 불의한 자에게서 저를 구하소서”(시편 43〔42〕,1). 우리가 자주 듣는 이 애원처럼, 하느님께만 마지막 희망을 둘 수 있는 절박함을 이 여인은 잘 보여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면서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드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으며 ‘사람 낚는 어부’의 덕목이 무엇일지 묵상해 봅니다. 한나처럼 모든 것을 내놓은 채 하느님께 호소해야 할 정도로 처절하고 가난한 이의 마음을 제대로 볼 줄 아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굴곡과 서러움의 마디마디를 가벼이 여기지 않고, 그 상처와 한을 두려움 없이 하느님 앞에서 고스란히 호소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것이, 주님의 제자로서 사람을 대하는 자세일 것입니다.
미국의 철강재벌 앤드류 카네기가 살아있을 때 자신의 친한 친척에게 유산을 물려주었습니다. 액수는 자그마치 1백만 달러였지요. 그런데 유산을 물려받은 친척은 고마워하기는커녕 크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글쎄 세계 최고의 갑부인 카네기가 자선 단체에는 3억 달러를 기부했으면서도 친척인 자신에게는 1백만 달러밖에 주지 않았다는 것이 그 이유라고 하네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이지요. 그러나 이 모습을 우리 역시 가지고 있었음을 반성하게 됩니다. 주님으로부터 그렇게 많은 능력과 힘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불평과 불만으로 일관했던 우리들의 삶이었으니까요. 그러면서도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만 신경을 쓰고 정신을 기울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지요.
영국의 하리 베인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형이 확정되어 단두대에 오르게 되었지요. 그런데 사형이 집행되기 바로 전, 유언을 하는데 영 뜻밖이었습니다.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덜미에 있는 종기를 다치지 않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지켜 본 수많은 사람들은 어이가 없이 코웃음을 쳤답니다.
죽는 순간에 목덜미에 난 종기가 중요할 리가 없지요. 그러나 우리도 이처럼 중요하지 않은 것을 중요한 것으로 착각하면서 어리석은 행동과 생각을 할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이러한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해 주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즉, 가까이 온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제일 중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기쁜 소식이신 주님을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 안에서만 중요하게 보이는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는 가장 중요한 것을 쫓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나를 따라오너라.”는 말씀에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 현재로써는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결단이 필요할 때입니다. 이 세상 것만을 쫓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향하는 결단과 그 실천이 가장 필요합니다.
지금도 사랑이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으로 다가오시며 당신을 따르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 사랑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을까요? 혹시 불평과 불만을 던지면서 중요하지 않은 것만을 계속 쫓는 어리석은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대리석이 아닌 사람의 마음에 당신의 이름을 새겨라(찰스 스펄전).
참 만남
-김광태-
마르코 복음 전체가 그렇지만, 특히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의 이야기는 간결하게 묘사되어 그 느낌이 아주 강렬합니다.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인생 전체가 걸린 문제일 텐데, 예수님을 따른 동기나 내면의 갈등에 대한 어떠한 부연 설명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최면에 걸리는 것과 비슷한 어떤 강렬한 체험이 없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만남의 힘이고 사랑의 힘입니다. 제자들은 자기의 영혼 깊숙이 새겨진 그분을 만나고서 그 황홀함에 매료되어 따라나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진 것을 다 버리는 일이 구태여 고뇌에 찬 결단이 될 이유도 없었습니다. 배와 그물이 조금 전까지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소중한 생계수단이었지만, 이제는 그분을 따르는 일을 방해하는 거추장스런 짐으로 여겨질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정면으로 응시해야 합니다. 그분의 눈을 바라보고 그분과 마음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분 매력에 온전히 빠지면, 나머지는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초인적인 의지를 발휘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다 해결해줄 것입니다.
믿음과 확신
-김찬선신부-
저는 성공과 실패의 차원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무엇이 그것으로 전부가 아니고 무엇이 그것으로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시점에서 단층적으로 보면 그것이 전부이고 끝인 것 같지만 그것이 사실은 아직 알지 못하는 미래와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굳이 실패한 것이 있다면 젊은이들과 관련한 것들입니다. 제 조카들 중에 하나라도 수도자로 만들고 싶었는데 열 셋 중에 아직 한 놈도 수도자가 된 놈이 없습니다. 아직 여섯이 남아 있긴 하지만 가능성이 희박한 것 같습니다. 조카들이 제 기대를 배반한 것도 있지만 제가 조카들을 적극적으로 끌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이 생활이 가장 가치 있는 삶인 것 사실이지만 그만큼 쉽지 않고 실패율이 높기 때문이고, 제가 아는 한 조카들도 영 미덥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실패는 조카뿐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제가 흑심을 품었던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흑심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요놈 잘 키워서 수도자 만들어야겠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내색은 하지 않고 공을 들였는데 어느 날 ‘저 시집가요, 장가가요’하고 휭 떠나버립니다.
오늘 복음의 부르심 얘기를 묵상하면서 저를 반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다 알고 계셨을 텐데 그럼에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부르셨는데 저는 제 조카들을 인간적으로 따져보고 끌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부르시고 하느님께서 뽑으시고 하느님께서 키우시고 하느님께서 이끄시고 하느님께서 힘주신다고 말로는 하면서 실제로는 그런 믿음으로 하느님께 조카들을 맡기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저에 비추어 고기를 낚는 어부들을 사람 낚는 어부들로 만들겠다는 예수님의 그 믿음과 확신은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란 제자들에 대한 믿음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제자들, 나중에 확인되었듯이 그리 믿을 만하지 못합니다. 제 조카들이나 제자들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확신이란 고기 낚는 어부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될 것이라는 확신과 함께 또 그렇게 되게 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자기 확신입니다. 이 확신은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 당신의 헌신의지가 합해져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무엇에 대한 확신을 갖고자 한다면 하느님께서 그렇게 해주실 것이라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은총에 부응하는 우리의 헌신의지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믿음과 확신으로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을 대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아침입니다.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전삼용신부-
제가 보좌 신부를 할 때 순교복자회 본원에서 지, 청원, 수련자들에게 성경강의를 해 달라는 부탁이 들어왔습니다. 제가 신학생 때는 성경을 전공했기 때문에 로마에서 함께 공부하던 수녀님을 통해 부탁을 해 온 것입니다.
그러나 첫 해 보좌 생활이 너무 바빴기 때문에 좀체 시간을 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새 사제의 불타는 열정으로 해 드리겠다고 수락했고 결국 쉬는 날인 월요일 아침마다 강의를 해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아침에 한 이유는 월요일은 사제가 쉬는 날인데 그 때마다 이런 저런 사제들의 모임이 많았기에 아침 일찍 하지 않으면 모임에 참석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일까지의 피곤한 일정을 마치고 월요일은 아침미사 하고 한 숨 자는 것이 꿀맛이었는데 그 주간부터는 새벽미사가 끝나자마자 차를 몰고 서울 청파동으로 향해야 했습니다. 매 주 한 시간 반의 강의를 마치고 내려오면 간신히 동기모임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월요일 날도 쉬지 못하니 정말 피곤할 것 같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제관에서 오전 내내 잠을 자던 때보다 더 힘이 났습니다. 그래서 유학을 다시 나오기 전까지 거의 2년을 매주 월요일 아침마다 그들에게 강의를 하였습니다.
육체적으로는 그렇게 힘들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들을 가르치는 것이 제게 힘을 주었습니다. 사실 신자들에게 강론시간에 말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정말 깊은 부분과 자세한 부분들은 일일이 강론에서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시간도 부족할뿐더러 신자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면 지루해 한다던가, 관심 없어 하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강론은 쉽게 핵심적인 것을 삶에 비추어 해야 합니다. 그래도 어려워하거나 잘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수녀님이 되겠다고 앉아있는 그 자매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은 가르치는 입장에서는 보물을 발견한 것과도 같습니다. 쉬지 않고 한 시간 반을 이야기해도 열심히 받아 적고 질문도 하는 등 가르치는 사람을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저는 사실 신자들에게 얻을 수 없는 만족을 그들을 통해 얻었었습니다. 많은 신자들도 힘을 주는 말씀을 많이 해 주셨지만, 그이들이 주는 만족은 그 이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서 더 ‘제자들’이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복음전파를 시작하시며 첫 네 명의 직업이 어부였던 이들을 제자로 부르십니다.
저는 그 자매들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왜 복음 선포를 시작하는 동시에 제자들을 부르셨는지 이해가 갑니다. 물론 당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아 그들을 온전히 당신의 후계자로 가르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이유가 가장 클 것입니다. 당신이 수난하시는 날까지 제자들은 완전하게 되지 못하여 모두 도망쳐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더라도 제자들은 예수님께 큰 위로가 되었음 또한 확실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던 것을 제자들에게만 따로 설명해 주시는가하면 제자들과만 함께 계실 때 특별한 것들을 더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들에게는 이렇게 비유로만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에게는 따로 일일이 그 뜻을 풀이해 주셨다.” (마르 4,36)
“예수의 일행이 그 곳을 떠나 갈릴래아 지방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예수께서는 이 일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그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따로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마르 9,30-31)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런 숨겨진 말씀들을 따로 해 주시며 만족하시고 더 깊은 관계를 형성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과 피를 먹고 마셔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실 때 모든 이들은 예수님을 떠나갔지만 제자들만은 예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사랑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어렵다고 모두 떠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아프셨지만 끝까지 당신께 남아있는 제자들을 보며 위로를 받으셨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도 부활하여 나타나신 예수님을 ‘스승님!’이라고 부릅니다. 열심히 배워 제자가 된다는 말은 곧 사랑한다는 말이고 스승에게 커다란 위로를 줍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하게 ‘스승’이라 불려야 합당한 분이십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제자로 삼으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이란 스승과의 더 깊은 가르침을 통해 끈끈한 통교와 사랑의 관계를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습은 항상 우리가 따라야하는 모범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전파를 시작하는 동시에 제자들을 뽑아 함께 지내시며 가르치셨습니다. 그것도 12사도와 72제자들만을 뽑으셔서 그들에게 특별교육을 하셨습니다. 가르친다는 것, 또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스승과 제자 관계를 넘어서서 사랑의 관계입니다. 제자들은 교회를 의미하고 스승이신 그리스도는 교회의 신랑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 자녀가 가장 큰 재산이라면 우리 신앙인은 자신의 제자들이 가장 큰 재산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직도 당신의 제자들이 더 늘어나기를 원하시고 당신의 제자들을 보며 기뻐하십니다. 이제 사람 낚는 어부를 부르는 몫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가르치는 몫도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차지하시는 분은 유일한 스승,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신앙인 - 경규봉 신부-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하여 불안하고 초조한 상태에서 남편의 다른 아내 브닌나로부터 시기와 질투,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할 때 자칫 브닌나를 원망하고 저주하는 악한 마음을 품기 쉽다.
그렇지만 한나는 브닌나를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처지가 한스러워서, 수치심과 무력감에 빠져 목 놓아 울었을 따름이다. 이렇게 목 놓아 울던 한나는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자신이 아이를 낳는 것은 오직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이며,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겨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무력감에 빠져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않고, 시간만 보내며 울고 있어서만은 안된다는 점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녀는 제사상을 물리고 난 후에 주님 앞에 나아가 기도했다. 물론 전에도 아버지 하느님께 아이를 낳게 해주시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자신이 기도한 결과로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제 한나는 자신이 기도함으로써 아이를 낳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
아이를 낳는 것은 주님의 은총과 자비의 결과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드리며, 자신은 다만 갓난아이처럼 주님의 자비를 간구한 것이다.
그녀의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는가 하는 것은 사제 엘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주정을 하고 있을 참이냐? 어서 술에서 깨어나지 못하겠느냐?” 하고 꾸짖는 데에서 잘 드러난다.
그녀는 마치 술에 취한 듯이 기도에 취해 있었고, 기도 속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리하여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그녀를 어여삐 보시고 그녀에게 아들을 잉태하게 해주셨다.
다른 이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결코 그들을 원망하거나 저주하는 악한 마음을 품지 않는 사람, 자신의 한계를 알고 고백할줄 아는 사람, 자신이 무력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다하는 사람,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되 최선을 다해 맡기는 사람, 갓난아이가 어머니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처럼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사람, 절망 속에서도 하느님께 의탁하며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사람, 그들이 곧 신앙인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
<이제 다시 시작입니다>
-양승국신부-
축복과 감동의 시기였던 성탄축제가 모두 끝났습니다. 이제 다시 시작입니다. 연중 제1주간 월요일 아침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한번 출발선상에 섰습니다. 들떠 있었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일상에로 돌아갈 순간입니다. 평상심으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언제까지나 축제만 준비하며 축제만 즐기며 지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언제나 기분 팍팍 내면서 왕자처럼 공주처럼 지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제는 다시 서류뭉치로 가득한 책상 앞으로 의자를 끌어당길 때입니다. 이제 다시 한번 삶의 현장으로 깊이 파고 들어갈 때입니다.
이 중요한 날 마르코 복음사가는 첫 번째 그룹의 사도들이-시몬과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어떻게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나가는지에 대해서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 제자단을 향해 선문답의 질문과도 같은 화두 하나를 던지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전문직 고기잡이 어부들을 향해 이제는 "고기가 아니라 사람"을 낚자고 제안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던지신 이 간단한 한 마디 말씀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뼈대 있는 말씀이고, 어떻게 생각하면 엄청난 결단을 촉구하는 초대의 말씀입니다.
갈릴래아 호수 안에 들어있는 이스라엘 잉어를 잡는 일도 중요하겠지만 이제 보다 가치 있는 일, 보다 의미 있는 일, 보다 고차원적이고 본질적인 일에 함께 투신하자는 초대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하는 첫 번째 제자들의 모습에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한순간의 지체도 없이 즉시 따라나섭니다.
그물을 던지고 있던 시몬과 안드레아였습니다. 저 같았으면 그 상황에서 "잠깐만 기다리세요. 이번에 던진 그물만 끌어올리고 따라 갈게요" 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느긋한 제 성격에 "당장 죽는 일 아니니까, 오늘 하루만 여유를 줘보세요. 하루 좀 생각해보고 따라가던지 남든지를 선택 하겠습니다" 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한 순간의 지체도 없습니다. 던지고 있던 그물을 집어 던집니다. 목돈을 투자해서 마련한 고깃배에도 미련을 두지 않습니다. 잡아놓은 광어며 우럭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기껏 다 손질해놓은 그물마저 집어던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젠가 상황이 좀 나아지면, 어느 정도 자리 잡으면, 마음이 정리가 되면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따라나설 것을 요구하십니다.
내일부터, 다음 주 월요일부터, 다음달 초부터, 내년부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당신과 함께 새 출발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이 은혜로운 첫 출발의 순간 주님과 함께 산뜻한 새 출발 하시길 기원합니다.
<첫마음>
한번은 다 바치고 다시
겨울나무로 서있는 벗들에게
저마다 지닌
상처 깊은 곳에
맑은 빛이 숨어 있다
첫마음을 잃지 말자
그리고 성공하자
참혹하게 아름다운 우리
첫마음으로
어제 1년 동안 간석4동 성당에서 거주하면서 미사를 도와주었던 학생 신부님이 다른 본당으로 이동을 했습니다. 떠나는 신부님을 보면서 잘해주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많이 남더군요. 사실 항상 그렇지요. 그때에는 충실하지 못하면서, 시간이 지난 뒤에야 후회하는 모습들.
저 역시 또다시 이런 후회를 하면서 신부님의 많은 짐들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저의 짐들을 생각하게 되더군요.
매년 늘어만 가는 저의 짐들. 너무나도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 나의 모습들. 또한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누군가 달라고 하면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는가라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참으로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던 저였습니다. 그리고 그 짐은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늘어만 갔습니다. 또한 그 짐에 대한 욕심도 만만치 않았지요. 그래서 꽉 움켜잡고서 지키기에 급급했던 적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과연 내 것들을 포기할 수 있을까요?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를 부르시는 예수님을 떠올려 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를 부르신다면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처럼 내가 소유하고 있는 그 모든 것을 곧바로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을까 라는 묵상을 해 봅니다.
마이스터 엑하르트 성인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더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더 알려고 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더 가지려고 하지 않는다.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지식으로부터의 자유, 소유로부터의 자유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저는 마음이 가난하지 못했습니다. 즉, 욕망, 지식, 소유에 대해서 자유롭지 못했던 저였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가난하지 못했기에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는 주님의 부르심에 곧바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데 주저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거리의 걸인들은 한 번 손에 들어온 것은 절대로 남에게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주위의 모든 사람을 의심하지요. 왜냐하면 자신이 가진 것을 남이 빼앗으려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모습은 거리의 걸인들 안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행여 잃어버리면 어떻게 할까 노심초사하는 사람들, 내가 아는 지식을 남이 알면 내가 초라해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너무 많지 않습니까?
소유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은 함께 나누는 기쁨을 간직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야말로 주님의 부르심에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응답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는 가지고 있는 것들을 정리해야 할 때입니다. 그래야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뭘 하러 흐리멍텅하게 살겄나? 죽지 못해 일하고 입에 간신히 풀칠이나 하며 살 바엔, 고생두 신나게 해야 사는 보람이 있잖어.(황석영, ‘개밥바리기별’ 중에서)
하느님의 초대
-오기백 신부-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외치는 요한의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으셔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조금 후에 요한은 체포되고 맙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고민하시고 결단을 내리셨던 것 같습니다. “이제 메시지를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니 내가 해야겠구나”라고 말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역사의 징표를 읽으시면서 응답하신 것이지요.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끔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발생해서 우리를 새롭게 부르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의 예를 든다면, 25년 전 저의 고향에 한 여고생이 있었는데 뜻하지 않은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부모는 여러 갈등을 겪으면서도 그 아이를 대신 키우게 되었습니다. 자기 자녀를 다 키워서 더 이상 아이들을 키운다는 계획을 갖고 있지 않던 부모님이었지만, 딸이 낳은 아기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고 다시 아기를 키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어느새 25년이 지났고 오늘날 그 두 분은 오히려 그 손녀로 인해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손녀가 결혼함으로써 증조부가 되었고 또 예쁜 증손을 보게 되어 요즘 얼마나 행복해하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역사, 우리의 삶에 있어서 예상치 않은 일들 속엔 하느님의 특별한 초대가 있습니다.
가장 깊은 어둠 가까이에
- 조정희 수녀-
오래전 맹인 선교회 식구들과 만날 때였다. 겨울에 차가운 방에서 예비자 교리도 하고 함께 병원 방문도 하며 기쁘게 지내던 중 한 사람을 통해 밑바닥까지 떨어지는 체험을 했다. 내가 상대방의 자립을 바라지 않고 나에게 의존하기를 바라며 만나왔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내 만족을 위한 것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자 나는 몹시 비참했고 슬펐다.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이라 믿으며 살아온 내 존재가 흔들리며 아주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을 깨닫게 해주신 것이 감사했다. 돌아보면 그 시간이 나에게 첫 회개의 순간이라 느껴진다. 내가 이상적이라고 굳게 믿었던 삶의 방식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주시고 나를 거짓된 강박관념에서 풀려나게 해주신, 그리고 순수한 사랑의 동기로 살아가도록 인도해 주신 은총의 시간이었다. 지금도 내가 느끼기에 버거운 일이 닥칠 때면 나는 하느님께서 함께해 주실 것을 믿고 ‘예.’`할 것인가, 부족한 내 능력을 생각하고 편하게 살고 싶은 본성에 따라 ‘아니오.’ 할 것인가의 갈림길에 서서 갈등한다. 나를 바라보는 눈을 들어 당신을 바라보고 당신께 온전히 맡겨드리며 ‘예.’`하는 데 믿음과 용기가 필요함을 느낀다. 내가 걸어온 길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는 때로 가장 깊은 어둠과 두려움 가까이에 있었다. 그 너머를 보게 해주시고 자유롭게 해주시는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은 늘 가까이 계셨다. 그러기에 깨어지고 부서지는 것도 감사하다. 당신께서 더 진실한 그릇으로 빚기 위해 인도하시는 것임을 늘 뒤늦게 깨닫지만….
새벽을 열며
-조명연신부-
젊은 시절부터 정력적으로 사업에 몰두하던 형제님이 중년에 들어서자 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위궤양 증세로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는 일을 하다가 그만 피를 토하고 쓰러져 큰 대학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지요. 의사는 그의 병세가 심각한 지경이라는 진단과 함께 매일같이 위세척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식사라고는 1시간마다 알칼리성 분말과 반 스푼 정도의 크림과 우유 반 컵 정도였지요. 이런 치료는 몇 달 동안 지루하게 계속되었습니다. 그동안 이 형제님의 체중은 79킬로그램에서 40킬로그램까지 내려갔지요. 하지만 이런 혹독한 치료에도 그의 병세에는 호전된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황한 의사들은 좀 더 정밀한 검사를 한 후에 그에게 완치될 가망이 없다는 충격적인 선고를 내렸습니다. 이 형제는 눈앞에 캄캄했지요.
‘이제 내 앞에 죽음밖에 남아 있는 것이 없다니…….’
하지만 그는 곧 마음을 새롭게 다졌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진정으로 원하던 일을 아낌없이 해보겠다는 다짐도 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던 중에 젊은 날 세계 일주를 해보고 싶었던 꿈이 되살아났습니다. 그는 의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여행을 시작하였지요.
여행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여태까지 복용했던 약이나 위세척의 횟수를 차츰 줄이고 먹고 싶었던 여러 가지 음식들을 먹어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죽음을 초월한 그에게 장애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지요. 마음껏 스스로의 자유를 즐기고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소망하던 낯선 세계로의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사업상의 문제들이 부질없는 걱정거리였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더욱 더 즐거운 여행을 할 수 있었지요.
세계 일주 여행이 끝났을 때 그는 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위궤양은 씻은 듯 사라졌고 오히려 체중이 50킬로그램 정도 늘어난 건강한 몸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지금이라는 현재에서 보다 더 나은 생활을 위해 노력을 했고, 그 결과 죽음을 이겨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내게 다가온 고통과 시련에 그냥 주저앉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은 연중 시기의 첫 날입니다. 이 연중 시기의 첫 날,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그 말은 언제 하라는 것일까요? 바로 지금이라는 현재에 당장 행하라는 것이지요. 그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고통과 시련을 이길 수 있는 힘이기에, 그리고 지금의 상황에서 더 나은 상황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이기에 지금 당장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당장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떠올려 봅시다. 주님께서는 안일한 마음을 가지고 대충 대충 살아가는 우리들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최선을 다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을 원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포기하지 말고, 지금 최선을 다해 살아보세요.
길을 얻었는가?
-박기호 신부-
예수님을 만났다 함은 길을 만난 것입니다. 참된 행복의 길, 평화로운 인생길, 조화로운 삶의 길입니다. 내 앞에 길이 있음은 내가 여기 말고 다른 곳으로 가야 함을 의미합니다. 찾아야 할 삶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은 내게 생명을 주시고 손을 떼신 것이 아니라 매순간 삶을 이끄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외치기만 하지 않고 친히 그 영접의 길로 인도하시고자 우리를 부릅니다. 어부는 고기를 잡고 농부는 곡식을 거둡니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 필요한 물자를 얻으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물을 들고 바다로 가고 소를 몰고 밭으로 가고 승용차를 몰고 회사로 갑니다. 한결같이 피곤하지만 가족의 행복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출정입니다. 그러나 지고의 행복이란 바로 ‘하느님 나라’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럴 필요가 없어집니다. 예수, 그분께서 행복의 모든 과정을 생략하시고 직접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시겠다고 초대하시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에 응답한 자는 자신에게 행복의 도구였던 어선도 그물도 버렸는지 챙겼는지 무상해집니다. 그분을 따라나서는 것만이 중요할 뿐. 그럼에도 즉시 따라나서지 못한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가까운 행복을 두고 왜 아직도 먼 길을 돌아가야 할까요? 움직이길 싫어하면서 건강을 위한 운동은 따로 하고 몸에 좋은 약과 웰빙 식품을 찾습니다. 버리고 떠날 수는 없을까요? 우리 ‘산 위의 마을’에서는 힘들여 노동하면서 소박하지만 좋은 음식을 먹고 삽니다.
순희 누님의 회갑 잔치
-박영대-
지금까지 ‘복음이 뭐냐?’고 물었을 때 선뜻 대답하는 신자는 거의 없었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하는 대답도 예수님의 모범 답안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이 기쁜 소식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신자들이 이처럼 예수께서 선포한 복음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참 이상한 일이다. 예수님의 복음을 안다손 치더라도 나는 예수님의 복음,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정말로 믿는가? 그걸 위해 모든 걸 포기할 정도로 기쁘게 받아들이는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던 제자들이 한 것처럼 재산과 가족마저 팽개칠 정도로? 쉽게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없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을 흉내라도 내며 살려는 건 주변에 하느님 나라를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던지는 스승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한 분은 지난해 회갑을 맞는 박순희 아녜스 누님이다. 스스로 노동운동과 결혼했다고 할 정도로 가톨릭노동청년회 활동을 시작한 뒤로 평생 한눈팔지 않고 노동자로서 사회운동가로서 온 삶을 바치신 분이다. 순희 누님의 회갑 잔치에 가서 놀란 건 단지 축하하러 온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 아니다. 전국 곳곳에서 정말 다양한 나이와 신분의 사람들이 모여서 놀랐다. 하나같이 밝고 행복한 축하 손님의 얼굴을 통해 순희 누님의 인생 성적표를 보는 것 같아 나도 괜히 우쭐하고 기뻤다. 이게 하느님 나라 잔치의 기쁨이 아닐까 싶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쉽게 믿지 못하는 건 내게 이 같은 기쁨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스도 가르침의 시작 - 회개 -서경돈 신부-
구원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하느님의 대변자가 가장 많 이 외친 주제는 무엇이겠는가? 하느님의 백성이 예언자들 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주제는 무엇이겠는가? 예수께서 공 생활을 시작하시며 세상을 향해 맨 처음 외치신 첫 일성은 무엇일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하고 말씀하신다. 인류가 하느님께 죄를 지은 이래 끊임없이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회개"이다. 회개라는 주제는 너무 많이, 너무 자주 들어 식상할 정도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만큼 회개를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회개가 무엇이기에 그토록 어려운 것일까?
회개는 삶의 중심, 생활의 기준 문제이다. 인간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데 있어 그 중심과 기준을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둔다. 그래서 오해하고, 미워하고, 탓하고, 불평하고, 고통 받고, 거짓말하고, 싸우고, 하느님을 잊는다. 이래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기쁜 소식으로 와 닿을 수 없다. 생각과 말과 행동의 중심과 기준을 내 자신이 아닌 하느님께 두는 것이 회개 하는 것이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인간인 우리에게 이것은 한시도 쉬운 문제가 아니다.
보라, 주님께서 분명히 우리와 함께 계시는 미사에까지 와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나의 사람관계, 어려운 일, 돈 문제 등을 생각하고 있지 않는가? 미사시간에 왜 그렇게 얼굴들을 펴지 못하고 있는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쁨과 평화를 주지 못하시는 것이겠는가? 회개가 필요한 모습들이다.
주님께 정신을 집중하고 마음을 활짝 열어 주님을 맛들이고 받아들여야 한다. 내 생각의 중심을 주님께 두어야 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앞날의 즐거움이나 괴로움을 생각하기 보다는 지금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데 열중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세상을 살아갈 힘도, 용기도, 강복도 주신다. 믿음을 가지고 삶의 중심을 하느님께 두는 회개를 종말 때까지,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해야 할 것이다..............◆
<또 다시 첫 아침에>
-양승국신부-
한 달 반가량의 대림?성탄 시기가 어제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돌아보니 참으로 행복했던 나날들이었습니다. 마치도 잔잔한 은혜의 강가를 주님과 함께 거닐던 꿈결 같던 순간이었습니다. 아기 예수님과 함께 걸어온 은총의 오솔길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또 다른 출발선상에 서 있습니다. 교회 전례력 안의 여러 전례 시기들 가운데 가장 평범하지만, 그래서 더욱 소중한 연중시기를 시작합니다. 연중시기가 있기에 사순?부활 시기가 더욱 빛을 발합니다. 연중시기가 있기에 대림?성탄시기가 더욱 풍요롭습니다. 이처럼 연중시기는 다른 전례시기의 배경이자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한 시절을 매듭지을 때 마다, 그리고 새로운 절기를 맞아들일 때 마다 드는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그 누군가가 이 세상에 와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면 그것은 엄청난 고통일 것입니다. 한번 만개한 꽃이 시들지 않고 계속해서 피어있는 것도 무척 어색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네 사랑에 이별이 있고, 인생에 기승전결이 있다는 것, 시절의 끝자락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다행한 일입니다. 인생에도 저무는 황혼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좋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황혼 속에서 사람들은 비로소 착해지기 때문입니다.
한 절기의 끝자락에 매달려 우여곡절의 지난 순간들을 뒤돌아보면 만감이 교차합니다. 복잡 미묘한 감정으로 마음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온 나날들은 주님의 자비 안에 행복했던 날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큰 부족함을 끝까지 참아주셨으니 말입니다.
감사하다고 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숱한 죄와 과오, 부끄러움을 끝까지 인내하셨으니 말입니다.
찬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직까지 우리에게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셨으니 말입니다. 아직 이렇게 살아서 두 발로 서있으니 말입니다.
돌아보니 정녕 우리는 모두 지난 대림?성탄 시기 동안 하느님으로부터 충만한 은총을 받고 또 받았습니다.
결국 새롭게 맞이한 연중시기 첫 아침에 우리가 취해야할 태도는 감사뿐입니다. 오늘은 정녕 은총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묵은 것이 새것과 화해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절망이 희망과 다시금 손을 잡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고통이 축복으로 변화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지나온 시절에 대한 결론은 항상 감사입니다.
은총의 주님께서는 은혜와 축복으로 충만했던 우리의 지난날들을 봉헌물로 받으시는군요. 그리고 은혜롭게도 우리 앞에 또 다시 빈 들판 같은 희망만으로 가득 찬 새로운 연중시기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감사하면서, 찬미하면서, 다시 한 번 힘차게 자리를 털고 일어설 때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주어진 평생의 과제는 삶이 눈물겹게 소중한 축복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부족했던 우리의 지난날들, 이제 하느님께서 모두 거두어가셨습니다. 우리는 또 다시 다시 새로운 연중시기란 과분한 은총 앞에 서있습니다. 정녕 헤아릴 수 없는 축복의 아침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가장 큰 표시인 은총의 아침입니다.
이 연중시기의 첫날,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처럼 기쁜 마음으로, 감개무량한 심정으로 다시 한 번 주님과 함께 힘찬 항해를 시작하시길 바랍니다.
연중시기를 시작하며...
-오상선신부-
우리 구원의 시작을 알린 주님의 성탄시기를 마무리하고 연중시기를 시작한다. 성탄시기 동안 보고 느끼고 체험한 화려함과 감동을 뒤로 하고 이제 묵묵히 그 성탄의 신비를 살아나가야 할 때이다.
성탄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새롭게 일깨워 주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아니 나를 얼마나 사랑해 주시는 지를 강력하게 깨우쳐 주었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의 사랑을 목말라하고 계심도 보여주셨다. 우리는 사람이 되어 오신 말씀, 겸손의 모습으로 오신 구세주를 통해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 겸손의 길임을 배우기도 하였다. 이제 우리는 묵묵히 이 성탄의 신비를 살아나가야 한다.
연중시기를 시작하시면서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일성(一聲)은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이다. 성탄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臨)하심을 체험하였다. 그러니 우리 가운데 계신 하느님을 중심에 놓고 사는 기쁨을 누리라는 메시지가 아니겠는가? 오늘 하루의 삶 안에서 나와 함께 계시는 그 주님을 느껴보자. 그리고 그 주님과 더불어 함께 기쁨을 나누자꾸나.
두번째의 말씀은 <나를 따라 오너라!>이다. 시몬과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시며 나를 따라 오너라고 하시고 제자들 또한 두말없이 묵묵히 그 초대에 응한다.
연중시기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거저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그분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하루하루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불러주시는 그분의 음성을 제대로 알아듣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가자. 그냥 단순히 그분의 초대에 <예> 하고 순응하는 생활이 연중시기를 지내는 가장 아름다운 방법이리라.
마치 장거리 경주의 출발점에 서 있듯이, 길고 지루하게 펼쳐질 연중시기를 시작하면서 소박하고 평범한 일상 안에서 가족 여러분 모두에게 영적 여정에 진보 있으시길 축원해 본다...
출발!
<왕수도자>
-양승국신부-
세상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수도자들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물론 감명 깊은 강론을 하는 수도자, 맡은 바 일을 무리 없이 원만히 척척 처리해내는 수도자, 수도복이 잘 어울리는 수도자도 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가장 수도자다운 수도자, 왕 수도자는 끊임없이 "길 떠나는" 수도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나를 따라 오너라" 하고 부르십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지체 없이 따라나서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참 수도자의 모범을 봅니다.
수도원 인사이동 기간을 맞아 집을 바꾸시는 선배 신부님들의 모습에서 참 된 수도자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다시 한번 배우게 됩니다. 가방 두 개만 달랑 양손에 들고 새로운 임지로 향하시는 선배 신부님들의 뒷모습, 오래된 안경, 다 떨어져가는 성무일도, 낡아 헤어진 바짓단, 곧 끊어질 듯한 허리띠를 매신 선배 신부님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우리 수도회의 희망을 봅니다(빛두레 제 547호 참조).
사제나 수도자들이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 생각 한가지가 있습니다. 사제나 수도자가 지녀야 할 가장 본질적인 자세는 "순례성"이란 것입니다.
순례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어느 한곳에 얽매이거나 집착하지 않고 언제나 떠날 준비가 되어있는 자유로움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 세상의 이방인들임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언젠가 이 세상 순례를 끝내고 나서는 또 다른 세상을 향해 먼 길을 떠나야만 하는 이 세상의 이방인들인 것입니다.
참된 수행의 첫걸음은 매일 자신을 떠나는 것입니다. 매일 우리의 아집과 이기심으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매일 우리를 가두어놓는 "나"란 울타리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한 해를 다시 시작하며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간 견뎌온 지난 세월만큼이나 보다 겸손해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홀가분한 자세가 되어 주님께서 부르실 때 즉시 그분을 따라나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 공생활 따라잡기
-박상대 신부-
어제 ‘주님 세례 축일’로서 20여일 정도의 성탄시기가 마감되고 연중시기가 시작되었다. 연중시기는 구체적으로 오늘부터 재의 수요일 전까지와 성령강림 주일 다음 월요일부터 새 전례력의 시작인 대림 제1주일 직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그래서 연중시기는 편의상 연중시기(1)과 연중시기(2)로 구분된다. 연중시기에 사제는 녹색 제의와 영대를 착용하고 미사를 봉헌한다. 녹색은 다른 색에 비해 나서기를 꺼려하고 멀리 있는 느낌을 주며, 희망과 겸손, 인내와 차분함을 상징한다. 따라서 연중시기는 대림, 성탄, 사순, 부활시기 같은 하느님의 구원계획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역사 안에서 드러난 특수한 신비를 고려하지 않고 이를 포괄적으로 기념하며 지내는 시기이다. 한 마디로 연중시기는 예수님의 공생활 ‘따라잡기’의 시기인 것이다.
연중시기의 시작에 걸맞게 오늘 복음은 마르코가 보도하는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 부분이다. 마르코는 마태오와 함께 세례자 요한의 투옥사건을 예수님 공생활 시작의 계기로 삼고 있다. 비록 강제로 중단된 것이지만 세례자 요한이 활동을 마치자 예수님의 공적 활동이 시작된다. 예수님의 공생활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다. 예수님의 복음선포는 오늘 복음에서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15절)는 절대절명의 언명(言明) 속에 간단명료하게 선포된다. 이 복음은 세상창조 때 이미 계획되고 약속된 것이며, 구약의 수많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예고되고, 이스라엘 백성의 기다림을 거쳐 예수님과 함께 성취의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아직은 아니지만 가까운 장래에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통하여 실현될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세상통치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하느님 스스로가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과 함께 계심(임마누엘)을 뜻한다
도래한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세상이 취할 태도는 회개(悔改)와 믿음이다. 회개는 죄악의 세계에 빠진 마음을 돌려 하느님의 은총의 세계로 복귀시키는 일련의 행위를 말한다. 회개는 여태껏 살아오던 삶의 방식과 방향을 바꾸고 전환하여 전적으로 하느님께 자신을 질서 지우는 것이다. 믿음은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복음을 수락하고, 수락하였다는 표시를 보이는 행위이다. 따라서 믿음은 복음에 대한 응답이다. 즉, 기쁜 소식의 소리를 듣고 응답하는 것이다. 믿음의 구체적인 행동은 추종(追從)이다. 모든 믿음이 다 적극적인 추종일 수는 없지만, “나를 따라오너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적극적인 추종이 필요하다. 성소(聖召)에 대한 적극적인 추종은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는 것이다. 추종은 맹목적 복종이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다.”는 뚜렷한 대의명분을 가지고 있다. 오늘 연중시기를 시작하는 첫날에 주님께서 복음선포의 길로 우리 각자를 초대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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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