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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1. 묵상글 (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 둘이서 완전해지는 짝.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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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1.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둘이서 완전해지는 짝
오늘 복음은 바르티매오의 얘기로서 너무 감동적입니다.
그는 본래 보던 사람이었는데 볼 수 없게 되었다가
보고 싶은 열망 때문에 자비를 열렬히 주님께 청하였고
그래서 주님께 자비를 입은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입 다물라고 했는데도 그것에 굴하지 않고,
더 큰 소리로 자비를 청하는 그 자비 열망이 너무 감동적이고
그래서 자비를 입은 것이 본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더 감동적인 것은 자비를 입고 난 뒤
그것으로 ‘땡’하지 않고 주님을 따라나선 것입니다.
자기 눈이 멀쩡해지고 불편함이 없어진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눈으로 주님을 보고 주님을 따라나서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복음 묵상은 이 정도로 나누고 집회서 묵상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집회서는 너무 장대하고 그래서 우리 인생과 신앙을 넓게 성찰케 합니다.
우선 첫 말씀이 우리 인생과 신앙을 성찰케 하고 반성케 합니다.
“나는 이제 주님의 업적을 기억하고 내가 본 것을 묘사하리라.”
우리는 나의 업적을 기억하고 그것을 대단한 것인 양 장광설을 펼치는데
집회서 저자는 주님의 업적을 기억하고 묘사하겠다고 합니다.
사실 주님의 업적 앞에 우리가 있다면 우리 업적은 업적도 아니잖습니까?
다음 말씀은 “주님의 업적은 그분의 말씀으로 이루어졌고,
그분의 결정은 선의에서 나왔다.”입니다.
우리의 업적이라는 것이 보잘것없지만
그 보잘것없는 업적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갖은 애를 쓰는데
주님은 당신 말씀으로 그것도 한 말씀으로 당신 업적을 이루십니다.
백인대장은 자기 종의 치유를 부탁하면서 주님 친히 자기 집에 오실 필요 없고,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종이 낫겠나이다 하였는데 이렇듯이 주님은
한 말씀으로 모든 걸 이루시지만 우리는 갖은 애를 써도 업적이랄 것이 못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결정은 악의에서 나오기 십상이고,
선의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불순물처럼 있기 십상입니다.
온전히 순수한 사랑에서 비롯된 선의가 아닐 때
위선이나 자기 성취나 만족과 같은 불순물이 선의에 섞여 있기 마련이지요.
이어서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깊은 바다와 사람의 마음까지 헤아리시고 그 술책을 꿰뚫어 보신다.
사실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는 온갖 통찰력을 갖추시고 시대의 표징을 살피신다.
어떤 생각도 그분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분 앞에는 말 한마디도 숨길 수 없다.”
우리는 어떤 인간을 일컬어 통찰력이 있다고 하고,
저도 성향상 다른 사람에 비해 직관이나 통찰력이 있는 편이라고 얘기되는데
그렇다고 한들 하느님께 비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겸손하면 할수록 그리고 하느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분을 다 알지 못하는데
그분은 우리를 속속들이 다 알고 모든 것을 다 아신다고,
그래서 우리의 어떤 생각도 그분을 벗어날 수 없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말씀이 마음에 많이 와닿습니다.
“만물은 서로 마주하여 짝을 이루고 있으니 그분께서는 어느 것도
불완전하게 만들지 않으셨다. 하나는 다른 하나의 좋은 점을 돋보이게 한다.”
하느님은 이러하도록 우리 인간을 만드셨는데,
곧 혼자 있는 것이 보기에 좋지 않아 짝을 이루도록 우리 인간을 만드셨고,
혼자서 완전하지 않고 합하여 완전하도록 만드셨는데, 우리는 종종
마주하는 것은 불편하다, 혼자 있는 것이 편타 하고 혼자서 완전해지려고 합니다.
그리고 서로 좋은 점을 돋보이게 하는 것으로 우리 인간을 만드셨는데
서로 돋보이게 하지 않고, 자기가 돋보이고, 자기만 돋보이려고 하거나
다른 사람으로 인해 열등감을 느끼곤 하기에 서로를 망가트립니다.
그러니 이제 누굴 만나든 둘이서 완전해지는 짝으로 마주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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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1.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르 10,5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거지 장님 바르톨로메오의 치유를 통해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곧 눈먼 이의 치유는 어둠 속에 있는 이가 빛을 보게 되는 것을 표상하며, 예언자들에 따르면 메시아의 표지 가운데 하나입니다(이사 35,5;시 146,8;마태 11,5).
<본문>에서, 눈먼 거지 바르티메오는 예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가에 앉아 있습니다. 그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른 이들의 꾸짖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악을 쓰듯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 10,47)
그분이 지닌 메시아의 권능을 믿고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에게서 나온다는 <이사야>(11,1) 예언서의 말씀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겉옷을 벗어버리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로 갔습니다.”(마르 10,50). 보이지도 않는데 말입니다.
우리도 오늘 자신을 가리고 있는 “겉옷”은 벗어버려야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대체 내가 걸치고 있는 “겉옷”은 무엇일까? 나에게는, 하느님의 일을 가리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게 하는 ‘내 생각’이 바로 ‘겉옷’입니다.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하는 ‘자애심과 이기심’이 바로 던져버려야 할 ‘겉옷’입니다.
예수님께서 눈 먼 거지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르 10,51)
예수님께서는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으시고,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물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을 줄 수 있는 분이 누구인지를 알고, 그분께 청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는지 환히 아시지만, 우리가 진정 바라야 할 것이 무엇이며, 누구에게 그것을 청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당신께 대한 믿음을 보고자 하십니다. 당신께 대한 진정한 믿음으로 청하기 원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을 믿음으로 청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진정 원해야 하 바가 무엇인지를 아는 이는 이미 성인입니다.”라는 성 프란치스코는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거지 장님은 예수님께 청했습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 10,51)
대체 무엇을 보아야 ‘다시 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어로 ‘보다’(αναβλεπω)라는 말은 ‘위를 쳐다보다’, ‘새로운 것을 보다’, ‘다시 보다’, ‘시력을 회복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신앙인이 눈을 뜨기 위해서는 항상 바라보아야 할 대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이십니다.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의 눈이 우리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할 것입니다. 성전 휘장을 찢어놓으신 그분께서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는 장막을 걷어내고 영적인 눈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곧 그분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될 때, 우리의 영적인 눈이 뜨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사랑을 보는 영적인 눈이 열릴 것입니다. 그것은 빛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보는 눈이요, 그분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는 눈이요, 믿음으로 세상과 형제들을 보는 눈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 10,52).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르 10,51)
주님!
제가 보지 못함은
태양이 떠오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눈을 감고 있는 까닭입니다.
마음이 완고한 까닭입니다.
하오니, 주님! 성전 휘장을 찢듯, 제 눈의 가림 막을 걷어 내소서!
완고함의 겉옷을 벗어던지고, 깊이 새겨진 당신의 영혼을 보게 하소서!
제 안에 선사된 당신 사랑을 보게 하소서.
제 안에 벌어진 당신 구원을 보게 하소서.
제가 바라고 싶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해주시고 싶은 것을 바라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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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1.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시력을 잃어 사물을 보지 못하는 요한 형제가 있습니다. 그는 신부의 특별강론이나 강의가 있으면 녹음을 했습니다. 앞이 보이지도 않는데도 방송기기를 잘 다룹니다. 녹음하여 나눠주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본당의 자료정리를 위해서 합니다. 아무리 좋은 강연이 있어도 지나가고 나면 그만이기에 기회가 되는 대로 정리를 합니다. 그는 눈이 보이지 않지만, 영적인 눈을 뜨고 있습니다. 미래를 볼 줄 압니다. 멀쩡한 눈을 가진 사람은 아무 생각이 없는데, 그는 더 많은 생각을 하고 더 많은 자료를 보물로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눈뜬장님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는 길을 지나가시는 예수님께 간절히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눈이 멀었다는 것은 항상 어둠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가 어둠 속에서 불행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은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그 불행을 벗어나는 길은 눈을 뜨고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외쳐야 했습니다.
자비는 하느님의 핵심이며 본질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애간장이 녹아나는 사랑입니다. 죄를 저질러도 잘못을 가리지 않고 먼저 받아들이는 사랑,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사랑입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누구도 그 사랑을 막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사랑을 갈망하였고 예수님께서는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나를 어떤 모양으로 부르고 계실까? 누구를 통해서 부르실까? 아니 나를 불러 주시기를 갈망하고 있는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사람들이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자 바르티매오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당시에 겉옷은 중요한 재산입니다. 신분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낮에는 햇빛을 가릴 수 있는 천막이고, 밤에는 추위를 견딜 수 있게 하는 이불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버리고 주님께 갔습니다. 예수님께 가는 데 장애 되는 전 재산, 신분마저 버리고 따른 것입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거지가 아닙니다.
제자들도 겉옷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못된 습성, 높은 자리에 앉아 지배하고 대접받으려는 교만함을 버리고 낮은 자리를 차지하고 희생 봉사하며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신을 버리기를 두려워하는 마음,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 하는 마음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부름을 받았으면 지체함 없이 “벌떡” 일어나야 합니다. 노숙자들을 만나보면 구걸하는 삶이 “처음에는 어색하고 창피한 마음이 들어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금방 익숙해지더라.” 하고 말합니다. 연민에 갇힌 자신의 신분에서 일어서야 할 때입니다.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시는 예수님의 물음에 눈먼 바르티매오는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눈을 떠야 합니다. 영의 눈을 떠야 영이신 분을 볼 수 있습니다. 영의 눈을 떠서 주님을 본다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큰 영광이며 소원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분, 능력을 드러내시는 분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을 지녀야 합니다. 영의 눈이 뜨여 볼 것을 보며 살아야 합니다. 시편 저자는 말합니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아라.’ 하신 당신을 제가 생각합니다. 주님, 제가 당신 얼굴을 찾고 있습니다. 당신 얼굴을 제게서 감추지 마시고 분노하여 당신 종을 물리치지 마소서. 당신은 저의 도움입니다”(27,8-9). 보지 않아도 될 것에 마음 빼앗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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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1.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지순례를 다녀오면서 ‘감기’가 친구처럼 따라왔습니다. 긴 비행시간과 긴장 때문에 몸의 면역력이 약해 진 것 같습니다. 몸져눕지는 않았지만 생활에 불편이 있었습니다. 목소리가 변해서 강론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침을 삼키면 목이 불편했습니다. 콧물과 가래가 있어서 주머니에 휴지를 가지고 다녀야 했습니다. 감기는 약을 먹으면 1주일, 약을 안 먹어도 1주일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번에는 약을 먹었어도 10일이 넘었습니다. 다행히 목소리도 돌아오고, 목에 이물감도 없어지고, 콧물과 가래도 그쳤습니다. 감기 덕분에 집에 머물면서 성지순례의 기쁨과 감격에 좀 더 머물 수 있었습니다. 함께 했던 분들이 ‘광야’에서 봉헌했던 미사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했습니다. 그 미사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함께 광야에서 하느님께 ‘예배’를 드렸던 모습을 떠올린 것 같았습니다. 저도 그날 광야에서의 미사가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바위, 바람, 모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순례자들, 서쪽으로 기울어가던 태양이 생각납니다.
한때 ‘삼포세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 삶의 근간이 되는 것들입니다. ‘연애, 결혼, 자녀’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에게 우리의 현실이 결코 녹녹하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삼포를 넘어 오포와 칠포세대라는 말까지 있었습니다. ‘연애, 결혼, 자녀, 인간관계, 집, 꿈, 희망’을 포기하는 세대를 이야기합니다. 우리 사회가 ‘재물, 성공, 권력’이라는 바벨탑을 세우기 때문입니다. 무한 경쟁의 시대에 도태되는 사람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소확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의미합니다. 복지와 나눔, 연대와 협력으로 상생의 길을 찾는 다면 우리는 ‘소확행’의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우리가 성지순례를 가는 것은 ‘길’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길을 찾았다면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걷기 위해서입니다. 혼자서는 외롭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장애물을 만나면 쉽게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강을 건넌 사람은 굳이 배를 가지고 가지 않습니다. 더 이상 배가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인생이라는 ‘강’을 건너지 않았기에 우리는 아직도 신앙생활을 하고, 성지순례를 다니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주님께 자비를 청하는 ‘바르티메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르티메오는 눈이 보이지 않는 소경입니다. 주님께서는 예전처럼 보고 싶다는 바르티메오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이제 눈을 뜬 바르티메오는 주님의 길을 따라갑니다. 팬데믹 3년을 지내면서 영적으로 눈이 먼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신앙의 지표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의 지표는 ‘성사 생활’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성체성사가 이루어지는 ‘미사’의 참례자 수가 줄었습니다. 예전에는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던 고백성사도 줄었습니다. 복음 선교의 결과인 세례성사도 줄었습니다. 현장에 있는 사목자의 고민은 깊어가지만 영적인 눈을 뜨려고 하는 신앙인의 열정은 식어갑니다. 주님께서는 ‘잃어버린 동전, 되찾은 양, 돌아온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사목자들은 신발 끈을 다시 매고 길을 나서야 합니다. 봉사자들은 기름을 준비했던 열 처녀처럼 불을 밝혀야 합니다. 팬데믹의 파도에 주저앉은 이웃들을 주님께 인도해야 합니다.
“저희가 그릇된 가르침을 물리치고 참된 믿음을 굳게 지켜 나가게 하소서. 주님의 업적은 그분의 말씀으로 이루어졌고, 그분의 결정은 선의에서 나왔다. 그분께서는 지나간 일과 다가올 일을 알려 주시고 숨겨진 일들의 자취를 드러내 보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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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1.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지각과 해석의 차이를 설명했던 그림이 있습니다. 아마 이 그림을 한 번쯤은 보셨을 것입니다. 얼핏 보면 오리로 보이고 또 얼핏 보면 토끼로 보이는 그림입니다. 또 루빈의 꽃병이라는 그림도 있습니다. 이 역시 꽃병이 보이면서 동시에 마주 보는 두 사람이 보입니다.
이 그림을 보면서 하나의 형상만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모든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가능성만을 진실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경우는 너무나 많았습니다. 결국 가능성을 받아들일 때, 그 안에서 진실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의 존재를 믿지 못하겠다는 이들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기에 하느님은 나약한 인간이 만든 허상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눈에 꼭 보이는 것만이 진실일까요? 산소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산소가 없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숨을 쉬고 있는 것만 봐도 분명히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실험 등을 통해 증거와 증명을 찾는 과학자들 사이에 무신론자가 많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과학자 중에서 신의 존재를 굳게 믿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과학자들은 모든 가능성의 장을 열어두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증명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 많아서 우선 그 가능성을 인정하고 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유신론자가 많다고 하더군요.
가능성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을 찾기란 더 힘들어집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야 하느님을 만날 가능성이 커집니다.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그의 반응은 곧바로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는 거지가 요청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주로 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를 확인하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르 10,51) 이에 바르티메오는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 10,51)라고 대답합니다.
그가 외쳤던, ‘다윗의 자손 예수님, 스승님’은 모두 주님을 향한 믿음의 호칭입니다. 이 믿음이 그의 어두움을 걷어내고 빛을 보게 한 것입니다. 이 믿음이 단순히 ‘돈’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나,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던 눈을 뜨는 가능성을 볼 수 있게 했던 것입니다. 이 가능성이 그에게 새로운 삶으로 이끌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섭니다(마르 10,52 참조). 참 빛을 향해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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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낙담해서 문 찾기를 그만두려 할 때 거짓말처럼 문은 열린다(마르셀 프루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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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1.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개안(開眼)의 여정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오늘 6월1일은 예수성심성월 첫날이자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예수성심의 사랑으로 빛나는 순교영성입니다. 마침 어제 면담고백성사를 본 사제에게 온유와 겸손의 예수성심의 사랑을 지닐 것을 권하며 드린 말씀입니다.
“오늘 5월31일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이자 ‘신부님의 수도원 방문 축일’이네요. 내일부터는 예수성심성월, 6월말까지 보속으로 다음 말씀처방전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11,29)”
참으로 깨달음의 은총을 통해 마음의 눈이 열려갈수록 날로 온유와 겸손의 예수성심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되어 갈 것입니다. 어제 수도원을 방문했던 분들에게 모두 오늘 형제(자매)님의 수도원 방문 축일이라 격려했습니다.
그래서 두말할 것 없이 오늘 강론 제목을 “개안의 여정”이라 했으니 이 또한 자주 반복되어온, 제가 참 좋아하는 제목입니다. 정말 내적성장은, 영적성장은 날로 눈이 열려 밝고 맑은 심안(心眼)을, 영안(靈眼)을 지니는데 있음을 봅니다. 인생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개안의 여정뿐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은 참으로 상징들로 풍부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서 소경을 고치시는 아름다운 장면은 그대로 복음의 요약같습니다. 예루살렘 도상에서 예리코에 들어갔을 때 길가에 앉아있던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자 전광석화(電光石火) 부르짖습니다. 그가 얼마나 구원을 갈망하며 주님을 찾았는지 단박 드러납니다. 참으로 간절히 주님을 찾는 갈망의 사람에게 나타나는 주님이십니다.
길을 잃고 ‘길가에 앉아 있던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는 그대로 가난하고 무지한 인간 실존의 상징입니다. 정말 불행한 사람은 길을 읽고, 삶의 목표, 방향, 중심, 의미를 잃고 현실의 늪에서, 욕망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가는 무지와 탐욕의 사람일 것입니다. 길가에 앉아 길이신 주님을 갈망하는 바르티매오는 가난과 무지의 상징이자 동시에 하느님을 찾는 갈망의 사람을 상징합니다.
활짝 깨어 있던 바르티매오의 영적 촉수에 닿은 예수님 소식입니다. 아, 바르티매오가 갈망에 깨어 기다리지 않았더라면 예수님은 그냥 지나쳤을 것입니다. 얼마나 많이 예수님은 나를 지나쳤고 그리하여 얼마나 많은 주님을 만날 절호의 기회를 놓쳤을까요! 바리티매오의 갈망이 집약된 기도가 답입니다. 우리가 바칠 단 하나의 기도는 자비송 하나뿐입니다. 참으로 가난한 자의 겸손한 기도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바로 여기서 유래된 “예수님 이름을 부르는 기도”입니다. 자비송으로 참회와 동시에 시작되는 이 거룩한 미사입니다. 잠자코 있으라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천금같은 구원의 기회를 놓칠수 없어 거듭 애타게 부르는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입니다.
“그를 불러 오너라.”
예수님은 직접 부르지 않고 이웃을 통해 그를 부르십니다. 우리 역시 얼마나 많이 좋은 분들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는지요!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복음의 압축같은 말씀으로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는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그는 겉옷을 버리고, 즉 자기를 안팎으로 묶어놓은 모든 내외적 구속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안주와 타성, 무기력과 무의욕, 무감각의 숙명의 늪에서 분연히 일어나, 과거에서 탈출하여 새롭게 자유인으로 시작하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즉각 응답한 바르티매오입니다. 주님과 주고받는 본질적 깊이의 대화가 마치 선사들의 선문답같고, 예전 사막의 스승을 찾았던 구도자들을 연상케 합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소원이 절박하고 간절하면 답은 간단명료합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참으로 무지의 눈이 열려 열린 눈으로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제대로 보며 살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의 갈망의 믿음과 주님 은총의 말씀이 만나니 개안의 기적입니다. 결코 갈망의 믿음이 없는 주님 은총의 일방적인 치유 기적은 애당초 불가능합니다.
마침 생각나는 법정 스님의 사부였던 한국 불교의 거목, 효봉스님의 일화가 생각납니다. 그가 ‘금강산 도인’으로 불리던 석두 큰 스님을 만나러 금강산 신계사를 찾았을 때 주고 받은 대화입니다.
“어디서 왔는가?”
“유점사에서 왔습니다.”
“몇걸음에 왔는가?”
효봉 스님은 방안을 한바퀴 돌며
“이렇게 왔습니다.”
“10년 공부한 수좌보다 낫다!”
며, 그 자리에서 계를 내렸다는 일화입니다.
효봉의 간절한 원의를 직감했기에 즉시 제자로 받아들인 석두 스님입니다. 다시 보게 된 바르티매오는 오매불망 꿈에 그리던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을 따라 길을 떠나니 정말 소원성취했습니다. 주님을 ‘보라고’ 있는 눈이요, 길이요 진리이자 생명이신 주님을 ‘따르라고’ 있는 발임을 깨닫습니다.
개안이 여정입니다. 한 두 번으로 끝나는 개안이 아니라 평생 살아 있는 그날까지 날마다 눈이 열려가는 개안의 여정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개안의 여정의 관점에서 보면 복음은 물론 제1독서 집회서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마음의 눈이 열리면 세상 모든 피조물에서 하느님을 관상합니다. 집회서의 저자, 정말 개안의 인물입니다.
“당신 지혜의 위대한 업적을 질서 있게 정하신 주님께서는, 영원에서 영원까지 같은 분이시다. 그분에게는 보탤 것도 없고 뺄 것도 없으며, 어떤 조언자도 필요없다. 그분의 업적은 모두 얼마나 아름다우며, 얼마나 찬란하게 보이는가!”
완전히 영안이 열려 피조물을 통해 창조주 하느님을 만나는 집회서의 저자는 말그대로 각자(覺者)요 견자(見者)입니다. 오늘은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역시 성 유스티노의 생애도 그대로 개안의 여정에 일치합니다. 말그대로 진리를 찾는 구도자의 여정이자 개안의 여정이었습니다.
스토아 철학,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피타고라스 철학, 플라톤 철학에 몰두하지만 여전히 갈증에 목이 탄 그는 어느날 카이사레아 바닷가를 산책하던중 한 노인을 통해 완전히 무지의 눈이 열려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에 입교했고 숱한 순교자들의 삶에 감동받으며 복음의 사도로 일하다가 6명의 동료와 순교합니다. 성인은 2세기 호교론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신학자요 철학자이자 교부였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한결같이 주님을 따르는 개안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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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1.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바르티매오가 왜 볼 수 없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볼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사실 저는 볼 수 없는 눈으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지금도 잘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볼 수 없는 분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도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조금, 아주 조금 상상하거나 헤아릴 수 있다고 말한다면 조심에 또 조심해야 한다는 것도 저는 알고 있습니다.
보던 사람이 볼 수 없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삶의 모든 것이 정지될 것입니다. 자유롭게 다닐 수 없습니다. 좋아하는 사람 혹은 다른 것들을 즐길 수도 없습니다. 일을 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그렇게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워질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해집니다. 눈이 안 보이면 말입니다. 그러나 그에 곁에는 아무도 없는 듯합니다. 처절하고 처절한 그의 삶이 그려지십니까?
어둠과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은 그의 마음이 그려지시나요?
그때 바르티매오는 듣습니다. 주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말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성경은 그저 ‘외쳤다.’라고 전합니다. 아주 건조하게 말입니다. 그러나 눈을 감고 그려보십시오. 그의 마음을 내 마음에 한 움큼 담아 그려보십시오. 얼마나 간절하게 외쳤을까요? 얼마나 크게 외쳤을까요? 얼마나 죽을힘을 다해 외쳤을까요?
그러한 바르티매오의 ‘외침’이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합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바르티매오가 눈을 뜹니다. 그리고 이전에 보던 세상을 다시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가 보는 세상은 이전의 세상이 아닙니다. 그저 그런 세상이 아닙니다. 눈 뜨기 전의 그와 눈 뜬 후의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입니다.
모든 것에 감사하고, 모든 것에 감사하며, 모든 것에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나온 그는 그렇게 빛이신 그리스도를 따라나섭니다. 그의 삶의 빛은 그리스도 한 분이신 것입니다.
그곳에 가면
그곳 입구에 서면
설렌다.
기대 된다.
즐겁다.
그곳 입구에 서면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천천히 천천히...
그곳에 입구를 들어서며
생각하고 생각한다.
조금만 조금만...
그곳에서 나올때면 늘 후회한다.
내가 왜그랬을까?
천천히, 조금만은 어디 갔을까?
그곳의 이름은
쿠땡쿠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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